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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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3
제50과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고린도전서 2:6~10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2:6~10 | 외울말씀 : 요한복음 1:12 | 참고 말씀: 창세기 3:14~15
교육목표 :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누리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사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을 만세 전부터 아셨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지혜 가운데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기까지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지요. 만약 원수 마귀가 이러한 비밀을 안다면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넘겨받은 모든 권세를 빼앗기지 않고자 인간 구원의 섭리를 훼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 먹게 한 뱀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게 되었습니다(창 3:14).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하신 대로, 간교한 뱀을 사주한 원수 마귀 사단은 여자의 후손, 곧 예수님이 태어나 자신을 상하게 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 간악한 헤롯왕을 사주하여 아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아기 예수와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게 하셨습니다. 헤롯이 죽자 예수님은 나사렛에 살면서 공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 30세쯤 되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니 많은 사람이 믿고 따랐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없애 버려야 자신들이 세세토록 세상을 주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략을 꾸몄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십자가에 양손, 양발을 못 박았습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여자의 후손을 죽였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7~8절에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신 대로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문제를 해결받아 구원에 이르도록 만세 전에 정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구원의 길이 세상에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의 훼방으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성취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지혜로 비밀한 가운데 철저히 감추어 두셨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떻게 사망으로 가던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공의 가운데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대로 사망은 죄인에게만 해당되지요. 그런데 아무런 죄도 없는 예수님을 원수 마귀 사단이 사람들을 사주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영계의 법칙을 어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지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만일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를 알았다면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말씀합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참 생명과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계의 법에 따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으로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지요. 원죄와 자범죄가 없었기에 원수 마귀를 이길 힘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전혀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영계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되었지요. 이것이 바로 만세 전에 감춰진 비밀이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사랑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이 세상의 어떤 권세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의 자녀라 할지라도 권세가 대단한데 하물며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주 만물을 치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어떠하겠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곧 성도가 있는가 하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교인은 교회만 출석할 뿐, 믿음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성도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기에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과정과 그녀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민족과 혈통이 섞인 사마리아인들을 상종하지 않았을뿐더러 그 땅을 밟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혹 그 땅을 지나가야 할 경우에는 멀리 돌아서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으셨지요. 마침 사마리아 땅을 지나면서 우물가에 앉아 계시다가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그 당시 지역 특성상 이스라엘의 여행자들은 항상 물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물이 떨어질 리 없고 설령 물이 떨어졌어도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으니 잠깐 기다리면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신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두드린 것입니다. 결국 여인은 물론 동네 사람들도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통해 마음을 두드리실 때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말씀한 대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하셨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약 2:14).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시고 선악과를 두셨는지, 왜 예수님만이 구세주가 되시며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지 인간 구원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때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일의 맛을 알려면 단순히 겉모양만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먹어 봐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다’라고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지 십자가의 섭리를 깨달아야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멸망의 길로 가는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인간 구원의 길을 완성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 )에 달려 죽으셨다.
원수 마귀는 전혀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영계의 법을 어긴 것이다. 이로 인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 )를 영접하여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 )이다.
2. 예수님께서는 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일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60~6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적대시한 이유’는?
북이스라엘은 B.C. 721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다. 이때 앗수르는 많은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고 북이스라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는 그들이 통치하던 다른 민족들을 이주시켜 살게 했다. 이 때문에 북이스라엘은 여러 민족과 뒤섞여 민족적 순수성을 잃고 만다. 이들이 ‘사마리아인’으로서 후일 유대인들이 그들을 이방인 취급하며 경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요 4:9).
교육목표 :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누리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사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을 만세 전부터 아셨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지혜 가운데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기까지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지요. 만약 원수 마귀가 이러한 비밀을 안다면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넘겨받은 모든 권세를 빼앗기지 않고자 인간 구원의 섭리를 훼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 먹게 한 뱀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게 되었습니다(창 3:14).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하신 대로, 간교한 뱀을 사주한 원수 마귀 사단은 여자의 후손, 곧 예수님이 태어나 자신을 상하게 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 간악한 헤롯왕을 사주하여 아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아기 예수와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게 하셨습니다. 헤롯이 죽자 예수님은 나사렛에 살면서 공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 30세쯤 되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니 많은 사람이 믿고 따랐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없애 버려야 자신들이 세세토록 세상을 주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략을 꾸몄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십자가에 양손, 양발을 못 박았습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여자의 후손을 죽였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7~8절에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신 대로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문제를 해결받아 구원에 이르도록 만세 전에 정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구원의 길이 세상에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의 훼방으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성취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지혜로 비밀한 가운데 철저히 감추어 두셨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떻게 사망으로 가던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공의 가운데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대로 사망은 죄인에게만 해당되지요. 그런데 아무런 죄도 없는 예수님을 원수 마귀 사단이 사람들을 사주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영계의 법칙을 어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지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만일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를 알았다면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말씀합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참 생명과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계의 법에 따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으로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지요. 원죄와 자범죄가 없었기에 원수 마귀를 이길 힘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전혀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영계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되었지요. 이것이 바로 만세 전에 감춰진 비밀이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사랑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이 세상의 어떤 권세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의 자녀라 할지라도 권세가 대단한데 하물며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주 만물을 치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어떠하겠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곧 성도가 있는가 하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교인은 교회만 출석할 뿐, 믿음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성도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기에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과정과 그녀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민족과 혈통이 섞인 사마리아인들을 상종하지 않았을뿐더러 그 땅을 밟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혹 그 땅을 지나가야 할 경우에는 멀리 돌아서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으셨지요. 마침 사마리아 땅을 지나면서 우물가에 앉아 계시다가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그 당시 지역 특성상 이스라엘의 여행자들은 항상 물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물이 떨어질 리 없고 설령 물이 떨어졌어도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으니 잠깐 기다리면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신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두드린 것입니다. 결국 여인은 물론 동네 사람들도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통해 마음을 두드리실 때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말씀한 대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하셨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약 2:14).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시고 선악과를 두셨는지, 왜 예수님만이 구세주가 되시며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지 인간 구원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때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일의 맛을 알려면 단순히 겉모양만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먹어 봐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다’라고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지 십자가의 섭리를 깨달아야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멸망의 길로 가는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인간 구원의 길을 완성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 )에 달려 죽으셨다.
원수 마귀는 전혀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영계의 법을 어긴 것이다. 이로 인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 )를 영접하여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 )이다.
2. 예수님께서는 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일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60~6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적대시한 이유’는?
북이스라엘은 B.C. 721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다. 이때 앗수르는 많은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고 북이스라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는 그들이 통치하던 다른 민족들을 이주시켜 살게 했다. 이 때문에 북이스라엘은 여러 민족과 뒤섞여 민족적 순수성을 잃고 만다. 이들이 ‘사마리아인’으로서 후일 유대인들이 그들을 이방인 취급하며 경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요 4:9).
2024-12-06
제49과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예수 그리스도
레위기 25:23~25
읽을말씀 : 레위기 25:23~25 | 외울말씀 : 로마서 5:19 | 참고 말씀: 요한계시록 5:1~5
교육목표 :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과 구세주가 되는 자격 조건에 대해 알아본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영의 세계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영계의 법칙에는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죄를 속량할 수 있는 법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범하여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를 속량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과연 범죄한 아담이 죄를 속량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법칙에 따라 비밀한 가운데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1. 토지를 사고파는 데 적용되는 토지 무르기 법칙
레위기 25장 23~25절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말씀합니다. 즉 토지는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어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다시 무를 수 있는 ‘토지 무르기 법칙’을 설명하였지요.
이스라엘에서는 계약서에 어떤 경로로 토지를 팔고 사는지 과정과 되돌려 받을 수 있는 토지 무르기의 내용을 기록하고, 팔고 사는 사람이 도장을 찍고 증인들을 세웁니다. 그 후 계약서 1부는 법과 규례대로 인봉하여 성전 창고에 보관하고, 다른 1부는 언제라도 볼 수 있게 성전 입구에 펼쳐 놓습니다. 이는 언제라도 근족이 와서 대신 토지를 무를 수 있고, 무를 사람이 없으면 본인이 부를 쌓아 힘이 있을 때 무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도 토지 무르기의 법칙에 따라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천하 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모든 권세를 마귀에게 넘겨주게 되었지만(눅 4:6),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라 영영히 팔지는 못하며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때가 되자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간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2.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조건과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5장 4절에는 하나님과 마귀가 계약한 책이 나옵니다. 이는 ‘아담이 불순종하여 마귀에게 천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넘겨주었지만, 무를 힘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다시 그 권세를 넘겨주겠다.’는 계약서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보니 그 책을 일곱 인으로 봉하여 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크게 웁니다. 그때 장로 중 하나가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다윗의 뿌리인 예수님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른 구세주의 자격 조건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19절에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즉 누군가 죄를 대속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멸망의 길을 가던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토지 무르기 법칙에 의하면 돈이 없어 토지를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되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언제든지 무를 수 있습니다. 만일 본인이 무를 힘이 없을 때에는 근족이 대신 무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범죄한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되찾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즉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토지 무르기 법칙 첫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분입니다.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지으니 그의 혈통을 이어받은 모든 인류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면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죄인이 죄인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아담의 후예가 아닌 사람을 찾고자 하늘 위를 보니 천사만 있고, 땅 위를 살펴보니 아담의 후예인 죄인들만 있고, 땅 아래를 보니 지옥에 속한 것뿐이었기에 애통하였습니다(계 5:1~3).
