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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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0
제15과팔복(2)
마태복음 5:4
읽을말씀 : 마태복음 5:4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4 | 참고 말씀: 살전 5:16~18
교육목표 :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을 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위로와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들은 삶이 버겁고 힘이 들 때 한탄하여 슬피 울며 애통합니다. 이런 육적인 애통은 하나님께 위로 받지도 못할뿐더러 복을 받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애통할 때 기뻐하시지요.
마태복음 5장 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며, 자신의 성결을 위해 애통할 때 위로하시고 큰 상급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1. 자신의 슬픔 속에서 나오는 육적인 애통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가 가난해서 서글프고, 병약하고 무능해서 한탄합니다. 또 내 뜻대로 일이 되지 않고, 자녀가 말썽을 부리고, 남편이나 아내가 맘에 들지 않아서 불만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니 눈물을 흘리며 속상해하지요. 이는 육의 사람들이 하는 육적인 애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상관없고 위로받거나 축복이 임하지도 않지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괴롭고 슬픈 일을 당해도 기뻐하고,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 기뻐할 것이 없는데요. 근심거리가 가득한데 어떻게 기뻐합니까?”라고 반문하실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을 약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슬퍼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감정에서 나오는 슬픔으로 애통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지요. 오직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영적인 애통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
1) 회개의 애통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면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 마음으로 깨우쳐지게 됩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느낄 때 눈물, 콧물을 흘리며 죄에 대해 통회자복하는 회개의 애통이 나옵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죄악 가운데 살았던 것을 철저하게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회개의 애통을 하면 죄의 짐이 벗겨지므로 마음에서 기쁨이 넘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하고 애통하며 은혜받았다 해도 아직 온전치 않으므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 그때마다 회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변화가 더디거나 아예 변화되지 못하는 경우이지요. 이는 회개의 애통을 한다고 하지만 마음 중심에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른 행함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죄악을 버림으로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 애통하는 일이 없는 것이 좋습니다.
2) 사명 감당을 못했을 때 회개의 애통을 합니다
만일 내가 직분자요 일꾼인데 기도하지 않고,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지 못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구역장으로서, 기관장으로서 심방하고 전도하며 맡은 분야에서 열매를 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면 회개의 애통을 해야지요.
마태복음 25장에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장사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주인에게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무서운 책망을 듣습니다. 나는 사명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 감당했는지, 혹여 게으르거나 나태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명을 맡으면 책임이 따르고 열심히 하지 못하면, 회개거리가 생기니 사명을 맡지 말고 그냥 교회만 열심히 다녀야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은혜를 갚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해야 합니다. 만일 사명을 맡고도 충성하지 못했다면,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으로 중심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참된 위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3) 믿음의 형제가 사망의 길로 갈 때 사랑으로 애통합니다
여기서부터는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애통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슬피 울며 따르던 여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말씀하십니다(눅 23:28). 바로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망으로 향해 가는 사람들을 위해 애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범죄하여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불쌍하고 긍휼한 마음으로 내가 대신하여 회개하고, 상대가 진리로 행할 수 있도록 애통하며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시험에 들어 힘을 잃고 있을 때 권면해 주며 힘을 실어 주되, 자신의 일과 같이 애통하며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 그들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습니다(출 32:32). 순종 잘하는 사랑스러운 백성도 아니고, 늘 원망 불평하며 모세를 힘들게 하는 백성이었지만 모세는 그들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애통하였던 것입니다.
4) 영혼 구원을 위해 애통합니다
가족, 일가친척, 이웃이 지옥으로 가고 있다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멸망으로 가는 무수한 영혼을 위해 애통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에 대한 애통, 교계에 대한 애통,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는 일들에 대해 애통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영적인 애통입니다.
온 인류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 값을 찾아 드리기 위해 애통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며 하늘나라에서 큰 자로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명예와 권세, 건강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며 애통하지요.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숱한 고난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는 고난으로 인해 힘들어하거나 애통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염려하고 애통해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서였습니다(고후 11:28~29). 바로 성도들이 말씀 가운데 서지 못할 때, 교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할 때였지요. 그러했기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큰 권능을 주셔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하셨고, 하늘나라에서도 큰 자로 높이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3. 애통하는 자가 받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애통을 하면 반드시 위로와 응답을 주십니다(마 5:4). 회개의 애통을 하는 사람에게는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심으로 위로하시지요.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중심에서 회개할 때,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시는 큰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나 다시 죄악 가운데 살면 하나님의 은혜는 거두어지지요. 따라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되 또 다시 범죄하였다면 신속히 회개하는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사명 감당을 위해 애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애통함의 내용에 따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응답해 주십니다. 가령, 가르치는 자로서 말씀의 권세와 담대함이 필요하다면, 그와 같은 능력을 주셔서 많은 영혼을 개종시키고 구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또 지혜와 명철이 필요하다면 세상 사람보다 더 뛰어나게 하시고 사명 감당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열매 맺게 하시지요.
이 외에도 형제가 사망으로 가는 것을 볼 때, 영혼 구원을 위해, 교회와 나라, 세계 선교를 위해 애통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에 맞게 위로와 응답을 주십니다. 범죄했던 사람이 새롭게 거듭나고, 선한 일꾼을 보내 주셔서 교회가 부흥되며, 세계 선교를 활발히 이루게 하시지요. 이처럼 영적인 애통은 하늘에 상급이 될 뿐 아니라, 자신은 물론 하나님 나라에도 큰 유익이 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애통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 ( )의 애통이 있다.
둘째, ( )을 못했을 때 회개의 애통이 있다.
셋째, 믿음의 형제가 ( )의 ( )로 갈 때의 애통이 있다.
넷째, ( )을 위한 애통이 있다.
2. 마태복음 5:4 “(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 )를 받을 것임이요”
● 알고 넘어갑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할 때 받는 상급’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늘 애통하며 기도하는 사람의 천국 집은 많은 황금 보석과 상급들이 있지만 유난히 크고 빛나는 진주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한 알의 진주가 만들어지기까지 조개는 오랜 시간 고통을 참아내며 자신의 진액을 쏟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는 동안 변화되기 위해 흘린 눈물, 하나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했던 시간들에 대한 위로를 진주로 표현해 주시는 것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을 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위로와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들은 삶이 버겁고 힘이 들 때 한탄하여 슬피 울며 애통합니다. 이런 육적인 애통은 하나님께 위로 받지도 못할뿐더러 복을 받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애통할 때 기뻐하시지요.
마태복음 5장 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며, 자신의 성결을 위해 애통할 때 위로하시고 큰 상급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1. 자신의 슬픔 속에서 나오는 육적인 애통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가 가난해서 서글프고, 병약하고 무능해서 한탄합니다. 또 내 뜻대로 일이 되지 않고, 자녀가 말썽을 부리고, 남편이나 아내가 맘에 들지 않아서 불만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니 눈물을 흘리며 속상해하지요. 이는 육의 사람들이 하는 육적인 애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상관없고 위로받거나 축복이 임하지도 않지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괴롭고 슬픈 일을 당해도 기뻐하고,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 기뻐할 것이 없는데요. 근심거리가 가득한데 어떻게 기뻐합니까?”라고 반문하실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을 약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슬퍼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감정에서 나오는 슬픔으로 애통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지요. 오직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영적인 애통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
1) 회개의 애통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면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 마음으로 깨우쳐지게 됩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느낄 때 눈물, 콧물을 흘리며 죄에 대해 통회자복하는 회개의 애통이 나옵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죄악 가운데 살았던 것을 철저하게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회개의 애통을 하면 죄의 짐이 벗겨지므로 마음에서 기쁨이 넘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하고 애통하며 은혜받았다 해도 아직 온전치 않으므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 그때마다 회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변화가 더디거나 아예 변화되지 못하는 경우이지요. 이는 회개의 애통을 한다고 하지만 마음 중심에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른 행함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죄악을 버림으로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 애통하는 일이 없는 것이 좋습니다.
2) 사명 감당을 못했을 때 회개의 애통을 합니다
만일 내가 직분자요 일꾼인데 기도하지 않고,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지 못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구역장으로서, 기관장으로서 심방하고 전도하며 맡은 분야에서 열매를 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면 회개의 애통을 해야지요.
마태복음 25장에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장사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주인에게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무서운 책망을 듣습니다. 나는 사명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 감당했는지, 혹여 게으르거나 나태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명을 맡으면 책임이 따르고 열심히 하지 못하면, 회개거리가 생기니 사명을 맡지 말고 그냥 교회만 열심히 다녀야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은혜를 갚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해야 합니다. 만일 사명을 맡고도 충성하지 못했다면,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으로 중심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참된 위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3) 믿음의 형제가 사망의 길로 갈 때 사랑으로 애통합니다
여기서부터는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애통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슬피 울며 따르던 여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말씀하십니다(눅 23:28). 바로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망으로 향해 가는 사람들을 위해 애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범죄하여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불쌍하고 긍휼한 마음으로 내가 대신하여 회개하고, 상대가 진리로 행할 수 있도록 애통하며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시험에 들어 힘을 잃고 있을 때 권면해 주며 힘을 실어 주되, 자신의 일과 같이 애통하며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 그들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습니다(출 32:32). 순종 잘하는 사랑스러운 백성도 아니고, 늘 원망 불평하며 모세를 힘들게 하는 백성이었지만 모세는 그들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애통하였던 것입니다.
4) 영혼 구원을 위해 애통합니다
가족, 일가친척, 이웃이 지옥으로 가고 있다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멸망으로 가는 무수한 영혼을 위해 애통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에 대한 애통, 교계에 대한 애통,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는 일들에 대해 애통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영적인 애통입니다.
온 인류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 값을 찾아 드리기 위해 애통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며 하늘나라에서 큰 자로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명예와 권세, 건강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며 애통하지요.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숱한 고난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는 고난으로 인해 힘들어하거나 애통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염려하고 애통해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서였습니다(고후 11:28~29). 바로 성도들이 말씀 가운데 서지 못할 때, 교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할 때였지요. 그러했기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큰 권능을 주셔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하셨고, 하늘나라에서도 큰 자로 높이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3. 애통하는 자가 받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애통을 하면 반드시 위로와 응답을 주십니다(마 5:4). 회개의 애통을 하는 사람에게는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심으로 위로하시지요.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중심에서 회개할 때,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시는 큰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나 다시 죄악 가운데 살면 하나님의 은혜는 거두어지지요. 따라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되 또 다시 범죄하였다면 신속히 회개하는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사명 감당을 위해 애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애통함의 내용에 따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응답해 주십니다. 가령, 가르치는 자로서 말씀의 권세와 담대함이 필요하다면, 그와 같은 능력을 주셔서 많은 영혼을 개종시키고 구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또 지혜와 명철이 필요하다면 세상 사람보다 더 뛰어나게 하시고 사명 감당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열매 맺게 하시지요.
이 외에도 형제가 사망으로 가는 것을 볼 때, 영혼 구원을 위해, 교회와 나라, 세계 선교를 위해 애통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에 맞게 위로와 응답을 주십니다. 범죄했던 사람이 새롭게 거듭나고, 선한 일꾼을 보내 주셔서 교회가 부흥되며, 세계 선교를 활발히 이루게 하시지요. 이처럼 영적인 애통은 하늘에 상급이 될 뿐 아니라, 자신은 물론 하나님 나라에도 큰 유익이 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애통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 ( )의 애통이 있다.
둘째, ( )을 못했을 때 회개의 애통이 있다.
셋째, 믿음의 형제가 ( )의 ( )로 갈 때의 애통이 있다.
넷째, ( )을 위한 애통이 있다.
2. 마태복음 5:4 “(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 )를 받을 것임이요”
● 알고 넘어갑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할 때 받는 상급’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늘 애통하며 기도하는 사람의 천국 집은 많은 황금 보석과 상급들이 있지만 유난히 크고 빛나는 진주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한 알의 진주가 만들어지기까지 조개는 오랜 시간 고통을 참아내며 자신의 진액을 쏟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는 동안 변화되기 위해 흘린 눈물, 하나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했던 시간들에 대한 위로를 진주로 표현해 주시는 것이다.
2026-04-03
제14과부활의 영적인 의미
요한복음 14:6
읽을말씀 : 요한복음 14:6 | 외울말씀 : 고린도전서 15:20 | 참고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16~17
교육목표 : 신앙생활의 핵심요소인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부활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시종 가난한 길을 가셨고, 마침내 채찍에 맞으며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히 돌아가셨습니다.
아무 흠도 티도 없으신 분이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이 있었기에 온 인류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으셨기에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의 부활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그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부활과 영생, 천국 소망이 가득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부활은 ‘참 생명’을 의미합니다
죄인은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인류를 건져 주셨습니다. 즉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요. 하지만 아무 죄가 없으셨기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지요.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하신 대로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목숨이 다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압니다. 즉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죄인이 당할 사망은 육의 사망, 곧 몸의 죽음만이 아닙니다. 몸의 죽음과 함께 영적인 사망 곧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사망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참 생명을 주셨기에 영원히 죽지 않고 천국에서 세세토록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구원받은 성도 중에도 수명이 다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들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했습니다. 여기서 ‘잠자는 자들’이란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를 믿다가 육의 수명이 다해 장사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공중강림하실 때 살아서 주를 맞는 성도들보다 앞서 부활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하신 대로, 죽어 장사되었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해 영혼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곧 육의 죽음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공중으로 들려올라가면서 영원히 죽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2. 부활은 ‘참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사건이 그 증거이지요. 예수님은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구원하시고 영생과 천국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행하심으로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지요. 또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그 사랑이 참됨을 증명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주님은 죄가 전혀 없으셨기에 사망에 전혀 매이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아무 죄도 없으면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증명하지요. 또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계획하신 분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아담은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육의 사람이 되었고, 죄인인 아담에게서 난 모든 후손들 또한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만세 전에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지극히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죄인들의 손에 내어주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비록 인생들이 죄를 범했을지라도, 독생자를 희생시켜 죄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실 만큼 인생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두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나눌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천국과 영생을 주시고 참사랑을 나누기 위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때가 이르매 이 땅에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 고난과 부활 사건을 이루심으로 그 사랑을 분명히 나타내셨지요. 이러한 참사랑은 지금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베풀고 계신 참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면 우리 마음에 성령이 오십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지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대로 살면, 점차 하나님의 신령한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죄에 대하여는 철저히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지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사랑은 상대를 대신해서 죽을 수도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최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랑이 참임을 확증하셨습니다.
