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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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9
제25과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빌립보서 2:11
읽을말씀 : 빌립보서 2:11 | 외울말씀 : 요한복음 14:6 | 참고 말씀: 사도행전 3:6, 16:18 ; 에베소서 5:20
교육목표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영적 권세를 알아 구원은 물론, 응답과 축복을 받아 성도들이 능력 있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 응답과 축복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할 때 어떤 이들은 습관을 좇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하기도 합니다. 과연 기도는 어떻게 마무리하는 것이 옳을까요? 혹여 “뭐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고, 그 권세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1.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성경은 예수님이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알려 줍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했고, 사도행전 4장 12절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말씀대로 영원히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는데, 이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구세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신 것은 언제일까요?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을 때 비로소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구세주의 의미가 담긴 그리스도를 덧붙여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야 합니다(빌 2:6~11).
성경을 보면 이러한 영적 의미를 알았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은 기도하거나 말씀을 전할 때 예수님이라 하지 않고 ‘주’나 ‘그리스도’를 덧붙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에 그치지 않고 더욱 강조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즐겨 썼습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에 보면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했고, 로마서 7장 2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외에도 성경 곳곳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이 많습니다.
2.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의미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과 원수 마귀 사단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어찌하든지 믿음의 사람들이 범죄하도록 미혹하며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말씀했습니다.
이러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 권세와 능력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기 전의 호칭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에는 우리를 구속하신 피의 의미와 함께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구세주로서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원수 마귀 사단은 두려워 떨 수밖에 없고,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의미를 깨우치지 못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점과 구원의 섭리를 정확하게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뿐 아니라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를 바로 알아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따르는 권세
사도행전 3장 6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쳐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 뛰고 걸으며 하나님을 찬미했지요.
또 사도행전 16장 1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귀신 들린 사람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할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야만 하는지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만일 도둑이 옆에 있는데도 경찰이 그를 몰라본다면 도둑은 두려워하지 않고 도망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도둑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잡힐 것이 분명하니 도둑은 경찰을 무서워하며 재빨리 도망치거나 숨어 버릴 것입니다.
원수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정확히 구원의 섭리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막연히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하는 것은 그 권세가 전혀 달라집니다. 자신의 의로는 불가능한 일도 구세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능함을 믿고 믿음으로 기도하기에 담대하고 능력 있는 기도가 되지요.
여러분이 기도로 악한 영을 물리칠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원수 마귀 사단의 사망 권세를 깨뜨리셨음을 알고, 승리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명하면 원수 마귀 사단이 두려워 떨며 물러갑니다. 이런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심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종종 어떤 분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나사렛’을 넣은 이유는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자랐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나사렛이란 이름을 넣을 필요가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도 역사되지 않는 경우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오래하며 여러 직분이 있다 해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간다면 영적인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치는 기도를 해도 시험 환난이 떠나지 않지요. 마치 더러운 것에 벌레가 모여드는 것과 같이 원수 마귀 사단이 계속적으로 역사하며 괴롭히는 것입니다.
반면 비록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면 그 아이에게는 영적인 힘이 따르게 됩니다. 그 아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치면 원수 마귀가 순종하여 떠나지요. 누구든지 정녕 진리 안에 살면서 거룩한 마음과 행실을 이룰 때는 자신의 삶에서 어둠이 물러갈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때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아무리 인정받는 사람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악을 버리지 않으면 영적인 권세가 따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악이 없는 성결한 사람만이 영적인 권세가 따르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결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마다 놀라운 응답과 축복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비로소 구세주가 되셨다.
②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예수’가 아니라‘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③‘예수’의 이름은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 자라는 뜻이다.
④ 죄 가운데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면 하나님의 역사가 따르지 않는다.
2. 왜“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가 아니라“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라고 해야 할까요?
( )
● 알고 넘어갑시다!
‘나사렛’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사셨던 남부 갈릴리에 있는 마을이다. 동정녀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수태 고지를 받았고(눅 1:26~33),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은 요셉의 본적지인 베들레헴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과 함께 헤롯 왕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왔다. 이후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자라셨고(눅 2:39~51), 30세 즈음 나사렛을 떠나셨다.
교육목표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영적 권세를 알아 구원은 물론, 응답과 축복을 받아 성도들이 능력 있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 응답과 축복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할 때 어떤 이들은 습관을 좇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하기도 합니다. 과연 기도는 어떻게 마무리하는 것이 옳을까요? 혹여 “뭐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고, 그 권세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1.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성경은 예수님이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알려 줍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했고, 사도행전 4장 12절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말씀대로 영원히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는데, 이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구세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신 것은 언제일까요?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을 때 비로소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구세주의 의미가 담긴 그리스도를 덧붙여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야 합니다(빌 2:6~11).
성경을 보면 이러한 영적 의미를 알았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은 기도하거나 말씀을 전할 때 예수님이라 하지 않고 ‘주’나 ‘그리스도’를 덧붙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에 그치지 않고 더욱 강조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즐겨 썼습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에 보면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했고, 로마서 7장 2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외에도 성경 곳곳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이 많습니다.
2.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의미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과 원수 마귀 사단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어찌하든지 믿음의 사람들이 범죄하도록 미혹하며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말씀했습니다.
이러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 권세와 능력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기 전의 호칭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에는 우리를 구속하신 피의 의미와 함께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구세주로서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원수 마귀 사단은 두려워 떨 수밖에 없고,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의미를 깨우치지 못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점과 구원의 섭리를 정확하게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뿐 아니라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를 바로 알아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따르는 권세
사도행전 3장 6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쳐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 뛰고 걸으며 하나님을 찬미했지요.
또 사도행전 16장 1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귀신 들린 사람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할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야만 하는지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만일 도둑이 옆에 있는데도 경찰이 그를 몰라본다면 도둑은 두려워하지 않고 도망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도둑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잡힐 것이 분명하니 도둑은 경찰을 무서워하며 재빨리 도망치거나 숨어 버릴 것입니다.
원수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정확히 구원의 섭리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막연히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하는 것은 그 권세가 전혀 달라집니다. 자신의 의로는 불가능한 일도 구세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능함을 믿고 믿음으로 기도하기에 담대하고 능력 있는 기도가 되지요.
여러분이 기도로 악한 영을 물리칠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원수 마귀 사단의 사망 권세를 깨뜨리셨음을 알고, 승리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명하면 원수 마귀 사단이 두려워 떨며 물러갑니다. 이런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심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종종 어떤 분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나사렛’을 넣은 이유는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자랐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나사렛이란 이름을 넣을 필요가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도 역사되지 않는 경우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오래하며 여러 직분이 있다 해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간다면 영적인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치는 기도를 해도 시험 환난이 떠나지 않지요. 마치 더러운 것에 벌레가 모여드는 것과 같이 원수 마귀 사단이 계속적으로 역사하며 괴롭히는 것입니다.
반면 비록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면 그 아이에게는 영적인 힘이 따르게 됩니다. 그 아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치면 원수 마귀가 순종하여 떠나지요. 누구든지 정녕 진리 안에 살면서 거룩한 마음과 행실을 이룰 때는 자신의 삶에서 어둠이 물러갈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때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아무리 인정받는 사람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악을 버리지 않으면 영적인 권세가 따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악이 없는 성결한 사람만이 영적인 권세가 따르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결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마다 놀라운 응답과 축복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비로소 구세주가 되셨다.
②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예수’가 아니라‘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③‘예수’의 이름은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 자라는 뜻이다.
④ 죄 가운데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면 하나님의 역사가 따르지 않는다.
2. 왜“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가 아니라“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라고 해야 할까요?
( )
● 알고 넘어갑시다!
‘나사렛’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사셨던 남부 갈릴리에 있는 마을이다. 동정녀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수태 고지를 받았고(눅 1:26~33),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은 요셉의 본적지인 베들레헴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과 함께 헤롯 왕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왔다. 이후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자라셨고(눅 2:39~51), 30세 즈음 나사렛을 떠나셨다.
2026-06-12
제24과예수님만이 구세주가 되신 이유
레위기 25:23~25
읽을말씀 : 레위기 25:23~25 | 외울말씀 : 사도행전 4:12 | 참고 말씀: 고린도전서 15:21
교육목표 : 오직 예수님만이 구세주의 자격 조건을 갖추신 분임을 알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참된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한다.
오늘날은 종교 다원주의 영향으로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에 오르는 길은 달라도 정상은 같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말씀한 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세주의 자격을 갖춘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일까요?
1.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
세상에도 법이 있듯이 영의 세계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망으로 가는 것도,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것도 영계의 법칙에 의한 것이지요.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한 후 인류가 사망으로 가게 된 것도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영계의 법칙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망이라는 형벌에서 놓여 구원받을 수 있는 것도 영계의 법칙에 따라야 합니다.
영계의 법칙에는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죄를 속량할 수 있는 법도 있습니다.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죄를 지은 사람 대신 그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죄의 대가는 아무나 치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영계의 법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토지 무르기 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토지 무르기 법이란 이스라엘의 토지 거래에 관한 법입니다. 레위기 25장 23~25절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말씀합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대로 팔 수 없었습니다. 만약 가난하여 토지를 팔게 될 경우, 언제든지 근족이 대신 토지의 값을 지불하면 반드시 그 땅을 돌려주도록 하셨지요. 이러한 토지를 무르는 법칙 안에 인류가 구원받을 길이 제시되어 있는데 과연 무엇일까요?
2. 죄를 대속할 수 있는 구세주의 자격 조건
하나님의 소유인 토지를 팔고 사는 법은 근본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과 직접 관계되는 영계의 법칙입니다(창 3:19, 3:23). 이스라엘의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소유인 것처럼 아담과 그의 권세 또한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영영히 팔 수 없지요. 비록 아담이 범죄하여 원수 마귀의 종이 되어 모든 권세를 넘겨주었다 해도 장차 토지 무르기의 법칙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면 다시 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토지 무르기 법칙에 근거하여 예수님만이 구세주가 되시는 네 가지 조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람이어야 합니다
토지를 팔았을 때 근족이 되찾아 올 수 있듯이(레 25:25), 죗값으로 원수 마귀 사단에게 팔린 사람을 대속할 이도 반드시 아담의 근족이어야 합니다. 아담의 근족이라는 것은 아담과 같이 영과 혼과 육을 가진 존재 곧 사람을 말하지요. 천사나 짐승은 우리 사람의 죗값을 대속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1절에도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말씀하신 대로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해 죄가 들어왔으니 죄를 대신 져 줄 수 있는 존재도 반드시 아담과 같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했고,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살과 뼈를 가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 성장 과정을 거치셨고, 배고픔과 목마름, 기쁨과 슬픔을 느끼셨지요. 또한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피를 흘리고 고통도 느끼셨습니다. 바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증거이지요.
2)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사람은 이미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외모와 성격뿐 아니라 죄성까지 물려받습니다. 젖먹이 아이에게서도 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엄마가 다른 아이에게 젖을 물리기라도 하면 이내 그 아이를 엄마 품에서 밀쳐내려 합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앙~!’ 하고 울음을 터트립니다. 아무도 아이에게 미움이나 시기, 질투를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타고난 죄성을 ‘원죄’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아담의 후손으로 오신다면 필연적으로 부모로부터 죄성을 타고날 수밖에 없습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남녀의 결합으로 잉태된 사람은 모두 조상으로부터 원죄를 물려받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입니다.
