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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2
제48과육의 흔적을 변환시켜 성정대로 쓰임 받기까지
히 10:22
읽을말씀 : 히 10:22 | 외울말씀 : 벧후 1:4 ㅣ 참고 말씀: 살전 5:23
교육목표 : 육의 흔적을 완전히 변환시킨 후 자기만이 가진 성정의 특징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게 한다.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와 영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일단 깨끗한 마음 그릇이 준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준비된 그릇에 영의 내용물들을 채워 나가기 시작한 상태를 ‘결여’라 하고 그릇의 반쯤 넘어선 상태를 ‘부족’이라 합니다. 그릇에 영의 내용물을 완전히 채우면 ‘온 영’이라 하지요. 그런데 4단계 80%부터 5단계 50% 미만까지는 아직 곳곳에 빈 공간이 조금은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믿음의 5단계 50%를 넘어야 빈 공간까지도 완전히 채웠다 할 수 있습니다.
1. 육의 흔적을 변환시키는 과정
어떤 사람은 덕과 사랑이 넘치지만 기질적으로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지 않아 끊어야 할 때 정확히 끊지 못합니다. 베풀기는 즐겨하는데 기분에 따라 즉흥적인 사람도 있고, 성실하고 바른 모습이지만 다소 차갑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으로 들어오면 이런 성품이나 기질적인 면이 악의 모양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육의 흔적으로 남아 온전한 영의 마음과는 차이가 납니다.
육의 흔적 중에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영적으로 결여되고 부족한 것은 채워야 영의 열매가 온전해져 온 영의 사람이 되지요. 이것을 ‘육의 흔적의 변환’이라 합니다. 육의 흔적이 신의 성품 안에 녹아지면서 영적인 것으로 변한다는 의미로서 인성도 사람의 인성이 아닌 신의 성품에 속한 인성으로 바뀝니다.
가령, 소극적인 사람은 그의 소극적인 면이 섬세함으로 승화됩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면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승화되지요. 또한 사리 판단이 빠르고 꾀가 있는 사람은 지혜롭고 민첩하게 바뀝니다. 답답하고 무딘 사람이라도 그 장점을 살려 진중한 모습으로 변환되지요. 이처럼 육의 흔적을 변환시켜 나가는 과정은 믿음의 4단계부터 믿음의 5단계 50%를 넘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2. 결여를 채우는 육의 흔적의 변환 1단계
믿음의 4단계 50% 미만에서는 육의 흔적으로 인한 결여를 채워야 합니다. 결여란 아예 없거나 조금밖에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랑의 결여를 채워야 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은 사랑의 분야에 결여가 생깁니다. 영으로 들어와 마음에 악은 없다 해도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일방적으로 보듬어 주고 용서만 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 여기기도 하고, 반대로 일방적으로 질책하고 책망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하기도 하지요.
부모로부터 따뜻한 관심과 이해와 용서를 받고 때로는 잘못에 대해 책망과 체벌을 적절히 받으며 이것이 부모의 사랑임을 깨달은 사람은 단지 용서하고 품어 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책망하고 외면하는 것도 사랑임을 마음에서 깨닫게 됩니다. 반면에 무조건적인 이해와 사랑만 받으며 성장하거나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성장하게 되면 사랑의 결여가 생길 수 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상대를 보듬어야 할지, 책망하고 외면해야 할지, 용서하고 품어야 할지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성장하면서 생긴 사랑의 결여를 채워야 온전한 영의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영의 지식의 결여를 채워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 지식으로 쌓아 왔다고는 하나 자기 마음을 온전히 영으로 이루지 못함으로 인해 그것이 결여로 자리 잡은 경우입니다. 영의 깊이가 더할수록 말씀을 깨닫고 적용하는 차원이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그러나 영의 지식이 결여된 사람은 자기가 마음에 이룬 한계 안에서만 그 말씀을 적용하므로 때로는 원하는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온전한 선의 결여를 채워야 합니다. 이 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감정이 없고 마음이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선에 비하면 아직은 소극적인 수준의 선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선은 악한 상대에게 나쁜 감정이 없음은 물론, 선대하고 감동을 주어 그를 변화시키는 차원입니다. 나아가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차원이지요. 이러한 온전한 선에 비교해 볼 때 거리가 멀다 할 수 있으므로 ‘결여’라고 합니다.
비유를 들면, 규정 속도가 60km인 1차선 도로를 달리는데, 뒤에서 비상등을 켠 차가 급속도로 달려옵니다. 이때 온전한 선의 결여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교통법규를 준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뒤따라 오는 운전자의 입장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 차가 추월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될 때까지만이라도 조금 빨리 달려 주면 될 텐데, 교통법규를 지켜야 한다는 한계 안에서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3. 부족을 채우는 육의 흔적의 변환 2단계
믿음의 4단계 50% 이상 80% 미만에서는 육의 흔적으로 인해 부족 현상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부족’이란 온 영의 차원과 비교할 때 아직은 부족하다는 의미로서, 아예 없거나 조금밖에 없는 ‘결여?와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온 영의 사람이 되기 위해 채워야 할 분야는 무엇일까요?
먼저, 사랑의 부족을 채워야 합니다. 가령,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해 주기로 했을 때, 어느 선까지 해야 할지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되, 어떤 때는 선을 그어야 하고, 어떤 때는 도가 넘치도록 해 줘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똑같이 이해하고 품는다 해도 어떤 경우는 선을 그어 상대가 스스로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어떤 경우는 넘치는 위로와 격려를 통해 상대가 힘을 얻고 변화되도록 해야 하지요. 따라서 더 깊이 있고, 섬세한 사랑의 차원을 깨달아 부족한 분야를 채워야 합니다.
다음으로, 영의 지식의 부족을 채워야 합니다. 똑같은 영의 지식이라도 마음을 얼마나 영으로 이뤘느냐에 따라 활용 범위와 방법이 달라집니다. 한 가지 영의 지식을 열 가지로 활용하고 적용할 수 있다고 가정할 때, 영의 지식이 부족하면 아직 대여섯 가지로밖에 활용하지 못하지요.
만일 어떤 여 성도가 이혼 문제로 상담을 요청했는데 무조건 ‘이혼하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만 적용합니다. 물론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남편의 심한 핍박으로 인해 아내가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면 경우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깊이 있게 깨달아 오직 성령의 감동 속에 영의 지식을 적재적소에 활용해야 더욱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온전한 선의 부족입니다. 가령, 규정 속도가 60km인 1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비상등을 켠 차가 급속도로 달려옵니다. 이때 온전한 선이 부족한 사람은 뒤차의 입장을 생각해 빨리 달릴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최대한 상대를 배려하지만 매번 그렇게 행하지는 못하지요.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한다면 결여에 해당되지만, 배려하되 항상 그런 것이 아니라면 부족입니다.
4. 육의 흔적의 변환을 통해 성정대로 쓰임 받기까지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와 육의 흔적이 변환되는 과정을 거쳐 믿음의 5단계에서 온전히 변환되면 그때부터는 ‘성정’ 즉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기질이나 성품적인 면’이 신의 성품 안에서 아름답게 발휘됩니다. 전에는 고유의 기질이나 성품이 육의 흔적으로 남아 온전함을 이루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면, 육의 흔적을 온전히 변환시킨 후부터는 그만의 특별한 장점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 80%부터 5단계 5% 미만은 아직 육의 흔적이 온전히 변환되어서 활용해 나가는 단계는 아닙니다. 육의 흔적이 나올 때도 있고, 변환되어 나올 때도 있어서 스스로 ‘내가 영인가, 온 영인가?’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4단계 80%부터는 온 영으로 인정해 주시며 그를 친히 주관하여 이끌어 가십니다. 엘리야, 에녹, 아브라함, 모세 등은 육의 흔적을 완전히 변환시킨 후, 자기만이 가진 성정의 특징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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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을 채워 보세요.
1. 육의 흔적 중에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영적으로 결여되고 부족한 것은 채워야 영의 열매가 온전해져 온 영의 사람이 된다. 이것을 ( )이라 한다.
2.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와 육의 흔적이 변환되는 과정을 거쳐 믿음의 5단계에서 온전히 변환되면 그때부터는 ( ) 즉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기질이나 성품적인 면’이 신의 성품 안에서 아름답게 발휘된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241~24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육의 흔적을 변환시킨 뒤 성정대로 쓰임 받은 모세
모세는 자기 동족을 때리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일 만큼 의분이 있고 급한 성품도 있었다. 하지만 변화된 후에는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다고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예전의 의분과 급한 성품이 백성을 향한 열정으로 바뀌었다.
뜨거운 성품이 있기에 온전히 변화된 후에는 수많은 백성을 마음 안에 다 담을 수 있는 큰 자가 되었다. 만약 모세가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한 성품이었다면, 백성들을 향한 열정으로 출애굽의 지도자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교육목표 : 육의 흔적을 완전히 변환시킨 후 자기만이 가진 성정의 특징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게 한다.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와 영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일단 깨끗한 마음 그릇이 준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준비된 그릇에 영의 내용물들을 채워 나가기 시작한 상태를 ‘결여’라 하고 그릇의 반쯤 넘어선 상태를 ‘부족’이라 합니다. 그릇에 영의 내용물을 완전히 채우면 ‘온 영’이라 하지요. 그런데 4단계 80%부터 5단계 50% 미만까지는 아직 곳곳에 빈 공간이 조금은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믿음의 5단계 50%를 넘어야 빈 공간까지도 완전히 채웠다 할 수 있습니다.
1. 육의 흔적을 변환시키는 과정
어떤 사람은 덕과 사랑이 넘치지만 기질적으로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지 않아 끊어야 할 때 정확히 끊지 못합니다. 베풀기는 즐겨하는데 기분에 따라 즉흥적인 사람도 있고, 성실하고 바른 모습이지만 다소 차갑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으로 들어오면 이런 성품이나 기질적인 면이 악의 모양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육의 흔적으로 남아 온전한 영의 마음과는 차이가 납니다.
육의 흔적 중에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영적으로 결여되고 부족한 것은 채워야 영의 열매가 온전해져 온 영의 사람이 되지요. 이것을 ‘육의 흔적의 변환’이라 합니다. 육의 흔적이 신의 성품 안에 녹아지면서 영적인 것으로 변한다는 의미로서 인성도 사람의 인성이 아닌 신의 성품에 속한 인성으로 바뀝니다.
가령, 소극적인 사람은 그의 소극적인 면이 섬세함으로 승화됩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면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승화되지요. 또한 사리 판단이 빠르고 꾀가 있는 사람은 지혜롭고 민첩하게 바뀝니다. 답답하고 무딘 사람이라도 그 장점을 살려 진중한 모습으로 변환되지요. 이처럼 육의 흔적을 변환시켜 나가는 과정은 믿음의 4단계부터 믿음의 5단계 50%를 넘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2. 결여를 채우는 육의 흔적의 변환 1단계
믿음의 4단계 50% 미만에서는 육의 흔적으로 인한 결여를 채워야 합니다. 결여란 아예 없거나 조금밖에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랑의 결여를 채워야 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은 사랑의 분야에 결여가 생깁니다. 영으로 들어와 마음에 악은 없다 해도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일방적으로 보듬어 주고 용서만 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 여기기도 하고, 반대로 일방적으로 질책하고 책망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하기도 하지요.
부모로부터 따뜻한 관심과 이해와 용서를 받고 때로는 잘못에 대해 책망과 체벌을 적절히 받으며 이것이 부모의 사랑임을 깨달은 사람은 단지 용서하고 품어 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책망하고 외면하는 것도 사랑임을 마음에서 깨닫게 됩니다. 반면에 무조건적인 이해와 사랑만 받으며 성장하거나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성장하게 되면 사랑의 결여가 생길 수 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상대를 보듬어야 할지, 책망하고 외면해야 할지, 용서하고 품어야 할지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성장하면서 생긴 사랑의 결여를 채워야 온전한 영의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영의 지식의 결여를 채워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 지식으로 쌓아 왔다고는 하나 자기 마음을 온전히 영으로 이루지 못함으로 인해 그것이 결여로 자리 잡은 경우입니다. 영의 깊이가 더할수록 말씀을 깨닫고 적용하는 차원이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그러나 영의 지식이 결여된 사람은 자기가 마음에 이룬 한계 안에서만 그 말씀을 적용하므로 때로는 원하는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온전한 선의 결여를 채워야 합니다. 이 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감정이 없고 마음이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선에 비하면 아직은 소극적인 수준의 선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선은 악한 상대에게 나쁜 감정이 없음은 물론, 선대하고 감동을 주어 그를 변화시키는 차원입니다. 나아가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차원이지요. 이러한 온전한 선에 비교해 볼 때 거리가 멀다 할 수 있으므로 ‘결여’라고 합니다.