3. 부활은 ‘참 믿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셨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섭리를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때로는 애매히 핍박을 받고, 생명의 위협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하나님께 외면당하여 철저히 혼자가 되시기도 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죄인의 신분으로 십자가를 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에는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과 함께 큰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을 믿으셨지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 안에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부활을 허락하시고 천국을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잠시 잠깐 머물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기에 날마다 죄를 벗으며 성결을 이루기 위해 힘씁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며, 그 충성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혹여 고난과 핍박이 올 때에도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하실 하나님을 굳게 믿으시고, 그날에 주실 영광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로 부활의 증인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새기심으로 부활의 기쁨이 샘솟아 나며, 더 확고한 믿음과 소망으로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을 침노해 가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에 담긴 영적인 의미 세 가지를 써 보세요.
첫째, ( )
둘째, 부활은 참사랑을 의미한다.
셋째, ( )
2.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은 누구실까요?
3.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목숨이 다하여 죽었을 때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표현했나요?
● 알고 넘어갑시다!
‘부활체’란
주님의 공중 강림 때에 영혼이 썩지도 죽지도 않는 신령한 몸을 입은 것을 “부활체”라고 하며, 이 부활체를 입고 7년 혼인 잔치를 한 후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천 년을 보내게 된다. 부활체를 입으면 부활하신 주님처럼 이 세상에서 어떤 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다(요 20:19). 손으로 만져지기도 하고 숨을 내쉬는가 하면, 음식도 먹고 마실 수 있는데(눅 24:39, 42~43) 섭취한 음식은 즉시 분해되어 호흡과 함께 배출되므로 화장실이 필요없다.
교육목표 : 신앙생활의 핵심요소인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부활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시종 가난한 길을 가셨고, 마침내 채찍에 맞으며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히 돌아가셨습니다.
아무 흠도 티도 없으신 분이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이 있었기에 온 인류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으셨기에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의 부활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그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부활과 영생, 천국 소망이 가득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부활은 ‘참 생명’을 의미합니다
죄인은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인류를 건져 주셨습니다. 즉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요. 하지만 아무 죄가 없으셨기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지요.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하신 대로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목숨이 다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압니다. 즉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죄인이 당할 사망은 육의 사망, 곧 몸의 죽음만이 아닙니다. 몸의 죽음과 함께 영적인 사망 곧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사망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참 생명을 주셨기에 영원히 죽지 않고 천국에서 세세토록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구원받은 성도 중에도 수명이 다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들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했습니다. 여기서 ‘잠자는 자들’이란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를 믿다가 육의 수명이 다해 장사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공중강림하실 때 살아서 주를 맞는 성도들보다 앞서 부활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하신 대로, 죽어 장사되었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해 영혼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곧 육의 죽음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공중으로 들려올라가면서 영원히 죽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2. 부활은 ‘참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사건이 그 증거이지요. 예수님은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구원하시고 영생과 천국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행하심으로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지요. 또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그 사랑이 참됨을 증명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주님은 죄가 전혀 없으셨기에 사망에 전혀 매이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아무 죄도 없으면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증명하지요. 또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계획하신 분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아담은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육의 사람이 되었고, 죄인인 아담에게서 난 모든 후손들 또한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만세 전에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지극히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죄인들의 손에 내어주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비록 인생들이 죄를 범했을지라도, 독생자를 희생시켜 죄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실 만큼 인생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두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나눌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천국과 영생을 주시고 참사랑을 나누기 위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때가 이르매 이 땅에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 고난과 부활 사건을 이루심으로 그 사랑을 분명히 나타내셨지요. 이러한 참사랑은 지금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베풀고 계신 참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면 우리 마음에 성령이 오십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지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대로 살면, 점차 하나님의 신령한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죄에 대하여는 철저히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지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사랑은 상대를 대신해서 죽을 수도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최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랑이 참임을 확증하셨습니다.
3. 부활은 ‘참 믿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셨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섭리를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때로는 애매히 핍박을 받고, 생명의 위협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하나님께 외면당하여 철저히 혼자가 되시기도 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죄인의 신분으로 십자가를 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에는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과 함께 큰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을 믿으셨지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 안에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부활을 허락하시고 천국을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잠시 잠깐 머물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기에 날마다 죄를 벗으며 성결을 이루기 위해 힘씁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며, 그 충성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혹여 고난과 핍박이 올 때에도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하실 하나님을 굳게 믿으시고, 그날에 주실 영광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로 부활의 증인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새기심으로 부활의 기쁨이 샘솟아 나며, 더 확고한 믿음과 소망으로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을 침노해 가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에 담긴 영적인 의미 세 가지를 써 보세요.
첫째, ( )
둘째, 부활은 참사랑을 의미한다.
셋째, ( )
2.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은 누구실까요?
3.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목숨이 다하여 죽었을 때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표현했나요?
● 알고 넘어갑시다!
‘부활체’란
주님의 공중 강림 때에 영혼이 썩지도 죽지도 않는 신령한 몸을 입은 것을 “부활체”라고 하며, 이 부활체를 입고 7년 혼인 잔치를 한 후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천 년을 보내게 된다. 부활체를 입으면 부활하신 주님처럼 이 세상에서 어떤 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다(요 20:19). 손으로 만져지기도 하고 숨을 내쉬는가 하면, 음식도 먹고 마실 수 있는데(눅 24:39, 42~43) 섭취한 음식은 즉시 분해되어 호흡과 함께 배출되므로 화장실이 필요없다.
2026-03-27
제13과팔복(1)
마태복음 5:3
읽을말씀 : 마태복음 5:3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3 | 참고 말씀: 요한일서 2:15~16
교육목표 :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가정, 학교, 일터 등 모든 곳에서 만사형통한 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상 사람들은 부유하고 명예와 권세가 있으며, 자녀들이 효도하고 건강하며 가족이 화목하면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을 모두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물질이 많아도 건강을 잃어 걱정하고, 명예 권세가 있지만 가정이 불화하여 속상해합니다. 또 불의의 사고를 당해 비참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해도 죽으면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지 않고,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잘 사는 것에만 삶의 목표를 둔다면 무서운 지옥에 떨어지고 말지요. 그러니 이 땅에서의 ‘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과연 참된 복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장을 중심으로 참된 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가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부유한 것이 좋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이 없어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것을 뜻하지요.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악이 없고 선한 마음으로, 아무 욕심이 없어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중심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심령을 채울 영의 것을 사모하기에 복음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전도해도 쉽게 받아들이고, 말씀을 들으면 그대로 순종하니 구원받기도 쉽지요.
반면 마음이 부유한 사람들은 세상 욕심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어 전도를 하면 거부합니다. “사업이 바빠서요. 공부해야 해요. 돈 벌어야 해요. 나중에 한가해지면 갈게요.”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부, 명예, 권세로 그 눈과 마음이 가득 차 있으니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를 보여 주어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심령이 부유한 부자와 심령이 가난한 거지 나사로가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부자는 호의호식하며 날마다 잔치를 베풀 정도로 풍족한 삶을 살았기에 마음까지 부요해져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비록 부자의 대문 앞에서 구걸하며, 그 상처를 개가 핥는 불쌍한 삶을 살았어도 심령이 가난했기에 하나님을 믿었지요.
그런데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형편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겨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렸습니다. 반면 부자는 ‘아랫음부’에 떨어져 뜨거운 불꽃 가운데 고통받으며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이라도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애걸합니다. 그러니 날마다 잔치를 즐겼던 부자와 비록 구걸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거지 나사로 중에서 진정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혹자는 “심령이 가난해지려면 거지 나사로처럼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거지와 같이 가난한 삶을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원한 내세에서는 영생과 영벌이 있기에, 우리가 영생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가난한 심령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심령이 되어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이 땅에서도 건강의 복, 물질의 복, 머리 되는 복 등 만사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또한 어떤 부귀영화와도 바꿀 수 없는 참되고 영원한 복 곧 천국을 주시지요.
2.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하려면
1)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세상 것들로 채워 있던 우리 마음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천국의 소망으로 온전히 채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육신의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죄를 지으려는 마음의 속성이지요. 다시 말해 ‘죄를 짓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미움, 혈기, 욕심, 음욕, 시기, 교만 등 온갖 악이 있으면 죄를 짓고 싶어지지요. 가령, 초신자가 술을 끊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술을 마시고 싶다는 마음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술자리에 가면 술을 마시고 싶은 강한 욕구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육신의 정욕이 사람을 충동하여 술을 마시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술을 마시도록 만듭니다. 또 판단 정죄하는 죄성이 있으면 남의 소문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수군수군합니다.
다음으로, 안목의 정욕을 차단해야 합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을 말합니다. 눈이 있어 보고 귀가 있어 들으며 발이 있어 간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으며 어디에 있는지가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 번 스쳐가며 본 것이라 해도, 아무 의미 없이 보고 들었다 해도 그것이 느낌으로 입력되어 다시 떠오르기도 하고, 또 보고 싶고 취하고 싶어집니다. 문제는 이렇게 보고 듣고 접한 것들이 죄에 속한 것, 어둠에 속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가령, 음란물을 한 번 봤는데 그것이 공부를 방해하며 또 보고 싶어집니다. 이처럼 안목의 정욕은 내 안에 비진리를 발동시킴으로 육신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주범이 됩니다. 그러니 진리가 아니면 보거나 듣지도 말고 그런 곳에 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이생의 자랑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는 속성입니다. 이생의 자랑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 부, 명예, 권세, 재능, 외모, 지식 등을 자랑하며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야고보서 4장 16절에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말씀하지요. 이생의 자랑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으로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교만이 나옵니다. 이는 가난한 심령인 섬김, 희생, 사랑과는 거리가 먼 마음이 부유한 모습이지요. 그러니 천국의 아름다움과 소망은 없고 이 세상 것들이 더 좋아 보이고 가치 있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기도 싫고 그저 교회만 왔다갔다 하는 쭉정이 신앙생활에 머무르지요.
혹여 여러분은 나를 자랑하고 싶고 세상 것에 욕심은 있지 않은지, 은근히 인정받고 높여 주기를 바라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천국의 소망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영적인 어린아이는 단순하고 순수하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알려 주면 쉽게 받아들이고 자존심이나 자기 고집이 없어 지적을 하거나 권면을 하여도 쉽게 인정하지요. 잘못한 것에 대해 바로 뉘우치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힘씁니다. 그러나 세상에 물들어 순수함이 사라지면 죄를 범하면서도 무감각해지고 권면을 받아도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죄책감도 없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에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지어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기도 하지요.
또한 영적인 어린아이는 선악 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지만 악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지요.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마음에서부터 싫어지고 어찌하든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성령님을 통해 신속히 변화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가난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 항상 겸손히 낮아지고,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불같은 기도를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자녀가 되어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이 땅에서도 부와 명예, 건강, 물질 등 축복을 받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이 없어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 )이 가난한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 )이 없고 선한 마음으로 아무 욕심이 없어 ( )를 비울 줄 아는 중심 상태를 말한다.
2. 육신의 정욕이란 ( )를 지으려는 마음의 ( )이다. 다시 말해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다. 마음속에 온갖 악이 있으면 죄를 짓고 싶어진다.
3. 안목의 정욕이란 ( )으로 보고 ( )로 듣는 것을 통해 ( )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을 말한다.
4. 이생의 자랑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 )를 드러내기 위해 ( )하는 속성이다. ( )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 부, 명예, 권세, 재능, 외모, 지식 등을 자랑하며 드러내고 싶어한다.
● 알고 넘어갑시다!
지옥의 대기 장소인 ‘아랫음부’
창세 이래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기 전 형벌을 받으며 머무는 장소이다. 이들은 인간 경작이 마쳐지고 백보좌 대심판 후에 죄의 경중에 따라 마침내 지옥의 불못이나 유황못으로 떨어진다.
교육목표 :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가정, 학교, 일터 등 모든 곳에서 만사형통한 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상 사람들은 부유하고 명예와 권세가 있으며, 자녀들이 효도하고 건강하며 가족이 화목하면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을 모두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물질이 많아도 건강을 잃어 걱정하고, 명예 권세가 있지만 가정이 불화하여 속상해합니다. 또 불의의 사고를 당해 비참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해도 죽으면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지 않고,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잘 사는 것에만 삶의 목표를 둔다면 무서운 지옥에 떨어지고 말지요. 그러니 이 땅에서의 ‘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과연 참된 복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장을 중심으로 참된 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가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부유한 것이 좋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이 없어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것을 뜻하지요.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악이 없고 선한 마음으로, 아무 욕심이 없어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중심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심령을 채울 영의 것을 사모하기에 복음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전도해도 쉽게 받아들이고, 말씀을 들으면 그대로 순종하니 구원받기도 쉽지요.
반면 마음이 부유한 사람들은 세상 욕심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어 전도를 하면 거부합니다. “사업이 바빠서요. 공부해야 해요. 돈 벌어야 해요. 나중에 한가해지면 갈게요.”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부, 명예, 권세로 그 눈과 마음이 가득 차 있으니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를 보여 주어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심령이 부유한 부자와 심령이 가난한 거지 나사로가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부자는 호의호식하며 날마다 잔치를 베풀 정도로 풍족한 삶을 살았기에 마음까지 부요해져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비록 부자의 대문 앞에서 구걸하며, 그 상처를 개가 핥는 불쌍한 삶을 살았어도 심령이 가난했기에 하나님을 믿었지요.