3) 영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혀간 동료를 구해내려면 힘이 있어야 하듯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도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기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자, 능력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기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원죄뿐 아니라 자범죄도 없어야 합니다. 원죄는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죄성을 말하고, 자범죄란 사람이 태어난 후 성장하면서 스스로 짓는 죄를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원죄와 자범죄가 있기 때문에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은 원죄가 없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사셨기에 자범죄도 없습니다. 이로써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조건에 모두 부합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살면서 크고 작은 죄를 짓습니다. 설령 행함으로는 죄를 짓지 않는다 해도 마음으로 미워하거나 시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죄라 여기십니다(마 5:28 ; 요일 3:15). 그러니 죄 없다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4)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가령 동생이 빚으로 고통받으며 산다고 합시다. 그의 형은 동생의 빚을 갚아 줄 능력이 있는 재벌입니다. 하지만 형에게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도와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만일 사랑이 없으셨다면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흉악한 죄인처럼 정죄받고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하는 엄청난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죄인 된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니 참으로 큰 사랑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하신 대로이지요. 보통 사람이라면 “왜 아무 죄가 없는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합니까?”라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처형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죄를 대속하려면 네 가지 조건을 다 갖추어야 하는데 예수님 외에 다른 분이 있을까요? 인류 역사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구세주 되심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죄인 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은 무엇일까요?
( )
2. 사도행전 4장 12절을 암송하여 써 보세요.
3. 예수님만이 구세주가 되시는 자격 조건 네 가지를 써 보세요.
첫째, ( )
둘째, ( )
셋째, ( )
넷째, ( )
● 알고 넘어갑시다!
흙으로 창조된 사람
창세기 3장 19절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말씀했고, 23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말씀했다. 이처럼 흙은 영적으로 사람을 의미하므로 토지 무르기 법칙 안에는 인간 구원의 길이 담겨 있다.
교육목표 : 오직 예수님만이 구세주의 자격 조건을 갖추신 분임을 알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참된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한다.
오늘날은 종교 다원주의 영향으로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에 오르는 길은 달라도 정상은 같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말씀한 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세주의 자격을 갖춘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일까요?
1.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
세상에도 법이 있듯이 영의 세계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망으로 가는 것도,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것도 영계의 법칙에 의한 것이지요.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한 후 인류가 사망으로 가게 된 것도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영계의 법칙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망이라는 형벌에서 놓여 구원받을 수 있는 것도 영계의 법칙에 따라야 합니다.
영계의 법칙에는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죄를 속량할 수 있는 법도 있습니다.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죄를 지은 사람 대신 그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죄의 대가는 아무나 치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영계의 법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토지 무르기 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토지 무르기 법이란 이스라엘의 토지 거래에 관한 법입니다. 레위기 25장 23~25절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말씀합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대로 팔 수 없었습니다. 만약 가난하여 토지를 팔게 될 경우, 언제든지 근족이 대신 토지의 값을 지불하면 반드시 그 땅을 돌려주도록 하셨지요. 이러한 토지를 무르는 법칙 안에 인류가 구원받을 길이 제시되어 있는데 과연 무엇일까요?
2. 죄를 대속할 수 있는 구세주의 자격 조건
하나님의 소유인 토지를 팔고 사는 법은 근본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과 직접 관계되는 영계의 법칙입니다(창 3:19, 3:23). 이스라엘의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소유인 것처럼 아담과 그의 권세 또한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영영히 팔 수 없지요. 비록 아담이 범죄하여 원수 마귀의 종이 되어 모든 권세를 넘겨주었다 해도 장차 토지 무르기의 법칙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면 다시 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토지 무르기 법칙에 근거하여 예수님만이 구세주가 되시는 네 가지 조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람이어야 합니다
토지를 팔았을 때 근족이 되찾아 올 수 있듯이(레 25:25), 죗값으로 원수 마귀 사단에게 팔린 사람을 대속할 이도 반드시 아담의 근족이어야 합니다. 아담의 근족이라는 것은 아담과 같이 영과 혼과 육을 가진 존재 곧 사람을 말하지요. 천사나 짐승은 우리 사람의 죗값을 대속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1절에도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말씀하신 대로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해 죄가 들어왔으니 죄를 대신 져 줄 수 있는 존재도 반드시 아담과 같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했고,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살과 뼈를 가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 성장 과정을 거치셨고, 배고픔과 목마름, 기쁨과 슬픔을 느끼셨지요. 또한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피를 흘리고 고통도 느끼셨습니다. 바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증거이지요.
2)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사람은 이미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외모와 성격뿐 아니라 죄성까지 물려받습니다. 젖먹이 아이에게서도 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엄마가 다른 아이에게 젖을 물리기라도 하면 이내 그 아이를 엄마 품에서 밀쳐내려 합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앙~!’ 하고 울음을 터트립니다. 아무도 아이에게 미움이나 시기, 질투를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타고난 죄성을 ‘원죄’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아담의 후손으로 오신다면 필연적으로 부모로부터 죄성을 타고날 수밖에 없습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남녀의 결합으로 잉태된 사람은 모두 조상으로부터 원죄를 물려받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입니다.
3) 영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혀간 동료를 구해내려면 힘이 있어야 하듯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도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기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자, 능력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기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원죄뿐 아니라 자범죄도 없어야 합니다. 원죄는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죄성을 말하고, 자범죄란 사람이 태어난 후 성장하면서 스스로 짓는 죄를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원죄와 자범죄가 있기 때문에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은 원죄가 없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사셨기에 자범죄도 없습니다. 이로써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조건에 모두 부합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살면서 크고 작은 죄를 짓습니다. 설령 행함으로는 죄를 짓지 않는다 해도 마음으로 미워하거나 시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죄라 여기십니다(마 5:28 ; 요일 3:15). 그러니 죄 없다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4)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가령 동생이 빚으로 고통받으며 산다고 합시다. 그의 형은 동생의 빚을 갚아 줄 능력이 있는 재벌입니다. 하지만 형에게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도와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만일 사랑이 없으셨다면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흉악한 죄인처럼 정죄받고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하는 엄청난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죄인 된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니 참으로 큰 사랑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하신 대로이지요. 보통 사람이라면 “왜 아무 죄가 없는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합니까?”라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처형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죄를 대속하려면 네 가지 조건을 다 갖추어야 하는데 예수님 외에 다른 분이 있을까요? 인류 역사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구세주 되심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죄인 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은 무엇일까요?
( )
2. 사도행전 4장 12절을 암송하여 써 보세요.
3. 예수님만이 구세주가 되시는 자격 조건 네 가지를 써 보세요.
첫째, ( )
둘째, ( )
셋째, ( )
넷째, ( )
● 알고 넘어갑시다!
흙으로 창조된 사람
창세기 3장 19절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말씀했고, 23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말씀했다. 이처럼 흙은 영적으로 사람을 의미하므로 토지 무르기 법칙 안에는 인간 구원의 길이 담겨 있다.
2026-06-05
제23과예수와 그리스도의 차이
요한복음 20:30~31
읽을말씀 : 요한복음 20:30~31 | 외울말씀 : 사도행전 2:36 | 참고 말씀: 마태복음 1:21
교육목표 :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예수와 그리스도의 차이를 깨닫게 한다.
인간 경작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이 외에도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는 등 인간 경작을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는 놀라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경작을 위한 섭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무엇일까요? 바로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인간 구원의 길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얻기까지 특별한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나라마다 법이 있듯이, 영의 세계에도 법이 있어 구세주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만 구원의 길을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와 그리스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1.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천국복음을 전하시며 놀라운 권능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는 아직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날이 갈수록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든 예수님의 허물을 찾아 책잡으려고 했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하나님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당시 유대 지역을 관할하던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끌려가 사형 언도를 받고 밤새 심문과 온갖 고초를 겪으신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랑하는 아들을 혹독한 십자가 처형에 내어주셨을까요? 이는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죄로 인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대신 죗값을 치러야 했지요. 성경을 보면 나무에 달린다는 것은 저주를 받았다는 증거이며, 반드시 생명과 일체인 피를 흘려야만 죄가 속해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갈 3:13 ; 히 9:22).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셔야 했고, 하나님께서도 이를 허락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기쁨과 감사함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심으로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2.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
영의 세계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이 있습니다(롬 6:23). 이 법에 따라 죄가 있는 사람은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하여 모든 사람이 사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놀라운 지혜 가운데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기까지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7~8절에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했고, 골로새서 1장 27절에는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은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드디어 공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으면 구원과 영생의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죄로 인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받아 아름다운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며 제자들에게 부활의 믿음과 천국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승천을 앞두고는 성령이 임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당부하셨지요(행 1:8). 이처럼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남기신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구세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지금도 성도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시며 천국집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이제 때가 되면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2천여 년 전에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오셨던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나팔 소리 속에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오십니다(살전 4:16). 신부단장에 힘쓴 성도들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에서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나 7년간 혼인 잔치를 치릅니다. 그 후 주님과 함께 지상에서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다가 백보좌 대심판을 거쳐 영원한 천국에서 세세토록 살아갑니다.
3. 예수와 그리스도의 차이
사람들은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수많은 표적과 기사를 보여 주셨습니다(요 20:30~31). 부활하신 후에도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오가며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의심 많은 도마는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수많은 표적과 기사를 보고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마음 중심에서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모든 의심을 버리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였지요. 결국 도마는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 힌두교의 나라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순교하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목도한 제자들은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지요.
여기서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은 ‘예수’와 ‘그리스도’의 차이입니다. 도마의 경우만 봐도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에는 참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로서 사역하실 때에는 단번에 영적인 고백을 하며 참 믿음과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와 ‘그리스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말씀합니다. 즉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미래형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란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구세주’라는 뜻이며 완료형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가 이름이라면 ‘그리스도’는 직함과 같아서 어떤 자격을 갖출 때 주어지는 공식적인 호칭입니다.
예를 들어, 한 학생이 훌륭한 의사를 꿈꾼다고 해서 의사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시험에 통과하고 정해진 코스를 밟은 후에야 의사라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얻기까지 특별한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탄생부터 30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3년의 공생애,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겪으신 후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리스도가 되셨지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그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얻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두 이름 사이에는 ‘구원할 자’와 ‘구원한 자’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부활 사건 전에는 ‘예수’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옳지만, 부활 사건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 혹은 ‘주 예수, 주님’이라는 호칭을 써야 합니다. 성경을 보아도 부활, 승천 사건 이후에는 ‘예수’라는 호칭에 ‘주’나 ‘그리스도’를 덧붙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왜 사랑하는 아들을 혹독한 십자가 처형에 내어주셨을까요?
2. 예수와 그리스도의 의미를 써 보세요.
① ‘예수’란?
② ‘그리스도’란?
● 알고 넘어갑시다!
‘십자가 처형법’
십자가 처형법은 너무 가혹하고 치욕적이어서 로마 사람들에게는 행하지 않았다. 유대인들도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여겼다(신 21:22~23).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아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과 수치를 당하셨다. 그래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속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다.
교육목표 :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예수와 그리스도의 차이를 깨닫게 한다.
인간 경작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이 외에도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는 등 인간 경작을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는 놀라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경작을 위한 섭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무엇일까요? 바로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인간 구원의 길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얻기까지 특별한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나라마다 법이 있듯이, 영의 세계에도 법이 있어 구세주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만 구원의 길을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와 그리스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1.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천국복음을 전하시며 놀라운 권능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는 아직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날이 갈수록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든 예수님의 허물을 찾아 책잡으려고 했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하나님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당시 유대 지역을 관할하던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끌려가 사형 언도를 받고 밤새 심문과 온갖 고초를 겪으신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랑하는 아들을 혹독한 십자가 처형에 내어주셨을까요? 이는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죄로 인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대신 죗값을 치러야 했지요. 성경을 보면 나무에 달린다는 것은 저주를 받았다는 증거이며, 반드시 생명과 일체인 피를 흘려야만 죄가 속해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갈 3:13 ; 히 9:22).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셔야 했고, 하나님께서도 이를 허락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기쁨과 감사함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심으로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2.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
영의 세계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이 있습니다(롬 6:23). 이 법에 따라 죄가 있는 사람은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하여 모든 사람이 사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놀라운 지혜 가운데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기까지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7~8절에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했고, 골로새서 1장 27절에는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은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드디어 공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으면 구원과 영생의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죄로 인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받아 아름다운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며 제자들에게 부활의 믿음과 천국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승천을 앞두고는 성령이 임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당부하셨지요(행 1:8). 이처럼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남기신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구세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지금도 성도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시며 천국집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이제 때가 되면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2천여 년 전에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오셨던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나팔 소리 속에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오십니다(살전 4:16). 신부단장에 힘쓴 성도들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에서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나 7년간 혼인 잔치를 치릅니다. 그 후 주님과 함께 지상에서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다가 백보좌 대심판을 거쳐 영원한 천국에서 세세토록 살아갑니다.