비유를 들면, 규정 속도가 60km인 1차선 도로를 달리는데, 뒤에서 비상등을 켠 차가 급속도로 달려옵니다. 이때 온전한 선의 결여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교통법규를 준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뒤따라 오는 운전자의 입장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 차가 추월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될 때까지만이라도 조금 빨리 달려 주면 될 텐데, 교통법규를 지켜야 한다는 한계 안에서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3. 부족을 채우는 육의 흔적의 변환 2단계
믿음의 4단계 50% 이상 80% 미만에서는 육의 흔적으로 인해 부족 현상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부족’이란 온 영의 차원과 비교할 때 아직은 부족하다는 의미로서, 아예 없거나 조금밖에 없는 ‘결여?와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온 영의 사람이 되기 위해 채워야 할 분야는 무엇일까요?
먼저, 사랑의 부족을 채워야 합니다. 가령,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해 주기로 했을 때, 어느 선까지 해야 할지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되, 어떤 때는 선을 그어야 하고, 어떤 때는 도가 넘치도록 해 줘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똑같이 이해하고 품는다 해도 어떤 경우는 선을 그어 상대가 스스로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어떤 경우는 넘치는 위로와 격려를 통해 상대가 힘을 얻고 변화되도록 해야 하지요. 따라서 더 깊이 있고, 섬세한 사랑의 차원을 깨달아 부족한 분야를 채워야 합니다.
다음으로, 영의 지식의 부족을 채워야 합니다. 똑같은 영의 지식이라도 마음을 얼마나 영으로 이뤘느냐에 따라 활용 범위와 방법이 달라집니다. 한 가지 영의 지식을 열 가지로 활용하고 적용할 수 있다고 가정할 때, 영의 지식이 부족하면 아직 대여섯 가지로밖에 활용하지 못하지요.
만일 어떤 여 성도가 이혼 문제로 상담을 요청했는데 무조건 ‘이혼하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만 적용합니다. 물론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남편의 심한 핍박으로 인해 아내가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면 경우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깊이 있게 깨달아 오직 성령의 감동 속에 영의 지식을 적재적소에 활용해야 더욱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온전한 선의 부족입니다. 가령, 규정 속도가 60km인 1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비상등을 켠 차가 급속도로 달려옵니다. 이때 온전한 선이 부족한 사람은 뒤차의 입장을 생각해 빨리 달릴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최대한 상대를 배려하지만 매번 그렇게 행하지는 못하지요.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한다면 결여에 해당되지만, 배려하되 항상 그런 것이 아니라면 부족입니다.
4. 육의 흔적의 변환을 통해 성정대로 쓰임 받기까지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와 육의 흔적이 변환되는 과정을 거쳐 믿음의 5단계에서 온전히 변환되면 그때부터는 ‘성정’ 즉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기질이나 성품적인 면’이 신의 성품 안에서 아름답게 발휘됩니다. 전에는 고유의 기질이나 성품이 육의 흔적으로 남아 온전함을 이루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면, 육의 흔적을 온전히 변환시킨 후부터는 그만의 특별한 장점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 80%부터 5단계 5% 미만은 아직 육의 흔적이 온전히 변환되어서 활용해 나가는 단계는 아닙니다. 육의 흔적이 나올 때도 있고, 변환되어 나올 때도 있어서 스스로 ‘내가 영인가, 온 영인가?’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4단계 80%부터는 온 영으로 인정해 주시며 그를 친히 주관하여 이끌어 가십니다. 엘리야, 에녹, 아브라함, 모세 등은 육의 흔적을 완전히 변환시킨 후, 자기만이 가진 성정의 특징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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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을 채워 보세요.
1. 육의 흔적 중에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영적으로 결여되고 부족한 것은 채워야 영의 열매가 온전해져 온 영의 사람이 된다. 이것을 ( )이라 한다.
2.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와 육의 흔적이 변환되는 과정을 거쳐 믿음의 5단계에서 온전히 변환되면 그때부터는 ( ) 즉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기질이나 성품적인 면’이 신의 성품 안에서 아름답게 발휘된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241~24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육의 흔적을 변환시킨 뒤 성정대로 쓰임 받은 모세
모세는 자기 동족을 때리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일 만큼 의분이 있고 급한 성품도 있었다. 하지만 변화된 후에는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다고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예전의 의분과 급한 성품이 백성을 향한 열정으로 바뀌었다.
뜨거운 성품이 있기에 온전히 변화된 후에는 수많은 백성을 마음 안에 다 담을 수 있는 큰 자가 되었다. 만약 모세가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한 성품이었다면, 백성들을 향한 열정으로 출애굽의 지도자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16-11-25
제47과선과 사랑을 채워 가는 믿음의 4단계
엡 4:13
읽을말씀 : 엡 4:13 | 외울말씀 : 빌 3:14 ㅣ 참고 말씀: 벧후 1:4~7
교육목표 : 불같은 기도로 자기를 깨뜨림으로 영의 정체기를 겪지 않고 신속히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 온전한 영의 열매가 되게 한다.
믿음의 3단계는 마음의 악을 버려가는 단계이므로 악을 버린 만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맺힐 조짐을 보입니다. 나아가 믿음의 4단계에 이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열매가 100% 맺히면 온 영, 곧 믿음의 5단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믿음의 5단계에 들어가서도 모든 열매가 얼마나 온전히 익었느냐에 따라 더 깊은 온 영의 차원에 이르러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밝히 깨닫고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4단계에서 믿음의 5단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100으로 나눈다면 1~10% 미만까지는 초입이라고 합니다. 10~20% 미만은 정체기, 20~50% 미만은 중엽, 50% 이상은 말엽이라 할 수 있지요.
1. 영의 열매가 온전치 않은 믿음의 4단계 초입
믿음의 4단계 초입에서는 스스로 보기에 악은 다 버린 것 같지만 “내가 영으로 들어갔다.”라고 자신 있게 고백하기에는 조금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믿음의 3단계 말엽인지, 아니면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왔는지 정확히 분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변에서 볼 때도 악한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저 사람은 확실히 영의 사람이다.”라고 인정하기에는 주저할 수 있지요.
그러면 믿음의 4단계 초입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째, 열매가 온전치 못합니다. 믿음의 4단계 초입에서는 불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고, 항상 순종할 자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명심하여 그대로 행하고자 합니다. 그런데도 열매가 온전치 않은 것은, 마음에 맺힌 영의 열매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온유하기는 한데 절제의 열매가 부족하다든가, 충성은 하는데 화평의 열매가 온전치 못하기도 합니다. 또 사랑한다 해도 영적인 사랑이 온전히 맺힌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아직 영의 열매들이 마음에 온전히 맺힌 것이 아니므로 실제 보이는 열매 역시 온전치 못합니다. 부흥의 열매를 못 내기도 하고, 일 처리도 완벽하지 못하지요. 또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음에도 어느 선에서 멈춰 버립니다.
둘째, 마음에 악은 없지만 온전한 선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4단계 초입에서는 악한 의도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주변 사람을 어렵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악을 행치는 않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아닌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상대를 온전히 배려하지 못하거나 상대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해 주지 못합니다. 선하다 하지만 온전한 선이 아닌 것입니다. 또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므로 결과적으로 일이 지체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남에게는 비겁함이나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하지요. 악은 벗었지만 아직 마음에 진리가 온전히 채워지지 않았으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온전한 선이 아닌 모습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셋째, 육체의 결여가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믿음의 3단계 말엽에 있는 사람 중에도 육체의 결여 때문에 믿음 성장이 지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4단계 초입에 들어온 사람의 육체의 결여는 3단계 말엽의 결여와는 다릅니다. 악은 다 버렸으되 더 온전한 열매를 내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이지요.
예를 들면, 성격적인 결여로 인해 나서야 할 때도 잠잠히 있는 경우, 성장 과정에서 생긴 결여로 인해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한 경우, 불편한 마음이나 감정은 없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섬겨 주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나 주변 사람이 볼 때도 아직 온전하다 생각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불같은 기도가 필요한 믿음의 4단계 정체기
믿음의 3단계에서 불같은 기도를 쌓았고 자기 의와 틀을 깨뜨리는 연단의 과정을 잘 겪었다면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와서 정체기 없이 더 깊은 영의 단계로 빠르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 10~20% 미만에 머물러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영의 정체기’라고 합니다.
비록 영의 초입에는 들어왔다 해도 더 이상 사모함을 갖지 못한 채 영의 세계를 뚫어 들어가지 않으면 결국 정체 현상을 겪게 됩니다. 더 깊은 영의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불같은 기도를 통해 ‘자기’가 온전히 깨어지고 없어야 합니다.
여기서 ‘자기’란, 영으로 들어오기 위해 깨뜨려야 하는 ‘육에 속한 자기’와는 다릅니다. 영으로 들어와서도 하나님의 뜻과 하나를 이루어 가기 위해 깨뜨려야 하는 ‘또 다른 자기’를 말합니다. 또한 영으로 들어오면 악이 나오지는 않지만 온전한 선의 마음, 온전한 영의 열매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도 채워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이때 불같이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을 발견할 수 없고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같은 기도가 중요합니다.
3. 주님의 향이 나는 믿음의 4단계 중엽
이 단계에만 들어와도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많은 일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단계에서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첫째, ‘육의 흔적’에 의한 육체의 결여가 조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육의 흔적이란, 성장하면서 습득한 여러 지식과 경험, 부모에게 전달받은 성품이나 기질 등이 영으로 들어가도 흔적처럼 남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나타나는 육체의 결여는 악의 모양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타고난 기 속에서 형성된 각 사람의 ‘성정’에 관한 분야이지요.
성정이란 간단히 말해 ‘타고난 본성?입니다. 어떤 이는 소극적이고 어떤 이는 적극적이며, 어떤 이는 무디고 어떤 이는 예민합니다. 이처럼 타고난 성정으로 인해 성격이나 행동 등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믿음의 4단계 50% 미만까지는 이렇게 성정으로 인해 나타나는 결여를 다듬는 과정입니다.
둘째, 주님의 향이 납니다.
이때부터는 모든 것이 주의 교양으로 바뀌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 주님이 저렇게 하셨겠구나.” 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이 차원에 들어오면 모든 분야에서 영의 열매가 무르익어 가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든지 주님의 향을 내며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셋째, 사랑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믿음의 4단계 20%를 넘어가면 영의 사랑이 점점 더 온전해집니다. 이와 더불어 덕까지 갖춰 많은 사람을 마음으로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사랑으로 바라봐 주고 품어 주니 그에게서 영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영의 사랑이 결국 수많은 영혼을 변화시키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힘이 되므로 풍성한 영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4. 영의 열매가 온전해져 가는 믿음의 4단계 말엽
믿음의 4단계 50% 이상이 되면 육체의 결여된 분야가 없고 이때는 자기가 얼마든지 누릴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기꺼이 포기합니다. 주님을 위해 생명까지 드릴 수 있고 하나님과 신뢰관계가 더욱 온전해집니다. 물론 모든 면이 온전해지려면 당연히 온 영의 차원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믿음의 4단계 50%만 넘어도 그만큼 온전함에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 단계에서는 선과 사랑, 영의 지식을 조금만 더 채우면 믿음의 4단계 80%를 넘어 온 영의 차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영의 차원에서 깊이 들어올수록 1%를 채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믿음의 3단계에서 1% 채우는 것과, 믿음의 4단계 초입에서 1% 채우는 것, 그리고 믿음의 4단계에서도 더 깊이 들어와 1%를 채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영으로 깊이 들어올수록 더 깊고 세미한 분야까지 깨우쳐 변화되어야 비로소 1%가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4단계 80%부터 친히 연단하시며 믿음의 5단계 곧 온 영의 차원에 진입하여 믿음의 선진들처럼 성정대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야(벧후 1:4~7)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룰 수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믿음의 3단계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맺힐 조짐을 보인다. 나아가 믿음의 4단계에 이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 )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열매가 ( ) 맺히면 믿음의 5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2. ( )이란, 성장하면서 습득한 여러 지식과 경험, 부모에게 전달받은 성품이나 기질 등이 영으로 들어가도 흔적처럼 남는 것을 말한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232~24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것은?