그런데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형편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겨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렸습니다. 반면 부자는 ‘아랫음부’에 떨어져 뜨거운 불꽃 가운데 고통받으며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이라도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애걸합니다. 그러니 날마다 잔치를 즐겼던 부자와 비록 구걸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거지 나사로 중에서 진정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혹자는 “심령이 가난해지려면 거지 나사로처럼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거지와 같이 가난한 삶을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원한 내세에서는 영생과 영벌이 있기에, 우리가 영생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가난한 심령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심령이 되어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이 땅에서도 건강의 복, 물질의 복, 머리 되는 복 등 만사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또한 어떤 부귀영화와도 바꿀 수 없는 참되고 영원한 복 곧 천국을 주시지요.
2.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하려면
1)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세상 것들로 채워 있던 우리 마음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천국의 소망으로 온전히 채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육신의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죄를 지으려는 마음의 속성이지요. 다시 말해 ‘죄를 짓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미움, 혈기, 욕심, 음욕, 시기, 교만 등 온갖 악이 있으면 죄를 짓고 싶어지지요. 가령, 초신자가 술을 끊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술을 마시고 싶다는 마음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술자리에 가면 술을 마시고 싶은 강한 욕구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육신의 정욕이 사람을 충동하여 술을 마시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술을 마시도록 만듭니다. 또 판단 정죄하는 죄성이 있으면 남의 소문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수군수군합니다.
다음으로, 안목의 정욕을 차단해야 합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을 말합니다. 눈이 있어 보고 귀가 있어 들으며 발이 있어 간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으며 어디에 있는지가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 번 스쳐가며 본 것이라 해도, 아무 의미 없이 보고 들었다 해도 그것이 느낌으로 입력되어 다시 떠오르기도 하고, 또 보고 싶고 취하고 싶어집니다. 문제는 이렇게 보고 듣고 접한 것들이 죄에 속한 것, 어둠에 속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가령, 음란물을 한 번 봤는데 그것이 공부를 방해하며 또 보고 싶어집니다. 이처럼 안목의 정욕은 내 안에 비진리를 발동시킴으로 육신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주범이 됩니다. 그러니 진리가 아니면 보거나 듣지도 말고 그런 곳에 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이생의 자랑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는 속성입니다. 이생의 자랑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 부, 명예, 권세, 재능, 외모, 지식 등을 자랑하며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야고보서 4장 16절에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말씀하지요. 이생의 자랑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으로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교만이 나옵니다. 이는 가난한 심령인 섬김, 희생, 사랑과는 거리가 먼 마음이 부유한 모습이지요. 그러니 천국의 아름다움과 소망은 없고 이 세상 것들이 더 좋아 보이고 가치 있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기도 싫고 그저 교회만 왔다갔다 하는 쭉정이 신앙생활에 머무르지요.
혹여 여러분은 나를 자랑하고 싶고 세상 것에 욕심은 있지 않은지, 은근히 인정받고 높여 주기를 바라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천국의 소망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영적인 어린아이는 단순하고 순수하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알려 주면 쉽게 받아들이고 자존심이나 자기 고집이 없어 지적을 하거나 권면을 하여도 쉽게 인정하지요. 잘못한 것에 대해 바로 뉘우치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힘씁니다. 그러나 세상에 물들어 순수함이 사라지면 죄를 범하면서도 무감각해지고 권면을 받아도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죄책감도 없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에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지어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기도 하지요.
또한 영적인 어린아이는 선악 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지만 악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지요.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마음에서부터 싫어지고 어찌하든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성령님을 통해 신속히 변화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가난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 항상 겸손히 낮아지고,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불같은 기도를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자녀가 되어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이 땅에서도 부와 명예, 건강, 물질 등 축복을 받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이 없어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 )이 가난한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 )이 없고 선한 마음으로 아무 욕심이 없어 ( )를 비울 줄 아는 중심 상태를 말한다.
2. 육신의 정욕이란 ( )를 지으려는 마음의 ( )이다. 다시 말해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다. 마음속에 온갖 악이 있으면 죄를 짓고 싶어진다.
3. 안목의 정욕이란 ( )으로 보고 ( )로 듣는 것을 통해 ( )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을 말한다.
4. 이생의 자랑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 )를 드러내기 위해 ( )하는 속성이다. ( )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 부, 명예, 권세, 재능, 외모, 지식 등을 자랑하며 드러내고 싶어한다.
● 알고 넘어갑시다!
지옥의 대기 장소인 ‘아랫음부’
창세 이래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기 전 형벌을 받으며 머무는 장소이다. 이들은 인간 경작이 마쳐지고 백보좌 대심판 후에 죄의 경중에 따라 마침내 지옥의 불못이나 유황못으로 떨어진다.
2026-03-20
제12과성령의 열매(9)
갈 5:22~23
읽을말씀 : 갈 5:22~23 | 외울말씀 : 잠 25:28 | 참고 말씀: 잠 16:32
교육목표 : 모든 것에 알맞게 조절하여 절제함으로 삶의 질을 높이며 빛나게 하여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라톤은 42.195km를 달려야 하는 육상 경기로 페이스를 잘 조절해야 결승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금방 끝나는 단거리 경기가 아니므로 선수들은 어느 한 구간만 빨리 달리거나 무조건 전력질주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코스 내내 흐트러짐 없이 달려야 하며, 적절한 지점에 이르면 더욱 힘을 내어 달리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결같은 성실로 끝까지 달려가면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영원한 천국에서 받을 영화로운 면류관을 바라보는 사람은 범사에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성령의 열매를 온전케 하는 절제
사전을 찾아보면 ‘정도에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함’이라고 절제에 대해 정의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어지럽게 하고 어려움을 자초합니다. 도박이나 향락에 빠진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하겠다.”고 하지만, 절제하지 못하니 한 번이 두 번, 세 번이 되어 결국 패가망신하고 말지요. 잠언 16장 32절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말씀했습니다.
절제의 힘이 약하면 자신을 제어하기가 힘듭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버리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이제는 육을 취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지만, 번번이 세상 유혹에 넘어가 버리지요. 그러나 절제를 잘하면 죄도 쉽게 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에 속한 ‘절제’는 단순히 죄를 짓지 않도록 자기를 제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온전해지도록 조절해 줍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마지막 ‘절제’로 끝난 이유가 바로 그런 까닭에서입니다. 절제는 다른 성령의 열매에 비해 두드러진 특성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맞게 조절함으로 안정되고 단단하게 지탱해 주지요.
절제의 미덕은 삶의 질을 높여 주고 빛나게 하지만, 무절제한 행동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하나님 일을 한다면서 절제하지 못함으로 덕이 되지 않는 경우도 봅니다. 예컨대 저녁 모임이 정해진 시간에 끝나지 않는다면 다니엘철야 기도회 시간까지 지장을 줄 수 있습니다. 시간을 경과하여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도 하나님 일을 한다는 것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키지요. 또 가정주부라면 가족들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모임이 충만하고 은혜롭다 하여 저녁 식사 때가 되었는데도 집에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제어하지 못하면 온 집에 충성할 수 없지요. 반면에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아무리 사명이 많아도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나중에 해야 할지, 앞으로 나가야 할지, 뒤로 물러서야 할지, 잠잠히 있어야 할지 분별할 줄 압니다.
2.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의 미덕
첫째, 항상 질서를 좇아 행합니다.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가만히 있어야 할 때,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잘 분별하여 질서를 따릅니다. 그러니 누구와도 변론하거나 다투지 않고 오해할 일이 없지요. 또한 격에 맞지 않는 일이나 분수에 지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절제하지 못하면 질서를 무너뜨리고 월권하는 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가령 선교회 회장이 총무에게 어떤 일을 지시했습니다. 총무는 열정이 넘친 나머지 임의로 일을 변경해 버렸습니다. 총무는 일을 더 크게 이루었다는 데에만 의의를 둘 뿐 정작 자신이 질서를 깨뜨렸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지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가정, 교회, 학교, 직장에서든 질서를 좇아 행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화평이 깨지는 곳에는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진리를 행할 때도 대상과 시기, 장소 등을 고려할 줄 압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라 했다고 해서 아무 데서나 큰소리로 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 전도나 심방을 할 때도 믿음의 분량에 맞게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깊은 말씀을 초신자나 전도자에게 무분별하게 전한다면 그 영혼을 실족시킬 수도 있고, 판단 정죄하게 만들지요.
또한 바쁜 사람을 붙잡아 놓고 자신이 깨달은 말씀이나 은혜 받은 체험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는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듣고는 있지만 초조하여 내용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지요. 그러므로 항상 상대의 상황을 잘 고려하고 지금 대화를 해도 좋을는지 다음에 해야 하는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시기에 맞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며 일의 전후를 분별하여 대응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급하고 경솔합니다. 서두르다 보면 분별력이 흐려져서 중요한 일들을 빠뜨리기도 하고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지요. 또 상대의 말을 중간에 끊고 자신의 생각 속에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립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급하기 때문에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합니다. 그러나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을 뿐 아니라, 무슨 말을 듣고 쉽게 요동하지도 않습니다. 차분히 상대의 말을 듣고 성령의 역사 속에 진실을 분별할 수 있지요. 매사에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면 잘못 판단하지도 않을뿐더러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3. 절제의 열매를 맺으려면
첫째, 변개함 없는 마음을 이루어야 합니다.
즉 거짓이 없고 간사함이 없는 마음, 진실한 마음을 이루어야 하지요. 그러면 ‘내가 이렇게 해야겠다’고 할 때 그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런 마음을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일 하나에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훈련을 쌓아가야 하지요.
작은 약속도 어기지 않고 지킬 때라야 큰 약속도 이행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지킬 때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고 변개함이 없는 마음이 되지요. 한 번 마음을 정했다면 자기 유익을 좇아 변개하지 말고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 쌓이면 결국 정한 마음이 되고 절제의 능력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둘째, 범사에 앞서지 말고 성령의 소욕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은 만큼 성령께서는 그 진리를 통해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해도 “용서하라, 사랑하라”는 성령의 음성이 먼저 들립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다. 대화로 오해를 풀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에도 당장 내가 보기에 급한 것,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해 나가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늘 성령의 소욕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해 나가는 훈련을 할수록 점점 더 세미한 것까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훈련이 될 때 진리대로 내가 그렇게 지켜야겠다 마음먹으면 지킬 수 있는 힘이 오지요. 기도도 내가 1시간 해야겠다면 1시간 하게 되고, 2시간 해야겠다면 2시간 하게 됩니다. 말씀 한 절 암송해야겠다, 한 장 이상 읽어야겠다고 하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행할 때 늘 질서 가운데 조화롭게 행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 절제는 두드러진 특성이 없지만 약방에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모든 약의 성질을 조화롭게 하여 약효를 잘 발휘하게 하는 감초처럼,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의 열매를 조절하여 온전케 해 주는 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을 맺으면 하나님께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범사에 형통하고 보장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둔 세상에서 빛 된 권세와 능력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지요. 성령의 열매들을 맺기에 더욱 힘써 아버지 하나님께 탐스럽고 아름다운 최상품의 열매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의 열매에 속한 절제는 단순히 ( )를 짓지 않도록 자기를 제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 ) 조절해 준다.
2.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날까요?
첫째, 항상 질서를 좇아 행한다.
둘째, ( )
셋째,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며 일의 전후를 분별하여 대응한다.
3. 절제의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변개함 없는 마음을 이루어야 한다.
둘째, ( )
● 알고 넘어갑시다!
절제를 의미하는 ‘비취옥’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열 번째 기초석인 비취옥은 반투명의 청록색 빛이 난다.
옛날 우리나라 여인들이 귀히 여기던 보석 중에 하나로 정숙함과 정결을 상징한다.
비취옥은 영적으로 절제를 의미한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풍성하면 좋겠지만 질서를 따라 아름답게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제가 있어야 한다. 이처럼 절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로서 약방의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한다.
교육목표 : 모든 것에 알맞게 조절하여 절제함으로 삶의 질을 높이며 빛나게 하여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라톤은 42.195km를 달려야 하는 육상 경기로 페이스를 잘 조절해야 결승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금방 끝나는 단거리 경기가 아니므로 선수들은 어느 한 구간만 빨리 달리거나 무조건 전력질주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코스 내내 흐트러짐 없이 달려야 하며, 적절한 지점에 이르면 더욱 힘을 내어 달리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결같은 성실로 끝까지 달려가면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영원한 천국에서 받을 영화로운 면류관을 바라보는 사람은 범사에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성령의 열매를 온전케 하는 절제
사전을 찾아보면 ‘정도에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함’이라고 절제에 대해 정의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어지럽게 하고 어려움을 자초합니다. 도박이나 향락에 빠진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하겠다.”고 하지만, 절제하지 못하니 한 번이 두 번, 세 번이 되어 결국 패가망신하고 말지요. 잠언 16장 32절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말씀했습니다.
절제의 힘이 약하면 자신을 제어하기가 힘듭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버리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이제는 육을 취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지만, 번번이 세상 유혹에 넘어가 버리지요. 그러나 절제를 잘하면 죄도 쉽게 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에 속한 ‘절제’는 단순히 죄를 짓지 않도록 자기를 제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온전해지도록 조절해 줍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마지막 ‘절제’로 끝난 이유가 바로 그런 까닭에서입니다. 절제는 다른 성령의 열매에 비해 두드러진 특성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맞게 조절함으로 안정되고 단단하게 지탱해 주지요.
절제의 미덕은 삶의 질을 높여 주고 빛나게 하지만, 무절제한 행동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하나님 일을 한다면서 절제하지 못함으로 덕이 되지 않는 경우도 봅니다. 예컨대 저녁 모임이 정해진 시간에 끝나지 않는다면 다니엘철야 기도회 시간까지 지장을 줄 수 있습니다. 시간을 경과하여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도 하나님 일을 한다는 것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키지요. 또 가정주부라면 가족들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모임이 충만하고 은혜롭다 하여 저녁 식사 때가 되었는데도 집에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제어하지 못하면 온 집에 충성할 수 없지요. 반면에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아무리 사명이 많아도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나중에 해야 할지, 앞으로 나가야 할지, 뒤로 물러서야 할지, 잠잠히 있어야 할지 분별할 줄 압니다.