3. 예수와 그리스도의 차이
사람들은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수많은 표적과 기사를 보여 주셨습니다(요 20:30~31). 부활하신 후에도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오가며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의심 많은 도마는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수많은 표적과 기사를 보고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마음 중심에서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모든 의심을 버리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였지요. 결국 도마는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 힌두교의 나라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순교하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목도한 제자들은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지요.
여기서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은 ‘예수’와 ‘그리스도’의 차이입니다. 도마의 경우만 봐도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에는 참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로서 사역하실 때에는 단번에 영적인 고백을 하며 참 믿음과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와 ‘그리스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말씀합니다. 즉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미래형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란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구세주’라는 뜻이며 완료형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가 이름이라면 ‘그리스도’는 직함과 같아서 어떤 자격을 갖출 때 주어지는 공식적인 호칭입니다.
예를 들어, 한 학생이 훌륭한 의사를 꿈꾼다고 해서 의사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시험에 통과하고 정해진 코스를 밟은 후에야 의사라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얻기까지 특별한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탄생부터 30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3년의 공생애,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겪으신 후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리스도가 되셨지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그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얻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두 이름 사이에는 ‘구원할 자’와 ‘구원한 자’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부활 사건 전에는 ‘예수’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옳지만, 부활 사건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 혹은 ‘주 예수, 주님’이라는 호칭을 써야 합니다. 성경을 보아도 부활, 승천 사건 이후에는 ‘예수’라는 호칭에 ‘주’나 ‘그리스도’를 덧붙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왜 사랑하는 아들을 혹독한 십자가 처형에 내어주셨을까요?
2. 예수와 그리스도의 의미를 써 보세요.
① ‘예수’란?
② ‘그리스도’란?
● 알고 넘어갑시다!
‘십자가 처형법’
십자가 처형법은 너무 가혹하고 치욕적이어서 로마 사람들에게는 행하지 않았다. 유대인들도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여겼다(신 21:22~23).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아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과 수치를 당하셨다. 그래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속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다.
2026-05-29
제22과구세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요한복음 1:1~4
읽을말씀 : 요한복음 1:1~4 | 외울말씀 : 요한복음 3:16 | 참고 말씀: 빌립보서 2:6~8
교육목표 :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한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 성경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앞서 전하였고, 신약 성경은 이 땅에 오셔서 구약의 예언과 구속 사업을 성취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근본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지요(요 1:2~3). 만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는다면 어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혹여라도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이나 위대한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인이 되려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왜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신지 정확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이를 알기 위해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의 근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랑으로 시작된 태초의 비밀
요한복음 1장 1~3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태초는 사람의 시간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는 아득히 오래전 일입니다. 천지 만물이 창조되기 전, 그때에는 우주가 하나였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지구도, 푸른 하늘도, 별들도, 사람도, 동물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광활한 우주의 주인으로 계셨지요.
이처럼 태초에 하나님은 어떤 형체가 없이 영롱한 빛으로 온 우주를 감싸고 그 안에 소리를 머금고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홀로 우주 공간을 다스리시던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엔가 이러한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이 넓고도 오묘한 공간에서 서로의 마음을 알아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감동이 될까….’ 하시며 한 가지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으려는 계획입니다. 마치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고 열심히 가꿔 열매를 거두기 위해 농사를 짓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형상을 닮은 참 자녀를 얻기 위해서 ‘인간 경작’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영롱한 빛과 웅장한 소리로 계시던 태초의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이라는 거대한 계획의 총감독으로서, 성자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구세주로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보혜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때가 이르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 하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담긴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 마음을 닮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에덴동산을 창설하여 첫 사람 아담을 이끌어 들이시고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금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곧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지요. 창세기 2장 16~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죄로 사망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담에게 명하신 후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끝없이 넓은 에덴동산에 아담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여자를 창조하시고 돕는 배필로 주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아내 하와와 함께 에덴동산에서 많은 자녀를 낳으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교한 뱀의 유혹을 받은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줍니다. 아담은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한 채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받아서 먹었습니다(창 3:6). 이로써 그들은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 말씀대로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더는 에덴동산에서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권세와 축복을 잃고 에덴동산에서 이 땅으로 쫓겨나 험난한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도 죄성을 이어받아 영원한 사망인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태초의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계획하실 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면서 만세 전부터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성자 하나님께서는 사망의 길로 가는 인류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2천여 년 전, 예수님은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있는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이셨지요.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왜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셔야 했을까요?
첫 사람 아담은 영과 혼과 육으로 지음 받아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한 후에는 ‘정녕 죽으리라’ 한 대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습니다. 이후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 아래 아담의 후손들은 점점 정욕을 좇아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전 3:18). 이러한 인생들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지요.
요한복음 6장 51절에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양식 삼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양식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듯이 사람의 영도 영의 양식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이시며 말씀 자체이신(요 1:1, 14)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짐승과 같은 인류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게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가득했고, 수많은 천군 천사가 함께하며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했습니다. 그날 밤 들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은 천사에게서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전해 듣고 찾아와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렸습니다(눅 2:8~20).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셨지만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되어 잉태되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입니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 아니기에 원죄(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죄)가 없으며 성장하면서도 하나님 말씀대로만 사셨기 때문에 자범죄(스스로 짓는 죄)도 없으셨습니다. 어린 시절에도 틈만 나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준비하셨지요.
마침내 30세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는 한편,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치료하셨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온전케 하셨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셨습니다. 또 물 위를 걸으며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는 등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 말씀의 권세와 능력에 놀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음 주에 이어서 공부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 년)
2. 신앙인의 기본 책자 15페이지를 보고 다음 약자의 뜻을 써 보세요.
① A.D. (Anno Domini: )
② B.C. (Before Christ: )
3. 요한복음 3장 16절, 마태복음 16장 16절, 빌립보서 2장 6~8절을 찾아 함께 읽어보세요. 그리고 공통점은 무엇인지 찾아보세요.
( )
● 알고 넘어갑시다!
태초(창세기) VS 태초(요한복음)
창세기 1장 1절에서의 ‘태초’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시점을 가리킨다. 반면에 요한복음 1장 1절에서의 ‘태초’는 창조 이전, 사람의 한계로 이해할 수 없는 아득히 오래전을 말하므로 이 두 말씀에서 나타내는 ‘태초’는 전혀 시점이 다르다.
교육목표 :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한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 성경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앞서 전하였고, 신약 성경은 이 땅에 오셔서 구약의 예언과 구속 사업을 성취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근본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지요(요 1:2~3). 만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는다면 어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혹여라도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이나 위대한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인이 되려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왜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신지 정확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이를 알기 위해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의 근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랑으로 시작된 태초의 비밀
요한복음 1장 1~3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태초는 사람의 시간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는 아득히 오래전 일입니다. 천지 만물이 창조되기 전, 그때에는 우주가 하나였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지구도, 푸른 하늘도, 별들도, 사람도, 동물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광활한 우주의 주인으로 계셨지요.
이처럼 태초에 하나님은 어떤 형체가 없이 영롱한 빛으로 온 우주를 감싸고 그 안에 소리를 머금고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홀로 우주 공간을 다스리시던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엔가 이러한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이 넓고도 오묘한 공간에서 서로의 마음을 알아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감동이 될까….’ 하시며 한 가지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으려는 계획입니다. 마치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고 열심히 가꿔 열매를 거두기 위해 농사를 짓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형상을 닮은 참 자녀를 얻기 위해서 ‘인간 경작’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영롱한 빛과 웅장한 소리로 계시던 태초의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이라는 거대한 계획의 총감독으로서, 성자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구세주로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보혜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때가 이르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 하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담긴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 마음을 닮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에덴동산을 창설하여 첫 사람 아담을 이끌어 들이시고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금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곧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지요. 창세기 2장 16~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죄로 사망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담에게 명하신 후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끝없이 넓은 에덴동산에 아담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여자를 창조하시고 돕는 배필로 주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아내 하와와 함께 에덴동산에서 많은 자녀를 낳으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교한 뱀의 유혹을 받은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줍니다. 아담은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한 채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받아서 먹었습니다(창 3:6). 이로써 그들은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 말씀대로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더는 에덴동산에서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권세와 축복을 잃고 에덴동산에서 이 땅으로 쫓겨나 험난한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도 죄성을 이어받아 영원한 사망인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태초의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계획하실 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면서 만세 전부터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성자 하나님께서는 사망의 길로 가는 인류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2천여 년 전, 예수님은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있는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이셨지요.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왜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셔야 했을까요?
첫 사람 아담은 영과 혼과 육으로 지음 받아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한 후에는 ‘정녕 죽으리라’ 한 대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습니다. 이후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 아래 아담의 후손들은 점점 정욕을 좇아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전 3:18). 이러한 인생들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지요.
요한복음 6장 51절에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양식 삼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양식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듯이 사람의 영도 영의 양식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이시며 말씀 자체이신(요 1:1, 14)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짐승과 같은 인류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게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가득했고, 수많은 천군 천사가 함께하며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했습니다. 그날 밤 들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은 천사에게서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전해 듣고 찾아와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렸습니다(눅 2:8~20).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셨지만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되어 잉태되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입니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 아니기에 원죄(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죄)가 없으며 성장하면서도 하나님 말씀대로만 사셨기 때문에 자범죄(스스로 짓는 죄)도 없으셨습니다. 어린 시절에도 틈만 나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준비하셨지요.
마침내 30세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는 한편,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치료하셨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온전케 하셨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셨습니다. 또 물 위를 걸으며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는 등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 말씀의 권세와 능력에 놀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음 주에 이어서 공부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 년)
2. 신앙인의 기본 책자 15페이지를 보고 다음 약자의 뜻을 써 보세요.
① A.D. (Anno Domini: )
② B.C. (Before Christ: )
3. 요한복음 3장 16절, 마태복음 16장 16절, 빌립보서 2장 6~8절을 찾아 함께 읽어보세요. 그리고 공통점은 무엇인지 찾아보세요.
( )
● 알고 넘어갑시다!
태초(창세기) VS 태초(요한복음)
창세기 1장 1절에서의 ‘태초’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시점을 가리킨다. 반면에 요한복음 1장 1절에서의 ‘태초’는 창조 이전, 사람의 한계로 이해할 수 없는 아득히 오래전을 말하므로 이 두 말씀에서 나타내는 ‘태초’는 전혀 시점이 다르다.
2026-05-22
제21과팔복(8)
마태복음 5:10~12
읽을말씀 : 마태복음 5:10~12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10 | 참고 말씀: 마가복음 10:30
교육목표 : 주님을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함으로 하늘의 큰 상급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핍박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핍박받는 것이 참되고 영원한 복이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만큼, 영생의 축복과 이 땅에서도 복을 받게 되는데, 핍박도 겸하여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0절에는 주와 그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가족이나 전토를 버린 사람에 대해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지요.
1.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란
그러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진리와 선과 빛을 좇아 살아갈 때 받는 핍박을,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라 말합니다. 물론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면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어려움을 당하거나 애매히 핍박을 받기도 하지요.