그러면 예수님은 토지 무르기 법칙 두 번째 조건에 합당한 분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다윗의 뿌리이지만, 남녀가 결혼하여 잉태된 분이 아니므로 원죄가 없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아담의 후예가 아닙니다.
셋째로,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빚을 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여도 자신에게 그만한 재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대속해 주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므로 원수 마귀에게 빼앗긴 아담의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원수 마귀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토지 무르기 세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을까요?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기 때문에 원죄가 없습니다.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33년 동안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셨으니 스스로 짓는 자범죄도 전혀 없으셨지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온전한 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전혀 죄가 없으시므로 토지 무를 힘이 있습니다.
넷째로,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앞서 설명한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성립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형이 아무리 부자라 해도 사랑이 없으면 동생의 빚을 갚아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룻기 4장을 보면 보아스가 가난했던 나오미의 형편을 알고 가장 가까운 근족에게 기업 무르기를 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근족은 자신이 손해를 입지 않으려고 토지 무르기를 거부하지요. 이렇게 근족이 기업을 무를 수 있는 힘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무를 수 없습니다. 결국 나오미의 다음 근족인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수 있는 힘이 있고 사랑도 있어서 그를 대신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크신 사랑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는 희생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범죄한 아담으로 인해 원수 마귀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하나님 자녀로 되찾아 올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각색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며,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시고,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주시며 오직 선만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온갖 고난과 멸시를 당하시고 마침내는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엄청난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에 인간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분이며,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행 4:12).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구세주의 자격 조건을 써보세요.
첫째, ( )이어야 한다.
둘째, ( )의 후예가 아니어야 한다.
셋째,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는 ( )이 있어야 한다.
넷째, 목숨까지 줄 수 있는 ( )이 있어야 한다.
2. 토지는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다 하더라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근족이나 본인이 다시 무를 수 있도록 하는 법칙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48~5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원죄’란?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인류는 부모의 기를 통해 불순종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를 원죄라 한다.
‘자범죄’란?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면서 스스로 짓는 죄를 말한다.
교육목표 :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과 구세주가 되는 자격 조건에 대해 알아본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영의 세계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영계의 법칙에는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죄를 속량할 수 있는 법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범하여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를 속량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과연 범죄한 아담이 죄를 속량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법칙에 따라 비밀한 가운데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1. 토지를 사고파는 데 적용되는 토지 무르기 법칙
레위기 25장 23~25절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말씀합니다. 즉 토지는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어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다시 무를 수 있는 ‘토지 무르기 법칙’을 설명하였지요.
이스라엘에서는 계약서에 어떤 경로로 토지를 팔고 사는지 과정과 되돌려 받을 수 있는 토지 무르기의 내용을 기록하고, 팔고 사는 사람이 도장을 찍고 증인들을 세웁니다. 그 후 계약서 1부는 법과 규례대로 인봉하여 성전 창고에 보관하고, 다른 1부는 언제라도 볼 수 있게 성전 입구에 펼쳐 놓습니다. 이는 언제라도 근족이 와서 대신 토지를 무를 수 있고, 무를 사람이 없으면 본인이 부를 쌓아 힘이 있을 때 무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도 토지 무르기의 법칙에 따라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천하 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모든 권세를 마귀에게 넘겨주게 되었지만(눅 4:6),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라 영영히 팔지는 못하며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때가 되자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간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2.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조건과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5장 4절에는 하나님과 마귀가 계약한 책이 나옵니다. 이는 ‘아담이 불순종하여 마귀에게 천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넘겨주었지만, 무를 힘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다시 그 권세를 넘겨주겠다.’는 계약서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보니 그 책을 일곱 인으로 봉하여 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크게 웁니다. 그때 장로 중 하나가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다윗의 뿌리인 예수님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른 구세주의 자격 조건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19절에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즉 누군가 죄를 대속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멸망의 길을 가던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토지 무르기 법칙에 의하면 돈이 없어 토지를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되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언제든지 무를 수 있습니다. 만일 본인이 무를 힘이 없을 때에는 근족이 대신 무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범죄한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되찾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즉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토지 무르기 법칙 첫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분입니다.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지으니 그의 혈통을 이어받은 모든 인류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면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죄인이 죄인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아담의 후예가 아닌 사람을 찾고자 하늘 위를 보니 천사만 있고, 땅 위를 살펴보니 아담의 후예인 죄인들만 있고, 땅 아래를 보니 지옥에 속한 것뿐이었기에 애통하였습니다(계 5:1~3).
그러면 예수님은 토지 무르기 법칙 두 번째 조건에 합당한 분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다윗의 뿌리이지만, 남녀가 결혼하여 잉태된 분이 아니므로 원죄가 없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아담의 후예가 아닙니다.
셋째로,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빚을 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여도 자신에게 그만한 재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대속해 주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므로 원수 마귀에게 빼앗긴 아담의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원수 마귀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토지 무르기 세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을까요?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기 때문에 원죄가 없습니다.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33년 동안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셨으니 스스로 짓는 자범죄도 전혀 없으셨지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온전한 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전혀 죄가 없으시므로 토지 무를 힘이 있습니다.
넷째로,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앞서 설명한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성립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형이 아무리 부자라 해도 사랑이 없으면 동생의 빚을 갚아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룻기 4장을 보면 보아스가 가난했던 나오미의 형편을 알고 가장 가까운 근족에게 기업 무르기를 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근족은 자신이 손해를 입지 않으려고 토지 무르기를 거부하지요. 이렇게 근족이 기업을 무를 수 있는 힘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무를 수 없습니다. 결국 나오미의 다음 근족인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수 있는 힘이 있고 사랑도 있어서 그를 대신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크신 사랑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는 희생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범죄한 아담으로 인해 원수 마귀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하나님 자녀로 되찾아 올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각색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며,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시고,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주시며 오직 선만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온갖 고난과 멸시를 당하시고 마침내는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엄청난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에 인간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분이며,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행 4:12).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구세주의 자격 조건을 써보세요.
첫째, ( )이어야 한다.
둘째, ( )의 후예가 아니어야 한다.
셋째,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는 ( )이 있어야 한다.
넷째, 목숨까지 줄 수 있는 ( )이 있어야 한다.
2. 토지는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다 하더라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근족이나 본인이 다시 무를 수 있도록 하는 법칙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48~5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원죄’란?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인류는 부모의 기를 통해 불순종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를 원죄라 한다.
‘자범죄’란?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면서 스스로 짓는 죄를 말한다.
2024-11-29
제48과선악과를 두신 이유
창세기 3:1~7
읽을말씀 : 창세기 3:1~7 | 외울말씀 : 야고보서 1:15 | 참고 말씀: 창세기 2:17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에덴동산에 이끌어 들이시고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섭리를 알아본다.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깊고 오묘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두어 사람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하셨느냐?”고 묻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시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일부러 선악과를 두고 사망의 길로 인도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이며, 생령 아담은 왜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을까요?
1.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으로 창조하시고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고 생명수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령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돕는 배필로 여자인 하와를 지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창 2:18~25). 이는 아담이 스스로 외롭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홀로 계셨던 하나님께서 아담의 형편을 헤아려 베푸신 사랑이었으며 장차 인간 경작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생령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마음껏 누리며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있었지요. 바로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2. 뱀의 유혹을 받아 범죄한 아담과 하와
오랜 세월이 흐르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한 채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사단이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을 통해 하와를 유혹하니 하와는 물론 결국 아담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창 2:16~17).
그런데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창 3:1) 묻습니다. 여자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하나님 말씀을 변질시켜 답변하자 뱀은 더욱 적극적으로 유혹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지요(창 3:4~5).
사단이 간교한 뱀을 통해 욕심을 불어넣자 여자는 선악과가 예전과 다르게 보였습니다. 곧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여자는 선악과를 따 먹고 아담에게도 줘서 먹게 했지요.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악이 있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다.”고 하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하기 전에는 전혀 악이 없었습니다. 다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에 따라 선악과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다가 사단이 뱀을 통하여 유혹하자 선악과를 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운 질서에 불순종하므로 악이 들어왔습니다. 즉 생령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처음부터 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 가운데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가 성립되었고, 비로소 악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3. 죄의 삯은 사망
영계의 법칙은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한 후 곧바로 죽지 않고 오랜 세월 살면서 많은 자녀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죽는다”라는 것은 단순히 호흡이 끊어지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의 죽음을 뜻합니다.
원래 사람은 생령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과, 영의 지배를 받는 혼, 그리고 영과 혼의 장막인 육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니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던 사람의 영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죄로 인해 아담과 하와의 영이 죽으니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서 육의 공간인 이 땅으로 쫓겨났지요.
이때부터 인류의 고난이 시작되어 하와는 잉태하는 고통이 크게 더하여 수고하며 자녀를 낳고, 남편을 사모하며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했습니다(창 3:16). 범죄한 아담은 저주받은 이 땅에서 평생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창 3:17).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되었지요. 그리하여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도 죄인으로 태어나 죄의 삯인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롬 5:12).