2.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의 미덕
첫째, 항상 질서를 좇아 행합니다.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가만히 있어야 할 때,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잘 분별하여 질서를 따릅니다. 그러니 누구와도 변론하거나 다투지 않고 오해할 일이 없지요. 또한 격에 맞지 않는 일이나 분수에 지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절제하지 못하면 질서를 무너뜨리고 월권하는 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가령 선교회 회장이 총무에게 어떤 일을 지시했습니다. 총무는 열정이 넘친 나머지 임의로 일을 변경해 버렸습니다. 총무는 일을 더 크게 이루었다는 데에만 의의를 둘 뿐 정작 자신이 질서를 깨뜨렸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지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가정, 교회, 학교, 직장에서든 질서를 좇아 행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화평이 깨지는 곳에는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진리를 행할 때도 대상과 시기, 장소 등을 고려할 줄 압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라 했다고 해서 아무 데서나 큰소리로 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 전도나 심방을 할 때도 믿음의 분량에 맞게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깊은 말씀을 초신자나 전도자에게 무분별하게 전한다면 그 영혼을 실족시킬 수도 있고, 판단 정죄하게 만들지요.
또한 바쁜 사람을 붙잡아 놓고 자신이 깨달은 말씀이나 은혜 받은 체험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는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듣고는 있지만 초조하여 내용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지요. 그러므로 항상 상대의 상황을 잘 고려하고 지금 대화를 해도 좋을는지 다음에 해야 하는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시기에 맞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며 일의 전후를 분별하여 대응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급하고 경솔합니다. 서두르다 보면 분별력이 흐려져서 중요한 일들을 빠뜨리기도 하고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지요. 또 상대의 말을 중간에 끊고 자신의 생각 속에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립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급하기 때문에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합니다. 그러나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을 뿐 아니라, 무슨 말을 듣고 쉽게 요동하지도 않습니다. 차분히 상대의 말을 듣고 성령의 역사 속에 진실을 분별할 수 있지요. 매사에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면 잘못 판단하지도 않을뿐더러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3. 절제의 열매를 맺으려면
첫째, 변개함 없는 마음을 이루어야 합니다.
즉 거짓이 없고 간사함이 없는 마음, 진실한 마음을 이루어야 하지요. 그러면 ‘내가 이렇게 해야겠다’고 할 때 그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런 마음을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일 하나에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훈련을 쌓아가야 하지요.
작은 약속도 어기지 않고 지킬 때라야 큰 약속도 이행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지킬 때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고 변개함이 없는 마음이 되지요. 한 번 마음을 정했다면 자기 유익을 좇아 변개하지 말고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 쌓이면 결국 정한 마음이 되고 절제의 능력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둘째, 범사에 앞서지 말고 성령의 소욕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은 만큼 성령께서는 그 진리를 통해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해도 “용서하라, 사랑하라”는 성령의 음성이 먼저 들립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다. 대화로 오해를 풀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에도 당장 내가 보기에 급한 것,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해 나가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늘 성령의 소욕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해 나가는 훈련을 할수록 점점 더 세미한 것까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훈련이 될 때 진리대로 내가 그렇게 지켜야겠다 마음먹으면 지킬 수 있는 힘이 오지요. 기도도 내가 1시간 해야겠다면 1시간 하게 되고, 2시간 해야겠다면 2시간 하게 됩니다. 말씀 한 절 암송해야겠다, 한 장 이상 읽어야겠다고 하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행할 때 늘 질서 가운데 조화롭게 행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 절제는 두드러진 특성이 없지만 약방에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모든 약의 성질을 조화롭게 하여 약효를 잘 발휘하게 하는 감초처럼,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의 열매를 조절하여 온전케 해 주는 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을 맺으면 하나님께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범사에 형통하고 보장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둔 세상에서 빛 된 권세와 능력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지요. 성령의 열매들을 맺기에 더욱 힘써 아버지 하나님께 탐스럽고 아름다운 최상품의 열매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의 열매에 속한 절제는 단순히 ( )를 짓지 않도록 자기를 제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 ) 조절해 준다.
2.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날까요?
첫째, 항상 질서를 좇아 행한다.
둘째, ( )
셋째,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며 일의 전후를 분별하여 대응한다.
3. 절제의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변개함 없는 마음을 이루어야 한다.
둘째, ( )
● 알고 넘어갑시다!
절제를 의미하는 ‘비취옥’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열 번째 기초석인 비취옥은 반투명의 청록색 빛이 난다.
옛날 우리나라 여인들이 귀히 여기던 보석 중에 하나로 정숙함과 정결을 상징한다.
비취옥은 영적으로 절제를 의미한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풍성하면 좋겠지만 질서를 따라 아름답게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제가 있어야 한다. 이처럼 절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로서 약방의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한다.
2026-03-13
제11과성령의 열매(8)
갈 5:22~23
읽을말씀 : 갈 5:22~23 | 외울말씀 : 민 12:3 | 참고 말씀: 마 5:5
교육목표 : 덕을 겸비한 영적인 온유란 무엇이며, 온유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성령의 열매를 온전히 맺게 한다.
사전에 ‘온유’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남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선 부글부글하지만 눌러 참으면 “저 사람은 참으로 유(柔)하다.”고 하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이 있으면서 겉으로만 그럴 듯하게 참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 중 여덟 번째 온유에 대해 살펴볼까요?
1. 많은 사람을 품는 온유의 열매
영적으로 ‘온유’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악이 없어 모두를 이해하고 품어 주는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곧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덕(德)이 겸한 마음이지요. 덕(德)이 있으면 마냥 유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사에 절도 있고 반듯하며 위엄이 흐릅니다.
또한 온유한 사람의 마음은 솜털같이 포근합니다. 푹신한 솜털에 돌을 던지거나 바늘로 찔러도, 솜털은 소리 없이 감싸 안습니다. 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걸림이 없습니다. 곧 상대로 인해 혈기를 내거나 서운해하지도 않지요. 불편해하거나 상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 하지 않고 이해하며 감싸 줍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깃들이며 쉼을 얻지요. 마치 우람한 나무에 새들이 깃들여 보금자리를 짓고 쉼을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많은 사람을 의의 길로 인도하여 생명을 낳지요. 따라서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유함을 인정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신 대로이지요. 그는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갔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번번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조금만 힘든 상황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적했지요. 이러한 백성들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생활한 것만으로도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마음이 바로 영적인 온유함이며, 성령의 열매 중 온유의 열매에 속합니다.
2. 덕을 겸비한 영적인 온유
사전에 ‘덕(德)’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공정하며 사리사욕이 없습니다. 언행이 반듯하고 이해심이 깊어 많은 사람을 포용하지요. 덕이 있으면 그 외모에서부터 위엄이 흘러나옵니다.
영적인 온유함은 부드럽고 유순한 것만이 아니라 덕을 겸해야 합니다. 내면에 온유한 성품과 외면에 덕스러움을 갖춰야 영적으로 온유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그에 어울리는 옷을 입은 것과 같지요.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그가 벌거벗고 돌아다닌다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처럼 덕이 없는 온유는 그 가치를 다하지 못합니다.
덕은 온유함을 빛나게 하는 옷과 같은 것이지만 율법적이거나 외식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마음의 성결을 이루기보다 겉모습을 바르게 하는 데 치우치다 보면 자기 발견을 멈추고 스스로 영적인 성장을 이룬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세상에서도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외모를 그럴 듯하게 꾸민다 해서 뭇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추지 않고 외면에 치중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3. 온유한 사람의 특징
첫째, 반듯하고 위엄 있으며 절도 있는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분별없이 순하기만 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무시당하고 이용을 당하기 쉽지요. 진정한 온유는 반듯하고 위엄과 절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실 때에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의 외식을 책망하실 때에도 단호하고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부드러운 마음이지만 책망해야 할 때는 호되게 책망하셨지요. 그런 단호함과 의로움이 내면에 있는 사람은 언성을 높이거나 엄하게 하지 않아도, 뭇사람들이 그를 경솔하게 대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주의 교양이나 온전한 몸의 행실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덕 있는 사람은 말 한마디에도 무게가 있어 무익한 말이나 헛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복장도 때와 장소에 적합하게 입지요. 표정도 무뚝뚝하거나 차가운 것이 아니라 부드럽습니다. 이처럼 덕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반듯하게 하되 동시에 상대의 마음을 배려하여 편하게 하는 마음 씀씀이를 갖고 있습니다.
둘째, 마음을 넓게 쓰는 긍휼과 자비의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온유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구제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 곤고한 사람, 연약한 사람을 돌아보아 위로하고 은혜를 끼칩니다. 그런데 온유함이 마음 안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 자체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기 어렵습니다.
가령, 핍박받으며 힘들게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있다고 합시다. 이때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만 안타까워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기회가 될 때마다 따뜻하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고 상황을 살펴 구제합니다. 믿음으로 잘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지요. 이렇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안에 담고만 있느냐, 행함으로 나타내느냐 하는 것은 상대의 입장에서 느낄 때 큰 차이가 납니다. 온유한 마음이 덕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상대에게 은혜와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은 덕으로 인해 나타나는 충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땅을 받는다는 것은 상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급은 충성과 관련이 깊지요. 마찬가지로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도, 마음이 온유한 것만 가지고 받는 상이 아닙니다. 온유한 마음이 덕스럽게 표현될 때 결과적으로 충성의 열매를 맺으니 그로 인해 상을 받는 것입니다. 곧 많은 영혼을 덕스럽게 품어서 힘과 위로를 주고 생명을 심어 줄 때 천국의 땅을 상급으로 받게 되지요.
4.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마음 밭을 옥토로 개간해야 합니다. 혈기, 미움, 시기, 욕심, 다툼, 들렘, 자기 의 이런 것들을 뽑아내야 온유해지지요. 그래서 온유는 다른 성령의 열매들보다도 성결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옥토 즉 온유한 마음이 되면 구하는 것마다 신속히 응답을 받습니다. 성령의 음성도 밝히 들어 나감으로 범사가 형통하지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땅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에 영적인 온유함을 이룬 만큼 천국에서 넓은 땅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 안에 깃들였던 모든 영혼을 다 초청하여 함께할 수 있을 만큼 큰 처소를 상급으로 받는다는 말입니다.
천국에서 그렇게 큰 처소를 얻었다면 그만큼 영화로운 지위에 있다는 뜻도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넓은 땅을 소유했다 해도 그것을 천국에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을 이룬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땅은 세세토록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기업입니다. 그 기업 안에서 주님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마음 밭을 개간하여 아름다운 온유의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와 같이 많은 사람을 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크게 이룬다면 장차 천국에서 크고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아 세세토록 그 영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 )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악이 없어 모두를 이해하고 품어 주는 ( ) 마음을 말한다. 곧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덕이 겸한 마음이다.
2. ( )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공정하며 사리사욕이 없다. 언행이 반듯하고 이해심이 깊어 많은 사람을 포용한다. ( )이 있으면 그 외모에서부터 위엄이 흘러나온다.
3. 온유한 사람의 특징을 써 보세요.
● 알고 넘어갑시다!
온유함을 의미하는 ‘자정’
새 예루살렘 성곽에 있는 열두 번째 기초석이며, 일반적으로 자수정이라고 불린다.
보랏빛을 내는 투명한 보석이다. 빛이 고상하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귀족에게 사랑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도 자정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을 아름답다 하시는데, 자정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바로 ‘온유’이다.
온유는 사랑장이나 팔복,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도 나온다.
성령으로 영을 낳아 가는 사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증거로 맺히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교육목표 : 덕을 겸비한 영적인 온유란 무엇이며, 온유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성령의 열매를 온전히 맺게 한다.
사전에 ‘온유’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남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선 부글부글하지만 눌러 참으면 “저 사람은 참으로 유(柔)하다.”고 하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이 있으면서 겉으로만 그럴 듯하게 참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 중 여덟 번째 온유에 대해 살펴볼까요?
1. 많은 사람을 품는 온유의 열매
영적으로 ‘온유’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악이 없어 모두를 이해하고 품어 주는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곧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덕(德)이 겸한 마음이지요. 덕(德)이 있으면 마냥 유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사에 절도 있고 반듯하며 위엄이 흐릅니다.
또한 온유한 사람의 마음은 솜털같이 포근합니다. 푹신한 솜털에 돌을 던지거나 바늘로 찔러도, 솜털은 소리 없이 감싸 안습니다. 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걸림이 없습니다. 곧 상대로 인해 혈기를 내거나 서운해하지도 않지요. 불편해하거나 상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 하지 않고 이해하며 감싸 줍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깃들이며 쉼을 얻지요. 마치 우람한 나무에 새들이 깃들여 보금자리를 짓고 쉼을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많은 사람을 의의 길로 인도하여 생명을 낳지요. 따라서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유함을 인정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신 대로이지요. 그는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갔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번번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조금만 힘든 상황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적했지요. 이러한 백성들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생활한 것만으로도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마음이 바로 영적인 온유함이며, 성령의 열매 중 온유의 열매에 속합니다.
2. 덕을 겸비한 영적인 온유
사전에 ‘덕(德)’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공정하며 사리사욕이 없습니다. 언행이 반듯하고 이해심이 깊어 많은 사람을 포용하지요. 덕이 있으면 그 외모에서부터 위엄이 흘러나옵니다.
영적인 온유함은 부드럽고 유순한 것만이 아니라 덕을 겸해야 합니다. 내면에 온유한 성품과 외면에 덕스러움을 갖춰야 영적으로 온유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그에 어울리는 옷을 입은 것과 같지요.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그가 벌거벗고 돌아다닌다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처럼 덕이 없는 온유는 그 가치를 다하지 못합니다.