그러면 왜 주님을 믿으면 고난을 받는 것일까요? 이는 물과 기름이 하나 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하신 대로 주님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영적으로 빛에 속합니다(요일 1:5).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주인은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입니다(엡 6:12). 그러니 원수 마귀 사단은 빛의 자녀들을 싫어하지요.
빛이 비추이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빛이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많아질수록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의 영역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니 원수 마귀 사단은 자기에게 속한 세상 사람들을 주관하여, 빛에 속한 성도들을 핍박함으로 주를 믿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받는 경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경우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시작하면 여러 모양으로 핍박이 오기도 합니다. 세상에 있을 때는 친구들과 만나면 술도 마시고 비진리의 말과 행동으로 어울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술도 끊고 거룩하게 행동하려고 하니까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싫은 소리를 듣게 되지요.
직장에서 주일에 체육대회나 친목회가 있으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회사생활하면 승진하기 어렵다.”며 압박을 가하지요. 복음화 되지 않은 가정에서는 제사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핍박을 합니다.
또 남들은 적당히 속이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씀대로 정직하게 행하니, 속이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싫어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윗사람이 있을 때는 섬기고 비위를 맞추다가도, 자리를 비우면 험담하고 자기 유익에 따라 잘 변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진실히 행하고 자기의 유익에 따라 변하지 않지요.
세상에서는 이런 경우들이 핍박거리가 될 수 있지만, 지나고 보면 회사에서도,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인정과 사랑을 받습니다. 즉 선과 사랑으로 승리해 가기 때문에 핍박이 물러갈 수밖에 없지요. 나아가 핍박을 이겨 나감으로 믿음이 더 장성해 가고, 주변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으니 영육 간에 축복인 것입니다.
2) 자신의 잘못이나 지혜가 부족해서 핍박받는 경우
의를 행함으로 핍박받는 경우 외에 지혜가 부족하거나 본인의 잘못으로 핍박받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온 집에 충성하지 못해서, 주변에 덕이 되지 못해 욕을 먹거나 어려움을 받는 일도 발생하지요.
가령, 여 성도님이 게을러서 집 안 청소나 식사 준비를 해 놓지 않고, 교회 일에 바쁘다면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때 집 안을 돌보지 못한 것이 문제인데 정작 핍박받은 당사자는 자신이 하나님 일 때문에 그렇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직장에서도 교회 간다면서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실수를 잘하며 불성실합니다. 그러면서 동료들을 전도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요. “교회 갈 시간에 자기 일이나 잘하지.”라는 소리나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 핍박받는다면 감사하고 기뻐함으로 승리하시되, 혹여 자신의 부족한 모습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다면, 신속히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악이나 불법으로 인해 받는 핍박은 복이나 상급이 될 수 없지만,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은 천국을 소유할 수 있기에 복되다 하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믿음이 장성하여 하나님께 축복들을 크게 받아갈 뿐만 아니라, 더 좋은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팔복의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과, 여덟 번째 복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전자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천국이라면, 후자는 각 사람이 의를 행함으로 핍박을 받은 만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다 세밀한 의미에서의 천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되면 그로 인해 믿음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핍박을 받으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진리로 인내함으로 아이 믿음에서 청년의 믿음으로, 아비의 믿음으로 장성해 가기 때문이지요. 고난당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마음속 깊이 있는 비진리까지도 발견하여 버리니, 온유함과 화평함을 이루며,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갑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얼마나 의를 행하여 마음을 변화시켰느냐에 따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4. 주를 위해 받은 핍박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함으로 의를 온전히 이루었다 해도 모든 핍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를 위해 받는 핍박’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꾼 된 사람들이 받는 핍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말씀하시지요.
예부터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흠도 티도 없는 분이셨지만 죄인들의 형벌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고, 온갖 조롱과 멸시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핍박받고 순교했던 사람들의 충성과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넘치는 영광과 상급으로 갚아 주시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를 확실히 보여 주십니다.
영혼이 잘되는 축복은 물론,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고 따르는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지요. 혹여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장차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급을 바라봄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심령이 가난한 자가 들어가는 천국’과‘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들어가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이란?
(고전 15:41)
◈ 해의 영광 : 아비들의 믿음으로 3천층 또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달의 영광 : 청년들의 믿음으로 2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 : 아이들의 믿음으로 1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이처럼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은 각각 큰 차이가 난다. 또한 밤하늘의 무수한 별의 크기나 밝기가 다르듯이 별마다 영광이 다르다.
낙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이 없으므로 상급이 없고 영광이라고 표현하지도 않는다.
교육목표 : 주님을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함으로 하늘의 큰 상급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핍박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핍박받는 것이 참되고 영원한 복이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만큼, 영생의 축복과 이 땅에서도 복을 받게 되는데, 핍박도 겸하여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0절에는 주와 그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가족이나 전토를 버린 사람에 대해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지요.
1.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란
그러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진리와 선과 빛을 좇아 살아갈 때 받는 핍박을,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라 말합니다. 물론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면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어려움을 당하거나 애매히 핍박을 받기도 하지요.
그러면 왜 주님을 믿으면 고난을 받는 것일까요? 이는 물과 기름이 하나 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하신 대로 주님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영적으로 빛에 속합니다(요일 1:5).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주인은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입니다(엡 6:12). 그러니 원수 마귀 사단은 빛의 자녀들을 싫어하지요.
빛이 비추이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빛이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많아질수록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의 영역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니 원수 마귀 사단은 자기에게 속한 세상 사람들을 주관하여, 빛에 속한 성도들을 핍박함으로 주를 믿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받는 경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경우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시작하면 여러 모양으로 핍박이 오기도 합니다. 세상에 있을 때는 친구들과 만나면 술도 마시고 비진리의 말과 행동으로 어울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술도 끊고 거룩하게 행동하려고 하니까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싫은 소리를 듣게 되지요.
직장에서 주일에 체육대회나 친목회가 있으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회사생활하면 승진하기 어렵다.”며 압박을 가하지요. 복음화 되지 않은 가정에서는 제사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핍박을 합니다.
또 남들은 적당히 속이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씀대로 정직하게 행하니, 속이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싫어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윗사람이 있을 때는 섬기고 비위를 맞추다가도, 자리를 비우면 험담하고 자기 유익에 따라 잘 변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진실히 행하고 자기의 유익에 따라 변하지 않지요.
세상에서는 이런 경우들이 핍박거리가 될 수 있지만, 지나고 보면 회사에서도,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인정과 사랑을 받습니다. 즉 선과 사랑으로 승리해 가기 때문에 핍박이 물러갈 수밖에 없지요. 나아가 핍박을 이겨 나감으로 믿음이 더 장성해 가고, 주변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으니 영육 간에 축복인 것입니다.
2) 자신의 잘못이나 지혜가 부족해서 핍박받는 경우
의를 행함으로 핍박받는 경우 외에 지혜가 부족하거나 본인의 잘못으로 핍박받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온 집에 충성하지 못해서, 주변에 덕이 되지 못해 욕을 먹거나 어려움을 받는 일도 발생하지요.
가령, 여 성도님이 게을러서 집 안 청소나 식사 준비를 해 놓지 않고, 교회 일에 바쁘다면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때 집 안을 돌보지 못한 것이 문제인데 정작 핍박받은 당사자는 자신이 하나님 일 때문에 그렇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직장에서도 교회 간다면서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실수를 잘하며 불성실합니다. 그러면서 동료들을 전도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요. “교회 갈 시간에 자기 일이나 잘하지.”라는 소리나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 핍박받는다면 감사하고 기뻐함으로 승리하시되, 혹여 자신의 부족한 모습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다면, 신속히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악이나 불법으로 인해 받는 핍박은 복이나 상급이 될 수 없지만,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은 천국을 소유할 수 있기에 복되다 하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믿음이 장성하여 하나님께 축복들을 크게 받아갈 뿐만 아니라, 더 좋은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팔복의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과, 여덟 번째 복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전자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천국이라면, 후자는 각 사람이 의를 행함으로 핍박을 받은 만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다 세밀한 의미에서의 천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되면 그로 인해 믿음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핍박을 받으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진리로 인내함으로 아이 믿음에서 청년의 믿음으로, 아비의 믿음으로 장성해 가기 때문이지요. 고난당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마음속 깊이 있는 비진리까지도 발견하여 버리니, 온유함과 화평함을 이루며,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갑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얼마나 의를 행하여 마음을 변화시켰느냐에 따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4. 주를 위해 받은 핍박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함으로 의를 온전히 이루었다 해도 모든 핍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를 위해 받는 핍박’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꾼 된 사람들이 받는 핍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말씀하시지요.
예부터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흠도 티도 없는 분이셨지만 죄인들의 형벌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고, 온갖 조롱과 멸시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핍박받고 순교했던 사람들의 충성과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넘치는 영광과 상급으로 갚아 주시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를 확실히 보여 주십니다.
영혼이 잘되는 축복은 물론,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고 따르는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지요. 혹여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장차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급을 바라봄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심령이 가난한 자가 들어가는 천국’과‘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들어가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이란?
(고전 15:41)
◈ 해의 영광 : 아비들의 믿음으로 3천층 또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달의 영광 : 청년들의 믿음으로 2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 : 아이들의 믿음으로 1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이처럼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은 각각 큰 차이가 난다. 또한 밤하늘의 무수한 별의 크기나 밝기가 다르듯이 별마다 영광이 다르다.
낙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이 없으므로 상급이 없고 영광이라고 표현하지도 않는다.
2026-05-15
제20과팔복(7)
마태복음 5:9
읽을말씀 : 마태복음 5:9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9 | 참고 말씀: 히브리서 12:14, 로마서 6:16
교육목표 :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케 하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모든 사람과 화평함을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의미의 ‘화평’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마음이기 때문에 무례히 행치 않고 설령 내가 옳다 하더라도 비진리가 아니면 상대에게 맞추어 주지요. 또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으며 나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먼저 생각해 주고 맞추어 주며, 편벽됨이 없고 진리 안에서 양면성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되 생명까지 내어 주는 것이 영적인 화평함이지요.
1. 자신을 희생하여 화평케 하신 예수님
첫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단 한 가지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죄인이 되어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으로 막히게 되었습니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온 인류를 위하여 친히 화목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대신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하나님과 모든 인류 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혹자는 “왜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온 인류가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는데 이는 과거에 한 번 노예가 되면 자손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노예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6장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말씀하신 대로 첫 사람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순종하여 죄를 범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평케 하는 직책을 감당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도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진리를 알면 악한 의도로 화평을 깨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하는 자기 의가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화평을 깰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맞추어 주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맞추어 주는가를 점검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는 음식을 싱겁게 먹는 반면 남편은 짜게 먹습니다. 이때 아내가 싱겁게 먹는 것이 건강에 좋으니 무조건 자신의 의견에 따르라고만 한다면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화평하려면 최대한 상대를 이해시키고 배려하며 조금씩 개선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는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로 인해 화평이 깨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상대의 유익을 구하기보다는 내 유익을 먼저 구하지 않는가?’, ‘내 생각이 옳고 진리이기 때문에 상대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관철시키지 않았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이 얼마나 화평케 하는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는 화평을 이루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히 12:14).
2.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사야 59장 1~2절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사이에 죄의 담으로 가로막히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하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인해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가로막혔던 죄의 담이 허물어져 화평을 이루게 되지요. 그런데 죄를 사함 받았는데 또다시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받을 수 있습니다. 질병이 있으면 치료받아 강건해지고, 물질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부요해지는 등 마음의 소원들을 응답받게 되지요.