그렇다면 사단의 사주를 받아 하와를 미혹한 뱀은 어떠한 저주를 받았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흙은 흙으로 창조된 사람을 말하며(창 2:7), 뱀은 원수 마귀 사단을 뜻합니다(계 20:2).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으라고 하신 것은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원수 마귀 사단의 밥이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은 물론,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악을 행하고 죄를 지으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므로(벧전 5:8) 시험 환난이 찾아옵니다. 더욱이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말씀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4.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신 이유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의 가장 중앙에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고 멸망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성을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령으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아주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상대성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 행복과 사랑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많은 것을 누렸지만 스스로 땀 흘려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에덴동산에서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고통, 불행, 죽음 등을 체험한 후에야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깨우칩니다.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끄신 에덴동산에서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상대성을 체험해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 영원히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고,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사람이 자유 의지에 따라 선악과를 따 먹어도 막지 않으시고, 인간 경작을 통해 이 땅에서 모든 희로애락을 경험하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상대성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과 기쁨, 감사가 무엇인지 깨달아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며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풍요로운 에덴동산을 창설하여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고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인간 경작의 섭리를 이루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을지니라” 하신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3.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아주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 )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 행복과 사랑을 알지 못하였다.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40~4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자유 의지’(Free Will)란?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 통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말한다.
즉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능력과 특권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에덴동산에 이끌어 들이시고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섭리를 알아본다.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깊고 오묘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두어 사람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하셨느냐?”고 묻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시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일부러 선악과를 두고 사망의 길로 인도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이며, 생령 아담은 왜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을까요?
1.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으로 창조하시고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고 생명수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령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돕는 배필로 여자인 하와를 지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창 2:18~25). 이는 아담이 스스로 외롭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홀로 계셨던 하나님께서 아담의 형편을 헤아려 베푸신 사랑이었으며 장차 인간 경작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생령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마음껏 누리며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있었지요. 바로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2. 뱀의 유혹을 받아 범죄한 아담과 하와
오랜 세월이 흐르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한 채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사단이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을 통해 하와를 유혹하니 하와는 물론 결국 아담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창 2:16~17).
그런데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창 3:1) 묻습니다. 여자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하나님 말씀을 변질시켜 답변하자 뱀은 더욱 적극적으로 유혹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지요(창 3:4~5).
사단이 간교한 뱀을 통해 욕심을 불어넣자 여자는 선악과가 예전과 다르게 보였습니다. 곧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여자는 선악과를 따 먹고 아담에게도 줘서 먹게 했지요.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악이 있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다.”고 하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하기 전에는 전혀 악이 없었습니다. 다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에 따라 선악과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다가 사단이 뱀을 통하여 유혹하자 선악과를 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운 질서에 불순종하므로 악이 들어왔습니다. 즉 생령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처음부터 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 가운데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가 성립되었고, 비로소 악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3. 죄의 삯은 사망
영계의 법칙은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한 후 곧바로 죽지 않고 오랜 세월 살면서 많은 자녀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죽는다”라는 것은 단순히 호흡이 끊어지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의 죽음을 뜻합니다.
원래 사람은 생령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과, 영의 지배를 받는 혼, 그리고 영과 혼의 장막인 육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니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던 사람의 영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죄로 인해 아담과 하와의 영이 죽으니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서 육의 공간인 이 땅으로 쫓겨났지요.
이때부터 인류의 고난이 시작되어 하와는 잉태하는 고통이 크게 더하여 수고하며 자녀를 낳고, 남편을 사모하며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했습니다(창 3:16). 범죄한 아담은 저주받은 이 땅에서 평생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창 3:17).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되었지요. 그리하여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도 죄인으로 태어나 죄의 삯인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롬 5:12).
그렇다면 사단의 사주를 받아 하와를 미혹한 뱀은 어떠한 저주를 받았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흙은 흙으로 창조된 사람을 말하며(창 2:7), 뱀은 원수 마귀 사단을 뜻합니다(계 20:2).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으라고 하신 것은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원수 마귀 사단의 밥이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은 물론,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악을 행하고 죄를 지으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므로(벧전 5:8) 시험 환난이 찾아옵니다. 더욱이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말씀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4.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신 이유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의 가장 중앙에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고 멸망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성을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령으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아주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상대성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 행복과 사랑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많은 것을 누렸지만 스스로 땀 흘려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에덴동산에서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고통, 불행, 죽음 등을 체험한 후에야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깨우칩니다.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끄신 에덴동산에서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상대성을 체험해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 영원히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고,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사람이 자유 의지에 따라 선악과를 따 먹어도 막지 않으시고, 인간 경작을 통해 이 땅에서 모든 희로애락을 경험하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상대성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과 기쁨, 감사가 무엇인지 깨달아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며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풍요로운 에덴동산을 창설하여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고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인간 경작의 섭리를 이루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을지니라” 하신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3.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아주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 )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 행복과 사랑을 알지 못하였다.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40~4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자유 의지’(Free Will)란?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 통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말한다.
즉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능력과 특권이다.
2024-11-22
제47과사람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28
읽을말씀 : 창세기 1:28 | 외울말씀 : 마태복음 3:12 | 참고 말씀: 디모데전서 2:4
교육목표 :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의 섭리를 통해 알곡 성도는 천국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지옥에 던지시는 이유를 깨닫게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로써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려 주셨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의 것들로 비유하여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마 13:34).
특히 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밭의 가라지 비유, 포도원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등 경작에 관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농부가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가꾸어 열매를 거두듯이, 하나님께서도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고 때가 되면 알곡을 거둬 천국으로 들이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1. 하나님께서 사람을 경작하시는 이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우주 공간에 홀로 계셨습니다(요 1:1). 지극히 아름답고 영롱한 빛 안에 맑고 청아한 소리를 머금고 온 우주공간을 다스리셨지요(요일 1:5).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함께 느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품으신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계획하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계시던 공간을 분리하시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기 시작하셨지요. 인간 경작의 총감독이 되시는 성부 하나님, 구세주가 되실 성자 예수님,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자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와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멈추지 않고 사람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깨달아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어떤 부모에게 두 자녀가 있는데 큰아이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자신의 의견이나 사랑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반면 작은아이는 부모님을 서운케 할 때도 있지만 이내 돌이키며 사랑스럽게 매달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면 어느 자녀가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또한 가정에 로봇이 있어 밥도 짓고 청소도 하며 모든 시중을 들어준다고 해서 자녀보다 로봇이 더 사랑스러울까요? 로봇이 아무리 유익하다 해도 자녀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도 순종을 잘하는 천군 천사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성과 감정을 가지고 자유 의지 가운데 즐거이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창조하되 자유 의지를 주시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며 참 자녀로 나오기까지 오랜 세월을 참고 기다리며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경작이란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통해 열매를 얻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경작하는 수고를 통해 참 자녀를 얻고자 이 땅에 아담과 하와라는 첫 씨를 심으셨습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마음 밭을 개간하는 경작의 과정을 거쳐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 5~6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범죄할 줄을 모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만세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을 창조하여 경작하시는 이유는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마음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입니까? 잉태하여 해산할 때까지 고통이 따르고, 자녀를 먹이고 입히며 가르치기 위해 밤낮으로 수고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이유는 부모의 사랑을 느끼고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대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서 극진히 섬기고 효도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근심할 것을 아셨지만,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가 나올 것을 믿기에 기꺼이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2.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 하나님
농부가 열심히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농사를 짓는 이유는 추수 때 많은 소산을 거둘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추수 때 보면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도 섞여 나옵니다. 이때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우지요. 하나님께서도 인간 경작을 마친 뒤에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십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참 자녀인 알곡은 천국에 들이시지만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지십니다.
알곡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말씀대로 행하는 빛의 자녀들이지요. 반면에 쭉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거나 입술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말씀 안에 살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하며 세상의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쭉정이는 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지시는 것일까요?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 방법으로 깨우쳐 주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도 자유 의지 가운데 끝까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으므로 쭉정이에 속하며 짐승과 다를 바 없지요(전 3:18). 하지만 영원불멸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기에 영이 없는 짐승처럼 아예 무 상태로 멸할 수도 없고 알곡 성도와 함께 천국에 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천국과 구별하여 지옥을 두시는 것입니다.
농부가 추수 때에 알곡을 거두어 쭉정이를 함께 두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온갖 죄악이 가득한 쭉정이와 같은 존재가 알곡 성도와 영원히 함께 산다면 아름다운 천국이 죄악으로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을 따로 두신 것도 바로 근본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3. 인간 경작과 백보좌 대심판
농부가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이 한 해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인간 경작을 멈추지 않고 계십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려 주시며 믿음의 선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주의 종과 일꾼들을 통해 깨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시며 끊임없이 인간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듯이, 인간 경작도 한없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말씀한 대로 때가 이르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간 경작의 섭리가 마쳐집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창조 사역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처럼, 인간 경작의 역사가 끝나면 천년왕국을 보내지요.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는 백보좌 대심판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1~12절에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한 대로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알곡 성도는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상급 심판을 받고 각자 믿음의 분량에 합당한 천국 처소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쭉정이는 지옥 불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받습니다. 이러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깨달아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는 알곡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 )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 )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을 말한다.