온전한 빛의 차원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빛에 흡수되어도 좋을 만큼의 온전한 빛을 이루어 근본 하나님이 계신 4차원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근본 하나님이 계신 4차원의 공간은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고 계신 공간으로서 온전한 참 빛을 이룬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들어갈 수 있다.
교육목표 : 불같은 기도로 자기를 깨뜨림으로 영의 정체기를 겪지 않고 신속히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 온전한 영의 열매가 되게 한다.
믿음의 3단계는 마음의 악을 버려가는 단계이므로 악을 버린 만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맺힐 조짐을 보입니다. 나아가 믿음의 4단계에 이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열매가 100% 맺히면 온 영, 곧 믿음의 5단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믿음의 5단계에 들어가서도 모든 열매가 얼마나 온전히 익었느냐에 따라 더 깊은 온 영의 차원에 이르러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밝히 깨닫고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4단계에서 믿음의 5단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100으로 나눈다면 1~10% 미만까지는 초입이라고 합니다. 10~20% 미만은 정체기, 20~50% 미만은 중엽, 50% 이상은 말엽이라 할 수 있지요.
1. 영의 열매가 온전치 않은 믿음의 4단계 초입
믿음의 4단계 초입에서는 스스로 보기에 악은 다 버린 것 같지만 “내가 영으로 들어갔다.”라고 자신 있게 고백하기에는 조금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믿음의 3단계 말엽인지, 아니면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왔는지 정확히 분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변에서 볼 때도 악한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저 사람은 확실히 영의 사람이다.”라고 인정하기에는 주저할 수 있지요.
그러면 믿음의 4단계 초입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째, 열매가 온전치 못합니다. 믿음의 4단계 초입에서는 불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고, 항상 순종할 자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명심하여 그대로 행하고자 합니다. 그런데도 열매가 온전치 않은 것은, 마음에 맺힌 영의 열매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온유하기는 한데 절제의 열매가 부족하다든가, 충성은 하는데 화평의 열매가 온전치 못하기도 합니다. 또 사랑한다 해도 영적인 사랑이 온전히 맺힌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아직 영의 열매들이 마음에 온전히 맺힌 것이 아니므로 실제 보이는 열매 역시 온전치 못합니다. 부흥의 열매를 못 내기도 하고, 일 처리도 완벽하지 못하지요. 또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음에도 어느 선에서 멈춰 버립니다.
둘째, 마음에 악은 없지만 온전한 선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4단계 초입에서는 악한 의도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주변 사람을 어렵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악을 행치는 않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아닌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상대를 온전히 배려하지 못하거나 상대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해 주지 못합니다. 선하다 하지만 온전한 선이 아닌 것입니다. 또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므로 결과적으로 일이 지체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남에게는 비겁함이나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하지요. 악은 벗었지만 아직 마음에 진리가 온전히 채워지지 않았으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온전한 선이 아닌 모습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셋째, 육체의 결여가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믿음의 3단계 말엽에 있는 사람 중에도 육체의 결여 때문에 믿음 성장이 지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4단계 초입에 들어온 사람의 육체의 결여는 3단계 말엽의 결여와는 다릅니다. 악은 다 버렸으되 더 온전한 열매를 내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이지요.
예를 들면, 성격적인 결여로 인해 나서야 할 때도 잠잠히 있는 경우, 성장 과정에서 생긴 결여로 인해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한 경우, 불편한 마음이나 감정은 없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섬겨 주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나 주변 사람이 볼 때도 아직 온전하다 생각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불같은 기도가 필요한 믿음의 4단계 정체기
믿음의 3단계에서 불같은 기도를 쌓았고 자기 의와 틀을 깨뜨리는 연단의 과정을 잘 겪었다면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와서 정체기 없이 더 깊은 영의 단계로 빠르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 10~20% 미만에 머물러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영의 정체기’라고 합니다.
비록 영의 초입에는 들어왔다 해도 더 이상 사모함을 갖지 못한 채 영의 세계를 뚫어 들어가지 않으면 결국 정체 현상을 겪게 됩니다. 더 깊은 영의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불같은 기도를 통해 ‘자기’가 온전히 깨어지고 없어야 합니다.
여기서 ‘자기’란, 영으로 들어오기 위해 깨뜨려야 하는 ‘육에 속한 자기’와는 다릅니다. 영으로 들어와서도 하나님의 뜻과 하나를 이루어 가기 위해 깨뜨려야 하는 ‘또 다른 자기’를 말합니다. 또한 영으로 들어오면 악이 나오지는 않지만 온전한 선의 마음, 온전한 영의 열매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도 채워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이때 불같이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을 발견할 수 없고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같은 기도가 중요합니다.
3. 주님의 향이 나는 믿음의 4단계 중엽
이 단계에만 들어와도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많은 일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단계에서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첫째, ‘육의 흔적’에 의한 육체의 결여가 조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육의 흔적이란, 성장하면서 습득한 여러 지식과 경험, 부모에게 전달받은 성품이나 기질 등이 영으로 들어가도 흔적처럼 남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나타나는 육체의 결여는 악의 모양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타고난 기 속에서 형성된 각 사람의 ‘성정’에 관한 분야이지요.
성정이란 간단히 말해 ‘타고난 본성?입니다. 어떤 이는 소극적이고 어떤 이는 적극적이며, 어떤 이는 무디고 어떤 이는 예민합니다. 이처럼 타고난 성정으로 인해 성격이나 행동 등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믿음의 4단계 50% 미만까지는 이렇게 성정으로 인해 나타나는 결여를 다듬는 과정입니다.
둘째, 주님의 향이 납니다.
이때부터는 모든 것이 주의 교양으로 바뀌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 주님이 저렇게 하셨겠구나.” 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이 차원에 들어오면 모든 분야에서 영의 열매가 무르익어 가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든지 주님의 향을 내며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셋째, 사랑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믿음의 4단계 20%를 넘어가면 영의 사랑이 점점 더 온전해집니다. 이와 더불어 덕까지 갖춰 많은 사람을 마음으로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사랑으로 바라봐 주고 품어 주니 그에게서 영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영의 사랑이 결국 수많은 영혼을 변화시키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힘이 되므로 풍성한 영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4. 영의 열매가 온전해져 가는 믿음의 4단계 말엽
믿음의 4단계 50% 이상이 되면 육체의 결여된 분야가 없고 이때는 자기가 얼마든지 누릴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기꺼이 포기합니다. 주님을 위해 생명까지 드릴 수 있고 하나님과 신뢰관계가 더욱 온전해집니다. 물론 모든 면이 온전해지려면 당연히 온 영의 차원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믿음의 4단계 50%만 넘어도 그만큼 온전함에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 단계에서는 선과 사랑, 영의 지식을 조금만 더 채우면 믿음의 4단계 80%를 넘어 온 영의 차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영의 차원에서 깊이 들어올수록 1%를 채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믿음의 3단계에서 1% 채우는 것과, 믿음의 4단계 초입에서 1% 채우는 것, 그리고 믿음의 4단계에서도 더 깊이 들어와 1%를 채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영으로 깊이 들어올수록 더 깊고 세미한 분야까지 깨우쳐 변화되어야 비로소 1%가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4단계 80%부터 친히 연단하시며 믿음의 5단계 곧 온 영의 차원에 진입하여 믿음의 선진들처럼 성정대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야(벧후 1:4~7)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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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믿음의 3단계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맺힐 조짐을 보인다. 나아가 믿음의 4단계에 이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 )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열매가 ( ) 맺히면 믿음의 5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2. ( )이란, 성장하면서 습득한 여러 지식과 경험, 부모에게 전달받은 성품이나 기질 등이 영으로 들어가도 흔적처럼 남는 것을 말한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232~24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것은?
온전한 빛의 차원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빛에 흡수되어도 좋을 만큼의 온전한 빛을 이루어 근본 하나님이 계신 4차원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근본 하나님이 계신 4차원의 공간은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고 계신 공간으로서 온전한 참 빛을 이룬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들어갈 수 있다.
2016-11-18
제46과하나님께 감사
출 23:16
읽을말씀 : 출 23:16 | 외울말씀 : 시 17:8 l 참고 말씀: 레 23:42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알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스럽고 하나님께도 큰 기쁨이 될까요?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절기 중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장절은 원래 곡식을 자라게 하시고 추수할 수 있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수확한 곡식을 저장한 후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성경에는 수장절을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레위기 23장 3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 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지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감동적인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오늘날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의 개척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마침내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도착한 그곳은 혹독한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지요.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지낸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무엇에 감사해야 할까요?
먼저, 이 세상의 수많은 질병, 사고, 재앙으로부터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명명된 병만 해도 약 1억 2천 2백만 개가 넘습니다. 이중에는 세상 의학으로 완치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합니다.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병, 마음의 병도 심각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살로 이어지는 우울증을 앓고 알코올, 마약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와 명예, 권세도 있고,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도 자살하기도 하지요. 이 외에도 우리가 모르는 병,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병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처럼 질병 많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늘 지켜 주셨습니다.
여 성도 한 분은 ‘양수 과소증’으로 도저히 살릴 길 없었던 태아를 기도를 받고 무사히 출산했습니다. 양수가 거의 없는 태반 속에서 그 연약한 생명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남았지요. 또 한 분은 급성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진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병원에 누워서 수술을 기다리던 중 통회자복을 한 후 기도를 받았는데 수술을 받지 않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으면 만나 주십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각종 재앙과 사고로부터도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지구는 대지진과 가뭄과 산불, 태풍, 폭우, 폭설 등 자연재해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지켜 주십니다.
혹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철저히 돌이키고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면 해결됩니다. 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다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원한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소망이 온전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십니다.
전 세계 수많은 성도들이 『천국』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해졌습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저도 새 예루살렘 성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한 대로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까지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찬양이 있습니다.
“진주문 지나 새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지난 일들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네” 이 찬양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런 은혜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알곡처럼 우리의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 주시며 의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더욱 사랑함으로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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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장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어떻게 하면 질병, 사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지킴 받으며 살 수 있을까요?
3. 올 한 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감사의 조건들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맞아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 다해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진주문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두 개의 문이 있다. 문마다 큰 천사가 지키고 있어 성의 위엄과 권세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한참을 올려다볼 정도로 큰 아치형의 문 전체가 하나의 영롱한 진주로 되어 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며 황금보석 손잡이가 달려 있으나 굳이 손으로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린다.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려면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 내기까지 고통을 인내한 것처럼 믿음의 연단을 잘 통과하여 승리했을 때 들어갈 수 있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알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스럽고 하나님께도 큰 기쁨이 될까요?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절기 중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장절은 원래 곡식을 자라게 하시고 추수할 수 있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수확한 곡식을 저장한 후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성경에는 수장절을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레위기 23장 3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 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지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감동적인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오늘날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의 개척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마침내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도착한 그곳은 혹독한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지요.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지낸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무엇에 감사해야 할까요?
먼저, 이 세상의 수많은 질병, 사고, 재앙으로부터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명명된 병만 해도 약 1억 2천 2백만 개가 넘습니다. 이중에는 세상 의학으로 완치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합니다.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병, 마음의 병도 심각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살로 이어지는 우울증을 앓고 알코올, 마약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와 명예, 권세도 있고,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도 자살하기도 하지요. 이 외에도 우리가 모르는 병,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병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처럼 질병 많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늘 지켜 주셨습니다.
여 성도 한 분은 ‘양수 과소증’으로 도저히 살릴 길 없었던 태아를 기도를 받고 무사히 출산했습니다. 양수가 거의 없는 태반 속에서 그 연약한 생명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남았지요. 또 한 분은 급성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진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병원에 누워서 수술을 기다리던 중 통회자복을 한 후 기도를 받았는데 수술을 받지 않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으면 만나 주십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각종 재앙과 사고로부터도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지구는 대지진과 가뭄과 산불, 태풍, 폭우, 폭설 등 자연재해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지켜 주십니다.
혹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철저히 돌이키고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면 해결됩니다. 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다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원한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소망이 온전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십니다.
전 세계 수많은 성도들이 『천국』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해졌습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저도 새 예루살렘 성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한 대로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까지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찬양이 있습니다.