2)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등 악이 있으면, 환경과 조건에 따라 악이 발동하므로 자신과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스스로 고통을 받기 때문에 평안할 수 없지요.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시기심 때문에 스스로 고통받는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시기, 질투, 교만, 다툼, 간음 등 마음에 악이 있으면 참 평안을 누릴 수 없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시니 마음이 곤고해질 뿐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의 악을 벗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3)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악해서 화평을 깨기보다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포용하지 못하므로 화평을 깨기도 합니다. 가령,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하다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도 본인은 모릅니다. 반대 의견이 나와도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좋은 쪽을 택했으니까 하며 계획대로 추진해 갑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보실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열심은 기특하지만 실족하고 상처받는 영혼들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비진리가 아니라면 상대의 연약한 믿음도 고려하여 화평을 좇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몇몇 사람이 뜨거워 많은 일을 이루는 것보다, 모두가 화평함 속에 적은 일을 이루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축복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했는데 여기서 ‘아들’이란 단지 남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지칭합니다. 단순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차원을 넘어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믿음의 분량은 각 사람마다 차이가 납니다. 가령, 겨우 구원받을 만한 ‘자녀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이제 막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아이들의 믿음’이 있습니다. 또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청년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아비들의 믿음’도 있지요.
따라서 ‘화평케 하는 자’란 아비들의 믿음을 이룬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바로 악은 모양도 없고 하나님의 선과 사랑을 이룬 하나님의 마음을 쏙 빼닮은 사랑받는 자녀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축복받으며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권능도 받아 원수 마귀가 두려워 떨며 물러갑니다. 이 외에도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면 빛나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참 아들로서 존귀와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왕정 시대에 왕위를 계승할 왕자라면 그 영화로움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하물며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꼭 닮아 그분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면 그 영광과 존귀함은 엄청나지요. 천군 천사들의 호위와 수종을 받으며, 수많은 천국 백성에게 세세토록 칭송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웅장한 황금 보석 집과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며, 존귀와 영광 가운데 영원히 살아가게 되지요.
따라서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십자가에 달리사 생명까지 내어주신 주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써보세요.
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② 자기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③ 모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2.‘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는데,
여기서‘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아비들의 믿음’(요한일서 2:14)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까지 아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고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차원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근본을 알았기에 천지 창조를 비롯하여 무수한 비밀을 계시 받아 모세 오경을 기록했다.
아브라함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단계’에 이르렀기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었다.
교육목표 :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케 하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모든 사람과 화평함을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의미의 ‘화평’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마음이기 때문에 무례히 행치 않고 설령 내가 옳다 하더라도 비진리가 아니면 상대에게 맞추어 주지요. 또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으며 나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먼저 생각해 주고 맞추어 주며, 편벽됨이 없고 진리 안에서 양면성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되 생명까지 내어 주는 것이 영적인 화평함이지요.
1. 자신을 희생하여 화평케 하신 예수님
첫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단 한 가지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죄인이 되어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으로 막히게 되었습니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온 인류를 위하여 친히 화목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대신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하나님과 모든 인류 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혹자는 “왜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온 인류가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는데 이는 과거에 한 번 노예가 되면 자손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노예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6장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말씀하신 대로 첫 사람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순종하여 죄를 범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평케 하는 직책을 감당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도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진리를 알면 악한 의도로 화평을 깨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하는 자기 의가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화평을 깰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맞추어 주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맞추어 주는가를 점검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는 음식을 싱겁게 먹는 반면 남편은 짜게 먹습니다. 이때 아내가 싱겁게 먹는 것이 건강에 좋으니 무조건 자신의 의견에 따르라고만 한다면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화평하려면 최대한 상대를 이해시키고 배려하며 조금씩 개선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는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로 인해 화평이 깨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상대의 유익을 구하기보다는 내 유익을 먼저 구하지 않는가?’, ‘내 생각이 옳고 진리이기 때문에 상대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관철시키지 않았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이 얼마나 화평케 하는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는 화평을 이루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히 12:14).
2.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사야 59장 1~2절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사이에 죄의 담으로 가로막히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하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인해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가로막혔던 죄의 담이 허물어져 화평을 이루게 되지요. 그런데 죄를 사함 받았는데 또다시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받을 수 있습니다. 질병이 있으면 치료받아 강건해지고, 물질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부요해지는 등 마음의 소원들을 응답받게 되지요.
2)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등 악이 있으면, 환경과 조건에 따라 악이 발동하므로 자신과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스스로 고통을 받기 때문에 평안할 수 없지요.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시기심 때문에 스스로 고통받는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시기, 질투, 교만, 다툼, 간음 등 마음에 악이 있으면 참 평안을 누릴 수 없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시니 마음이 곤고해질 뿐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의 악을 벗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3)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악해서 화평을 깨기보다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포용하지 못하므로 화평을 깨기도 합니다. 가령,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하다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도 본인은 모릅니다. 반대 의견이 나와도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좋은 쪽을 택했으니까 하며 계획대로 추진해 갑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보실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열심은 기특하지만 실족하고 상처받는 영혼들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비진리가 아니라면 상대의 연약한 믿음도 고려하여 화평을 좇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몇몇 사람이 뜨거워 많은 일을 이루는 것보다, 모두가 화평함 속에 적은 일을 이루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축복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했는데 여기서 ‘아들’이란 단지 남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지칭합니다. 단순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차원을 넘어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믿음의 분량은 각 사람마다 차이가 납니다. 가령, 겨우 구원받을 만한 ‘자녀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이제 막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아이들의 믿음’이 있습니다. 또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청년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아비들의 믿음’도 있지요.
따라서 ‘화평케 하는 자’란 아비들의 믿음을 이룬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바로 악은 모양도 없고 하나님의 선과 사랑을 이룬 하나님의 마음을 쏙 빼닮은 사랑받는 자녀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축복받으며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권능도 받아 원수 마귀가 두려워 떨며 물러갑니다. 이 외에도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면 빛나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참 아들로서 존귀와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왕정 시대에 왕위를 계승할 왕자라면 그 영화로움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하물며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꼭 닮아 그분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면 그 영광과 존귀함은 엄청나지요. 천군 천사들의 호위와 수종을 받으며, 수많은 천국 백성에게 세세토록 칭송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웅장한 황금 보석 집과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며, 존귀와 영광 가운데 영원히 살아가게 되지요.
따라서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십자가에 달리사 생명까지 내어주신 주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써보세요.
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② 자기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③ 모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2.‘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는데,
여기서‘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아비들의 믿음’(요한일서 2:14)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까지 아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고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차원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근본을 알았기에 천지 창조를 비롯하여 무수한 비밀을 계시 받아 모세 오경을 기록했다.
아브라함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단계’에 이르렀기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었다.
2026-05-08
제19과팔복(6)
마태복음 5:8
읽을말씀 : 마태복음 5:8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8 | 참고 말씀: 요한일서 3:15, 마태복음 5:28
교육목표 : 육의 행실과 마음의 죄성을 온전히 벗어 버림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뵐 수 있는 성결한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청결’을 문자 그대로 풀면 맑고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죄악이 없어서 성결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악이 없고 깨끗한 마음이 될 때라야 하나님을 뵐 수 있고,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마음이 청결한 사람과 악독한 사람
마음이 청결하여 복을 받은 룻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룻은 모압 지방의 이방 여인으로 자녀도 없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겼던 효부였지요.
룻은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가야 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당장 거할 집도 넉넉히 먹을 양식도 없었고, 살아갈 일이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거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극진히 섬겼지요.
이처럼 룻이 선하고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부요하고 선한 보아스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다윗 왕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마음이 악독하여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율법은 물론 장로의 유전까지도 철저히 지켰습니다. 자신을 절제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기에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겼지요. 즉 외식주의자들로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였습니다.
일례로 장로의 유전 중에는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 앞에 부정하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장로의 유전을 범한다고 시비하지요. 이때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말씀하십니다.
즉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등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요. 그러니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다고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하셨습니다(마 23:27). 무덤은 시체를 보관하기에 아무리 단장해도 속은 부패하여 썩은 냄새만 진동할 뿐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거룩한 척했지만, 마음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했기에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마음 중심까지 깨끗하고 아름답기를 원하십니다.
2. 마음의 청결을 이루려면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악한 행위는 물론 마음속 죄까지도 다 벗어 버리고 청결한 마음을 갖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말씀했고(벧전 1:16),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투고 혈기 내던 사람은 혈기를 버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교만하던 사람은 낮아지고 섬기며, 미워하던 사람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하지요. 우리가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여 진리로 채워 가는 만큼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옷에 더러운 똥이 묻었는데 “깨끗이 빨아야지.” 생각만 하고, 실제로는 옷을 빨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마음의 더러움을 발견했다면, 스스로 버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의 청결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의 힘과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2~24)
여기서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진리의 마음입니다. 반면에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란 까만 비진리의 마음을 뜻하지요. 다시 말해 우리 마음 안에는 죄를 행하고자 하는 비진리 속성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버릴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술과 담배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결단해 보지만 작심삼일로 끝나는 일이 많지요. 이것들이 해로운 줄 알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끊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술과 담배를 단번에 끊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죄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불같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능히 버릴 수 있습니다.
이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두 번 말씀대로 행해 보다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변화될 때까지 금식과 기도를 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 결국 모든 죄를 벗고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임하는 복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했습니다. 혹자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사사기 13장 22절에 보면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만 보고도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였고, 요한복음 1장 18절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장 11절에는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죽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뵈었지요(출 20:18~19).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대면하여 보기도 하며 친히 동행하기까지 했던 것일까요? 요한삼서 1장 11절에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는 말씀대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뵈올 수 있지만, 죄악으로 마음이 더러우면 하나님을 뵈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면 천국 중에서도 3천층 이상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주님과 하나님을 가까이 뵈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낙원이나 1천층, 2천층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주님을 가까이 뵙지 못하지요. 즉 얼마큼 성결되었느냐에 따라 각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적인 빛이 다르고, 들어가는 처소 역시 달라집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은 단순히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모든 분야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방언이나 각종 성령의 은사들(고전 12:9~11)을 받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축복’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육의 행실은 물론 마음의 더러움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고후 7:1)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뵈옵는 영광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 )이 없어서 ( )된 것을 의미한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에녹 선지자’(창세기 5:21~24)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365세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이다. 에녹은 모나지 않고 순수하며 착한 성품을 지녔다.
하나님에 대해, 영의 세계에 대해 늘 궁구했기에 무엇을 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으려 했다. 예를 들어,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꼈다.
에녹 선지자는 강하거나 자기를 주장하는 성정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찾을 때는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교통하며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교육목표 : 육의 행실과 마음의 죄성을 온전히 벗어 버림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뵐 수 있는 성결한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청결’을 문자 그대로 풀면 맑고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죄악이 없어서 성결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악이 없고 깨끗한 마음이 될 때라야 하나님을 뵐 수 있고,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마음이 청결한 사람과 악독한 사람
마음이 청결하여 복을 받은 룻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룻은 모압 지방의 이방 여인으로 자녀도 없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겼던 효부였지요.
룻은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가야 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당장 거할 집도 넉넉히 먹을 양식도 없었고, 살아갈 일이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거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극진히 섬겼지요.
이처럼 룻이 선하고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부요하고 선한 보아스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다윗 왕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마음이 악독하여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율법은 물론 장로의 유전까지도 철저히 지켰습니다. 자신을 절제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기에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겼지요. 즉 외식주의자들로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였습니다.
일례로 장로의 유전 중에는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 앞에 부정하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장로의 유전을 범한다고 시비하지요. 이때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말씀하십니다.
즉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등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요. 그러니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다고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하셨습니다(마 23:27). 무덤은 시체를 보관하기에 아무리 단장해도 속은 부패하여 썩은 냄새만 진동할 뿐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거룩한 척했지만, 마음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했기에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마음 중심까지 깨끗하고 아름답기를 원하십니다.