3. ( )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거나 입술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말씀 안에 살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하며 ( )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알파와 오메가’
: 문명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뜻.
‘처음과 나중’
: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재림하심으로써 구속 사업을 마무리하신다는 뜻.
‘시작과 끝’
: 성령님께서 인간 경작의 시작과 끝이 되신다는 뜻.
교육목표 :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의 섭리를 통해 알곡 성도는 천국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지옥에 던지시는 이유를 깨닫게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로써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려 주셨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의 것들로 비유하여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마 13:34).
특히 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밭의 가라지 비유, 포도원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등 경작에 관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농부가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가꾸어 열매를 거두듯이, 하나님께서도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고 때가 되면 알곡을 거둬 천국으로 들이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1. 하나님께서 사람을 경작하시는 이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우주 공간에 홀로 계셨습니다(요 1:1). 지극히 아름답고 영롱한 빛 안에 맑고 청아한 소리를 머금고 온 우주공간을 다스리셨지요(요일 1:5).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함께 느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품으신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계획하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계시던 공간을 분리하시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기 시작하셨지요. 인간 경작의 총감독이 되시는 성부 하나님, 구세주가 되실 성자 예수님,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자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와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멈추지 않고 사람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깨달아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어떤 부모에게 두 자녀가 있는데 큰아이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자신의 의견이나 사랑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반면 작은아이는 부모님을 서운케 할 때도 있지만 이내 돌이키며 사랑스럽게 매달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면 어느 자녀가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또한 가정에 로봇이 있어 밥도 짓고 청소도 하며 모든 시중을 들어준다고 해서 자녀보다 로봇이 더 사랑스러울까요? 로봇이 아무리 유익하다 해도 자녀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도 순종을 잘하는 천군 천사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성과 감정을 가지고 자유 의지 가운데 즐거이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창조하되 자유 의지를 주시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며 참 자녀로 나오기까지 오랜 세월을 참고 기다리며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경작이란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통해 열매를 얻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경작하는 수고를 통해 참 자녀를 얻고자 이 땅에 아담과 하와라는 첫 씨를 심으셨습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마음 밭을 개간하는 경작의 과정을 거쳐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 5~6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범죄할 줄을 모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만세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을 창조하여 경작하시는 이유는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마음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입니까? 잉태하여 해산할 때까지 고통이 따르고, 자녀를 먹이고 입히며 가르치기 위해 밤낮으로 수고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이유는 부모의 사랑을 느끼고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대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서 극진히 섬기고 효도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근심할 것을 아셨지만,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가 나올 것을 믿기에 기꺼이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2.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 하나님
농부가 열심히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농사를 짓는 이유는 추수 때 많은 소산을 거둘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추수 때 보면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도 섞여 나옵니다. 이때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우지요. 하나님께서도 인간 경작을 마친 뒤에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십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참 자녀인 알곡은 천국에 들이시지만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지십니다.
알곡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말씀대로 행하는 빛의 자녀들이지요. 반면에 쭉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거나 입술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말씀 안에 살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하며 세상의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쭉정이는 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지시는 것일까요?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 방법으로 깨우쳐 주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도 자유 의지 가운데 끝까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으므로 쭉정이에 속하며 짐승과 다를 바 없지요(전 3:18). 하지만 영원불멸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기에 영이 없는 짐승처럼 아예 무 상태로 멸할 수도 없고 알곡 성도와 함께 천국에 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천국과 구별하여 지옥을 두시는 것입니다.
농부가 추수 때에 알곡을 거두어 쭉정이를 함께 두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온갖 죄악이 가득한 쭉정이와 같은 존재가 알곡 성도와 영원히 함께 산다면 아름다운 천국이 죄악으로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을 따로 두신 것도 바로 근본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3. 인간 경작과 백보좌 대심판
농부가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이 한 해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인간 경작을 멈추지 않고 계십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려 주시며 믿음의 선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주의 종과 일꾼들을 통해 깨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시며 끊임없이 인간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듯이, 인간 경작도 한없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말씀한 대로 때가 이르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간 경작의 섭리가 마쳐집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창조 사역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처럼, 인간 경작의 역사가 끝나면 천년왕국을 보내지요.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는 백보좌 대심판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1~12절에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한 대로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알곡 성도는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상급 심판을 받고 각자 믿음의 분량에 합당한 천국 처소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쭉정이는 지옥 불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받습니다. 이러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깨달아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는 알곡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 )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 )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을 말한다.
3. ( )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거나 입술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말씀 안에 살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하며 ( )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알파와 오메가’
: 문명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뜻.
‘처음과 나중’
: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재림하심으로써 구속 사업을 마무리하신다는 뜻.
‘시작과 끝’
: 성령님께서 인간 경작의 시작과 끝이 되신다는 뜻.
2024-11-15
제46과추수감사절
출애굽기 23:14~17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4~17 | 외울말씀 : 출애굽기 23:16 | 참고 말씀: 레위기 23:42~43 ; 신명기 16:13~17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척박한 세상에서 광야 생활을 하며 정처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진리에 뿌리내리고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축복 속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이스라엘의 대표적 절기들을 알아보고,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절기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이스라엘의 대표적 절기들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정하시고 대대로 지키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이날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안식일처럼 거룩하게 여호와의 은혜와 구원을 찬양하고 기념하면서 지내게 하셨지요.
이스라엘에는 우리나라의 명절과 같이 대대로 지켜온 큰 절기들이 있습니다. 그중 유월절,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은 대표적인 절기라 할 수 있지요.
여기에서 최고의 명절이라 할 수 있는 유월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12장 27절에 “…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 말씀하지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기 전 애굽에 장자의 재앙이 임할 때,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구원받은 이날을 기념하여 어린 양의 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며 유월절로 지키게 하셨지요. 그날이 곧 아빕월(니산월-4월) 14일입니다(레 23:5).
유월절은 영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는 유월절에 잡은 어린 양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무교절이란 어떤 절기일까요? 출애굽기 34장 18절에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 그 기한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했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을 지키고 그다음 날인 안식일로부터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심을 기념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즉 아빕월(니산월-4월) 15일부터 21일까지 지켰지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애굽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에 떡을 발효시킬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룩을 넣지 않은 맛없는 무교병을 먹었지요.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무교절을 대신하여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맥추절은 어떠한 절기일까요?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축복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지어 얻은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을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는 그 시점이 유월절 다음 날인 안식일로부터 7주가 되기 때문에 칠칠절(7x7)이라 하고, 또 날짜로는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유대교 전통대로 하자면 맥추절은 성령강림절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오순절은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7월 첫 주일을 맥추절로 지키고 있지요. 즉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고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맥추절은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게 됨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우리가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자녀가 됨에 감사한다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장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했습니다.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결실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지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하면서 초막(장막)을 짓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장절이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 동안 거했지요.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으로 더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로 초막절(수장절)을 드리면서, 동시에 가장 힘들었던 광야 생활을 기억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 유래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먼저 성경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수장절에서 유래되었습니다(수장절 내용 참고).
이스라엘 백성은 한 해 농사를 마친 후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 시내 버들로 초막을 지어 그곳에서 7일 동안 살았습니다. 농사지은 것을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지내던 때를 잊지 않고 기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영국 청교도들이 종교 박해를 피해 1620년 신대륙 미국에 정착하여, 이듬해 11월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린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마침내 117일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지요. 그런데 인디언의 습격과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까지 돌아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 땅을 개척해 나갔지요.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밀과 조, 옥수수 등 경작법을 배워 이듬해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인디언들을 초대해 햇곡식과 칠면조 고기를 요리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의 첫 추수감사절을 드렸지요. 이것이 기원이 되어 그 후 미국에서 법으로까지 제정하여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의 단을 쌓았지요. 그러면서 그들은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갔고, 결국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감사하며 믿음의 제단을 쌓은 청교도들이 미국을 건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심으로 미국을 세계적인 부강한 국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올 한 해 많은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알차게 여문 곡식처럼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탐스럽게 익은 과일처럼 우리 속에 진리를 가득 채워 주셨지요. 사건 사고, 많은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 주시고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사랑받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개개인에게 축복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를 드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수장절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절기로 즐거운 축제라 할 수 있습니다(신 16:13~17). 이때 빈손으로 하나님께 보이지 말고 주신 복을 따라 힘을 다하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정성 된 예물과 아름다운 마음의 향을 드려 예비하신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으세요.
① ( )이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출애굽 한 것을 기념하여 유월절을 지낸 다음 안식일로부터 7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지키는 절기다.
② ( )이란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축복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열매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로,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 한다.
③ ( )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도중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거한 것을 기념하며, 가을의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로 초막절, 장막절이라 한다.
2. 어떤 일에 대한 열매를 거둘 때 혹 자신이 수고한 대가로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는지요? 올 한 해를 돌아보며 가정, 일터, 사업터에 복합적인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합심으로 기도합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청교도’란?
16세기 후반,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여 생긴 개신교의 한 교파. 캘빈주의를 바탕으로 모든 쾌락을 죄악시하고, 사치와 성직자의 권위를 배격하였으며, 철저한 금욕주의를 주장했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척박한 세상에서 광야 생활을 하며 정처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진리에 뿌리내리고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축복 속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이스라엘의 대표적 절기들을 알아보고,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절기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이스라엘의 대표적 절기들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정하시고 대대로 지키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이날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안식일처럼 거룩하게 여호와의 은혜와 구원을 찬양하고 기념하면서 지내게 하셨지요.