“진주문 지나 새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지난 일들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네” 이 찬양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런 은혜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알곡처럼 우리의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 주시며 의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더욱 사랑함으로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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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장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어떻게 하면 질병, 사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지킴 받으며 살 수 있을까요?
3. 올 한 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감사의 조건들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맞아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 다해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진주문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두 개의 문이 있다. 문마다 큰 천사가 지키고 있어 성의 위엄과 권세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한참을 올려다볼 정도로 큰 아치형의 문 전체가 하나의 영롱한 진주로 되어 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며 황금보석 손잡이가 달려 있으나 굳이 손으로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린다.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려면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 내기까지 고통을 인내한 것처럼 믿음의 연단을 잘 통과하여 승리했을 때 들어갈 수 있다.
2016-11-11
제45과영혼이 잘되어 만사형통한 믿음의 4단계
요 1:2
읽을말씀 : 요 1:2 | 외울말씀 : 빌 3:8 l 참고 말씀: 요일 3:21~22
교육목표 : 악은 모양이라도 벗어 버림으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며 만사형통한 축복을 받는 영의 사람이 되게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이 많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계명을 지켜 행하면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3단계까지는 열심히 심은 대로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넘치게 부어 주십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에 들어오면 마음의 죄성까지 버린 ‘영의 사람’이기에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축복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영혼이 잘되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임하지요. 요한삼서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말씀한 대로 이루어집니다.
1. 믿음의 4단계에 이르면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받아
영혼이 잘된다는 것은, 영과 혼과 육의 질서가 바로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죽었던 영이 살아난 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함으로 영이 주인으로서 혼과 육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상태이지요.
원래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지으셨습니다. 생령인 아담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 그리고 영의 지배를 받는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자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영계의 법칙대로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영이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영이 소멸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영의 활동이 중지되었다는 뜻입니다. 영이 죽으니 영의 지배를 받던 혼이 사람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혼’이란 두뇌의 기억 장치와 그 안에 담긴 모든 지식, 그리고 그것을 떠올리고 활용하는 모든 작용을 총칭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체험한 것을 기억하고 떠올려 활용하는 것이 다 혼의 작용이지요.
영이 주인 역할을 할 때는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진리의 지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지자 원수 마귀 사단이 혼을 통해 사람을 주관해 가니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의 마음은 비진리로 물들어 갔습니다. 그리하여 불순종한 아담의 후손들은 혼과 육으로 지어진 짐승과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전도서 3장 18절에 보면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여시고, 그를 영접하는 자마다 죽었던 영이 살아나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며, 나아가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만큼 마음에 비진리는 벗어지고 진리로 채워집니다. 이것이 곧 성령으로 영을 낳는 것이며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우리 마음이 진리로 채워지면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신 사람의 형상을 되찾게 되는데 바로 이 상태를 ‘영혼이 잘됐다? 하는 것입니다.
2.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아 하나님께 큰 영광
믿음의 4단계에 들어가면 악은 모양이라도 버린 상태이므로 영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 ‘영의 사람?이라 부릅니다. 영이 혼을 지배하면 말씀인 진리가 마음 전체를 사로잡으니 자기 생각이나 자기 뜻이 동원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온전히 주관하시니 시험 환난을 피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지킴을 받습니다.
영혼이 잘된 사람은 오직 전지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임합니다.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다?는 것은 질병 없이 몸이 건강한 것만이 아니라 가정, 일터, 사업터가 잘되고 모든 것이 형통한 것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영의 사람은 범죄하지 않으므로 영적인 권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육적인 분야에서도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구하여 응답을 받습니다.
우선, 성령의 주관을 받으니 범사가 형통합니다. 믿음의 4단계는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차원이 아니라 마음 자체가 진리로 변화되었기에 저절로 진리의 행함이 나오는 단계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의 사람이 되면 건강의 축복을 받습니다. 죄가 없기에 질병이나 연약함으로 고통받지 않습니다. 항상 성령의 불담으로 지킴 받으니 질병이 틈타지 않을 뿐 아니라 혹여 틈탔다 해도 기도하면 즉시 성령의 불로 태움 받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뒤에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말씀하십니다. 죄로 인해 병이 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때 치료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하신 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때 치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질의 축복도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축복을 주십니다. 따라서 영의 사람이 되기 전에도 믿음으로 심고 구할 때는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곧 두 배 이상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 영의 사람이 되면 하나를 심어도 30배, 60배 이상 거두며, 나아가 믿음의 5단계, 온 영의 사람이 되면 60배, 100배로도 거둡니다.
마태복음 13장 23절에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축복받을 만한 일이나 별다른 기술이나 재능이 없다 해도 영으로 들어가면 신명기 28장 약속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2~6)
이뿐 아니라 영의 사람이 되면 가정복음화가 이뤄집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면 그로 인해 그 가정까지 구원을 받습니다.
영으로 들어오는 만큼 영적인 권세가 따르므로 가족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전도할 때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수 없고 상대도 그 선과 사랑에 더 쉽게 마음 문을 열게 됩니다.
영의 사람이 되면 범사에 섬기고 낮아지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씀씀이, 사소한 말 한마디와 행동도 아름답고 선하게 나타납니다. 착한 행실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변을 감동시키고 하나님께서도 감동하심으로 범사에 응답과 축복으로 함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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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 )는 것은, 영과 혼과 육의 질서가 바로잡히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죽었던 영이 살아난 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함으로 영이 주인으로서 혼과 육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상태이다.
2. ( )는 것은 질병 없이 몸이 건강한 것만이 아니라 가정, 일터, 사업터가 잘되고 모든 것이 형통한 것을 말한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223~23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영이란?
‘썩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요, ‘영원하며 참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시라’ 하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이처럼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속성 중 일부를 나눠 주셨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은 생령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아담은 범죄함으로 육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육으로 변질된 사람에게 있어 반드시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교육목표 : 악은 모양이라도 벗어 버림으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며 만사형통한 축복을 받는 영의 사람이 되게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이 많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계명을 지켜 행하면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3단계까지는 열심히 심은 대로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넘치게 부어 주십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에 들어오면 마음의 죄성까지 버린 ‘영의 사람’이기에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축복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영혼이 잘되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임하지요. 요한삼서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말씀한 대로 이루어집니다.
1. 믿음의 4단계에 이르면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받아
영혼이 잘된다는 것은, 영과 혼과 육의 질서가 바로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죽었던 영이 살아난 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함으로 영이 주인으로서 혼과 육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상태이지요.
원래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지으셨습니다. 생령인 아담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 그리고 영의 지배를 받는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자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영계의 법칙대로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영이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영이 소멸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영의 활동이 중지되었다는 뜻입니다. 영이 죽으니 영의 지배를 받던 혼이 사람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혼’이란 두뇌의 기억 장치와 그 안에 담긴 모든 지식, 그리고 그것을 떠올리고 활용하는 모든 작용을 총칭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체험한 것을 기억하고 떠올려 활용하는 것이 다 혼의 작용이지요.
영이 주인 역할을 할 때는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진리의 지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지자 원수 마귀 사단이 혼을 통해 사람을 주관해 가니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의 마음은 비진리로 물들어 갔습니다. 그리하여 불순종한 아담의 후손들은 혼과 육으로 지어진 짐승과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전도서 3장 18절에 보면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여시고, 그를 영접하는 자마다 죽었던 영이 살아나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며, 나아가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만큼 마음에 비진리는 벗어지고 진리로 채워집니다. 이것이 곧 성령으로 영을 낳는 것이며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우리 마음이 진리로 채워지면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신 사람의 형상을 되찾게 되는데 바로 이 상태를 ‘영혼이 잘됐다? 하는 것입니다.
2.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아 하나님께 큰 영광
믿음의 4단계에 들어가면 악은 모양이라도 버린 상태이므로 영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 ‘영의 사람?이라 부릅니다. 영이 혼을 지배하면 말씀인 진리가 마음 전체를 사로잡으니 자기 생각이나 자기 뜻이 동원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온전히 주관하시니 시험 환난을 피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지킴을 받습니다.
영혼이 잘된 사람은 오직 전지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임합니다.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다?는 것은 질병 없이 몸이 건강한 것만이 아니라 가정, 일터, 사업터가 잘되고 모든 것이 형통한 것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영의 사람은 범죄하지 않으므로 영적인 권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육적인 분야에서도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구하여 응답을 받습니다.
우선, 성령의 주관을 받으니 범사가 형통합니다. 믿음의 4단계는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차원이 아니라 마음 자체가 진리로 변화되었기에 저절로 진리의 행함이 나오는 단계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의 사람이 되면 건강의 축복을 받습니다. 죄가 없기에 질병이나 연약함으로 고통받지 않습니다. 항상 성령의 불담으로 지킴 받으니 질병이 틈타지 않을 뿐 아니라 혹여 틈탔다 해도 기도하면 즉시 성령의 불로 태움 받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뒤에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말씀하십니다. 죄로 인해 병이 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때 치료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하신 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때 치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질의 축복도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축복을 주십니다. 따라서 영의 사람이 되기 전에도 믿음으로 심고 구할 때는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곧 두 배 이상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믿음의 4단계, 영의 사람이 되면 하나를 심어도 30배, 60배 이상 거두며, 나아가 믿음의 5단계, 온 영의 사람이 되면 60배, 100배로도 거둡니다.
마태복음 13장 23절에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축복받을 만한 일이나 별다른 기술이나 재능이 없다 해도 영으로 들어가면 신명기 28장 약속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2~6)
이뿐 아니라 영의 사람이 되면 가정복음화가 이뤄집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면 그로 인해 그 가정까지 구원을 받습니다.
영으로 들어오는 만큼 영적인 권세가 따르므로 가족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전도할 때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수 없고 상대도 그 선과 사랑에 더 쉽게 마음 문을 열게 됩니다.
영의 사람이 되면 범사에 섬기고 낮아지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씀씀이, 사소한 말 한마디와 행동도 아름답고 선하게 나타납니다. 착한 행실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변을 감동시키고 하나님께서도 감동하심으로 범사에 응답과 축복으로 함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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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 )는 것은, 영과 혼과 육의 질서가 바로잡히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죽었던 영이 살아난 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함으로 영이 주인으로서 혼과 육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상태이다.
2. ( )는 것은 질병 없이 몸이 건강한 것만이 아니라 가정, 일터, 사업터가 잘되고 모든 것이 형통한 것을 말한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223~23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영이란?
‘썩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요, ‘영원하며 참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시라’ 하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이처럼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속성 중 일부를 나눠 주셨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은 생령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아담은 범죄함으로 육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육으로 변질된 사람에게 있어 반드시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2016-11-04
제44과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의 4단계
요 4:24
읽을말씀 : 요 4:24 | 외울말씀 : 요 5:3 l 참고 말씀: 요 14:15
교육목표 : 주님을 지극히 사랑함으로 범사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부족함이 없는 영의 사람의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목적지를 향해 계단을 오를 때에 한 계단, 한 계단 차례대로 밟아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단계를 거쳐 성장합니다. 마음의 악을 모두 버리고 내가 옳다는 착각, 육체의 결여, 교만까지 정리되면 믿음의 4단계에 진입합니다. 바로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영의 사람은 죄악을 벗어 버리고 거룩하게 변화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악이 없기에 고난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맞는다 해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현실은 막막하다 해도 마음에서 기쁨과 평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행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체가 즐겁지요.
이때부터 비로소 영이신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라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신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루었다 할 수 있지요. 그러면 믿음의 4단계에 진입한 영의 사람은 어떠한 특징이 있을까요?
1. 주님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주님을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4단계의 믿음에 이르면 하나님과 주님을 사랑하는 깊이가 이전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물론 믿음의 3단계에서도 계명을 지키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말씀했지요. 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마음의 죄성까지 다 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님, 사랑해요.”라고 고백하는 것이 조금은 민망합니다. 반면에 성결되어 믿음의 4단계에 이르면 담대하게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고, 하나님도 그 고백을 기뻐 받으시므로 위로부터 성령의 감동이 임하지요.
그래서 믿음의 4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 하나님, 주님!” 하고 부르기만 해도 진한 감동이 밀려와 금세 눈물이 흘러내리고 그 사랑이 변함없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대할 때도 마음이 다릅니다. 만약 누군가 애매한 말로 자신을 모함한다고 합시다.