2. 마음의 청결을 이루려면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악한 행위는 물론 마음속 죄까지도 다 벗어 버리고 청결한 마음을 갖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말씀했고(벧전 1:16),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투고 혈기 내던 사람은 혈기를 버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교만하던 사람은 낮아지고 섬기며, 미워하던 사람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하지요. 우리가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여 진리로 채워 가는 만큼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옷에 더러운 똥이 묻었는데 “깨끗이 빨아야지.” 생각만 하고, 실제로는 옷을 빨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마음의 더러움을 발견했다면, 스스로 버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의 청결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의 힘과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2~24)
여기서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진리의 마음입니다. 반면에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란 까만 비진리의 마음을 뜻하지요. 다시 말해 우리 마음 안에는 죄를 행하고자 하는 비진리 속성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버릴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술과 담배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결단해 보지만 작심삼일로 끝나는 일이 많지요. 이것들이 해로운 줄 알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끊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술과 담배를 단번에 끊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죄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불같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능히 버릴 수 있습니다.
이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두 번 말씀대로 행해 보다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변화될 때까지 금식과 기도를 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 결국 모든 죄를 벗고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임하는 복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했습니다. 혹자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사사기 13장 22절에 보면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만 보고도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였고, 요한복음 1장 18절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장 11절에는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죽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뵈었지요(출 20:18~19).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대면하여 보기도 하며 친히 동행하기까지 했던 것일까요? 요한삼서 1장 11절에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는 말씀대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뵈올 수 있지만, 죄악으로 마음이 더러우면 하나님을 뵈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면 천국 중에서도 3천층 이상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주님과 하나님을 가까이 뵈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낙원이나 1천층, 2천층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주님을 가까이 뵙지 못하지요. 즉 얼마큼 성결되었느냐에 따라 각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적인 빛이 다르고, 들어가는 처소 역시 달라집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은 단순히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모든 분야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방언이나 각종 성령의 은사들(고전 12:9~11)을 받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축복’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육의 행실은 물론 마음의 더러움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고후 7:1)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뵈옵는 영광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 )이 없어서 ( )된 것을 의미한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에녹 선지자’(창세기 5:21~24)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365세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이다. 에녹은 모나지 않고 순수하며 착한 성품을 지녔다.
하나님에 대해, 영의 세계에 대해 늘 궁구했기에 무엇을 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으려 했다. 예를 들어,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꼈다.
에녹 선지자는 강하거나 자기를 주장하는 성정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찾을 때는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교통하며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2026-05-01
제18과팔복(5)
마태복음 5:7
읽을말씀 : 마태복음 5:7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7 | 참고 말씀: 히브리서12:6
교육목표 : 선한 긍휼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생명을 주며 하나님의 축복하심 가운데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긍휼?의 사전적 의미는 ‘가엾게 여긴다, 불쌍하게 생각한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하지요. 이는 성령의 열매 중 양선과 비슷하지만 이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양선은 악이 전혀 없으며 오직 선만을 추구하는 마음이지요. 이런 양선의 마음이 행함으로 나타나되,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더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긍휼입니다.
1. 한없는 용서의 긍휼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일곱 번씩이나 용서해 준다면 크게 관용을 베푼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 하시지요. 이는 70번씩 7번 즉 490번만 용서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7은 완전수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완전한 용서,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용서의 긍휼에 대해 깨우쳐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갚을 힘이 없었습니다. 당시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노동자가 6천 일, 즉 16여 년간을 꼬박 일해서 모은 품삯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하루 노동자의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한다면 한 달란트는 3억 원에 해당하지요. 그러니 일만 달란트라고 한다면 3조 원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종은 엎드려 절하며 갚을테니 참아 달라며 사정하지요. 결국 임금이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나오던 종이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 단위로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할 경우 일백 데나리온은 500만 원 정도의 금액에 불과합니다.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요.
그런데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빚진 사람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심히 노하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며 감옥에 가두고 말지요.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상대의 작은 잘못 하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판단 정죄한다면 얼마나 악한 모습이겠습니까.
혹여 자신이 상대로 인해 불이익을 당했다 해도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포용할 때,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있다면 누구를 미워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일을 행해도 징계하기보다는 먼저 사랑으로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면할 때도 내 생각과 기준에 맞지 않으므로 불편한 마음으로 찌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사랑의 권면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한다 해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상대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2. 사랑을 담은 징계의 긍휼
이처럼 용서의 긍휼이 있는 반면 상황에 따라 긍휼이 징계의 형태로 나타나는 징계의 긍휼도 있습니다. 징계의 긍휼 역시 미움이나 정죄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도 따르고, 그렇게 해서라도 죄에서 돌이켜 진리대로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8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이를 바로잡는 것이 사랑이라 해서 처음부터 매를 들어 때리는 부모는 드물 것입니다. 자녀가 중심에서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한다면 “용서해 줄 테니 다음에는 절대 그러지 말아라.” 하고 따뜻하게 안아 주게 되지요.
그런데 자녀가 말로는 회개한다 하면서 계속하여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마음이 아프더라도 징계의 매를 들어서라도 마음 깊이 깨우칠 수 있게 해 줘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이상 빗나가기 전에 징계를 해서라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징계라도 사랑이 없으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집 아이가 물건을 훔쳤을 때, 아이가 중심에서 용서를 빈다면 선한 사람은 긍휼히 여겨 용서해 줍니다. 하지만 악한 사람은 자신에게 손해를 입혔다며 혈기를 내고, 아이를 책망하거나 심지어 용서를 빌어도 처벌을 요구하지요. 또한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잘못을 전하거나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이러한 징계는 미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긍휼이 아닐뿐더러 결코 상대를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비록 상대가 잘못을 범했다 해도 그 사람의 입장과 장래를 생각하여 사랑으로 징계할 때라야 징계의 긍휼에 속하지요.
성경에는 믿음의 형제가 범죄했을 경우 진리로 권고하고 징계하는 과정이 나옵니다(마 18:15~17).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주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당사자에게 사랑으로 권면하여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만일 권면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이 속한 모임의 윗분에게 말하여 돌이키게 해야지요.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 알려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과 같이 여기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대로 하되 어떤 범죄라도 사람을 판단 정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랑의 긍휼을 베풀어야 우리도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구제의 긍휼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돌볼 줄 아는 구제의 긍휼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형제가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말로만 안타까워하고 행함이 없다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약 2:15~16). 진정한 구제는 형제가 어려울 때 내 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혹자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나도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도와줍니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자녀가 굶고 있으면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형제에게 내 자녀와 같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누가 어렵다고 무턱대고 구제하는 것은 가하지 않습니다. 범죄하여 징계를 받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제하거나, 게을러서 놀고 돈만 있으면 도박하고 술 마시는 사람을 구제한다면 죄를 짓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구제는 축복이 막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요.
따라서 상대가 어렵다고 해서 무조건 구제하며 긍휼을 베풀 것이 아니라, 잘 분별하여 구제하고도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4.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게 임하는 복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신 말씀대로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설령 자신을 힘들게 하고 피해를 입힌 사람이라 해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면,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거나 실수로 상대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또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는 부요하고 강건한 축복을 더해 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시며, 연약함을 강건하게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이 여기는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축복인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한다.
2.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불순종한 요나를 도왔다가 어려움을 당한 경우’
강대국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로 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뜻을 외치라고 명하신다.
그런데 요나는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국 앗수르가 망하기를 원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배를 타고 간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대풍을 내리셨고, 요나가 탄 배는 거의 난파 지경에 이르렀다. 배에 탄 사람들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뽑혀 바다에 던져지고 만다.
그러므로 긍휼을 베푼다 해도 하나님의 징계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는다면 함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
교육목표 : 선한 긍휼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생명을 주며 하나님의 축복하심 가운데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긍휼?의 사전적 의미는 ‘가엾게 여긴다, 불쌍하게 생각한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하지요. 이는 성령의 열매 중 양선과 비슷하지만 이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양선은 악이 전혀 없으며 오직 선만을 추구하는 마음이지요. 이런 양선의 마음이 행함으로 나타나되,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더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긍휼입니다.
1. 한없는 용서의 긍휼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일곱 번씩이나 용서해 준다면 크게 관용을 베푼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 하시지요. 이는 70번씩 7번 즉 490번만 용서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7은 완전수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완전한 용서,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용서의 긍휼에 대해 깨우쳐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갚을 힘이 없었습니다. 당시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노동자가 6천 일, 즉 16여 년간을 꼬박 일해서 모은 품삯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하루 노동자의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한다면 한 달란트는 3억 원에 해당하지요. 그러니 일만 달란트라고 한다면 3조 원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종은 엎드려 절하며 갚을테니 참아 달라며 사정하지요. 결국 임금이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나오던 종이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 단위로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할 경우 일백 데나리온은 500만 원 정도의 금액에 불과합니다.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요.
그런데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빚진 사람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심히 노하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며 감옥에 가두고 말지요.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상대의 작은 잘못 하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판단 정죄한다면 얼마나 악한 모습이겠습니까.
혹여 자신이 상대로 인해 불이익을 당했다 해도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포용할 때,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있다면 누구를 미워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일을 행해도 징계하기보다는 먼저 사랑으로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면할 때도 내 생각과 기준에 맞지 않으므로 불편한 마음으로 찌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사랑의 권면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한다 해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상대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2. 사랑을 담은 징계의 긍휼
이처럼 용서의 긍휼이 있는 반면 상황에 따라 긍휼이 징계의 형태로 나타나는 징계의 긍휼도 있습니다. 징계의 긍휼 역시 미움이나 정죄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도 따르고, 그렇게 해서라도 죄에서 돌이켜 진리대로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8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이를 바로잡는 것이 사랑이라 해서 처음부터 매를 들어 때리는 부모는 드물 것입니다. 자녀가 중심에서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한다면 “용서해 줄 테니 다음에는 절대 그러지 말아라.” 하고 따뜻하게 안아 주게 되지요.
그런데 자녀가 말로는 회개한다 하면서 계속하여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마음이 아프더라도 징계의 매를 들어서라도 마음 깊이 깨우칠 수 있게 해 줘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이상 빗나가기 전에 징계를 해서라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징계라도 사랑이 없으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집 아이가 물건을 훔쳤을 때, 아이가 중심에서 용서를 빈다면 선한 사람은 긍휼히 여겨 용서해 줍니다. 하지만 악한 사람은 자신에게 손해를 입혔다며 혈기를 내고, 아이를 책망하거나 심지어 용서를 빌어도 처벌을 요구하지요. 또한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잘못을 전하거나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이러한 징계는 미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긍휼이 아닐뿐더러 결코 상대를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비록 상대가 잘못을 범했다 해도 그 사람의 입장과 장래를 생각하여 사랑으로 징계할 때라야 징계의 긍휼에 속하지요.
성경에는 믿음의 형제가 범죄했을 경우 진리로 권고하고 징계하는 과정이 나옵니다(마 18:15~17).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주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당사자에게 사랑으로 권면하여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만일 권면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이 속한 모임의 윗분에게 말하여 돌이키게 해야지요.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 알려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과 같이 여기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대로 하되 어떤 범죄라도 사람을 판단 정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랑의 긍휼을 베풀어야 우리도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구제의 긍휼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돌볼 줄 아는 구제의 긍휼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형제가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말로만 안타까워하고 행함이 없다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약 2:15~16). 진정한 구제는 형제가 어려울 때 내 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혹자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나도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도와줍니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자녀가 굶고 있으면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형제에게 내 자녀와 같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누가 어렵다고 무턱대고 구제하는 것은 가하지 않습니다. 범죄하여 징계를 받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제하거나, 게을러서 놀고 돈만 있으면 도박하고 술 마시는 사람을 구제한다면 죄를 짓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구제는 축복이 막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요.