이스라엘에는 우리나라의 명절과 같이 대대로 지켜온 큰 절기들이 있습니다. 그중 유월절,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은 대표적인 절기라 할 수 있지요.
여기에서 최고의 명절이라 할 수 있는 유월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12장 27절에 “…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 말씀하지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기 전 애굽에 장자의 재앙이 임할 때,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구원받은 이날을 기념하여 어린 양의 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며 유월절로 지키게 하셨지요. 그날이 곧 아빕월(니산월-4월) 14일입니다(레 23:5).
유월절은 영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는 유월절에 잡은 어린 양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무교절이란 어떤 절기일까요? 출애굽기 34장 18절에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 그 기한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했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을 지키고 그다음 날인 안식일로부터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심을 기념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즉 아빕월(니산월-4월) 15일부터 21일까지 지켰지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애굽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에 떡을 발효시킬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룩을 넣지 않은 맛없는 무교병을 먹었지요.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무교절을 대신하여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맥추절은 어떠한 절기일까요?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축복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지어 얻은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을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는 그 시점이 유월절 다음 날인 안식일로부터 7주가 되기 때문에 칠칠절(7x7)이라 하고, 또 날짜로는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유대교 전통대로 하자면 맥추절은 성령강림절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오순절은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7월 첫 주일을 맥추절로 지키고 있지요. 즉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고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맥추절은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게 됨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우리가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자녀가 됨에 감사한다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장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했습니다.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결실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지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하면서 초막(장막)을 짓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장절이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 동안 거했지요.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으로 더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로 초막절(수장절)을 드리면서, 동시에 가장 힘들었던 광야 생활을 기억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 유래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먼저 성경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수장절에서 유래되었습니다(수장절 내용 참고).
이스라엘 백성은 한 해 농사를 마친 후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 시내 버들로 초막을 지어 그곳에서 7일 동안 살았습니다. 농사지은 것을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지내던 때를 잊지 않고 기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영국 청교도들이 종교 박해를 피해 1620년 신대륙 미국에 정착하여, 이듬해 11월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린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마침내 117일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지요. 그런데 인디언의 습격과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까지 돌아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 땅을 개척해 나갔지요.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밀과 조, 옥수수 등 경작법을 배워 이듬해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인디언들을 초대해 햇곡식과 칠면조 고기를 요리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의 첫 추수감사절을 드렸지요. 이것이 기원이 되어 그 후 미국에서 법으로까지 제정하여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의 단을 쌓았지요. 그러면서 그들은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갔고, 결국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감사하며 믿음의 제단을 쌓은 청교도들이 미국을 건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심으로 미국을 세계적인 부강한 국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올 한 해 많은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알차게 여문 곡식처럼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탐스럽게 익은 과일처럼 우리 속에 진리를 가득 채워 주셨지요. 사건 사고, 많은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 주시고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사랑받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개개인에게 축복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를 드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수장절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절기로 즐거운 축제라 할 수 있습니다(신 16:13~17). 이때 빈손으로 하나님께 보이지 말고 주신 복을 따라 힘을 다하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정성 된 예물과 아름다운 마음의 향을 드려 예비하신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으세요.
① ( )이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출애굽 한 것을 기념하여 유월절을 지낸 다음 안식일로부터 7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지키는 절기다.
② ( )이란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축복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열매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로,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 한다.
③ ( )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도중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거한 것을 기념하며, 가을의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로 초막절, 장막절이라 한다.
2. 어떤 일에 대한 열매를 거둘 때 혹 자신이 수고한 대가로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는지요? 올 한 해를 돌아보며 가정, 일터, 사업터에 복합적인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합심으로 기도합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청교도’란?
16세기 후반,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여 생긴 개신교의 한 교파. 캘빈주의를 바탕으로 모든 쾌락을 죄악시하고, 사치와 성직자의 권위를 배격하였으며, 철저한 금욕주의를 주장했다.
2024-11-08
제45과창조주 하나님
창세기 1:1
읽을말씀 : 창세기 1:1 | 외울말씀 : 창세기 2:7 | 참고 말씀: 로마서 1:20
교육목표 : 창조론과 진화론의 차이점을 알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이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특히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신 대략의 과정과 우주 만물을 비롯해 사람을 창조하신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주 만물을 설계하고 창조하셨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그분의 뜻을 좇아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신본주의 사상이지요.
반면 진화론은 모든 생물이 무생물로부터 자연 발생하여 하등에서 고등으로, 동종에서 이종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유인원이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고 고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근원을 우연의 산물로 보며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본주의 사상이 팽배합니다. 이들은 삶의 목적을 이 땅에 두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며 살아가지요. 인생을 즐기며 마음껏 누리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여기지만 참된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결국 육체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지니 얼마나 허무하고 공허한 인생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반드시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장난감에서부터 하늘을 나는 비행기까지 누군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없습니다. 천하 만물도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이 있어 그분의 마음에 맞게 설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하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히브리서 11장 3절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말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성경뿐 아니라 우주 만물 안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동서남북과 사계절이 있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 밀물과 썰물의 교차, 바람과 구름의 이동 등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운행되지요. 이것을 어찌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아닌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사람, 짐승, 새, 물고기 등 모든 동물이 한결같이 눈은 두 개요, 코는 하나에 입도 하나, 귀는 두 개요, 그 위치 선정까지 똑같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조물주 한 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천지 만물을 바라보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느낄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롬 1:20).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고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래 누구도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서 못 믿었습니다.”라고 핑계할 수 없도록 지금도 끊임없이 성령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2.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지요(창 1:27~28).
그러면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했습니다.
여기서 흙이란 진흙을 말합니다. 뛰어난 도공은 진흙을 사용하여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도자기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사람은 질그릇이나 기왓장, 혹은 값싼 벽돌을 만들어 내지요. 이처럼 누가 어떤 재료로 어떤 물건을 만들었느냐에 따라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형상을 따라 진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로 창조하셨겠습니까?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영, 곧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생령으로 창조된 과정은 형광등이 빛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광등이 빛을 내게 하려면 먼저 잘 조립된 형광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상태로는 빛을 낼 수 없으며, 전원과 연결되어 전류가 흘러야 비로소 빛을 내지요. 텔레비전도 아무런 움직임 없이 죽어 있는 듯한 물건인데 전원을 연결하면 갖가지 영상이 나타납니다. 텔레비전은 외관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오밀조밀한 부속품이 복잡하게 조립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흙으로 사람의 형상만 빚은 것이 아닙니다. 설계도대로 사람의 형상을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끝에서 근본의 빛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몸 안의 오장육부와 뼈, 핏줄과 신경조직이 완벽하게 만들어졌지요. 이런 상태에서 전류를 통하게 하듯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곧 피가 돌고 호흡하며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기억 장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기억 장치에 저장되는데 이것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떠올리는 것이 생각이며, 지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지혜이지요.
피조물인 사람도 지혜와 지식이 더하여 문자나 사람의 음성을 인식해 대화할 수 있는 컴퓨터까지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을 만드시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참으로 쉬운 일이지만, 한계가 있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신기하고 측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시 139:14).
3.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그곳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2:8~15).
갓 태어난 자녀는 본능적인 생리작용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면서 부모, 형제, 교사 등을 통해 각종 교육을 받아야 인간답게 살아갑니다. 아담도 처음 생령이 되었을 때는 몸은 성인의 모습이지만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천지 만물의 조화와 영계의 법칙, 진리의 말씀 등 필요한 것들을 자상하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이런 것은 먹어도 되지만 저런 것은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죄의 삯인 사망’이 임하게 됩니다(롬 6:23). 사람에게 있어 주인의 역할을 하는 영이 죽게 되었고, 결국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죄인으로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 경작을 통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참 자녀를 얻어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고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고 풍성한 사랑을 공급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자유 의지 가운데 순종하는 축복의 삶 영위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증거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2. ( ) 안에 단어를 써넣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 )를 만들어 주셨다.
여기에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저장되는데 이것이 ( )이다.
이것을 떠올리는 것이 ( )이며, 이것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 )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신 생기가 아담의 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세포핵에 들어가자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오랜 세월을 살다가 범죄함으로 죽은 영이 되었고 더 이상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교육목표 : 창조론과 진화론의 차이점을 알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이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특히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신 대략의 과정과 우주 만물을 비롯해 사람을 창조하신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주 만물을 설계하고 창조하셨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그분의 뜻을 좇아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신본주의 사상이지요.
반면 진화론은 모든 생물이 무생물로부터 자연 발생하여 하등에서 고등으로, 동종에서 이종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유인원이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고 고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근원을 우연의 산물로 보며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본주의 사상이 팽배합니다. 이들은 삶의 목적을 이 땅에 두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며 살아가지요. 인생을 즐기며 마음껏 누리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여기지만 참된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결국 육체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지니 얼마나 허무하고 공허한 인생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반드시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장난감에서부터 하늘을 나는 비행기까지 누군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없습니다. 천하 만물도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이 있어 그분의 마음에 맞게 설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하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히브리서 11장 3절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말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성경뿐 아니라 우주 만물 안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동서남북과 사계절이 있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 밀물과 썰물의 교차, 바람과 구름의 이동 등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운행되지요. 이것을 어찌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아닌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사람, 짐승, 새, 물고기 등 모든 동물이 한결같이 눈은 두 개요, 코는 하나에 입도 하나, 귀는 두 개요, 그 위치 선정까지 똑같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조물주 한 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천지 만물을 바라보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느낄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롬 1:20).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고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래 누구도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서 못 믿었습니다.”라고 핑계할 수 없도록 지금도 끊임없이 성령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2.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지요(창 1:27~28).