이때 3단계의 믿음에 있는 사람이라면 순간 ‘너무한다, 피하고 싶다.’는 서운함과 미움의 감정이 스치기도 합니다. 또 진리를 알기 때문에 “감사하자, 기뻐하자.” 하며 마음을 다스리지만 온전한 감사가 나오지는 않지요.
하지만 믿음의 4단계에 들어선 사람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해도 마음에 요동이 없습니다. 상대가 밉다는 생각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았고 스스로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로 감사와 기쁨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런 상황을 통해 더욱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고, 상대가 범죄하지 않도록 기도하게 되지요.
이처럼 똑같은 상황이라 해도 믿음의 4단계에 이르면 선의 향, 사랑의 향이 다릅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상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주고 싶어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면 모든 계명을 기쁨으로 지키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한 대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사랑하는 증거를 나타내십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할 때 하나님 편에서도 그런 자녀들을 지극히 사랑하며 항상 만나 주십니다.
2. 대가를 바라지 않고 조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믿음의 3단계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깨우침으로 사랑하려고 애씁니다. 반면, 믿음의 4단계에서는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할 뿐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합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사무치도록 느끼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요. 어떤 시험 환난에도 마음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가 우러나오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질 줄 알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지키려다 생명이 위태로워졌다.”고 근심하며 슬픔 가운데 기도한 것이 아니라, 평안하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지요.
다니엘 6장 10절에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할 뿐이기에 사나 죽으나 오직 감사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바울과 실라도 그러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매를 맞고 차꼬에 채인 채 깊은 감옥에 갇혔으나 원망 불평하지 않았고, 앞으로 어찌 될까 염려 근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감동 속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립니다. 이것이 믿음의 4단계의 모습이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참 자녀의 모습입니다. 이 감동의 찬양이 울려 퍼질 때 홀연히 큰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벗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지요.
믿음의 4단계에 이르게 되면 무조건 하나님이 좋고 진리가 좋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불철주야 기도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은혜만으로도 감사하여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까 궁구하게 됩니다.
3.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면 부귀영화도 아깝지 않고 자신의 생명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빌립보서 3장 7~8절에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금세에 백배의 축복을 받고 내세에 영생의 축복을 받는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여기서 가족이나 집과 전토를 버린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영이신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한다고 해서 가족들과의 관계를 끊고 도리를 하지 말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욱 가족들을 섬기며 가족의 일원으로서 온 집에 충성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이 그 섬김과 사랑에 감동받아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이끄는 것이 하나님 뜻이지요. 다만 가족이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면 범사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니 부족함이 없습니다. 위로부터 진정한 행복이 임합니다. 또한 마음에 악이 없으니 선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며 영원히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줄 수 있지요(고전 13:4~7).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면 처음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핍박이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이 잘되어 믿음의 4단계에 이르면 오히려 핍박이 축복으로 바뀌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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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믿음의 4단계의 특징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① 주님을 ( ) 사랑한다.
② ( )를 바라지 않고 ( ) 없이 하나님을 사랑한다.
③ 모든 것을 버리고 ( )을 첫째로 사랑한다.
2. 여러분에게 다니엘 선지자나 사도 바울과 같은 시험이 왔다면 어떠한 믿음의 행함을 내보이시겠습니까?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217~22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믿음의 4단계에 주어지는 천국 처소와 면류관
처 소 : 믿음의 4단계가 들어가는 3천층의 집은 주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영적인 향이 흘러나오므로 문패가 없어도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집은 복층 건물로 정금과 보석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3천층에서는 본인이 원하는 모든 시설을 소유할 수 있다.
면류관 :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계 2:10).
교육목표 : 주님을 지극히 사랑함으로 범사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부족함이 없는 영의 사람의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목적지를 향해 계단을 오를 때에 한 계단, 한 계단 차례대로 밟아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단계를 거쳐 성장합니다. 마음의 악을 모두 버리고 내가 옳다는 착각, 육체의 결여, 교만까지 정리되면 믿음의 4단계에 진입합니다. 바로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영의 사람은 죄악을 벗어 버리고 거룩하게 변화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악이 없기에 고난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맞는다 해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현실은 막막하다 해도 마음에서 기쁨과 평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행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체가 즐겁지요.
이때부터 비로소 영이신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라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신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루었다 할 수 있지요. 그러면 믿음의 4단계에 진입한 영의 사람은 어떠한 특징이 있을까요?
1. 주님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주님을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4단계의 믿음에 이르면 하나님과 주님을 사랑하는 깊이가 이전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물론 믿음의 3단계에서도 계명을 지키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말씀했지요. 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마음의 죄성까지 다 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님, 사랑해요.”라고 고백하는 것이 조금은 민망합니다. 반면에 성결되어 믿음의 4단계에 이르면 담대하게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고, 하나님도 그 고백을 기뻐 받으시므로 위로부터 성령의 감동이 임하지요.
그래서 믿음의 4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 하나님, 주님!” 하고 부르기만 해도 진한 감동이 밀려와 금세 눈물이 흘러내리고 그 사랑이 변함없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대할 때도 마음이 다릅니다. 만약 누군가 애매한 말로 자신을 모함한다고 합시다.
이때 3단계의 믿음에 있는 사람이라면 순간 ‘너무한다, 피하고 싶다.’는 서운함과 미움의 감정이 스치기도 합니다. 또 진리를 알기 때문에 “감사하자, 기뻐하자.” 하며 마음을 다스리지만 온전한 감사가 나오지는 않지요.
하지만 믿음의 4단계에 들어선 사람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해도 마음에 요동이 없습니다. 상대가 밉다는 생각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았고 스스로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로 감사와 기쁨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런 상황을 통해 더욱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고, 상대가 범죄하지 않도록 기도하게 되지요.
이처럼 똑같은 상황이라 해도 믿음의 4단계에 이르면 선의 향, 사랑의 향이 다릅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상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주고 싶어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면 모든 계명을 기쁨으로 지키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한 대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사랑하는 증거를 나타내십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할 때 하나님 편에서도 그런 자녀들을 지극히 사랑하며 항상 만나 주십니다.
2. 대가를 바라지 않고 조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믿음의 3단계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깨우침으로 사랑하려고 애씁니다. 반면, 믿음의 4단계에서는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할 뿐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합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사무치도록 느끼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요. 어떤 시험 환난에도 마음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가 우러나오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질 줄 알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지키려다 생명이 위태로워졌다.”고 근심하며 슬픔 가운데 기도한 것이 아니라, 평안하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지요.
다니엘 6장 10절에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할 뿐이기에 사나 죽으나 오직 감사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바울과 실라도 그러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매를 맞고 차꼬에 채인 채 깊은 감옥에 갇혔으나 원망 불평하지 않았고, 앞으로 어찌 될까 염려 근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감동 속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립니다. 이것이 믿음의 4단계의 모습이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참 자녀의 모습입니다. 이 감동의 찬양이 울려 퍼질 때 홀연히 큰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벗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지요.
믿음의 4단계에 이르게 되면 무조건 하나님이 좋고 진리가 좋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불철주야 기도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은혜만으로도 감사하여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까 궁구하게 됩니다.
3.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면 부귀영화도 아깝지 않고 자신의 생명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빌립보서 3장 7~8절에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금세에 백배의 축복을 받고 내세에 영생의 축복을 받는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여기서 가족이나 집과 전토를 버린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영이신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한다고 해서 가족들과의 관계를 끊고 도리를 하지 말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욱 가족들을 섬기며 가족의 일원으로서 온 집에 충성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이 그 섬김과 사랑에 감동받아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이끄는 것이 하나님 뜻이지요. 다만 가족이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면 범사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니 부족함이 없습니다. 위로부터 진정한 행복이 임합니다. 또한 마음에 악이 없으니 선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며 영원히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줄 수 있지요(고전 13:4~7).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면 처음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핍박이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이 잘되어 믿음의 4단계에 이르면 오히려 핍박이 축복으로 바뀌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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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믿음의 4단계의 특징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① 주님을 ( ) 사랑한다.
② ( )를 바라지 않고 ( ) 없이 하나님을 사랑한다.
③ 모든 것을 버리고 ( )을 첫째로 사랑한다.
2. 여러분에게 다니엘 선지자나 사도 바울과 같은 시험이 왔다면 어떠한 믿음의 행함을 내보이시겠습니까?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217~22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믿음의 4단계에 주어지는 천국 처소와 면류관
처 소 : 믿음의 4단계가 들어가는 3천층의 집은 주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영적인 향이 흘러나오므로 문패가 없어도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집은 복층 건물로 정금과 보석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3천층에서는 본인이 원하는 모든 시설을 소유할 수 있다.
면류관 :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계 2:10).
2016-10-28
제43과믿음의 4단계에 신속히 들어가려면
살전 5:21~22
읽을말씀 : 살전 5:21~22 | 외울말씀 : 마 5:37 l 참고 말씀: 잠언 18:12
교육목표 : 자신이 옳다고 하는 착각과 육체의 결여와 교만을 온전히 벗어 버림으로 악이 없는 믿음의 4단계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게 한다.
믿음의 반석을 넘어선 사람은 일부러 악을 행하거나 하나님 뜻을 거스르려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 깨닫지 못하거나, 쉽게 버리지 못하는 육의 분야들이 남아 있어 믿음 성장의 정체를 겪기도 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죄성까지 벗어 버리고 신속히 믿음의 4단계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자신이 옳다는 착각을 버리고 자기 의와 틀을 깨뜨려야
믿음의 반석을 지나 4단계에 가까워지면 겉으로 볼 때는 특별히 지적할 만한 악의 모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기도를 쉬거나 눈에 띌 만한 비진리를 행치 않지요. 하나님 말씀에 드러나게 불순종하거나 사명 감당을 힘들어하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말씀에 걸릴 만한 요소가 쉽게 발견되지 않으니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여기며 이 정도면 나도 믿음의 4단계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온전하지 못한 모습이 많습니다. 자신은 순종한다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불순종하는 것도 있고, ‘선’이 아닌 모습도 있습니다. 순간순간 비진리의 생각이 동원되기도 하지요. 그러나 자기 생각에는 옳은 것처럼 보이기에 무엇이 잘못인지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악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보기에 더 옳아 보이는 것이 남아 있어 ‘자기’를 고집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는 것을 ‘자기 의’라고 합니다.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상대에게도 자기 뜻을 따르도록 강요하기도 합니다. 또 틀이란, 자기가 옳다는 생각이 단단하게 굳은 것을 말합니다. 틀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진리라 생각하는 것만 고집하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고 답답하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자기 의와 틀이 강한 사람은 믿음이 여려 열심 내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왜 충성하지 않느냐, 왜 기도하지 않느냐!” 지적하고 책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당연히 가르칠 것을 가르쳤고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책망을 들은 사람이 힘들어하고 낙심하면 “왜 기쁨과 감사로 받지 못하느냐?”며 또다시 지적하지요. 진리에 비추어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에 자기의 권면을 받지 못하는 상대에게 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아는 진리가 옳다고만 생각하므로 자신의 방법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고 선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의와 틀’을 믿음의 3단계에서 집중적으로 깨뜨려야 4단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 의와 틀은 자기가 볼 때 분명히 옳다고 여기는 것이므로 무엇이 잘못인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진리로 만든 의와 틀은 말씀에 비추어 보아도 틀리지 않기 때문에 깨닫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착각’을 하지요. 더 큰 문제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만일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겠지.’ 한다면 여전히 착각 속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자기 의와 틀을 버리려면 간절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2. 오랜 습관처럼 굳어진 ‘육체의 결여’를 깨닫고 채워야
육체의 결여란, 사람이 성장하면서 거쳐야 할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함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를 통틀어 일컫습니다. 육체의 결여는 범위도 넓고 형태도 다양합니다. 가벼운 육체의 결여도 있지만 사망에 이르는 죄로 이어질 만큼 심각한 육체의 결여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4단계에 가까운 경우라면 이런 종류의 결여는 이미 정리되었을 것입니다. 다만 몸가짐이나 태도, 말투나 자세 등에서 여러 가지 육체의 결여가 나타나는데 이런 것들이 4단계의 믿음으로 들어가는 데 장애물이 됩니다.