따라서 상대가 어렵다고 해서 무조건 구제하며 긍휼을 베풀 것이 아니라, 잘 분별하여 구제하고도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4.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게 임하는 복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신 말씀대로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설령 자신을 힘들게 하고 피해를 입힌 사람이라 해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면,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거나 실수로 상대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또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는 부요하고 강건한 축복을 더해 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시며, 연약함을 강건하게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이 여기는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축복인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한다.
2.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불순종한 요나를 도왔다가 어려움을 당한 경우’
강대국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로 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뜻을 외치라고 명하신다.
그런데 요나는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국 앗수르가 망하기를 원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배를 타고 간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대풍을 내리셨고, 요나가 탄 배는 거의 난파 지경에 이르렀다. 배에 탄 사람들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뽑혀 바다에 던져지고 만다.
그러므로 긍휼을 베푼다 해도 하나님의 징계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는다면 함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
2026-04-24
제17과팔복(4)
마태복음 5:6
읽을말씀 : 마태복음 5:6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6 | 참고 말씀: 요한복음 6:35, 55
교육목표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식 삼아 행함으로 아비의 믿음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사전에 보면 ‘의’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또는 옳은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성결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의미합니다.
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옛말에 ‘사흘 굶어 도둑질하지 않을 사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굶주림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가를 잘 나타내 주지요. 옛날 어르신 가운데는 너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으므로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로 죽을 끓여 먹으며 겨우 연명한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너무 배가 고프니까 자식까지 잡아먹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왕하 6:28~29). 그런데 배고픈 것 못지않게 목마른 것도 견디기 힘듭니다. 찜통 같은 무더위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낄 때 한 모금의 물만 마셔도 살 것 같지요.
하나님께서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과 물을 갈급히 구하는 것처럼 의를 사모하라 하십니다.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행하라는 것이지요. 성결되기 위해, 진리 안에 거하기 위해, 주님의 마음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시는지요? 혹여 ‘난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말씀 들으니까 배부르고 만족스럽다.’ 하십니까? 말씀을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내 것이 되지 않으니 하나님의 뜻이 나의 의가 될 수 없지요. 그런 사람은 항상 먹지 못하여 배고픈 사람과 같고, 물이 있어도 마시지 않아 목말라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더 깊이 알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요한복음 6장 53절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6장 55절에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지요. 이 말씀은 인자 곧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영적 양식이요, 목마름을 시원케 하는 영적 음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 2천 년 전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어디서 구하며, 설령 구해 와도 어떻게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을까요? 여기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예수님의 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말씀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육신, 곧 예수님의 살은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이것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곧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양식 삼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1편 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했고, 시편 119편 147~148절에는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하며 주야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양식 삼는다 고백하지요.
여러분도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들은 설교 말씀을 늘 되새기며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양식 삼고 계신지요? 양식 삼는다는 것은 단지 머리에 지식으로만 담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배운 말씀을 붙잡고 불같이 기도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듣고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도 수분과 함께 섭취하지 않으면 소화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진리대로 지켜 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것이 될 수가 없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으면, 순종하여 악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할 때, 말씀이 소화되어 내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며칠 굶은 사람 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으면 체면 불구하고 허겁지겁 먹듯이, 영적인 양식과 음료를 찾은 우리는 생명이 되는 말씀을 양식 삼고 행하기 위해 더 간절히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과 위배된 자신의 행동과 마음, 생각을 찾아 부족한 부분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지요.
또한 어찌하면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찌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릴까 궁구하며,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갈급하게 의를 이루기 위해 힘써야지요. 그런 사람은 말씀을 듣는 대로 열심히 순종하여 죄를 버리고 진리를 행해 나갑니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임하는 축복
마태복음 5장 6절에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의를 이루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성경에 ‘버리라’ 하신 것을 마음과 생각, 행함에서 버리고, ‘하지 말라’ 하신 대로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라’ 하신 말씀대로 지켜 행합니다.
그렇게 계속하여 의에 주리고 갈급한 심정으로 말씀을 양식 삼고 진리대로 행해 나가면 비진리가 전혀 없는 성결한 영의 마음을 이루게 됩니다. 곧 영의 사람이 되지요. 이것이 곧 배부름의 복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이루면 하나님을 쏙 빼닮은 온 영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닮은 만큼 그분이 가지신 권세와 능력,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3절에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말씀합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지켜 행하는 아비의 믿음으로, 이것 역시 영적으로 배부름을 받는 자의 복된 모습입니다. 아비와 같은 큰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영의 양식을 배부르게 먹고, 믿음이 쑥쑥 자라야 합니다. 육적으로도 아이가 태어나 젖을 먹고 밥을 먹으면서 쑥쑥 자라면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힘이 됩니다.
이렇듯 우리도 하나님의 의를 행해 나가면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순종하는 차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즉 아비의 믿음이 되어 배부름을 받은 복된 사람이 됩니다. 아비들의 신앙이 되면 만사가 형통하고 축복이 임하며, 원수 마귀 사단을 능히 이기고 지배하며 다스립니다. 또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감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 그 뜻이 무엇인지 잘 알아 순종하지요.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 대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가면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여 범사에 성령의 인도하심과 형통함을 받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배부름을 받는 복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시험 환난을 당할 걱정이 없습니다. 앞길에 장애물이 있다 해도 피해 가게 하시고, 어려움을 만나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행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나만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배부를 것이 아니라, 아직도 굶주리고 헐벗어 있는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으로 배불리 먹여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 주시며 항상 풍성하고 배부른 삶을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 )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 )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 )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과 피는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임할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믿음의 분량’(요한일서 2:12~14)
◆ 자녀들의 믿음(믿음의 1단계) - 성령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
◆ 아이들의 믿음(믿음의 2단계) -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
◆ 청년들의 믿음(믿음의 3단계) -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
◆ 아비들의 믿음(믿음의 4, 5단계) -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기쁘시게 하는 믿음
교육목표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식 삼아 행함으로 아비의 믿음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사전에 보면 ‘의’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또는 옳은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성결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의미합니다.
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옛말에 ‘사흘 굶어 도둑질하지 않을 사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굶주림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가를 잘 나타내 주지요. 옛날 어르신 가운데는 너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으므로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로 죽을 끓여 먹으며 겨우 연명한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너무 배가 고프니까 자식까지 잡아먹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왕하 6:28~29). 그런데 배고픈 것 못지않게 목마른 것도 견디기 힘듭니다. 찜통 같은 무더위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낄 때 한 모금의 물만 마셔도 살 것 같지요.
하나님께서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과 물을 갈급히 구하는 것처럼 의를 사모하라 하십니다.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행하라는 것이지요. 성결되기 위해, 진리 안에 거하기 위해, 주님의 마음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시는지요? 혹여 ‘난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말씀 들으니까 배부르고 만족스럽다.’ 하십니까? 말씀을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내 것이 되지 않으니 하나님의 뜻이 나의 의가 될 수 없지요. 그런 사람은 항상 먹지 못하여 배고픈 사람과 같고, 물이 있어도 마시지 않아 목말라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더 깊이 알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요한복음 6장 53절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6장 55절에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지요. 이 말씀은 인자 곧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영적 양식이요, 목마름을 시원케 하는 영적 음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 2천 년 전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어디서 구하며, 설령 구해 와도 어떻게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을까요? 여기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예수님의 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말씀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육신, 곧 예수님의 살은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이것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곧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양식 삼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1편 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했고, 시편 119편 147~148절에는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하며 주야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양식 삼는다 고백하지요.
여러분도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들은 설교 말씀을 늘 되새기며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양식 삼고 계신지요? 양식 삼는다는 것은 단지 머리에 지식으로만 담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배운 말씀을 붙잡고 불같이 기도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듣고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도 수분과 함께 섭취하지 않으면 소화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진리대로 지켜 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것이 될 수가 없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으면, 순종하여 악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할 때, 말씀이 소화되어 내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며칠 굶은 사람 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으면 체면 불구하고 허겁지겁 먹듯이, 영적인 양식과 음료를 찾은 우리는 생명이 되는 말씀을 양식 삼고 행하기 위해 더 간절히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과 위배된 자신의 행동과 마음, 생각을 찾아 부족한 부분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지요.
또한 어찌하면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찌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릴까 궁구하며,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갈급하게 의를 이루기 위해 힘써야지요. 그런 사람은 말씀을 듣는 대로 열심히 순종하여 죄를 버리고 진리를 행해 나갑니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임하는 축복
마태복음 5장 6절에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의를 이루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성경에 ‘버리라’ 하신 것을 마음과 생각, 행함에서 버리고, ‘하지 말라’ 하신 대로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라’ 하신 말씀대로 지켜 행합니다.
그렇게 계속하여 의에 주리고 갈급한 심정으로 말씀을 양식 삼고 진리대로 행해 나가면 비진리가 전혀 없는 성결한 영의 마음을 이루게 됩니다. 곧 영의 사람이 되지요. 이것이 곧 배부름의 복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이루면 하나님을 쏙 빼닮은 온 영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닮은 만큼 그분이 가지신 권세와 능력,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3절에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말씀합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지켜 행하는 아비의 믿음으로, 이것 역시 영적으로 배부름을 받는 자의 복된 모습입니다. 아비와 같은 큰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영의 양식을 배부르게 먹고, 믿음이 쑥쑥 자라야 합니다. 육적으로도 아이가 태어나 젖을 먹고 밥을 먹으면서 쑥쑥 자라면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힘이 됩니다.
이렇듯 우리도 하나님의 의를 행해 나가면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순종하는 차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즉 아비의 믿음이 되어 배부름을 받은 복된 사람이 됩니다. 아비들의 신앙이 되면 만사가 형통하고 축복이 임하며, 원수 마귀 사단을 능히 이기고 지배하며 다스립니다. 또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감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 그 뜻이 무엇인지 잘 알아 순종하지요.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 대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가면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여 범사에 성령의 인도하심과 형통함을 받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배부름을 받는 복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시험 환난을 당할 걱정이 없습니다. 앞길에 장애물이 있다 해도 피해 가게 하시고, 어려움을 만나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행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나만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배부를 것이 아니라, 아직도 굶주리고 헐벗어 있는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으로 배불리 먹여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 주시며 항상 풍성하고 배부른 삶을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 )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 )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 )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과 피는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임할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믿음의 분량’(요한일서 2:12~14)
◆ 자녀들의 믿음(믿음의 1단계) - 성령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
◆ 아이들의 믿음(믿음의 2단계) -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
◆ 청년들의 믿음(믿음의 3단계) -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
◆ 아비들의 믿음(믿음의 4, 5단계) -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기쁘시게 하는 믿음
2026-04-17
제16과팔복(3)
마태복음 5:5
읽을말씀 : 마태복음 5:5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5 | 참고 말씀: 시편 37:11
교육목표 : 온유한 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품음으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큰 권세와 영광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성군으로,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과학과 기술의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의약기술과 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토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지요.
이처럼 세종대왕이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사랑과 덕으로 어진 정치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훌륭한 인재들이 깃들일 수 있었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후대에까지 이름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유한 자에게 어떠한 복을 내려주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온유한 자란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사전에 보면 ‘온유’에 대해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 유순함,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듦’이라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는 성품이 순해서 쉽게 화를 내지 않거나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고, 또 소극적이고 유약한 사람이나 친절하게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마음속에는 미움이 있고 불편하여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화가 나지만 꾹꾹 눌러 참고, 따져 묻고 싶지만 겉으론 상대에게 양보하며 부드럽게 대하면 ‘착하다. 온유하다.’ 말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겉모습만 그럴 듯하게 온유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마음에 어떤 불편함도, 싫어함도 없이 선한 마음으로 상대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품어 줄 수 있어야 온유하다고 인정해 주시지요.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상대의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하며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하고 위로가 되어 주는 마음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고, 내 성격과 취향에 맞지 않아도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품습니다.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으며 매사에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 주는 포근한 마음이지요. 이런 온유한 마음은 ‘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솜에 단단한 물체나 돌멩이를 던지면 소리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반면 단단한 철판에 돌을 던지면 요란하고 튕겨져 나가지요. 또 유리에 돌을 던지면 “쨍!” 하고 깨져 버립니다.