덕은 온유함을 빛나게 하는 옷과 같은 것이지만 율법적이거나 외식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마음의 성결을 이루기보다 겉모습을 바르게 하는 데 치우치다 보면 자기 발견을 멈추고 스스로 영적인 성장을 이룬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세상에서도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외모를 그럴 듯하게 꾸민다 해서 뭇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추지 않고 외면에 치중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3. 온유한 사람의 특징
첫째, 반듯하고 위엄 있으며 절도 있는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분별없이 순하기만 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무시당하고 이용을 당하기 쉽지요. 진정한 온유는 반듯하고 위엄과 절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실 때에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의 외식을 책망하실 때에도 단호하고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부드러운 마음이지만 책망해야 할 때는 호되게 책망하셨지요. 그런 단호함과 의로움이 내면에 있는 사람은 언성을 높이거나 엄하게 하지 않아도, 뭇사람들이 그를 경솔하게 대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주의 교양이나 온전한 몸의 행실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덕 있는 사람은 말 한마디에도 무게가 있어 무익한 말이나 헛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복장도 때와 장소에 적합하게 입지요. 표정도 무뚝뚝하거나 차가운 것이 아니라 부드럽습니다. 이처럼 덕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반듯하게 하되 동시에 상대의 마음을 배려하여 편하게 하는 마음 씀씀이를 갖고 있습니다.
둘째, 마음을 넓게 쓰는 긍휼과 자비의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온유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구제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 곤고한 사람, 연약한 사람을 돌아보아 위로하고 은혜를 끼칩니다. 그런데 온유함이 마음 안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 자체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기 어렵습니다.
가령, 핍박받으며 힘들게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있다고 합시다. 이때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만 안타까워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기회가 될 때마다 따뜻하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고 상황을 살펴 구제합니다. 믿음으로 잘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지요. 이렇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안에 담고만 있느냐, 행함으로 나타내느냐 하는 것은 상대의 입장에서 느낄 때 큰 차이가 납니다. 온유한 마음이 덕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상대에게 은혜와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은 덕으로 인해 나타나는 충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땅을 받는다는 것은 상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급은 충성과 관련이 깊지요. 마찬가지로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도, 마음이 온유한 것만 가지고 받는 상이 아닙니다. 온유한 마음이 덕스럽게 표현될 때 결과적으로 충성의 열매를 맺으니 그로 인해 상을 받는 것입니다. 곧 많은 영혼을 덕스럽게 품어서 힘과 위로를 주고 생명을 심어 줄 때 천국의 땅을 상급으로 받게 되지요.
4.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마음 밭을 옥토로 개간해야 합니다. 혈기, 미움, 시기, 욕심, 다툼, 들렘, 자기 의 이런 것들을 뽑아내야 온유해지지요. 그래서 온유는 다른 성령의 열매들보다도 성결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옥토 즉 온유한 마음이 되면 구하는 것마다 신속히 응답을 받습니다. 성령의 음성도 밝히 들어 나감으로 범사가 형통하지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땅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에 영적인 온유함을 이룬 만큼 천국에서 넓은 땅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 안에 깃들였던 모든 영혼을 다 초청하여 함께할 수 있을 만큼 큰 처소를 상급으로 받는다는 말입니다.
천국에서 그렇게 큰 처소를 얻었다면 그만큼 영화로운 지위에 있다는 뜻도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넓은 땅을 소유했다 해도 그것을 천국에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을 이룬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땅은 세세토록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기업입니다. 그 기업 안에서 주님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마음 밭을 개간하여 아름다운 온유의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와 같이 많은 사람을 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크게 이룬다면 장차 천국에서 크고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아 세세토록 그 영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 )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악이 없어 모두를 이해하고 품어 주는 ( ) 마음을 말한다. 곧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덕이 겸한 마음이다.
2. ( )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공정하며 사리사욕이 없다. 언행이 반듯하고 이해심이 깊어 많은 사람을 포용한다. ( )이 있으면 그 외모에서부터 위엄이 흘러나온다.
3. 온유한 사람의 특징을 써 보세요.
● 알고 넘어갑시다!
온유함을 의미하는 ‘자정’
새 예루살렘 성곽에 있는 열두 번째 기초석이며, 일반적으로 자수정이라고 불린다.
보랏빛을 내는 투명한 보석이다. 빛이 고상하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귀족에게 사랑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도 자정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을 아름답다 하시는데, 자정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바로 ‘온유’이다.
온유는 사랑장이나 팔복,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도 나온다.
성령으로 영을 낳아 가는 사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증거로 맺히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2026-03-06
제10과성령의 열매(7)
갈 5:22~23
읽을말씀 : 갈 5:22~23 | 외울말씀 : 잠 25:13 | 참고 말씀: 시 101:6; 계 2:10
교육목표 :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충성을 하여 하나님 나라를 크게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사전에 ‘충성’은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 혹은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자신을 바치고 지조를 굽히지 않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도 충성된 사람은 신뢰하고 칭찬할 만한 사람으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충성과는 차이가 납니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한다 해서 그 행위만으로 충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특정한 분야에만 생명 다하기까지 열정을 쏟는다 해서 온전한 충성이라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의 열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랑과 정성을 다해 맡겨진 일 이상 감당해야 충성
급여를 받는 직원이 자신의 업무를 잘 감당했다 해서 그것만으로 ‘충성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책임을 완수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삯을 받은 만큼 한 것이므로 ‘충성’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요. 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 사명을 넘치게 감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받은 만큼은 해야지’ 하는 계산적인 마음이나 억지로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자기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넘치도록 감당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또 책임을 지는 분야에 있어서도 마음에 충성의 열매가 맺힌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상으로 책임을 다합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경우,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는 기도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 뜻을 전했지만 그들이 불순종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과 정성을 다해 백성을 인도했습니다. 그들이 잘못했을 때도 자신이 그런 것처럼 책임을 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질지라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해 왔는데 구성원들 때문에 일이 잘못되거나 난처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동안 저도 많이 괴로웠습니다.” 하며 책임을 회피하고자 합니다. “내가 할 바는 다 했기에 떳떳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마음은 충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충성의 열매가 맺힌 사람이라면 “나는 책임이 없다.” 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 해도 그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사명을 맡기셨는지를 먼저 떠올리며 영적인 충성을 하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적인 충성이란?
어떤 사람이 범죄 조직에 들어가 그 두목에게 목숨을 바쳐 헌신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충성되다 하실까요? 선과 진리 속에서 충성할 때라야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감사함으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다가 어느 순간 사명을 놓거나 충성이 식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충성을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충성이란 꾸준히 ‘마음의 할례’를 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마음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비진리, 악, 불의, 불법 등 모든 죄를 버리고 성결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다하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 66권에 담긴 하나님 말씀을 생명 다해 이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충성을 하려면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마음의 할례 없이 사명만 감당한다고 충성했다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비진리에 속한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죽이고 성결되는 것이 곧 영적인 충성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성결’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온전히 성결되기까지 다른 사명은 감당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직분이나 사명을 맡더라도 항상 마음의 할례를 함께 이뤄가야 하지요. 그런 사람은 변함없이 사명 감당도 잘합니다. 현실에 어떤 어려움이 오거나 마음의 연단이 있어도 사명을 놓거나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과 나와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죄를 버리는 것은 상급이 되지 않지만 성결된 만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성결된 마음으로 사명 감당할 때 더 많은 상급을 쌓을 수 있습니다.
3. 주인의 마음에 맞게 순종해야 충성
잠언 25장 13절에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일을 잘한다 해도 자신의 뜻대로 한다면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할 수 없습니다.
가령, 사장님이 직원에게 “귀한 손님이 오실 테니까 꼭 사무실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 나갔다가 늦게 들어왔습니다. 사장님이 이 직원을 잘했다고 할까요? 아니지요. 아무리 회사 일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불순종하였기에 칭찬을 받을 수 없지요.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기 생각과 욕심을 좇아 일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주인의 뜻을 저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보다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춰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충성한들 어찌 그것이 상급이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든 비진리가 아닌 이상 윗분의 의중에 맞춰 일을 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지 않고, 결과 또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4. 온 집에 충성이란?
자신이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두루 충성하는 것을 온 집에 충성한다고 말합니다. 만일 교회에서 특별한 사명이 없다 해도 성도로서, 각종 모임에 속한 회원으로서 자리를 지키는 것도 충성의 한 분야이지요. 가정, 직장,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속한 구성원으로서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내와 남편으로서, 부모로서, 학생으로서, 직원으로서 모든 본분을 다할 때 온 집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한두 가지 분야만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좀 소홀히 한다면 온전한 충성이라 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몸은 하나고 직분이 많을 때 모든 분야에 어떻게 충성할 수 있습니까? 영으로 변화되면 온 집에 충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가령, A 모임에서는 회장이고 B 모임에서는 회원입니다. 이때 충성의 열매가 맺히면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지 않습니다. “나는 A 모임의 머리니까, B 모임에 가지 않아도 이해하겠지?” 하지 않습니다. B 모임에 가지 못할 상황이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마음을 쓰며 힘이 되려고 합니다. 이렇게 선이 있는 만큼 온 집에 충성할 수 있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도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충성함이 예전과 얼마나 달라졌는지요? 예전에는 사명도 사모하고 충성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맡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사명은 그대로라 해도 처음 뜨거웠던 마음이 식지는 않았는지요?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충성도 더 승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장차 천국에서는 얼마나 값지고 귀한 상급으로 받겠습니까?
시편 101편 6절에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마음의 성결을 이루고 온 집에 충성하면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습니다. 영적인 충성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 나라에 기둥같이 쓰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 보좌 가까이 거하는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충성이란 꾸준히 ( )를 하는 작업을 말한다.
끊임없이 마음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비진리, 악, 불의, 불법 등 모든 죄를 버리고 ( )을 이루는 것이다.
2. 요한계시록 2:10에‘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다하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 66권에 담긴 ( )을 생명 다해 이뤄 드린다는 의미이다.
● 알고 넘어갑시다!
천국에서 상급으로 받는 면류관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면류관이 나온다.
법대로 경기한 자가 받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 9:25), 하나님께 영광 돌림으로 받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 계 2:10), 하나님의 보좌 곁에 둘러선 이십사 장로들이 쓰는 금면류관(계 4:4, 14:14), 사도 바울이 바라보았던 의의 면류관(딤후 4:8)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금장식관, 꽃으로 장식된 화관, 영롱한 진주로 만들어진 진주관, 투명한 크리스털 위에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크리스털관 등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교육목표 :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충성을 하여 하나님 나라를 크게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사전에 ‘충성’은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 혹은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자신을 바치고 지조를 굽히지 않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도 충성된 사람은 신뢰하고 칭찬할 만한 사람으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충성과는 차이가 납니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한다 해서 그 행위만으로 충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특정한 분야에만 생명 다하기까지 열정을 쏟는다 해서 온전한 충성이라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의 열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랑과 정성을 다해 맡겨진 일 이상 감당해야 충성
급여를 받는 직원이 자신의 업무를 잘 감당했다 해서 그것만으로 ‘충성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책임을 완수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삯을 받은 만큼 한 것이므로 ‘충성’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요. 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 사명을 넘치게 감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받은 만큼은 해야지’ 하는 계산적인 마음이나 억지로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자기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넘치도록 감당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또 책임을 지는 분야에 있어서도 마음에 충성의 열매가 맺힌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상으로 책임을 다합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경우,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는 기도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 뜻을 전했지만 그들이 불순종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과 정성을 다해 백성을 인도했습니다. 그들이 잘못했을 때도 자신이 그런 것처럼 책임을 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질지라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해 왔는데 구성원들 때문에 일이 잘못되거나 난처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동안 저도 많이 괴로웠습니다.” 하며 책임을 회피하고자 합니다. “내가 할 바는 다 했기에 떳떳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마음은 충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충성의 열매가 맺힌 사람이라면 “나는 책임이 없다.” 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 해도 그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사명을 맡기셨는지를 먼저 떠올리며 영적인 충성을 하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적인 충성이란?
어떤 사람이 범죄 조직에 들어가 그 두목에게 목숨을 바쳐 헌신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충성되다 하실까요? 선과 진리 속에서 충성할 때라야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감사함으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다가 어느 순간 사명을 놓거나 충성이 식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충성을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충성이란 꾸준히 ‘마음의 할례’를 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마음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비진리, 악, 불의, 불법 등 모든 죄를 버리고 성결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다하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 66권에 담긴 하나님 말씀을 생명 다해 이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충성을 하려면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마음의 할례 없이 사명만 감당한다고 충성했다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비진리에 속한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죽이고 성결되는 것이 곧 영적인 충성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성결’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온전히 성결되기까지 다른 사명은 감당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직분이나 사명을 맡더라도 항상 마음의 할례를 함께 이뤄가야 하지요. 그런 사람은 변함없이 사명 감당도 잘합니다. 현실에 어떤 어려움이 오거나 마음의 연단이 있어도 사명을 놓거나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과 나와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죄를 버리는 것은 상급이 되지 않지만 성결된 만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성결된 마음으로 사명 감당할 때 더 많은 상급을 쌓을 수 있습니다.
3. 주인의 마음에 맞게 순종해야 충성
잠언 25장 13절에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일을 잘한다 해도 자신의 뜻대로 한다면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할 수 없습니다.
가령, 사장님이 직원에게 “귀한 손님이 오실 테니까 꼭 사무실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 나갔다가 늦게 들어왔습니다. 사장님이 이 직원을 잘했다고 할까요? 아니지요. 아무리 회사 일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불순종하였기에 칭찬을 받을 수 없지요.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기 생각과 욕심을 좇아 일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주인의 뜻을 저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보다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춰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충성한들 어찌 그것이 상급이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든 비진리가 아닌 이상 윗분의 의중에 맞춰 일을 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지 않고, 결과 또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4. 온 집에 충성이란?