이러한 육체의 결여는 단지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불편함과 어려움을 주고, 사람들에게 덕과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육체의 결여로 인해 상대에게 무례를 범하거나 실족시키는 일이 발생하며, 하나님의 일을 더 아름답게 이루는 데 지장을 초래하지요. 오랫동안 습관처럼 굳어져서 스스로 잘 깨닫지 못하고, 알아도 바로잡기 쉽지 않은 육체의 결여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문을 ‘쾅!’ 하고 닫거나, 방을 나갈 때 으레 문을 열어놓고 나갑니다. 식사할 때 ‘쩝쩝’ 소리를 내거나 음식을 흘리면서 먹습니다. 발소리가 요란하거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 거북할 만큼 이상한 걸음걸이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단체생활을 할 때도 다른 사람을 먼저 섬긴다거나 배려하는 행함이 부족합니다. 물건을 쓴 후 제자리에 두지 않고 아무 데나 두며 어디를 가든 늘 어지르고 정리를 하지 않지요. 약속을 수시로 어기거나 습관처럼 늦습니다.
이 외에도 상대의 말에 경청하지 않는 태도나, 윗사람이 말하는데 딴청하는 것, 상대의 말을 중도에 끊고 자기 할 말만 하거나, 상대에게 양보하지 않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경우 등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부러 악을 행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라온 환경 속에 늘 ‘자기 위주’로 살았기 때문에 자기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하는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결여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먼저, ‘지식의 결여’로 생깁니다. 자라면서 당연히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지 못한 까닭이지요.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거나 도리나 예절에 대한 지식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의 한계 안에서 자기 것만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지식의 결여에서 나오는 모습입니다. 지식 자체가 없으니 행함으로도 결여된 모습이 나옵니다. 이런 경우는 결여된 모습을 찾아 그에 대한 지식을 하나하나 배우며 행하면 됩니다.
다음으로, ‘행함의 결여’로 인해 생깁니다. 듣고 배웠지만 행하지 않은 결과이지요. 주변 정리정돈을 잘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게을러서 미루거나 치우지 않고 지저분하게 살다 보면 어느새 습관처럼 굳어 버립니다. 듣고 배웠는데도 자기 편한 대로 살아온 것들이 쌓여 결국 육체의 결여를 낳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타고난 기’로 인해 결여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부정적인 사고로 인해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더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부모님과 사이가 서먹서먹하고 어색하며 제대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있는데, 아버지 하나님과도 이런 모습이라면 더 깊은 관계로 뚫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육체의 결여는 다양한 원인으로 생길 수 있습니다. 육체의 결여는 마음이나 행함의 결여로 작용할 수도 있고, 생각이나 사고의 결여로 작용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이러한 것이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 속에서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믿음의 4단계로 들어가려면 이러한 육체의 결여는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3. 판단 정죄하는 일이 없도록 영적인 ‘교만’을 버려야
상대보다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는 육적인 교만도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이 단계에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영적인 교만입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지요. 자신이 아는 하나님 말씀과 지식을 기준으로 ‘이것이 옳다.? 생각하는 것이 자칫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교회 일을 처리해 나가는 노하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일이든 개인의 일이든 얼마든지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영적인 교만에서 오는 것으로 자칫 판단 정죄를 낳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나름대로 열심히 충성하며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한다 하지만, 지식에 비해 행함이 따르지 못하므로 여러 부족한 모습이 나오기도 합니다. 자기가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열심히 하지만, 하고 싶지 않은 일에는 소극적이며 희생과 헌신하기보다는 회피하고자 하지요. 이는 질서 가운데 순종하는 것이 아니므로 교만에서 나오는 모습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잠 18:12) 했습니다. 믿음의 4단계에 가까울수록 깊은 악의 뿌리를 거의 뽑아 버렸기에 교만이 큰 악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것이라도 뿌리가 남아 있으면 다시 자랄 수 있으므로 온전히 뽑아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질서에 온전히 순종하고 자기가 아는 것으로 쉽게 분별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겸손과 섬김, 희생과 배려의 마음을 이루어야 하지요. 이처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미세한 비진리의 분야까지 발견해서 온전히 버려야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혹여 아래와 같은 육체의 결여가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점검해 봅시다.
( ) 음식이 맛있다고 쩝쩝 소리를 내면서 먹지는 않는가?
( ) 바쁘다고 설거지를 하지 않고 쌓아 두지는 않는가?
( ) 평소 정리정돈을 잘하지 않아 주변이 지저분하지는 않는가?
( ) 상대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자기 용건만 말하지는 않는가?
( ) 자녀나 아랫사람에게 질책하거나 가르치는 말투를 사용하는가?
( ) 규모없이 생활하며 수중에 있는 대로 돈을 쓰지는 않는가?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210~2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사랑이 부족해 영으로 들어가지 못한 경우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자기중심적으로 살면서 자신을 만들어 온 사람은 주 안에 들어와서도 자기적인 것이 강하게 남아 있다. 자기 지식과 경험 등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옳다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눈물을 흘려 줄 수 있는 사랑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들어가려면 오랜 세월 동안 자기를 만들어온 것과는 반대로 심어 나가야 한다. 열심히 자기를 낮추고 섬기며, 주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며 채워야 한다. 그래야 진정 마음에서 상대를 영적인 사랑으로 대할 수 있게 되며, 상대의 마음과 입장, 아픔도 이해하고 품을 수 있다.
교육목표 : 자신이 옳다고 하는 착각과 육체의 결여와 교만을 온전히 벗어 버림으로 악이 없는 믿음의 4단계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게 한다.
믿음의 반석을 넘어선 사람은 일부러 악을 행하거나 하나님 뜻을 거스르려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 깨닫지 못하거나, 쉽게 버리지 못하는 육의 분야들이 남아 있어 믿음 성장의 정체를 겪기도 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죄성까지 벗어 버리고 신속히 믿음의 4단계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자신이 옳다는 착각을 버리고 자기 의와 틀을 깨뜨려야
믿음의 반석을 지나 4단계에 가까워지면 겉으로 볼 때는 특별히 지적할 만한 악의 모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기도를 쉬거나 눈에 띌 만한 비진리를 행치 않지요. 하나님 말씀에 드러나게 불순종하거나 사명 감당을 힘들어하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말씀에 걸릴 만한 요소가 쉽게 발견되지 않으니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여기며 이 정도면 나도 믿음의 4단계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온전하지 못한 모습이 많습니다. 자신은 순종한다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불순종하는 것도 있고, ‘선’이 아닌 모습도 있습니다. 순간순간 비진리의 생각이 동원되기도 하지요. 그러나 자기 생각에는 옳은 것처럼 보이기에 무엇이 잘못인지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악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보기에 더 옳아 보이는 것이 남아 있어 ‘자기’를 고집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는 것을 ‘자기 의’라고 합니다.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상대에게도 자기 뜻을 따르도록 강요하기도 합니다. 또 틀이란, 자기가 옳다는 생각이 단단하게 굳은 것을 말합니다. 틀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진리라 생각하는 것만 고집하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고 답답하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자기 의와 틀이 강한 사람은 믿음이 여려 열심 내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왜 충성하지 않느냐, 왜 기도하지 않느냐!” 지적하고 책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당연히 가르칠 것을 가르쳤고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책망을 들은 사람이 힘들어하고 낙심하면 “왜 기쁨과 감사로 받지 못하느냐?”며 또다시 지적하지요. 진리에 비추어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에 자기의 권면을 받지 못하는 상대에게 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아는 진리가 옳다고만 생각하므로 자신의 방법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고 선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의와 틀’을 믿음의 3단계에서 집중적으로 깨뜨려야 4단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 의와 틀은 자기가 볼 때 분명히 옳다고 여기는 것이므로 무엇이 잘못인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진리로 만든 의와 틀은 말씀에 비추어 보아도 틀리지 않기 때문에 깨닫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착각’을 하지요. 더 큰 문제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만일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겠지.’ 한다면 여전히 착각 속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자기 의와 틀을 버리려면 간절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2. 오랜 습관처럼 굳어진 ‘육체의 결여’를 깨닫고 채워야
육체의 결여란, 사람이 성장하면서 거쳐야 할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함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를 통틀어 일컫습니다. 육체의 결여는 범위도 넓고 형태도 다양합니다. 가벼운 육체의 결여도 있지만 사망에 이르는 죄로 이어질 만큼 심각한 육체의 결여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4단계에 가까운 경우라면 이런 종류의 결여는 이미 정리되었을 것입니다. 다만 몸가짐이나 태도, 말투나 자세 등에서 여러 가지 육체의 결여가 나타나는데 이런 것들이 4단계의 믿음으로 들어가는 데 장애물이 됩니다.
이러한 육체의 결여는 단지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불편함과 어려움을 주고, 사람들에게 덕과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육체의 결여로 인해 상대에게 무례를 범하거나 실족시키는 일이 발생하며, 하나님의 일을 더 아름답게 이루는 데 지장을 초래하지요. 오랫동안 습관처럼 굳어져서 스스로 잘 깨닫지 못하고, 알아도 바로잡기 쉽지 않은 육체의 결여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문을 ‘쾅!’ 하고 닫거나, 방을 나갈 때 으레 문을 열어놓고 나갑니다. 식사할 때 ‘쩝쩝’ 소리를 내거나 음식을 흘리면서 먹습니다. 발소리가 요란하거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 거북할 만큼 이상한 걸음걸이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단체생활을 할 때도 다른 사람을 먼저 섬긴다거나 배려하는 행함이 부족합니다. 물건을 쓴 후 제자리에 두지 않고 아무 데나 두며 어디를 가든 늘 어지르고 정리를 하지 않지요. 약속을 수시로 어기거나 습관처럼 늦습니다.
이 외에도 상대의 말에 경청하지 않는 태도나, 윗사람이 말하는데 딴청하는 것, 상대의 말을 중도에 끊고 자기 할 말만 하거나, 상대에게 양보하지 않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경우 등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부러 악을 행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라온 환경 속에 늘 ‘자기 위주’로 살았기 때문에 자기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하는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결여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먼저, ‘지식의 결여’로 생깁니다. 자라면서 당연히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지 못한 까닭이지요.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거나 도리나 예절에 대한 지식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의 한계 안에서 자기 것만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지식의 결여에서 나오는 모습입니다. 지식 자체가 없으니 행함으로도 결여된 모습이 나옵니다. 이런 경우는 결여된 모습을 찾아 그에 대한 지식을 하나하나 배우며 행하면 됩니다.
다음으로, ‘행함의 결여’로 인해 생깁니다. 듣고 배웠지만 행하지 않은 결과이지요. 주변 정리정돈을 잘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게을러서 미루거나 치우지 않고 지저분하게 살다 보면 어느새 습관처럼 굳어 버립니다. 듣고 배웠는데도 자기 편한 대로 살아온 것들이 쌓여 결국 육체의 결여를 낳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타고난 기’로 인해 결여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부정적인 사고로 인해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더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부모님과 사이가 서먹서먹하고 어색하며 제대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있는데, 아버지 하나님과도 이런 모습이라면 더 깊은 관계로 뚫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육체의 결여는 다양한 원인으로 생길 수 있습니다. 육체의 결여는 마음이나 행함의 결여로 작용할 수도 있고, 생각이나 사고의 결여로 작용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이러한 것이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 속에서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믿음의 4단계로 들어가려면 이러한 육체의 결여는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3. 판단 정죄하는 일이 없도록 영적인 ‘교만’을 버려야
상대보다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는 육적인 교만도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이 단계에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영적인 교만입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지요. 자신이 아는 하나님 말씀과 지식을 기준으로 ‘이것이 옳다.? 생각하는 것이 자칫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교회 일을 처리해 나가는 노하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일이든 개인의 일이든 얼마든지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영적인 교만에서 오는 것으로 자칫 판단 정죄를 낳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나름대로 열심히 충성하며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한다 하지만, 지식에 비해 행함이 따르지 못하므로 여러 부족한 모습이 나오기도 합니다. 자기가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열심히 하지만, 하고 싶지 않은 일에는 소극적이며 희생과 헌신하기보다는 회피하고자 하지요. 이는 질서 가운데 순종하는 것이 아니므로 교만에서 나오는 모습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잠 18:12) 했습니다. 믿음의 4단계에 가까울수록 깊은 악의 뿌리를 거의 뽑아 버렸기에 교만이 큰 악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것이라도 뿌리가 남아 있으면 다시 자랄 수 있으므로 온전히 뽑아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질서에 온전히 순종하고 자기가 아는 것으로 쉽게 분별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겸손과 섬김, 희생과 배려의 마음을 이루어야 하지요. 이처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미세한 비진리의 분야까지 발견해서 온전히 버려야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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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혹여 아래와 같은 육체의 결여가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점검해 봅시다.