온유한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주는 마음입니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이지요.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의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덕’이란 사전에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 인격이 갖추어져 남을 정복시키는 일’이라 설명합니다. 영적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졌다 해도 덕이 없으면 온유함의 가치를 온전히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따뜻하고 사랑이 있지만 행동이 거칠고 실수가 많으면 사람들이 깃들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성격이 너무 소극적이어서 남들에게 답답함을 주고, 어떤 사람은 말이 많고 떠들며, 농담을 잘하여 신뢰가 떨어지지요.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지만 상대가 말하고 있는데, 딴청하거나 경청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덕이 없으므로 온유한 마음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유함이 마음에 이룬 내면적인 것이라면 덕은 외면적인 옷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지저분하고 남루하게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몰라 주고, 지나칠 수밖에 없지요.
덕을 갖춘 온유함은 마음과 함께 말이나 행동, 모습도 사람들에게 본이 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신뢰와 인정을 받으며, 사람들을 치리함에 있어서도 물리적인 힘이 아닌 사랑으로 포용하고 이끌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깃들지요. 이렇게 덕을 갖춘 온유함은 내가 선하게 행동하여 상대를 품는 것뿐만 아니라, 꽃향기에 나비와 벌이 모여들듯 많은 사람이 그 선과 사랑에 감동을 얻고 깃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온유한 마음이 되셨는지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내가 있는 곳에 소리가 나고 화평이 깨어지지는 않습니까? 만일 모임에 불평하고 고집스런 사람이 있어서 화평이 깨진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먼저 온유한 사람이 되어 그들에게 은혜를 끼치며 감동을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때문에 불화하고, 아내 때문에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 말고, 내가 가족에게 미소가 되기 위해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어도 외면하지 말고 끝까지 바라봐 줘야 합니다.
다음으로, 권면이나 지적받을 때 기쁘게 자신을 돌아보며 발전시키는 모습이십니까? 나보다 못한 사람이 말을 해도 중심에서 귀히 여기며 감사하게 받으시는지요? 이런 사람은 어린 소자의 말이라도 귀 기울여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능력이 부족하여 실수하는 사람이라도 무시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기다려 주고 계십니까? 다투지 않고, 부드럽고 잔잔하며 쓸데없는 허탄한 말도 하지 않고 꼭 필요한 진리의 말만 내고 계신지요? 온전한 온유를 이룬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걸림이 되지 않고,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을뿐더러 변화시켜 나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열심히 마음밭을 개간해야 합니다. 거친 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떨기도 뽑아내야지요. 불필요한 것을 걸러내고 거름도 주면서 개간하면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서 미움, 시기, 질투, 다툼, 판단, 정죄, 교만 등 비진리, 육신의 생각을 벗어 버리면 온유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온유한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본문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기업이란 “선대로부터 이어오는 재산과 사업 또는 기초가 되는 업”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이 세상에 속한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의 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혹자는 “구원받아 천국 가면 그만이지. 개인적으로 땅을 꼭 받아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 충성한 것만큼 개개인에게 상급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는 교회만 왔다갔다 하고, 어떤 사람은 전도하고 충성하며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애통하며 간구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생명을 잃기까지 헌신하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기 다르게 충성하였는데 똑같은 집에, 똑같은 상급을 주신다면 하나님을 어찌 ‘공평하시며 공의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시기에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바로 자신을 낮추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며 덕을 갖춰 온유함을 이룬 사람이 영혼 구원과 사명 감당에 최선을 다했으니 하늘나라에서 넓은 땅을 주어, 큰 집을 지을 수 있는 터전을 주시지요.
온유하여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 이르게 하였으니, 천국에서도 그들이 감사하여 함께 사랑을 나누려고 방문할 텐데, 많은 사람을 맞을 집터도 넓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마음 중심에서 존경하고 깃들이는 것이 천국에서는 큰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낮아지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섬기고 희생하였지만, 하늘나라에선 ‘큰 자’의 권세를 누리며, 큰 땅을 소유하게 되지요. 이렇게 주어진 넓은 땅에 이 세상에서 충성으로, 봉사로, 헌금으로 드려진 천국 집의 재료를 가지고, 우리 주님의 지휘 아래 멋지고 아름다운 내 집이 지어집니다. 이 넓은 땅에 정원과 호수, 수영장 등 각종 시설물을 짓게 되지요. 그러나 한 번 받은 천국 땅과 상급은 천국에서 더 이상 늘릴 수도, 나누어 줄 수도, 구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사랑과 덕으로 많은 사람을 품어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 많은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 )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주는 마음이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 )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이다.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 )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의 마음을 이룰 수 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옥토’란
땅이 고르고 비옥하여 씨를 뿌리면 싹이 자라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내는 밭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의와 틀에 매여 있는 단단한 길가밭과 같지 않고 부드럽다.
또 돌이나 가시떨기 즉 비진리나 육신의 생각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며, 하나님 말씀에 오직 아멘과 예로 순종하기에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다.
교육목표 : 온유한 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품음으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큰 권세와 영광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성군으로,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과학과 기술의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의약기술과 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토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지요.
이처럼 세종대왕이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사랑과 덕으로 어진 정치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훌륭한 인재들이 깃들일 수 있었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후대에까지 이름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유한 자에게 어떠한 복을 내려주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온유한 자란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사전에 보면 ‘온유’에 대해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 유순함,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듦’이라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는 성품이 순해서 쉽게 화를 내지 않거나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고, 또 소극적이고 유약한 사람이나 친절하게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마음속에는 미움이 있고 불편하여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화가 나지만 꾹꾹 눌러 참고, 따져 묻고 싶지만 겉으론 상대에게 양보하며 부드럽게 대하면 ‘착하다. 온유하다.’ 말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겉모습만 그럴 듯하게 온유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마음에 어떤 불편함도, 싫어함도 없이 선한 마음으로 상대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품어 줄 수 있어야 온유하다고 인정해 주시지요.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상대의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하며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하고 위로가 되어 주는 마음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고, 내 성격과 취향에 맞지 않아도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품습니다.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으며 매사에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 주는 포근한 마음이지요. 이런 온유한 마음은 ‘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솜에 단단한 물체나 돌멩이를 던지면 소리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반면 단단한 철판에 돌을 던지면 요란하고 튕겨져 나가지요. 또 유리에 돌을 던지면 “쨍!” 하고 깨져 버립니다.
온유한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주는 마음입니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이지요.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의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덕’이란 사전에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 인격이 갖추어져 남을 정복시키는 일’이라 설명합니다. 영적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졌다 해도 덕이 없으면 온유함의 가치를 온전히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따뜻하고 사랑이 있지만 행동이 거칠고 실수가 많으면 사람들이 깃들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성격이 너무 소극적이어서 남들에게 답답함을 주고, 어떤 사람은 말이 많고 떠들며, 농담을 잘하여 신뢰가 떨어지지요.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지만 상대가 말하고 있는데, 딴청하거나 경청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덕이 없으므로 온유한 마음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유함이 마음에 이룬 내면적인 것이라면 덕은 외면적인 옷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지저분하고 남루하게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몰라 주고, 지나칠 수밖에 없지요.
덕을 갖춘 온유함은 마음과 함께 말이나 행동, 모습도 사람들에게 본이 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신뢰와 인정을 받으며, 사람들을 치리함에 있어서도 물리적인 힘이 아닌 사랑으로 포용하고 이끌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깃들지요. 이렇게 덕을 갖춘 온유함은 내가 선하게 행동하여 상대를 품는 것뿐만 아니라, 꽃향기에 나비와 벌이 모여들듯 많은 사람이 그 선과 사랑에 감동을 얻고 깃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온유한 마음이 되셨는지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내가 있는 곳에 소리가 나고 화평이 깨어지지는 않습니까? 만일 모임에 불평하고 고집스런 사람이 있어서 화평이 깨진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먼저 온유한 사람이 되어 그들에게 은혜를 끼치며 감동을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때문에 불화하고, 아내 때문에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 말고, 내가 가족에게 미소가 되기 위해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어도 외면하지 말고 끝까지 바라봐 줘야 합니다.
다음으로, 권면이나 지적받을 때 기쁘게 자신을 돌아보며 발전시키는 모습이십니까? 나보다 못한 사람이 말을 해도 중심에서 귀히 여기며 감사하게 받으시는지요? 이런 사람은 어린 소자의 말이라도 귀 기울여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능력이 부족하여 실수하는 사람이라도 무시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기다려 주고 계십니까? 다투지 않고, 부드럽고 잔잔하며 쓸데없는 허탄한 말도 하지 않고 꼭 필요한 진리의 말만 내고 계신지요? 온전한 온유를 이룬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걸림이 되지 않고,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을뿐더러 변화시켜 나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열심히 마음밭을 개간해야 합니다. 거친 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떨기도 뽑아내야지요. 불필요한 것을 걸러내고 거름도 주면서 개간하면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서 미움, 시기, 질투, 다툼, 판단, 정죄, 교만 등 비진리, 육신의 생각을 벗어 버리면 온유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온유한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본문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기업이란 “선대로부터 이어오는 재산과 사업 또는 기초가 되는 업”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이 세상에 속한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의 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혹자는 “구원받아 천국 가면 그만이지. 개인적으로 땅을 꼭 받아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 충성한 것만큼 개개인에게 상급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는 교회만 왔다갔다 하고, 어떤 사람은 전도하고 충성하며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애통하며 간구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생명을 잃기까지 헌신하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기 다르게 충성하였는데 똑같은 집에, 똑같은 상급을 주신다면 하나님을 어찌 ‘공평하시며 공의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시기에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바로 자신을 낮추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며 덕을 갖춰 온유함을 이룬 사람이 영혼 구원과 사명 감당에 최선을 다했으니 하늘나라에서 넓은 땅을 주어, 큰 집을 지을 수 있는 터전을 주시지요.
온유하여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 이르게 하였으니, 천국에서도 그들이 감사하여 함께 사랑을 나누려고 방문할 텐데, 많은 사람을 맞을 집터도 넓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마음 중심에서 존경하고 깃들이는 것이 천국에서는 큰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낮아지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섬기고 희생하였지만, 하늘나라에선 ‘큰 자’의 권세를 누리며, 큰 땅을 소유하게 되지요. 이렇게 주어진 넓은 땅에 이 세상에서 충성으로, 봉사로, 헌금으로 드려진 천국 집의 재료를 가지고, 우리 주님의 지휘 아래 멋지고 아름다운 내 집이 지어집니다. 이 넓은 땅에 정원과 호수, 수영장 등 각종 시설물을 짓게 되지요. 그러나 한 번 받은 천국 땅과 상급은 천국에서 더 이상 늘릴 수도, 나누어 줄 수도, 구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사랑과 덕으로 많은 사람을 품어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 많은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 )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주는 마음이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 )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이다.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 )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의 마음을 이룰 수 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옥토’란
땅이 고르고 비옥하여 씨를 뿌리면 싹이 자라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내는 밭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의와 틀에 매여 있는 단단한 길가밭과 같지 않고 부드럽다.
또 돌이나 가시떨기 즉 비진리나 육신의 생각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며, 하나님 말씀에 오직 아멘과 예로 순종하기에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