자신이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두루 충성하는 것을 온 집에 충성한다고 말합니다. 만일 교회에서 특별한 사명이 없다 해도 성도로서, 각종 모임에 속한 회원으로서 자리를 지키는 것도 충성의 한 분야이지요. 가정, 직장,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속한 구성원으로서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내와 남편으로서, 부모로서, 학생으로서, 직원으로서 모든 본분을 다할 때 온 집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한두 가지 분야만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좀 소홀히 한다면 온전한 충성이라 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몸은 하나고 직분이 많을 때 모든 분야에 어떻게 충성할 수 있습니까? 영으로 변화되면 온 집에 충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가령, A 모임에서는 회장이고 B 모임에서는 회원입니다. 이때 충성의 열매가 맺히면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지 않습니다. “나는 A 모임의 머리니까, B 모임에 가지 않아도 이해하겠지?” 하지 않습니다. B 모임에 가지 못할 상황이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마음을 쓰며 힘이 되려고 합니다. 이렇게 선이 있는 만큼 온 집에 충성할 수 있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도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충성함이 예전과 얼마나 달라졌는지요? 예전에는 사명도 사모하고 충성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맡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사명은 그대로라 해도 처음 뜨거웠던 마음이 식지는 않았는지요?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충성도 더 승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장차 천국에서는 얼마나 값지고 귀한 상급으로 받겠습니까?
시편 101편 6절에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마음의 성결을 이루고 온 집에 충성하면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습니다. 영적인 충성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 나라에 기둥같이 쓰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 보좌 가까이 거하는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충성이란 꾸준히 ( )를 하는 작업을 말한다.
끊임없이 마음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비진리, 악, 불의, 불법 등 모든 죄를 버리고 ( )을 이루는 것이다.
2. 요한계시록 2:10에‘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다하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 66권에 담긴 ( )을 생명 다해 이뤄 드린다는 의미이다.
● 알고 넘어갑시다!
천국에서 상급으로 받는 면류관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면류관이 나온다.
법대로 경기한 자가 받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 9:25), 하나님께 영광 돌림으로 받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 계 2:10), 하나님의 보좌 곁에 둘러선 이십사 장로들이 쓰는 금면류관(계 4:4, 14:14), 사도 바울이 바라보았던 의의 면류관(딤후 4:8)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금장식관, 꽃으로 장식된 화관, 영롱한 진주로 만들어진 진주관, 투명한 크리스털 위에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크리스털관 등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2026-02-27
제9과성령의 열매 (6)
갈 5:22~23
읽을말씀 : 갈 5:22~23 | 외울말씀 : 마 5:16 | 참고 말씀: 마 12:35
교육목표 : 성령 안에서 범사에 선을 추구하며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함으로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주 안에서 성령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 선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즉 자기 양심에 따라 “이것은 선하다. 저것은 악하다.” 하지요.
그래서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나름 선하고 의롭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양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는 선하다고 여긴 것이 상대에게는 악할 수 있고, 내게는 악한 것이 남에게는 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 양심이란
그렇다면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부모로부터 어떤 기를 받고 태어나는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난 자녀는 비교적 본성이 선합니다. 또 좋은 환경 속에서 선한 것을 많이 보고 들으며 자란 사람은 양심이 선하게 만들어지기 쉽지요. 반면 악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나 악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접하면 본성과 양심이 악해지기 마련입니다.
가령, 정직의 중요성을 교육받고 자라는 아이는 작은 거짓말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거짓말하며 자란 아이는 큰 거짓말을 하면서도 잘못한 줄도 모르지요. 양심이 그만큼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양심은 달라집니다. 사회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가치관이 다 같지는 않습니다. 왕정 시대에는 노예를 부리며 학대해도 그것을 잘못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또 4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손가락질 받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만큼 시대의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2. 성령의 열매인 양선의 열매란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보기에 선한 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선악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준이 항상 동일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 곧 하나님 말씀이 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기준 삼아 행하려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양선(良善)’을 문자대로 풀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이지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는 것처럼,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나옵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선한 마음이 있기에 선행을 베풀지요.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합니다. 그런데 선을 추구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해서 양선의 열매가 맺히지는 않습니다. 선을 보고 듣고 반드시 마음에 이루고 행함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양선을 행했는지 잘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를 보았으나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그 뒤에 레위인이 지나가지만 그도 외면해 버립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 뜻을 행해야 할 순간에는 행함을 내보이지 못했지요. 그 후 한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상처를 싸매 주며 황급히 주막으로 데려가 돌봐 주었지요.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그를 부탁하며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와서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이기적인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갈 길도 바쁜데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과 물질을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응급 조치는 해 줄 수 있지만 굳이 앞으로의 비용까지 대겠다면서 주막 주인에게 부탁해야 할 책임은 없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선을 추구하며 행하는 양선의 마음이 있었기에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물질이나 시간에 손해를 본다 해도, 아무리 갈 길이 바쁘다 해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유가 있어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다친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를 구했어야 했는데’ 하며 내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양선은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선을 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 범사에 선을 택해 나가는 마음입니다.
3. 예수님의 양선의 마음
마태복음 12장 19~20절에는 예수님의 양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말씀한 대로 양선의 열매가 가득하고 향기가 진동을 합니다. 선한 일만 하신 예수님을 악한 사람들은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참 뜻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 훼방하여도 다투거나 들레지도 않으셨지요. 육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좋아합니다. 나를 알아주기 원하고 대접받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큰 권능을 베풀면서도 들레지 않으셨고 겸손하셨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걸음걸이, 몸가짐, 언어에도 흠이 없으셨지요. 오직 그 마음에는 지극한 선과 겸손함, 영적인 사랑만이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맺으면 예수님처럼 누구와도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티나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지요. 자신을 드러내 높임 받으려 하지도 않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한다 해서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이지요.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 행함을 보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성령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도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양선의 열매가 맺히면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품습니다. 굳이 시비를 따져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거나 꺾으려고 하지 않지요. 진실한 마음으로 선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줍니다. 설령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기까지만 참자!”라고 한계를 두고 선을 넘는다고 해서 외면하는 것도 없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고자 애쓰지요. 이것이 곧 양선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양선’의 마음과 다른 성령의 열매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가령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자비나 구제와 긍휼이 아닌가?” 또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는 마음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이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면에 중점을 두었느냐를 보면 됩니다.
‘양선’의 열매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것입니다.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긍휼’에 초점을 두지 않고, 긍휼히 여겨야 할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의 마음’에 중점을 두었지요. 또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는다는 것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양선에 비유했을 때는 선해서 화평을 깰 수 없는 마음, 인정받으려고 들레기보다는 겸비한 것을 더 좋아하는 선한 마음에 포인트를 둔 것입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온전히 맺으면 주님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지 않으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도 선과 겸손이 풍겨납니다. 주의 교양으로 범사에 존경받을 만하며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 등이 온전해지지요. 누가 봐도 존중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2. 양선이란 ( )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 )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입니다.
3. ( )는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 )는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사마리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그 주변을 일컫는 말이다. 이곳에 바알 당이나 다른 종교의 사당들이 있었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로 여겼다. 예후는 왕이 된 후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사마리아는 여러 번 앗수르의 공격을 받다가 마침내 함락되고 만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에 자국민들을 이주시켜 혼혈정책을 펼친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는 혼혈 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적대시하며 상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교육목표 : 성령 안에서 범사에 선을 추구하며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함으로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주 안에서 성령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 선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즉 자기 양심에 따라 “이것은 선하다. 저것은 악하다.” 하지요.
그래서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나름 선하고 의롭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양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는 선하다고 여긴 것이 상대에게는 악할 수 있고, 내게는 악한 것이 남에게는 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 양심이란
그렇다면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부모로부터 어떤 기를 받고 태어나는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난 자녀는 비교적 본성이 선합니다. 또 좋은 환경 속에서 선한 것을 많이 보고 들으며 자란 사람은 양심이 선하게 만들어지기 쉽지요. 반면 악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나 악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접하면 본성과 양심이 악해지기 마련입니다.
가령, 정직의 중요성을 교육받고 자라는 아이는 작은 거짓말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거짓말하며 자란 아이는 큰 거짓말을 하면서도 잘못한 줄도 모르지요. 양심이 그만큼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양심은 달라집니다. 사회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가치관이 다 같지는 않습니다. 왕정 시대에는 노예를 부리며 학대해도 그것을 잘못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또 4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손가락질 받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만큼 시대의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2. 성령의 열매인 양선의 열매란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보기에 선한 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선악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준이 항상 동일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 곧 하나님 말씀이 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기준 삼아 행하려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양선(良善)’을 문자대로 풀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이지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는 것처럼,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나옵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선한 마음이 있기에 선행을 베풀지요.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합니다. 그런데 선을 추구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해서 양선의 열매가 맺히지는 않습니다. 선을 보고 듣고 반드시 마음에 이루고 행함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양선을 행했는지 잘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를 보았으나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그 뒤에 레위인이 지나가지만 그도 외면해 버립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 뜻을 행해야 할 순간에는 행함을 내보이지 못했지요. 그 후 한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상처를 싸매 주며 황급히 주막으로 데려가 돌봐 주었지요.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그를 부탁하며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와서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이기적인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갈 길도 바쁜데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과 물질을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응급 조치는 해 줄 수 있지만 굳이 앞으로의 비용까지 대겠다면서 주막 주인에게 부탁해야 할 책임은 없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선을 추구하며 행하는 양선의 마음이 있었기에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물질이나 시간에 손해를 본다 해도, 아무리 갈 길이 바쁘다 해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유가 있어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다친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를 구했어야 했는데’ 하며 내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양선은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선을 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 범사에 선을 택해 나가는 마음입니다.
3. 예수님의 양선의 마음
마태복음 12장 19~20절에는 예수님의 양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말씀한 대로 양선의 열매가 가득하고 향기가 진동을 합니다. 선한 일만 하신 예수님을 악한 사람들은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참 뜻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 훼방하여도 다투거나 들레지도 않으셨지요. 육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좋아합니다. 나를 알아주기 원하고 대접받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큰 권능을 베풀면서도 들레지 않으셨고 겸손하셨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걸음걸이, 몸가짐, 언어에도 흠이 없으셨지요. 오직 그 마음에는 지극한 선과 겸손함, 영적인 사랑만이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맺으면 예수님처럼 누구와도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티나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지요. 자신을 드러내 높임 받으려 하지도 않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한다 해서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이지요.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 행함을 보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성령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도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양선의 열매가 맺히면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품습니다. 굳이 시비를 따져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거나 꺾으려고 하지 않지요. 진실한 마음으로 선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줍니다. 설령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기까지만 참자!”라고 한계를 두고 선을 넘는다고 해서 외면하는 것도 없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고자 애쓰지요. 이것이 곧 양선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양선’의 마음과 다른 성령의 열매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가령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자비나 구제와 긍휼이 아닌가?” 또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는 마음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이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면에 중점을 두었느냐를 보면 됩니다.
‘양선’의 열매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것입니다.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긍휼’에 초점을 두지 않고, 긍휼히 여겨야 할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의 마음’에 중점을 두었지요. 또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는다는 것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양선에 비유했을 때는 선해서 화평을 깰 수 없는 마음, 인정받으려고 들레기보다는 겸비한 것을 더 좋아하는 선한 마음에 포인트를 둔 것입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온전히 맺으면 주님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지 않으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도 선과 겸손이 풍겨납니다. 주의 교양으로 범사에 존경받을 만하며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 등이 온전해지지요. 누가 봐도 존중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2. 양선이란 ( )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 )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입니다.
3. ( )는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 )는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사마리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그 주변을 일컫는 말이다. 이곳에 바알 당이나 다른 종교의 사당들이 있었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로 여겼다. 예후는 왕이 된 후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사마리아는 여러 번 앗수르의 공격을 받다가 마침내 함락되고 만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에 자국민들을 이주시켜 혼혈정책을 펼친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는 혼혈 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적대시하며 상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2026-02-20
제8과성령의 열매 (5)
갈 5:22~23
읽을말씀 : 갈 5:22~23 | 외울말씀 : 눅 6:36 | 참고 말씀: 약 2장
교육목표 :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들은 종종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고 해도 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거나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다.”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선으로 이해할 수 있고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지요. “누구는 이래서 좋고, 누구는 저래서 싫다.” 하지 않습니다. 싫은 사람도 없고 미운 사람도 없습니다. 걸리거나 불편한 사람도 없고 원수는 더더욱 없지요.
1. 자비의 열매란
사전에 자비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자비의 영적인 의미는 단순히 상대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또 사람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는 마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비의 마음으로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시편 130편 3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고 공의대로만 판결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하고 이해해 주셨습니다. 또한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까지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자비하길 원하십니다(눅 6:36). 자비의 마음은 사랑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영적인 사랑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자비는 용서와 포용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오해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감싸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상대를 미워하거나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위로가 되어 줍니다. 상대방을 감싸는 따뜻한 마음이 되면 티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포용하여 아름다운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을 통해 예수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 간음죄는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거나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십니다.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죄임에도 예수님은 용서함으로써 여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의 마음입니다.
2. 영적인 자비의 특성
1) 편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부유하고 명예 있는 사람을 대할 때와 가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대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거나 마음 자세가 달라지는 자체가 없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나 부족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주님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야고보서 2장 1~4절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말씀했습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상대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직 재판관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누구도 형제를 정죄할 권한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징계받는 이를 볼 때 긍휼히 여기며 ‘저가 힘을 내어 잘 통과하기를’ 바라고 기도해 주게 되지요.
2)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즐겨 구제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말로만 “힘내세요!” 하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실질적으로 힘이 되도록 돕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16절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말씀했습니다.
진실한 구제는 상대가 굶고 있는데 ‘나도 한 끼 먹을 양식뿐이니 어쩔 수 없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하지요. 더구나 주님을 믿지 않으므로 지옥에 갈 영혼들을 본다면 어찌하든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마음을 쓰는 것이 곧 자비의 마음입니다.