( ) 음식이 맛있다고 쩝쩝 소리를 내면서 먹지는 않는가?
( ) 바쁘다고 설거지를 하지 않고 쌓아 두지는 않는가?
( ) 평소 정리정돈을 잘하지 않아 주변이 지저분하지는 않는가?
( ) 상대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자기 용건만 말하지는 않는가?
( ) 자녀나 아랫사람에게 질책하거나 가르치는 말투를 사용하는가?
( ) 규모없이 생활하며 수중에 있는 대로 돈을 쓰지는 않는가?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210~2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사랑이 부족해 영으로 들어가지 못한 경우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자기중심적으로 살면서 자신을 만들어 온 사람은 주 안에 들어와서도 자기적인 것이 강하게 남아 있다. 자기 지식과 경험 등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옳다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눈물을 흘려 줄 수 있는 사랑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들어가려면 오랜 세월 동안 자기를 만들어온 것과는 반대로 심어 나가야 한다. 열심히 자기를 낮추고 섬기며, 주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며 채워야 한다. 그래야 진정 마음에서 상대를 영적인 사랑으로 대할 수 있게 되며, 상대의 마음과 입장, 아픔도 이해하고 품을 수 있다.
2016-10-21
제42과믿음의 반석에 서기 위해 버려야 할 9가지
요일 2:15
읽을말씀 : 요일 2:15 | 외울말씀 : 마 5:28 l 참고 말씀: 약 4:11~12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소유하여 범사에 승리해 나가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믿음의 3단계에서 60% 이상이 되면 육신의 일, 즉 마음과 생각으로 짓는 죄도 웬만한 것은 다 버린 상태이므로 ‘믿음의 반석’에 섰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견고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범사에 믿음으로 승리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반석에 서기 위해 버려야 하는 악은 무엇일까요?
1. 분노, 짜증과 같은 혈기
혈기란 분노와 같은 악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말합니다. 혈기를 참지 못하면 욕설이나 폭행 등 거친 말과 행동이 나오지요. 믿음의 반석에서는 마음에서 ‘욱!’ 하거나 부글부글 끓는 것도 거의 없어야 합니다.
만약 혈기를 참기 위해 안절부절 못하거나 짜증 섞인 말과 감정이 담긴 말을 툭툭 내뱉는다면 믿음의 반석과는 거리가 멀지요. 더욱이 혈기가 얼굴에 분명히 드러나고 말이나 행동에서 확연히 느껴지는데도 스스로 반석에 섰다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혈기를 내고도 ‘상대를 깨우쳐 주기 위함’이며 ‘의분이 난 것’이라고 이유를 대거나 변명한다면 이 또한 믿음의 반석과 거리가 멉니다.
2. 불편함, 서운함 등 나쁜 감정
감정이란 마음 안에 있는 다양한 비진리가 느낌과 함께 올라오는 것으로서 혈기보다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이 감정으로부터 여러 가지 육신의 일들이 파생돼 나오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불편함과 서운함이지요. 누군가가 자신에게 안 좋은 말을 하거나 지적 또는 책망할 때, 자신을 섬겨 주지 않거나 자신이 원하는 만큼 해 주지 않을 때 불편함이 생깁니다. 또한 남이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거나 자기가 일한 만큼 대가가 주어지지 않을 때, 애매히 오해를 받을 때 서운함이 생깁니다.
믿음의 반석이라면 어느 정도 무익한 종의 마음(눅 17:7~10)이 되어 서운함이나 불편한 감정이 스스로 느낄 만큼 올라오지는 않습니다. 간혹 착각 속에 ‘나는 그런 감정들이 없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처럼 자신을 속이면 믿음의 반석에 설 수 없습니다.
3. 미움, 시기, 질투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마음에서 계속 상대를 미워한다면 이는 거듭 살인하는 것과 같으며(요일 3:15) 믿음의 반석과는 거리가 멉니다. 시기, 질투 역시 현저한 육체의 일(갈 5:19~21)이므로 반드시 버려야 할 악입니다.
만일 누군가 칭찬받을 때 ‘저 사람에게는 저런 부족한 모습이 있는데….’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면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와 비교하여 낙심하거나 자격지심을 갖는다면 이 역시 시기 질투로 인한 현상입니다. 시기 질투가 없다면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상대가 나보다 더 잘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인정과 칭찬을 받는다 해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미움, 시기, 질투를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의 반석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4. 거짓, 속이는 마음
자기 유익을 위해 속이거나 거짓말을 지어낸다면 믿음의 반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공을 드러내고자 허위로 실적을 보태고, 불리한 내용을 축소하거나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은 거짓과 속이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현실을 덮는 데 급급하여 거짓말하고 속인다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당장은 속여서 넘어갔다 해도 결국 시험 환난으로 오고 나중에는 더 큰 일도 속이는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속이려는 마음, 거짓말하거나 숨기려는 마음 자체가 없어야 믿음의 반석에 설 수 있습니다.
5. 헤아림과 비방, 판단 정죄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100%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나 지식 또는 자기 보기에 선과 의를 기준으로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지요. 따라서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하는 것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약 4:11~12). 판단을 하면 대부분 수군거림과 헤아림, 비방과 정죄가 따릅니다. 특히 ‘분별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거나 안 좋은 말을 퍼뜨리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이렇게 남의 이야기나 소문, 혹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 정죄하는 사람은 믿음의 반석과 거리가 멉니다.
6. 변개함
믿음의 반석에 서려면 육의 대표적인 특징인 변개함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자신과의 약속은 물론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쉽게 변경하고, 더욱이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도 수시로 바꾸는 사람이라면 변개함의 속성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의 반석이라면 순교의 믿음에 해당합니다. ‘순교의 믿음’이란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 앞에서도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변개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일상생활 속에서 수시로 변개하며 하나님과의 약속도 어기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의 위협 앞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7. 간음
믿음의 반석에 서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버려야 할 것이 바로 간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27~28). 이성을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거나 생각으로 하는 간음도 없어야 반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음란한 행위만 죄로 여길 뿐 음란한 생각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꼭 음란한 생각은 아니라 해도 이성을 보면서 ‘몸매 좋다.?거나 ‘잘생겼다.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간음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음란한 행위는 물론, 마음이나 생각으로 짓는 간음의 근본 뿌리까지 온전히 빼내야 합니다.
8. 욕심과 탐심, 사사로운 마음
욕심과 탐심은 물질, 명예, 권세, 외모 등 다양한 분야로 표출되어 나옵니다. 사심은 정과 욕심을 좇아 개인적인 유익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욕심, 사심, 탐심이 드러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물질과 관련된 경우입니다.
욕심이나 탐심이 있어 돈을 사랑하면 결국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딤전 6:10). 사심 역시 물질과 관련되면 온갖 부정과 부패의 원인이 되지요. 사심이 있으면 개인적인 유익,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의 유익을 먼저 챙깁니다. 믿음의 반석에 서려면 이러한 욕심, 탐심, 사심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9. 은혜를 저버리고 배신하는 마음
배신은 변개함과도 관련이 있지만 간사한 마음과 크게 관련이 있습니다. 또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 교만 등 여러 가지 악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배신’이라는 악을 낳게 됩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함께했던 사람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 상대와 약속해 놓고 그 기대를 저버리는 것도 배신입니다. 더욱이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이를 저버리고 배신한다면 더 큰 악입니다. 믿음의 반석에 서려면 이러한 배신의 마음을 근본 뿌리까지 철저히 뽑아야 합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아홉 가지 기준에 비추어 걸릴 만한 것이 없다면 믿음의 반석에 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반석에 서면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 앞에서도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범사에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으니 악을 버리고 믿음의 반석에 설 뿐 아니라 더 깊은 영의 차원으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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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쓰세요.
1. 믿음의 반석에 서려면 육의 대표적인 특징 ( )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
자신과의 약속은 물론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쉽게 변경하고,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도 수시로 바꾼다면 ( )의 속성이 많다는 증거이다.
2. ( )이란 마음 안에 있는 다양한 비진리가 느낌과 함께 올라오는 것으로 혈기 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 ( )으로부터 여러 가지 육신의 일들이 파생돼 나오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불편함과 서운함이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202~20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
가룟 유다는 사사로운 이익과 욕심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육적으로 힘 있는 위치에 오르시면 자신도 그 곁에서 덕을 보려는 속셈이었다. 돈궤도 자기가 맡았고 때때로 물질을 임의로 빼돌리기도 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점점 자기 기대와는 다른 길로 가시자 은 삼십에 팔아넘기고 만다. 가룟 유다의 최후에 대해 사도행전 1:18에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기록돼 있다.
사리사욕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보여 준다.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소유하여 범사에 승리해 나가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믿음의 3단계에서 60% 이상이 되면 육신의 일, 즉 마음과 생각으로 짓는 죄도 웬만한 것은 다 버린 상태이므로 ‘믿음의 반석’에 섰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견고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범사에 믿음으로 승리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반석에 서기 위해 버려야 하는 악은 무엇일까요?
1. 분노, 짜증과 같은 혈기
혈기란 분노와 같은 악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말합니다. 혈기를 참지 못하면 욕설이나 폭행 등 거친 말과 행동이 나오지요. 믿음의 반석에서는 마음에서 ‘욱!’ 하거나 부글부글 끓는 것도 거의 없어야 합니다.
만약 혈기를 참기 위해 안절부절 못하거나 짜증 섞인 말과 감정이 담긴 말을 툭툭 내뱉는다면 믿음의 반석과는 거리가 멀지요. 더욱이 혈기가 얼굴에 분명히 드러나고 말이나 행동에서 확연히 느껴지는데도 스스로 반석에 섰다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혈기를 내고도 ‘상대를 깨우쳐 주기 위함’이며 ‘의분이 난 것’이라고 이유를 대거나 변명한다면 이 또한 믿음의 반석과 거리가 멉니다.
2. 불편함, 서운함 등 나쁜 감정
감정이란 마음 안에 있는 다양한 비진리가 느낌과 함께 올라오는 것으로서 혈기보다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이 감정으로부터 여러 가지 육신의 일들이 파생돼 나오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불편함과 서운함이지요. 누군가가 자신에게 안 좋은 말을 하거나 지적 또는 책망할 때, 자신을 섬겨 주지 않거나 자신이 원하는 만큼 해 주지 않을 때 불편함이 생깁니다. 또한 남이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거나 자기가 일한 만큼 대가가 주어지지 않을 때, 애매히 오해를 받을 때 서운함이 생깁니다.
믿음의 반석이라면 어느 정도 무익한 종의 마음(눅 17:7~10)이 되어 서운함이나 불편한 감정이 스스로 느낄 만큼 올라오지는 않습니다. 간혹 착각 속에 ‘나는 그런 감정들이 없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처럼 자신을 속이면 믿음의 반석에 설 수 없습니다.
3. 미움, 시기, 질투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마음에서 계속 상대를 미워한다면 이는 거듭 살인하는 것과 같으며(요일 3:15) 믿음의 반석과는 거리가 멉니다. 시기, 질투 역시 현저한 육체의 일(갈 5:19~21)이므로 반드시 버려야 할 악입니다.
만일 누군가 칭찬받을 때 ‘저 사람에게는 저런 부족한 모습이 있는데….’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면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와 비교하여 낙심하거나 자격지심을 갖는다면 이 역시 시기 질투로 인한 현상입니다. 시기 질투가 없다면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상대가 나보다 더 잘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인정과 칭찬을 받는다 해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미움, 시기, 질투를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의 반석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4. 거짓, 속이는 마음
자기 유익을 위해 속이거나 거짓말을 지어낸다면 믿음의 반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공을 드러내고자 허위로 실적을 보태고, 불리한 내용을 축소하거나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은 거짓과 속이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현실을 덮는 데 급급하여 거짓말하고 속인다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당장은 속여서 넘어갔다 해도 결국 시험 환난으로 오고 나중에는 더 큰 일도 속이는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속이려는 마음, 거짓말하거나 숨기려는 마음 자체가 없어야 믿음의 반석에 설 수 있습니다.
5. 헤아림과 비방, 판단 정죄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100%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나 지식 또는 자기 보기에 선과 의를 기준으로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지요. 따라서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하는 것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약 4:11~12). 판단을 하면 대부분 수군거림과 헤아림, 비방과 정죄가 따릅니다. 특히 ‘분별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거나 안 좋은 말을 퍼뜨리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이렇게 남의 이야기나 소문, 혹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 정죄하는 사람은 믿음의 반석과 거리가 멉니다.