그러면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했습니다.
여기서 흙이란 진흙을 말합니다. 뛰어난 도공은 진흙을 사용하여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도자기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사람은 질그릇이나 기왓장, 혹은 값싼 벽돌을 만들어 내지요. 이처럼 누가 어떤 재료로 어떤 물건을 만들었느냐에 따라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형상을 따라 진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로 창조하셨겠습니까?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영, 곧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생령으로 창조된 과정은 형광등이 빛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광등이 빛을 내게 하려면 먼저 잘 조립된 형광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상태로는 빛을 낼 수 없으며, 전원과 연결되어 전류가 흘러야 비로소 빛을 내지요. 텔레비전도 아무런 움직임 없이 죽어 있는 듯한 물건인데 전원을 연결하면 갖가지 영상이 나타납니다. 텔레비전은 외관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오밀조밀한 부속품이 복잡하게 조립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흙으로 사람의 형상만 빚은 것이 아닙니다. 설계도대로 사람의 형상을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끝에서 근본의 빛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몸 안의 오장육부와 뼈, 핏줄과 신경조직이 완벽하게 만들어졌지요. 이런 상태에서 전류를 통하게 하듯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곧 피가 돌고 호흡하며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기억 장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기억 장치에 저장되는데 이것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떠올리는 것이 생각이며, 지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지혜이지요.
피조물인 사람도 지혜와 지식이 더하여 문자나 사람의 음성을 인식해 대화할 수 있는 컴퓨터까지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을 만드시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참으로 쉬운 일이지만, 한계가 있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신기하고 측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시 139:14).
3.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그곳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2:8~15).
갓 태어난 자녀는 본능적인 생리작용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면서 부모, 형제, 교사 등을 통해 각종 교육을 받아야 인간답게 살아갑니다. 아담도 처음 생령이 되었을 때는 몸은 성인의 모습이지만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천지 만물의 조화와 영계의 법칙, 진리의 말씀 등 필요한 것들을 자상하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이런 것은 먹어도 되지만 저런 것은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죄의 삯인 사망’이 임하게 됩니다(롬 6:23). 사람에게 있어 주인의 역할을 하는 영이 죽게 되었고, 결국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죄인으로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 경작을 통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참 자녀를 얻어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고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고 풍성한 사랑을 공급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자유 의지 가운데 순종하는 축복의 삶 영위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증거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2. ( ) 안에 단어를 써넣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 )를 만들어 주셨다.
여기에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저장되는데 이것이 ( )이다.
이것을 떠올리는 것이 ( )이며, 이것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 )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신 생기가 아담의 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세포핵에 들어가자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오랜 세월을 살다가 범죄함으로 죽은 영이 되었고 더 이상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2024-11-01
제44과엘리야의 선(3)
요한복음 3:28~30
읽을말씀 : 요한복음 3:28~30 | 외울말씀 : 요한복음 3:30 | 참고 말씀: 누가복음 3:15~16
교육목표 : 주의 길을 예비하며 자기의 본분을 다한 세례 요한처럼 마지막 때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본분에 대해 깨닫게 한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자기 의가 없었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믿음으로 담대히 행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자신의 모든 사명을 감당한 후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지요.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듯하여 엘리야는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마침내는 순교를 당합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엘리야의 선
누가복음 1장 13~17절에 보면 가브리엘 천사장이 사가랴에게 장차 아이를 얻게 될 것을 일러 줍니다. 즉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지요.
그 후에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요한이 “빈 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루었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히 주관받았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을 알았을까요? 요한복음 1장 21절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으로 보아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몰랐습니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졌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영 자체가 마음이요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에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있었던 일을 통해 알 수 있지요. 누가복음 2장 49절에,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찾은 육의 부모에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알고 계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마음의 주관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되어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 나갔지요. 즉 ‘자신이 오실 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주관받아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백성들은 요한이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게 됩니다. 이때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답했지요(눅 3:16).
세례 요한은 자신의 본분, 곧 자신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고 잘 지켰습니다.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더하였겠습니까.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이때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하지요(요 3:26).
그런데 요한은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지요(요 3:28~30). 제자들을 타이르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기뻐했지요. 어떠한 사심도, 불의도 없이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세례 요한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에 대한 마음은 옥에 갇히고 순교하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참으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2.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본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마지막 때에 사는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분임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해 그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본 교회에 주신 사명을 한마음으로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지요.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을 이루기까지 모든 과정이 영혼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큰 과업을 이루기 위해 교회 내 각 부서와 조직이 있으며, 각자가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때 결과적으로 교회 사명도 이루는 것이지요. 즉 각자의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비록 특별한 직분이 없어도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이 있지요. 우리가 어떤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 본분을 지키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높아져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고, 사심이 있어 처음의 순수한 목적에서 이탈되는 경우도 있지요.
세례 요한처럼 소중한 그릇이 되려면 사심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주님만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자신도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이 없이 오직 주의 영광만 위해 진실한 마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또한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도 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큰마음이지요. 각 분야에서 새로운 일꾼이 세워질 때도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모든 분야가 화평함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명을 받게 될까’에 연연하기보다 아버지 나라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이 돼야지요. 이것은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식어져서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충만한 가운데 잘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선이지요. 마음이 선하고 장성한 아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직 믿음이나 능력,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드러나게 일을 한다 해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다 해도 시기하지 않지요. 아비와 같은 마음이니 그가 사랑받으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행여나 경험이 부족하여 실수하지 않을까 하고 그의 부족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의탁하는 기도를 하지요.
정녕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엘리야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모든 사람과 화평하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고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으며 주님 품에 기쁨으로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② 세례 요한처럼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③ 요한은 따르던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갔을 때도 슬퍼하지 않았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기뻐하며, 어떤 사심도, 불의도 없었다.
④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져서 자신이 엘리야인 줄 몰랐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사가랴’란 누구인가?
세례 요한의 아버지로서 헤롯 왕 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다(눅 1:5).
그의 아내는 동정녀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으로 그들 부부는 모두 율법을 잘 지킨 선한 사람이었다.
교육목표 : 주의 길을 예비하며 자기의 본분을 다한 세례 요한처럼 마지막 때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본분에 대해 깨닫게 한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자기 의가 없었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믿음으로 담대히 행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자신의 모든 사명을 감당한 후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지요.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듯하여 엘리야는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마침내는 순교를 당합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엘리야의 선
누가복음 1장 13~17절에 보면 가브리엘 천사장이 사가랴에게 장차 아이를 얻게 될 것을 일러 줍니다. 즉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지요.
그 후에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요한이 “빈 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루었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히 주관받았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을 알았을까요? 요한복음 1장 21절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으로 보아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몰랐습니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졌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영 자체가 마음이요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에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있었던 일을 통해 알 수 있지요. 누가복음 2장 49절에,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찾은 육의 부모에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알고 계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마음의 주관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되어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 나갔지요. 즉 ‘자신이 오실 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주관받아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백성들은 요한이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게 됩니다. 이때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답했지요(눅 3:16).
세례 요한은 자신의 본분, 곧 자신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고 잘 지켰습니다.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더하였겠습니까.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이때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하지요(요 3:26).
그런데 요한은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지요(요 3:28~30). 제자들을 타이르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기뻐했지요. 어떠한 사심도, 불의도 없이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세례 요한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에 대한 마음은 옥에 갇히고 순교하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참으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2.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본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마지막 때에 사는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분임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해 그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본 교회에 주신 사명을 한마음으로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지요.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을 이루기까지 모든 과정이 영혼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큰 과업을 이루기 위해 교회 내 각 부서와 조직이 있으며, 각자가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때 결과적으로 교회 사명도 이루는 것이지요. 즉 각자의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비록 특별한 직분이 없어도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이 있지요. 우리가 어떤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 본분을 지키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높아져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고, 사심이 있어 처음의 순수한 목적에서 이탈되는 경우도 있지요.
세례 요한처럼 소중한 그릇이 되려면 사심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주님만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자신도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이 없이 오직 주의 영광만 위해 진실한 마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또한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도 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큰마음이지요. 각 분야에서 새로운 일꾼이 세워질 때도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모든 분야가 화평함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명을 받게 될까’에 연연하기보다 아버지 나라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이 돼야지요. 이것은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식어져서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충만한 가운데 잘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선이지요. 마음이 선하고 장성한 아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직 믿음이나 능력,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드러나게 일을 한다 해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다 해도 시기하지 않지요. 아비와 같은 마음이니 그가 사랑받으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행여나 경험이 부족하여 실수하지 않을까 하고 그의 부족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의탁하는 기도를 하지요.