3) 상대를 함부로 지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한다면 때로는 지적이나 책망도 해야 합니다. 무조건 덮어 주고 용서한다면 상대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비의 마음이 있다면 징계나 책망, 지적도 쉽게 하지 못합니다. 한마디 지적을 한다 해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하지요.
잠언 12장 18절에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했습니다. 특히 성도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님에게는 이런 비진리의 마음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집사님은 이러한 결점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사랑받지 못합니다.” 이런 말을 쉽게 하는 경우가 있지요.
아무리 맞는 말이라 해도 자기 의와 틀 속에 사랑이 없이 지적할 때는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지적을 받고 상대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낙심하여 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결코 찌르거나 허물을 들춰내어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그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으로 할 수 있어야 생명과 능력이 되어 변화될 수 있지요.
4) 모든 사람에게 관대합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며 자기 것을 내어줍니다. 자비의 마음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사랑합니다. 대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상대를 위해 나를 내어줄 때 자비의 열매가 맺히지요.
스데반 집사는 악한 자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미워하거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지 않았고 사랑의 기도를 올렸지요.
혹여 아직도 내 마음에 싫고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만큼 마음이 좁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성격과 의견이 맞지 않아도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며 이해하게 되지요. 만일 상대에 대한 좋지 않은 느낌이 있다면 좋은 느낌으로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5) 상대에게 공적을 돌립니다
자비의 열매를 맺으려면 잘한 일이 있을 때 상대의 공으로 돌리고 잘못된 일이 있을 때는 자신의 허물로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함께 일해서 열매를 냈는데 상대만 칭찬받는다 해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합니다. “사실은 내가 일을 더 많이 했는데 저 사람만 칭찬하시네?” 이런 생각으로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분이 칭찬을 받았으니 이제 자신감도 생기고 힘을 내서 더 잘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지요.
만일 어머니의 도움으로 자녀가 상을 받았다면 기뻐할 것입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자녀뿐 아니라 누구라도, 상대를 앞세울 수 있고 그에게 공적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공로를 인정받은 것처럼 그와 함께 기뻐할 수 있지요.
● 평가 및 적용하기
1. 자비의 영적인 의미는 단순히 상대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 )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는 마음이다.
또 사람으로서는 ( )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는 마음이다.
2. 자비의 마음을 이룬 사람의 특징을 말해 보세요.
① 편견이 없다.
② ( )
③ 상대를 함부로 지적하지 않는다.
④ ( )
⑤ 상대에게 공적을 돌린다.
● 알고 넘어갑시다!
‘스데반’ 집사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하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스데반을 모함하고 고소하였다. 이에 스데반 집사는 설교를 통해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죄를 지적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여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자 유대 지도자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 죽였다.
교육목표 :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들은 종종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고 해도 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거나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다.”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선으로 이해할 수 있고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지요. “누구는 이래서 좋고, 누구는 저래서 싫다.” 하지 않습니다. 싫은 사람도 없고 미운 사람도 없습니다. 걸리거나 불편한 사람도 없고 원수는 더더욱 없지요.
1. 자비의 열매란
사전에 자비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자비의 영적인 의미는 단순히 상대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또 사람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는 마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비의 마음으로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시편 130편 3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고 공의대로만 판결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하고 이해해 주셨습니다. 또한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까지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자비하길 원하십니다(눅 6:36). 자비의 마음은 사랑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영적인 사랑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자비는 용서와 포용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오해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감싸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상대를 미워하거나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위로가 되어 줍니다. 상대방을 감싸는 따뜻한 마음이 되면 티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포용하여 아름다운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을 통해 예수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 간음죄는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거나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십니다.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죄임에도 예수님은 용서함으로써 여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의 마음입니다.
2. 영적인 자비의 특성
1) 편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부유하고 명예 있는 사람을 대할 때와 가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대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거나 마음 자세가 달라지는 자체가 없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나 부족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주님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야고보서 2장 1~4절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말씀했습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상대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직 재판관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누구도 형제를 정죄할 권한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징계받는 이를 볼 때 긍휼히 여기며 ‘저가 힘을 내어 잘 통과하기를’ 바라고 기도해 주게 되지요.
2)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즐겨 구제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말로만 “힘내세요!” 하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실질적으로 힘이 되도록 돕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16절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말씀했습니다.
진실한 구제는 상대가 굶고 있는데 ‘나도 한 끼 먹을 양식뿐이니 어쩔 수 없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하지요. 더구나 주님을 믿지 않으므로 지옥에 갈 영혼들을 본다면 어찌하든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마음을 쓰는 것이 곧 자비의 마음입니다.
3) 상대를 함부로 지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한다면 때로는 지적이나 책망도 해야 합니다. 무조건 덮어 주고 용서한다면 상대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비의 마음이 있다면 징계나 책망, 지적도 쉽게 하지 못합니다. 한마디 지적을 한다 해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하지요.
잠언 12장 18절에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했습니다. 특히 성도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님에게는 이런 비진리의 마음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집사님은 이러한 결점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사랑받지 못합니다.” 이런 말을 쉽게 하는 경우가 있지요.
아무리 맞는 말이라 해도 자기 의와 틀 속에 사랑이 없이 지적할 때는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지적을 받고 상대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낙심하여 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결코 찌르거나 허물을 들춰내어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그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으로 할 수 있어야 생명과 능력이 되어 변화될 수 있지요.
4) 모든 사람에게 관대합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며 자기 것을 내어줍니다. 자비의 마음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사랑합니다. 대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상대를 위해 나를 내어줄 때 자비의 열매가 맺히지요.
스데반 집사는 악한 자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미워하거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지 않았고 사랑의 기도를 올렸지요.
혹여 아직도 내 마음에 싫고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만큼 마음이 좁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성격과 의견이 맞지 않아도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며 이해하게 되지요. 만일 상대에 대한 좋지 않은 느낌이 있다면 좋은 느낌으로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5) 상대에게 공적을 돌립니다
자비의 열매를 맺으려면 잘한 일이 있을 때 상대의 공으로 돌리고 잘못된 일이 있을 때는 자신의 허물로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함께 일해서 열매를 냈는데 상대만 칭찬받는다 해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합니다. “사실은 내가 일을 더 많이 했는데 저 사람만 칭찬하시네?” 이런 생각으로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분이 칭찬을 받았으니 이제 자신감도 생기고 힘을 내서 더 잘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지요.
만일 어머니의 도움으로 자녀가 상을 받았다면 기뻐할 것입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자녀뿐 아니라 누구라도, 상대를 앞세울 수 있고 그에게 공적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공로를 인정받은 것처럼 그와 함께 기뻐할 수 있지요.
● 평가 및 적용하기
1. 자비의 영적인 의미는 단순히 상대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 )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는 마음이다.
또 사람으로서는 ( )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는 마음이다.
2. 자비의 마음을 이룬 사람의 특징을 말해 보세요.
① 편견이 없다.
② ( )
③ 상대를 함부로 지적하지 않는다.
④ ( )
⑤ 상대에게 공적을 돌린다.
● 알고 넘어갑시다!
‘스데반’ 집사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하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스데반을 모함하고 고소하였다. 이에 스데반 집사는 설교를 통해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죄를 지적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여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자 유대 지도자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 죽였다.
2026-02-17
제0과설 명절 감사 예배 순서와 예문
고린도후서 5:18~19
읽을말씀 : 고린도후서 5:18~19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설날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음력을 사용하는 아시아권 나라들에서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음력으로 1월 1일인 설날은 ‘묵은해를 떨쳐 버리고 새로 맞이하는 한해의 첫머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2026년, 새해에도 늘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실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1. 설 명절 감사 예배 순서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458장 ---------------------- 다 같이
1.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2. 날이 갈수록 주의 사랑이 두루 광명하게 비치고
천성 가는 길 편히 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3.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기뻐 찬미 소리 외치고
겁과 두려움 없어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 봉독 ---------------- 고린도후서 5:18~19 ---------------- 인도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설 교 ----------------------- 화 목 ----------------------- 설교자
2. 설교 예문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새색시가 부엌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신랑이 깜짝 놀라 “왜 우느냐?”고 물었지요. 이유인즉슨 밥을 태웠다는 것입니다. 신랑은 “내가 물을 조금밖에 길어오지 못해 밥이 탔다.”며 자기 잘못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 부엌을 지나가시던 시아버지가 이 광경을 보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시아버지는 “내가 장작을 굵게 패지 못하고, 잘게 패서 화력이 너무 세서 밥이 탔다.”며 자기 탓이라고 하였지요. 또 시어머니는 “내가 늙어 밥 냄새를 못 맡아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며느리를 감싸 주었습니다.
가족 중에 누구 하나 상대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거나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자기를 돌아보며 ‘내가 좀 더 잘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며 상대방을 격려하고 위로해 주었지요.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서로 섬기고 사랑할 때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집은 가훈으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써 놓은 것도 봅니다.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것입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육선, 곧 고기로 만든 음식이 가득한 부유한 집에서 살며 다투는 것보다 떡 한 조각밖에 없는 가난한 집에서 살더라도 화목한 것이 낫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 늘 화목을 이룰 수 있을까요?
먼저, 입의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작은 불씨가 화근이 되어 큰불로 번지면 많은 재산을 잃고 사람이 다치고 죽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말이 화근(禍根)이 되어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큰 손해를 입히지요.
야고보서 3장 5~6절에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고 싸움으로 번지게 만듭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툭툭 내뱉는 말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요. 그러니 그 사람이 가는 곳은 늘 분쟁이 일어나고 화평이 깨지기 마련입니다.
누구든지 말할 자유는 있지만 그 말이 선하냐 악하냐에 따라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은 너무나 다르게 다가옵니다. 어떤 사람은 말 한마디 잘못해서 인생의 큰 해를 입기도 하고, 상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반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지요. 쏟아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듯이, 우리가 한 번 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새해에는 말 한마디도 심사숙고하여 신중하게 하고 쓸데없는 농담이나 험담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격려하는 말, 자존감을 높여 주는 힘이 되는 말을 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했습니다. 이처럼 삶 속에서 늘 상대에게 힘과 용기를 실어 주는 선한 말만 하여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섬겨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면 다툼이 그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무조건 남편이 자기에게 맞춰 주길 바라고 자신이 남편에게 한 만큼 받지 못한다면 서운해하고 삐치는 아내가 있다고 합시다. 더구나 남편은 자존심이 강하여 아내에게 져주기보다는 자기 의견을 강하게 내세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섬김’이란 겸손하게 자신을 희생하여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그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자녀를 사랑하고, 소금이 맛을 내기 위해 자신은 온전히 녹는 것과 같습니다.
섬기는 사람은 항상 자신보다 상대의 입장을 먼저 고려합니다. 또한 상대의 유익을 구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저 사람에게 힘이 될까?’를 생각합니다. 이렇게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사람의 공통점은 근본적으로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나, 내 것, 자존심, 내 고집, 나 보기에 의로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주장하지 않고 삼가 입술의 말을 주의하여 오직 덕을 세우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섬긴다면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룰 뿐 아니라 사랑으로 더욱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고 화평하면 하나님께서는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주시고 형통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출 20:6). 만일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비진리, 악들을 행한다면 형통하지 않은 것을 봅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설날이 되면 새해의 풍요로운 수확과 가족의 건강과 마음의 소원을 막연히 신에게 빌었습니다. 또 음식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절하며 제사를 지냈지요. 마치 돌아가신 조상이 와서 그 음식을 흠향하는 것처럼 정성 다해 차례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 다하여 영혼이 떠나면 다시 이 세상으로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출 20:4~5).
사람이 죽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믿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 세계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을 찾고 기도하였지요.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신 참 신으로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찾을 때 만나 주시고, 어떤 사고나 재앙 가운데서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좋으신 하나님을 새해에는 마음 중심에서 믿고 의지하심으로 항상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설날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음력을 사용하는 아시아권 나라들에서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음력으로 1월 1일인 설날은 ‘묵은해를 떨쳐 버리고 새로 맞이하는 한해의 첫머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2026년, 새해에도 늘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실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1. 설 명절 감사 예배 순서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458장 ---------------------- 다 같이
1.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2. 날이 갈수록 주의 사랑이 두루 광명하게 비치고
천성 가는 길 편히 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3.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기뻐 찬미 소리 외치고
겁과 두려움 없어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 봉독 ---------------- 고린도후서 5:18~19 ---------------- 인도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설 교 ----------------------- 화 목 ----------------------- 설교자
2. 설교 예문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새색시가 부엌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신랑이 깜짝 놀라 “왜 우느냐?”고 물었지요. 이유인즉슨 밥을 태웠다는 것입니다. 신랑은 “내가 물을 조금밖에 길어오지 못해 밥이 탔다.”며 자기 잘못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 부엌을 지나가시던 시아버지가 이 광경을 보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시아버지는 “내가 장작을 굵게 패지 못하고, 잘게 패서 화력이 너무 세서 밥이 탔다.”며 자기 탓이라고 하였지요. 또 시어머니는 “내가 늙어 밥 냄새를 못 맡아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며느리를 감싸 주었습니다.
가족 중에 누구 하나 상대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거나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자기를 돌아보며 ‘내가 좀 더 잘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며 상대방을 격려하고 위로해 주었지요.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서로 섬기고 사랑할 때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집은 가훈으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써 놓은 것도 봅니다.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것입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육선, 곧 고기로 만든 음식이 가득한 부유한 집에서 살며 다투는 것보다 떡 한 조각밖에 없는 가난한 집에서 살더라도 화목한 것이 낫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 늘 화목을 이룰 수 있을까요?
먼저, 입의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작은 불씨가 화근이 되어 큰불로 번지면 많은 재산을 잃고 사람이 다치고 죽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말이 화근(禍根)이 되어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큰 손해를 입히지요.
야고보서 3장 5~6절에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고 싸움으로 번지게 만듭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툭툭 내뱉는 말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요. 그러니 그 사람이 가는 곳은 늘 분쟁이 일어나고 화평이 깨지기 마련입니다.
누구든지 말할 자유는 있지만 그 말이 선하냐 악하냐에 따라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은 너무나 다르게 다가옵니다. 어떤 사람은 말 한마디 잘못해서 인생의 큰 해를 입기도 하고, 상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반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지요. 쏟아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듯이, 우리가 한 번 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새해에는 말 한마디도 심사숙고하여 신중하게 하고 쓸데없는 농담이나 험담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격려하는 말, 자존감을 높여 주는 힘이 되는 말을 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했습니다. 이처럼 삶 속에서 늘 상대에게 힘과 용기를 실어 주는 선한 말만 하여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섬겨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면 다툼이 그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무조건 남편이 자기에게 맞춰 주길 바라고 자신이 남편에게 한 만큼 받지 못한다면 서운해하고 삐치는 아내가 있다고 합시다. 더구나 남편은 자존심이 강하여 아내에게 져주기보다는 자기 의견을 강하게 내세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섬김’이란 겸손하게 자신을 희생하여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그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자녀를 사랑하고, 소금이 맛을 내기 위해 자신은 온전히 녹는 것과 같습니다.
섬기는 사람은 항상 자신보다 상대의 입장을 먼저 고려합니다. 또한 상대의 유익을 구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저 사람에게 힘이 될까?’를 생각합니다. 이렇게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사람의 공통점은 근본적으로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나, 내 것, 자존심, 내 고집, 나 보기에 의로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주장하지 않고 삼가 입술의 말을 주의하여 오직 덕을 세우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섬긴다면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룰 뿐 아니라 사랑으로 더욱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고 화평하면 하나님께서는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주시고 형통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출 20:6). 만일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비진리, 악들을 행한다면 형통하지 않은 것을 봅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설날이 되면 새해의 풍요로운 수확과 가족의 건강과 마음의 소원을 막연히 신에게 빌었습니다. 또 음식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절하며 제사를 지냈지요. 마치 돌아가신 조상이 와서 그 음식을 흠향하는 것처럼 정성 다해 차례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 다하여 영혼이 떠나면 다시 이 세상으로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출 20:4~5).
사람이 죽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믿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 세계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을 찾고 기도하였지요.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신 참 신으로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찾을 때 만나 주시고, 어떤 사고나 재앙 가운데서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좋으신 하나님을 새해에는 마음 중심에서 믿고 의지하심으로 항상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26-02-13
제7과성령의 열매(4)
갈 5:22~23
읽을말씀 : 갈 5:22~23 | 외울말씀 : 시 126:5 | 참고 말씀: 막 11:24 ; 고전 13:4~7
교육목표 :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음으로 모든 삶 속에서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삶 속에서 ‘참느냐, 참지 못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 자녀 간에, 부부나 형제, 친구 사이에 서로 참지 못하여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낳기도 합니다. 또 이에 따라 학업이나 직장생활, 사업 등의 성패가 좌우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오래 참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1.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 없는 오래 참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오래 참음과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도 참기는 하지만 대부분 육적인 인내를 합니다. 감정 상할 일이 생기면 참느라고 얼마나 고통받습니까?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끙끙 앓다가 노이로제나 우울증 같은 병을 얻기도 하지요. 이렇게 억지로라도 참는 사람을 인내심이 강하다고 합니다.
영적인 오래 참음은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는 것입니다. 선으로 참을 때는 힘든 일도 소망 중에 감사함으로 이겨 내며 결과적으로 더 큰 마음이 됩니다. 하지만 악으로 참으면 감정이 쌓여 병이 되거나 점점 심성이 거칠어지지요. 가령, 누가 애매하게 욕하며 고통을 주었을 때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참아야지.” 하면서 억지로 참습니다. 점점 얼굴이 상기되고 숨이 거칠어지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일로 한계에 부딪혔을 때 터지고 말지요. 이는 육적인 참음입니다.
주 안에서 영적인 오래 참음의 열매가 맺히면 어떤 일을 당해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애매히 비난을 받아도 “오해가 있나 보다.” 하며 어찌하든 상대의 마음을 풀어 주고자 하지요. 그러니 ‘참는다’거나 ‘용서한다’는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2. 오래 참음의 열매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은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어,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다’ 했는데, 이 말씀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려면 참아야 하는 상황들을 만납니다. 이렇게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이 사랑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입니다.
반면 성령의 열매 중에 ‘오래 참음’은 모든 것에 대한 오래 참음으로 사랑장의 오래 참음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든, 자신의 성결이나 소원을 위해서든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고난이 있습니다. 애통도 있고 진액을 다하는 수고도 따르지요. 그러나 그 열매를 바라보는 소망이 있기에 믿음과 사랑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 중의 오래 참음을 크게 세 가지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많을수록 오래 참기가 어렵습니다. 혈기, 교만, 욕심, 자기 의와 틀이 강하면 작은 일에도 분을 내고 감정과 서운함이 생깁니다. 우리가 성결된 만큼 오래 참는 것도 더 쉽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지요.
누가복음 8장 15절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곧 옥토와 같은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기까지 인내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자기 마음 밭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결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해 불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철야하는 등 부단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나가야 하지요.
예전에 좋아하던 것도 영적으로 유익이 되지 않으면 끊어 버려야 합니다. 성결의 열매를 온전히 거둘 때까지 부단히 수고하고 절제하며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죄성의 근본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참지 못할 상황이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예전의 모습이 다시 나옵니다. 이때 열심히 기도하여 버린 줄 알았는데 동일한 비진리가 다시 발견되면 실망이 되고 지치기도 하지요. 그럴지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죄성의 근본 뿌리를 뽑기 전까지는 전과 같은 비진리의 모습이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적 발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양파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또 나오지만 계속 벗기다 보면 완전히 벗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죄성이 아직 다 버려지지 않았다 해도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고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사람들은 자라 온 환경, 배움, 성격, 교양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니 똑같은 것을 보아도 서로 생각과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특히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상대와 의견이 안 맞으면 사사건건 걸리고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상대 탓하며 “저 사람은 사고방식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성격이 안 맞아서 도저히 같이 일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성격, 생활 습관, 취향이 맞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서로 양보하고 오래 참으며 맞춰 가는 것이지요. 성결을 사모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 해도 참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설령 그가 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해 줄 수 있어야 하지요.
특히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영혼들을 전도하고 심방할 때도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랜 세월 진리로 가르쳐도 변화가 더딘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혹여 세상과 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변화되리라는 소망으로 참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일꾼을 키울 때도 많은 세월을 참고 인내해야 하지요. 당장 일이 더딘 것 같고 열매가 부족하다 해도 “당신은 안 되겠으니까 그만두세요.”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능력 있는 사람이 혼자 감당하면 훨씬 신속하게 진행될 일도 그렇게 하지 않고 기다려 주지요. 한 영혼이라도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더 온전히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오래 참음의 씨를 심어 나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열매를 맺습니다. 영혼들이 변화되기까지 눈물로 기도하면서 오래 참으면 결국 그들을 품을 수 있는 큰마음이 되고, 많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주어지지요. 인내의 씨로 심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의 열매로 거두게 하십니다.
3)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한 것을 응답받기까지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합니다. 참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은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응답받기 위해서는 기도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가령, 학생이 전교 1등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수업 시간에는 딴청을 부리면 결코 1등 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이루게 하시지요.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수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오래 참지 못하므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가장 합당할 때 응답을 주십니다. 만일 기도 제목이 크고 중요하다면 공의에 맞게 그만큼 기도의 양을 채워야 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매달리다가도 금방 응답이 없으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응답받았다고 믿고 기도했다면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응답받을 믿음이 있다면 열매를 얻기까지 변함없이 기도하며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했습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과정에는 수고와 눈물과 애통이 따르지만 그 끝에는 반드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수확의 기쁨이 있음을 믿고 기쁨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과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의 오래 참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2. 성령의 열매 중 오래 참음을 크게 세 분야로 나눠 보세요.
① ( )을 ( )하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② ( )에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③ ( )께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오래 참음을 의미하는 ‘녹옥’
하나님의 영광이 드리운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여덟 번째 기초석인 녹옥은 파란색 혹은 연한 청록색의 보석으로 바다의 물빛을 연상할 수 있다.
영적인 의미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핍박하고 저주하거나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맞대응하지 않고 미워하거나 욕하지 않으며 사랑으로 오래 참는 것을 뜻한다.
교육목표 :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음으로 모든 삶 속에서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삶 속에서 ‘참느냐, 참지 못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 자녀 간에, 부부나 형제, 친구 사이에 서로 참지 못하여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낳기도 합니다. 또 이에 따라 학업이나 직장생활, 사업 등의 성패가 좌우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오래 참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1.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 없는 오래 참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오래 참음과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도 참기는 하지만 대부분 육적인 인내를 합니다. 감정 상할 일이 생기면 참느라고 얼마나 고통받습니까?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끙끙 앓다가 노이로제나 우울증 같은 병을 얻기도 하지요. 이렇게 억지로라도 참는 사람을 인내심이 강하다고 합니다.
영적인 오래 참음은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는 것입니다. 선으로 참을 때는 힘든 일도 소망 중에 감사함으로 이겨 내며 결과적으로 더 큰 마음이 됩니다. 하지만 악으로 참으면 감정이 쌓여 병이 되거나 점점 심성이 거칠어지지요. 가령, 누가 애매하게 욕하며 고통을 주었을 때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참아야지.” 하면서 억지로 참습니다. 점점 얼굴이 상기되고 숨이 거칠어지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일로 한계에 부딪혔을 때 터지고 말지요. 이는 육적인 참음입니다.
주 안에서 영적인 오래 참음의 열매가 맺히면 어떤 일을 당해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애매히 비난을 받아도 “오해가 있나 보다.” 하며 어찌하든 상대의 마음을 풀어 주고자 하지요. 그러니 ‘참는다’거나 ‘용서한다’는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2. 오래 참음의 열매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은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어,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다’ 했는데, 이 말씀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려면 참아야 하는 상황들을 만납니다. 이렇게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이 사랑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입니다.
반면 성령의 열매 중에 ‘오래 참음’은 모든 것에 대한 오래 참음으로 사랑장의 오래 참음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든, 자신의 성결이나 소원을 위해서든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고난이 있습니다. 애통도 있고 진액을 다하는 수고도 따르지요. 그러나 그 열매를 바라보는 소망이 있기에 믿음과 사랑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 중의 오래 참음을 크게 세 가지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많을수록 오래 참기가 어렵습니다. 혈기, 교만, 욕심, 자기 의와 틀이 강하면 작은 일에도 분을 내고 감정과 서운함이 생깁니다. 우리가 성결된 만큼 오래 참는 것도 더 쉽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지요.
누가복음 8장 15절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곧 옥토와 같은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기까지 인내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자기 마음 밭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결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해 불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철야하는 등 부단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나가야 하지요.
예전에 좋아하던 것도 영적으로 유익이 되지 않으면 끊어 버려야 합니다. 성결의 열매를 온전히 거둘 때까지 부단히 수고하고 절제하며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죄성의 근본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참지 못할 상황이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예전의 모습이 다시 나옵니다. 이때 열심히 기도하여 버린 줄 알았는데 동일한 비진리가 다시 발견되면 실망이 되고 지치기도 하지요. 그럴지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죄성의 근본 뿌리를 뽑기 전까지는 전과 같은 비진리의 모습이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적 발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양파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또 나오지만 계속 벗기다 보면 완전히 벗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죄성이 아직 다 버려지지 않았다 해도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고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사람들은 자라 온 환경, 배움, 성격, 교양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니 똑같은 것을 보아도 서로 생각과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특히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상대와 의견이 안 맞으면 사사건건 걸리고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상대 탓하며 “저 사람은 사고방식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성격이 안 맞아서 도저히 같이 일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성격, 생활 습관, 취향이 맞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서로 양보하고 오래 참으며 맞춰 가는 것이지요. 성결을 사모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 해도 참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설령 그가 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해 줄 수 있어야 하지요.
특히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영혼들을 전도하고 심방할 때도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랜 세월 진리로 가르쳐도 변화가 더딘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혹여 세상과 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변화되리라는 소망으로 참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일꾼을 키울 때도 많은 세월을 참고 인내해야 하지요. 당장 일이 더딘 것 같고 열매가 부족하다 해도 “당신은 안 되겠으니까 그만두세요.”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능력 있는 사람이 혼자 감당하면 훨씬 신속하게 진행될 일도 그렇게 하지 않고 기다려 주지요. 한 영혼이라도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더 온전히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오래 참음의 씨를 심어 나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열매를 맺습니다. 영혼들이 변화되기까지 눈물로 기도하면서 오래 참으면 결국 그들을 품을 수 있는 큰마음이 되고, 많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주어지지요. 인내의 씨로 심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의 열매로 거두게 하십니다.
3)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한 것을 응답받기까지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합니다. 참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은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응답받기 위해서는 기도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가령, 학생이 전교 1등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수업 시간에는 딴청을 부리면 결코 1등 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이루게 하시지요.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수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오래 참지 못하므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가장 합당할 때 응답을 주십니다. 만일 기도 제목이 크고 중요하다면 공의에 맞게 그만큼 기도의 양을 채워야 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매달리다가도 금방 응답이 없으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응답받았다고 믿고 기도했다면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응답받을 믿음이 있다면 열매를 얻기까지 변함없이 기도하며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했습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과정에는 수고와 눈물과 애통이 따르지만 그 끝에는 반드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수확의 기쁨이 있음을 믿고 기쁨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과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의 오래 참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2. 성령의 열매 중 오래 참음을 크게 세 분야로 나눠 보세요.
① ( )을 ( )하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② ( )에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③ ( )께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오래 참음을 의미하는 ‘녹옥’
하나님의 영광이 드리운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여덟 번째 기초석인 녹옥은 파란색 혹은 연한 청록색의 보석으로 바다의 물빛을 연상할 수 있다.
영적인 의미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핍박하고 저주하거나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맞대응하지 않고 미워하거나 욕하지 않으며 사랑으로 오래 참는 것을 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