정녕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엘리야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모든 사람과 화평하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고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으며 주님 품에 기쁨으로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② 세례 요한처럼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③ 요한은 따르던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갔을 때도 슬퍼하지 않았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기뻐하며, 어떤 사심도, 불의도 없었다.
④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져서 자신이 엘리야인 줄 몰랐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사가랴’란 누구인가?
세례 요한의 아버지로서 헤롯 왕 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다(눅 1:5).
그의 아내는 동정녀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으로 그들 부부는 모두 율법을 잘 지킨 선한 사람이었다.
2024-10-25
제43과엘리야의 선(2)
누가복음 1:17
읽을말씀 : 누가복음 1:17 | 외울말씀 : 누가복음 1:17 | 참고 말씀: 말라기 4:5~6
교육목표 :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가 어떻게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하게 되었는지 알아본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자기 의가 없어서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을 소유했기에 하나님께서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후에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지요. 그리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후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구약시대의 엘리야가 신약시대에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과연 엘리야가 어떻게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었을까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
엘리야 선지자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또한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기 위해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고,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내려 주셔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심히도 유약한 성품이었던 자신을 큰 권능으로 입혀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는 자신의 성품을 핑계 대며 슬그머니 뒤로 빠집니다. 혹여 자신은 그렇지 않은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엘리야는 육으로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녔지만, 혈혈단신으로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에게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대결을 하자고 아합왕에게 제안까지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인 아비들의 믿음으로 태초부터 계신 이, 곧 근본 하나님에 대해 깊이 알게 되지요.
엘리야는 이 땅에 있을 때도 하나님에 대해 깊이 깨우칠 뿐 아니라, 심히 사모했습니다. 하물며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을 친히 뵈었을 때 그 마음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을까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했을 뿐 아니라,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자 하나님께서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낮고 천한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종국에는 화목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엘리야는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아 하나님께 “주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그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케 하는 큰 사명을 주시지요.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의 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습니다. 말라기 4장 5~6절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했지요.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난 일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 오직 엘리야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잉태된 지 6개월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영을 보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길을 예비할 사람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지요. 이때 엘리야의 영 자체가 온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또한 태아는 부모의 기(氣)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요 1:6).
성경 곳곳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 4절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해 주셨지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홀연히 변화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지요(마 17:10).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답변하시지요(마 17:11~12). 그리고 이어지는 13절에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도 점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 영을 이뤄 산 채로 들림 받은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어 주의 길을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택함 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엘리야가 주를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다시 이 땅에 내려가라 하셨을 때 기꺼이 “아멘” 하며 순종했지요. 엘리야는 주님께서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주를 위해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말과 혀가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는 것을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고백을 변함없이 행함으로 진실하게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도 그 사랑이 배어 나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너무도 순전하셔서 “누구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고 길에서 그 소리도 듣지 못하리라” 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은 엄히 책망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자신의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하나님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게 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선을 통해 진실한 사랑 앞에서는 어떤 이유나 핑계도 필요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겠습니다. 더구나 엘리야 시대와는 달리 우리는 성령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계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힘주시는 성령님을 더욱 의지하심으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선의 단계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엘리야가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뒷받침해 주는 말씀이 아닌 것은?
① 누가복음 1:17 ② 누가복음 3:4
③ 마태복음 17:11~13 ④ 데살로니가전서 5:16~18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길을 예비할 사람이 잉태될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영이 아닌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다.
② 엘리야는 주님께서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다.
③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잉태하면 5개월째에 영을 보내 주신다.
④ 엘리야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바알신’이란?
가나안 및 수리아에서 섬겼던 남성신으로 주(lord) 혹은 소유자라는 뜻이다. 땅의 생산력과 가축의 번식력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정착 초기부터 바알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교육목표 :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가 어떻게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하게 되었는지 알아본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자기 의가 없어서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을 소유했기에 하나님께서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후에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지요. 그리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후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구약시대의 엘리야가 신약시대에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과연 엘리야가 어떻게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었을까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
엘리야 선지자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또한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기 위해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고,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내려 주셔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심히도 유약한 성품이었던 자신을 큰 권능으로 입혀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는 자신의 성품을 핑계 대며 슬그머니 뒤로 빠집니다. 혹여 자신은 그렇지 않은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엘리야는 육으로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녔지만, 혈혈단신으로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에게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대결을 하자고 아합왕에게 제안까지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인 아비들의 믿음으로 태초부터 계신 이, 곧 근본 하나님에 대해 깊이 알게 되지요.
엘리야는 이 땅에 있을 때도 하나님에 대해 깊이 깨우칠 뿐 아니라, 심히 사모했습니다. 하물며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을 친히 뵈었을 때 그 마음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을까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했을 뿐 아니라,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자 하나님께서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낮고 천한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종국에는 화목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엘리야는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아 하나님께 “주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그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케 하는 큰 사명을 주시지요.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의 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습니다. 말라기 4장 5~6절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했지요.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난 일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 오직 엘리야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잉태된 지 6개월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영을 보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길을 예비할 사람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지요. 이때 엘리야의 영 자체가 온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또한 태아는 부모의 기(氣)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요 1:6).
성경 곳곳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 4절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해 주셨지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홀연히 변화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지요(마 17:10).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답변하시지요(마 17:11~12). 그리고 이어지는 13절에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도 점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 영을 이뤄 산 채로 들림 받은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어 주의 길을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택함 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엘리야가 주를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다시 이 땅에 내려가라 하셨을 때 기꺼이 “아멘” 하며 순종했지요. 엘리야는 주님께서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주를 위해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말과 혀가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는 것을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고백을 변함없이 행함으로 진실하게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도 그 사랑이 배어 나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너무도 순전하셔서 “누구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고 길에서 그 소리도 듣지 못하리라” 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은 엄히 책망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자신의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하나님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게 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선을 통해 진실한 사랑 앞에서는 어떤 이유나 핑계도 필요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겠습니다. 더구나 엘리야 시대와는 달리 우리는 성령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계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힘주시는 성령님을 더욱 의지하심으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선의 단계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엘리야가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뒷받침해 주는 말씀이 아닌 것은?
① 누가복음 1:17 ② 누가복음 3:4
③ 마태복음 17:11~13 ④ 데살로니가전서 5:16~18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길을 예비할 사람이 잉태될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영이 아닌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다.
② 엘리야는 주님께서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다.
③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잉태하면 5개월째에 영을 보내 주신다.
④ 엘리야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바알신’이란?
가나안 및 수리아에서 섬겼던 남성신으로 주(lord) 혹은 소유자라는 뜻이다. 땅의 생산력과 가축의 번식력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정착 초기부터 바알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2024-10-18
제42과엘리야의 선(1)
열왕기하 2:11
읽을말씀 : 열왕기하 2:11 | 외울말씀 : 열왕기하 2:11 | 참고 말씀: 고린도후서 4:7
교육목표 : 엘리야와 같이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에녹과 더불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입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에는 “두 사람(엘리야, 엘리사)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고 엘리야가 승천한 장면이 나오지요. 이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한 것처럼, 사망 곧 죽음은 죄를 지은 대가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뜻이지요.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만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가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경작 받은 피조물로서 천국에서 최고의 서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하시고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신 것일까요?
1. 심히도 겸비한 마음으로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은 엘리야의 선
엘리야가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기 전에는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기에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고,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기에 그가 있는 곳에는 화평이 깨어지는 일이 없었지요. 이러한 모습이 육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 있으나 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는 마음이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의 선을 크게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쓰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 베드로,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 육적으로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심히도 유약하여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도 엘리야는 ‘나는 부족한데 어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겸비한 것은 좋으나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 유약함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함으로, 바알 신을 섬기며 온 나라가 우상숭배로 만연해졌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격노케 했으면 마침내 하나님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을 것을 아합왕에게 전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시지요. 또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엘리야를 시돈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서 공궤 받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 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내려 주었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 주었습니다.
3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아합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에 임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그를 잡기 위해 온 나라가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붙잡힌다면 생명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보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로서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아합왕 앞에 나가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나아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나타내었고,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기도함으로 3년 반 동안 우로가 없었던 이스라엘에 큰비가 내렸지요(약 5:17~18).
이 밖에도 요단강을 가르며,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는 등 영적으로 어두운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권능의 선지자였습니다.
2. 엘리야처럼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하려면?
엘리야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에 하나님과 늘 교통하기에 힘썼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려 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였지요.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을 받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사람의 생각으로 되지 않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겨진 것은 아닙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승리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인함이 입혀졌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믿음 안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즉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육의 한계 속에 있는 자신은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과 그 뜻에 순종만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 가능한 일들을 육의 공간에 나타내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사람을 쓰고자 할 때 육적으로 능력이 많은 사람을 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쓰시지요. ‘자기’로 꽉 차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담길 수가 없을뿐더러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셔도 ‘자기’와 섞이면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워 속이 깊은 그릇이지요. 그릇이 깊어야 많이 담길 수 있듯이 겸비하게 자신을 낮출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임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능력이 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택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입히시고 하나님의 일을 크게 이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고전 1:27~29). 그런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지 않고 욕심과 들레는 악이 있으면서도, 마치 하나님께서 택해 쓰임 받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은사가 나타나면 이내 교만해져서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하지요. 따라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 마음 그릇을 비우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신속히 벗어버리고, 자기 의와 틀을 철저히 깨뜨려 버릴 때 신령한 하나님의 능력과 풍성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기를 전혀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꾼들 사이에서 자기 의를 주장함으로 서로 부딪치며 불편해하는 경우를 봅니다. 자신은 진리라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틀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모든 죄와 허물을 주님의 보혈로 용서하시고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는 진리 말씀으로 죄와 의에 대해서 밝히 분별하되,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죄인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설령 나 보기에 의롭지 못한 상대도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참된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참된 의라 믿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를 택하사 보배를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가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에녹 ② 엘리야 ③ 모세 ④ 아브라함
2. 엘리야 선지자에 관한 설명 중 맞지 않은 것을 고르세요.
① 이스라엘 왕 중 가장 악한 왕 아합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다.
②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던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게 했다.
③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음으로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했다.
④ 원래 성격이 담대한 데다 하나님 능력이 입혀지니 더 크게 쓰임 받았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아합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힌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 결혼함으로 바알 신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으며,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교육목표 : 엘리야와 같이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에녹과 더불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입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에는 “두 사람(엘리야, 엘리사)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고 엘리야가 승천한 장면이 나오지요. 이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한 것처럼, 사망 곧 죽음은 죄를 지은 대가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뜻이지요.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만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가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경작 받은 피조물로서 천국에서 최고의 서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하시고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신 것일까요?
1. 심히도 겸비한 마음으로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은 엘리야의 선
엘리야가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기 전에는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기에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고,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기에 그가 있는 곳에는 화평이 깨어지는 일이 없었지요. 이러한 모습이 육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 있으나 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는 마음이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의 선을 크게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쓰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 베드로,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 육적으로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심히도 유약하여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도 엘리야는 ‘나는 부족한데 어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겸비한 것은 좋으나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 유약함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함으로, 바알 신을 섬기며 온 나라가 우상숭배로 만연해졌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격노케 했으면 마침내 하나님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을 것을 아합왕에게 전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시지요. 또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엘리야를 시돈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서 공궤 받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 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내려 주었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 주었습니다.
3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아합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에 임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그를 잡기 위해 온 나라가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붙잡힌다면 생명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보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로서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아합왕 앞에 나가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나아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나타내었고,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기도함으로 3년 반 동안 우로가 없었던 이스라엘에 큰비가 내렸지요(약 5:17~18).
이 밖에도 요단강을 가르며,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는 등 영적으로 어두운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권능의 선지자였습니다.
2. 엘리야처럼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하려면?
엘리야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에 하나님과 늘 교통하기에 힘썼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려 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였지요.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을 받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사람의 생각으로 되지 않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겨진 것은 아닙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승리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인함이 입혀졌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믿음 안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즉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육의 한계 속에 있는 자신은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과 그 뜻에 순종만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 가능한 일들을 육의 공간에 나타내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사람을 쓰고자 할 때 육적으로 능력이 많은 사람을 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쓰시지요. ‘자기’로 꽉 차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담길 수가 없을뿐더러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셔도 ‘자기’와 섞이면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워 속이 깊은 그릇이지요. 그릇이 깊어야 많이 담길 수 있듯이 겸비하게 자신을 낮출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임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능력이 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택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입히시고 하나님의 일을 크게 이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고전 1:27~29). 그런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지 않고 욕심과 들레는 악이 있으면서도, 마치 하나님께서 택해 쓰임 받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은사가 나타나면 이내 교만해져서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하지요. 따라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 마음 그릇을 비우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신속히 벗어버리고, 자기 의와 틀을 철저히 깨뜨려 버릴 때 신령한 하나님의 능력과 풍성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기를 전혀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꾼들 사이에서 자기 의를 주장함으로 서로 부딪치며 불편해하는 경우를 봅니다. 자신은 진리라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틀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모든 죄와 허물을 주님의 보혈로 용서하시고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는 진리 말씀으로 죄와 의에 대해서 밝히 분별하되,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죄인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설령 나 보기에 의롭지 못한 상대도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참된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참된 의라 믿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를 택하사 보배를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가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에녹 ② 엘리야 ③ 모세 ④ 아브라함
2. 엘리야 선지자에 관한 설명 중 맞지 않은 것을 고르세요.
① 이스라엘 왕 중 가장 악한 왕 아합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다.
②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던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게 했다.
③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음으로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했다.
④ 원래 성격이 담대한 데다 하나님 능력이 입혀지니 더 크게 쓰임 받았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아합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힌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 결혼함으로 바알 신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으며,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024-10-11
제41과아브라함의 선(2)
히브리서 11:17~19
읽을말씀 : 히브리서 11:17~19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1:19 | 참고 말씀: 민수기 23:19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만 말씀하셔도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한 경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을 때도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고 아무리 상황이 바뀐다 해도 절대 의심하지 않았지요. 이처럼 마음이 선하되, 특히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순수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한 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설령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자기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셨을 때(창 12:1) 즉시 순종했지요. 삶의 터전과 가족 및 친척들과의 관계를 뒤로 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낯선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나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순종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하나님과의 약속의 씨인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되었지요.
창세기 22장 1~3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다음 날,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나서 채비한 다음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이때는 “본토를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했던 차원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리 하라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는 능히 그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했지요. 바로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이니 아무리 짐승처럼 잡아 번제로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역사하셔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함을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되었어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바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 말씀에 즉시로 순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부터 한다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꿔 주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해결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고 순적하게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결국 우리를 잘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순종하면 복인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나는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지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것이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 말씀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지고, 더 나아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은 선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빨리 해 달라고 재촉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되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마음을 지닌 자녀는 잠잠히 부모를 믿고 기다리다가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빨리 주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먼저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하면서 오히려 부모의 마음을 편케 해드리지요.
이처럼 육의 부모는 능력이 부족해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다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비록 자기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기다림의 시간도 기쁨과 감사로 보내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티끌처럼, 하늘의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은 바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5년이 지나고 10년이 다 되어 가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절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오히려 아내 사라가 참지 못하고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게 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다시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은 99세, 아내 사라는 89세가 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주셨지요. 그런데 그때는 이미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여서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는 것이 육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4장 19~21절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기록한 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믿었기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그처럼 믿음으로 바라보던 것이 실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로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으며,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의 말씀을 주시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좋아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는지요?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았으며 선한 마음으로 지켜 오셨는지요? 여러분에게 주실 영광과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보되 여러분 자신도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허락된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에서 육과 악이 발견됨으로 인해 낙심해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내 마음과 모습으로 언제 영으로 들어가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뜨겁게 기도하며 성령 충만함을 입고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본다면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 받았던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온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아 세세토록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 거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아브라함의 선이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녔다.
②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출애굽 한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다.
③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
④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다.
2. ( ) 안을 채워 보세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 )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 )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 )치 않으시랴”(민수기 23:19)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모리아 산’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산이며, 다윗에게 나타나신 산이기도 하다(대상 21:15~22).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언덕의 정상부를 말하며,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샀고,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대하 3:1).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만 말씀하셔도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한 경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을 때도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고 아무리 상황이 바뀐다 해도 절대 의심하지 않았지요. 이처럼 마음이 선하되, 특히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순수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한 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설령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자기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셨을 때(창 12:1) 즉시 순종했지요. 삶의 터전과 가족 및 친척들과의 관계를 뒤로 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낯선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나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순종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하나님과의 약속의 씨인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되었지요.
창세기 22장 1~3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다음 날,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나서 채비한 다음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이때는 “본토를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했던 차원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리 하라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는 능히 그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했지요. 바로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이니 아무리 짐승처럼 잡아 번제로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역사하셔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함을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되었어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바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 말씀에 즉시로 순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부터 한다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꿔 주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해결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고 순적하게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결국 우리를 잘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순종하면 복인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나는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지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것이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 말씀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지고, 더 나아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은 선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빨리 해 달라고 재촉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되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마음을 지닌 자녀는 잠잠히 부모를 믿고 기다리다가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빨리 주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먼저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하면서 오히려 부모의 마음을 편케 해드리지요.
이처럼 육의 부모는 능력이 부족해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다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비록 자기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기다림의 시간도 기쁨과 감사로 보내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티끌처럼, 하늘의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은 바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5년이 지나고 10년이 다 되어 가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절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오히려 아내 사라가 참지 못하고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게 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다시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은 99세, 아내 사라는 89세가 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주셨지요. 그런데 그때는 이미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여서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는 것이 육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4장 19~21절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기록한 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믿었기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그처럼 믿음으로 바라보던 것이 실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로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으며,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의 말씀을 주시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좋아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는지요?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았으며 선한 마음으로 지켜 오셨는지요? 여러분에게 주실 영광과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보되 여러분 자신도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허락된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에서 육과 악이 발견됨으로 인해 낙심해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내 마음과 모습으로 언제 영으로 들어가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뜨겁게 기도하며 성령 충만함을 입고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본다면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 받았던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온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아 세세토록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 거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아브라함의 선이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녔다.
②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출애굽 한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다.
③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
④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다.
2. ( ) 안을 채워 보세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 )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 )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 )치 않으시랴”(민수기 23:19)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모리아 산’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산이며, 다윗에게 나타나신 산이기도 하다(대상 21:15~22).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언덕의 정상부를 말하며,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샀고,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대하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