6. 변개함
믿음의 반석에 서려면 육의 대표적인 특징인 변개함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자신과의 약속은 물론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쉽게 변경하고, 더욱이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도 수시로 바꾸는 사람이라면 변개함의 속성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의 반석이라면 순교의 믿음에 해당합니다. ‘순교의 믿음’이란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 앞에서도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변개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일상생활 속에서 수시로 변개하며 하나님과의 약속도 어기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의 위협 앞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7. 간음
믿음의 반석에 서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버려야 할 것이 바로 간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27~28). 이성을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거나 생각으로 하는 간음도 없어야 반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음란한 행위만 죄로 여길 뿐 음란한 생각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꼭 음란한 생각은 아니라 해도 이성을 보면서 ‘몸매 좋다.?거나 ‘잘생겼다.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간음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음란한 행위는 물론, 마음이나 생각으로 짓는 간음의 근본 뿌리까지 온전히 빼내야 합니다.
8. 욕심과 탐심, 사사로운 마음
욕심과 탐심은 물질, 명예, 권세, 외모 등 다양한 분야로 표출되어 나옵니다. 사심은 정과 욕심을 좇아 개인적인 유익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욕심, 사심, 탐심이 드러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물질과 관련된 경우입니다.
욕심이나 탐심이 있어 돈을 사랑하면 결국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딤전 6:10). 사심 역시 물질과 관련되면 온갖 부정과 부패의 원인이 되지요. 사심이 있으면 개인적인 유익,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의 유익을 먼저 챙깁니다. 믿음의 반석에 서려면 이러한 욕심, 탐심, 사심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9. 은혜를 저버리고 배신하는 마음
배신은 변개함과도 관련이 있지만 간사한 마음과 크게 관련이 있습니다. 또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 교만 등 여러 가지 악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배신’이라는 악을 낳게 됩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함께했던 사람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 상대와 약속해 놓고 그 기대를 저버리는 것도 배신입니다. 더욱이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이를 저버리고 배신한다면 더 큰 악입니다. 믿음의 반석에 서려면 이러한 배신의 마음을 근본 뿌리까지 철저히 뽑아야 합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아홉 가지 기준에 비추어 걸릴 만한 것이 없다면 믿음의 반석에 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반석에 서면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 앞에서도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범사에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으니 악을 버리고 믿음의 반석에 설 뿐 아니라 더 깊은 영의 차원으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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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쓰세요.
1. 믿음의 반석에 서려면 육의 대표적인 특징 ( )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
자신과의 약속은 물론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쉽게 변경하고,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도 수시로 바꾼다면 ( )의 속성이 많다는 증거이다.
2. ( )이란 마음 안에 있는 다양한 비진리가 느낌과 함께 올라오는 것으로 혈기 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 ( )으로부터 여러 가지 육신의 일들이 파생돼 나오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불편함과 서운함이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202~20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
가룟 유다는 사사로운 이익과 욕심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육적으로 힘 있는 위치에 오르시면 자신도 그 곁에서 덕을 보려는 속셈이었다. 돈궤도 자기가 맡았고 때때로 물질을 임의로 빼돌리기도 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점점 자기 기대와는 다른 길로 가시자 은 삼십에 팔아넘기고 만다. 가룟 유다의 최후에 대해 사도행전 1:18에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기록돼 있다.
사리사욕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보여 준다.
2016-10-14
제41과믿음의 3단계 초입과 반석의 차이
마 7:24~25
읽을말씀 : 마 7:24~25 | 외울말씀 : 히 12:4 l 참고 말씀: 계 3:15~1
교육목표 : 죄와의 싸움에서 멈추지 않고 죄성을 벗어 버림으로 믿음의 3단계에서 정체하지 않고 신속히 믿음의 4단계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
믿음의 1, 2단계를 지나 3단계가 되면 하나님 말씀에 담긴 뜻을 깨달아 가기 때문에 억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3단계 초입에서는 가벼운 육체의 일(행함으로 짓는 죄)이 간혹 나올 수 있습니다.
믿음의 3단계 초입을 지나 믿음의 반석에 서면 육체의 일은 물론, 육신의 일(마음과 생각으로 짓는 죄)도 웬만한 것은 버린 상태입니다. 과연 믿음의 3단계 초입과 믿음의 반석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1. 죄를 싸워 버리기 시작하는 ‘믿음의 3단계 초입?
자발적으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에 들어왔다 해도 처음에는 마음에 갈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순종은 하지만, 마음에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는 선을 좇으려는 진리의 생각과, 악을 좇으려는 비진리의 생각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3단계 초입이라면 어려움을 만날 때 ‘너무 힘들다.’라는 비진리 생각 때문에 성령 충만함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3단계에서도 중반을 넘어서게 되면 순간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이 스친다 해도 이내 생각을 바꾸어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직장 동료가 번번이 자신의 일을 떠넘기려 한다고 합시다. 이때 믿음의 2단계에 있는 사람은 상대의 행동에 기분이 상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감정을 삭이고 섬기려고 노력해 봅니다. 그러다가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나? 본때를 보여 줘야지.’라는 생각에 결국 참지 못하고 짜증을 내거나 따지기도 합니다.
반면 믿음의 3단계에 있는 사람은 불편한 심정이지만 따지거나 짜증을 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3단계 초입에서는 불편한 생각을 진리의 생각으로 바꾸기까지 마음을 다스리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반석을 지나면 순간적으로는 불편한 생각이 스칠 수 있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고 상대를 배려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3단계 초입에서 반석으로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가복음 9장 29절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셨으니 무엇보다 불같은 기도와 금식을 통해 죄를 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믿음의 반석에 설 수 있습니다.
2. 진리 안에 굳건하게 서 있는 ‘믿음의 반석?
같은 믿음의 단계 안에서도 저마다 믿음의 분량이 다릅니다. 각 믿음의 단계를 100으로 나누어 분량을 측정한다면 10%, 20%, 30% …, 이렇게 올라갑니다. 결국 100%가 되면 그다음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3단계에서 60% 이상이 되면 ‘믿음의 반석’에 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마 7:24~25). 반석은 넓고 평평한 큰 돌로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고전 10:4). 믿음의 반석에 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곧 진리 안에 굳건하게 서 있는 단계를 말합니다.
믿음의 3단계에 들어와 믿음의 반석에 서면 신앙생활이 힘든 것이 아니라 신이 납니다. 시험 환난이 오더라도 좌우로 치우치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 뜻에 순종하고 변함없이 기도함으로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지요.
믿음의 3단계 70~80%가 되면 반석에 온전히 선 것이고, 나아가 어떤 상황에서도 비진리의 생각이 나오지 않고 선을 좇으며 온전히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되면 마침내 악이 없는 4단계의 믿음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여 연륜이 쌓이면 장로, 권사 혹은 구역장이나 기관장 등 여러 직분을 받습니다. 이러한 직분자라면 적어도 믿음의 3단계는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2단계에 머물러 자기 신앙도 바로 세우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영혼을 진리로 이끌어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말씀을 들었는데도 여전히 2단계의 믿음에 있다면 하나님 앞에 참으로 민망한 일이지요. 세월이 지나도 노력하지 않으면 여전히 2단계에 머물다가 믿음의 1단계로 퇴보하기도 하며, 그러다 자칫하면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16절에는 이를 경계하여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면 토하여 내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직분을 맡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믿음의 3단계에는 들어와야 합니다. 또 믿음의 3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1, 2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살피고 돌아보아 그들도 3단계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죄와 싸우느라 지쳐 교회에서 직분 받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러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하신 말씀대로, 자신의 죄를 버려갈 뿐 아니라 믿음이 여린 영혼들을 돌아볼 때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깨달아 믿음이 쑥쑥 성장할 수 있습니다.
3.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믿음의 3단계는 육체의 일은 이미 버렸기에 본격적으로 육신의 일을 벗기 위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러다 믿음의 반석을 지나 더 성장하면, 육신의 일까지 대부분 버렸기에 비진리의 생각이 순간 스친다 해도 이내 진리로 바꾸고 범사에 순종하며 진리의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마음 먹기에 따라 믿음의 3단계로 들어가는 것은 신속히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3단계에서 4단계로 진입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립니다. 마치 나무가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새들이 깃들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 66권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려면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야 하는데,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짧은 기간에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령, ‘미워하지 말라,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담긴 뜻을 깨닫기에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이해하며 품어 주려고 하지만 마음에는 아직 미움이라는 죄성이 남아 있지요. 또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늘 기뻐하고 감사하기 위해 노력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지만 마음에서 불평이나 낙심, 서운함의 뿌리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에 죄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게으름이나 우유부단한 성품 때문에 결단력 있게 벗어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3단계에서 오래 지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마음에 있는 죄성까지 버리는 노력, 곧 마음의 할례를 멈췄기 때문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마음에 죄성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자신에게 어떤 죄와 악이 있는지 발견하지 못하니 여전히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3단계에서 오랫동안 정체되면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자신이 볼 때는 딱히 죄를 짓는 것 같지 않고 말씀대로 사는데 마음에 기쁨이 없고 답답합니다. 성령 충만함이 떨어지고 곤고함을 느끼지요. 따라서 죄와의 싸움을 멈추지 말고 신속히 죄성을 버려야 믿음의 4단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하신 대로 작은 죄악이라도 발견하면 어찌하든 버리고자 금식하고 기도하며 노력해야 하지요.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 다섯 번, 열 번 그 이상 도전해 보십시오. 부단히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노력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성까지 버릴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3~24절에는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말씀합니다. 거울을 보아 머리카락이 흐트러졌으면 빗고 더러운 것이 묻었으면 씻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비진리 모습을 발견했다면 그냥 두지 말고 그때그때 진리로 변화시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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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믿음의 3단계에서 60% 이상이 되면 ‘믿음의 반석’에 섰다고 할 수 있다. 반석은 넓고 평평한 큰 돌로 영적으로는 ( )를 의미한다. 믿음의 반석에 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곧 진리 안에 굳건하게 서 있는 단계를 말한다.
2. 3단계 ( ~ )%가 되면 반석에 온전히 선 것이고, 나아가 어떤 상황에서도 비진리의 생각이 나오지 않고 선을 좇으며 온전히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되면 마침내 악이 없는 ( )의 믿음으로 들어선 것이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94~20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미지근한 신앙이란?
미지근한 신앙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면서도 뜨거워지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미지근한 신앙으로는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모습을 깨우치지 못한다.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삶의 변화 역시 없다.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러만 있고 계속해서 돌이키지 않는 사람은 결국 차가운 신앙이 되고 만다.
교육목표 : 죄와의 싸움에서 멈추지 않고 죄성을 벗어 버림으로 믿음의 3단계에서 정체하지 않고 신속히 믿음의 4단계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
믿음의 1, 2단계를 지나 3단계가 되면 하나님 말씀에 담긴 뜻을 깨달아 가기 때문에 억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3단계 초입에서는 가벼운 육체의 일(행함으로 짓는 죄)이 간혹 나올 수 있습니다.
믿음의 3단계 초입을 지나 믿음의 반석에 서면 육체의 일은 물론, 육신의 일(마음과 생각으로 짓는 죄)도 웬만한 것은 버린 상태입니다. 과연 믿음의 3단계 초입과 믿음의 반석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1. 죄를 싸워 버리기 시작하는 ‘믿음의 3단계 초입?
자발적으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에 들어왔다 해도 처음에는 마음에 갈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순종은 하지만, 마음에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는 선을 좇으려는 진리의 생각과, 악을 좇으려는 비진리의 생각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3단계 초입이라면 어려움을 만날 때 ‘너무 힘들다.’라는 비진리 생각 때문에 성령 충만함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3단계에서도 중반을 넘어서게 되면 순간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이 스친다 해도 이내 생각을 바꾸어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직장 동료가 번번이 자신의 일을 떠넘기려 한다고 합시다. 이때 믿음의 2단계에 있는 사람은 상대의 행동에 기분이 상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감정을 삭이고 섬기려고 노력해 봅니다. 그러다가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나? 본때를 보여 줘야지.’라는 생각에 결국 참지 못하고 짜증을 내거나 따지기도 합니다.
반면 믿음의 3단계에 있는 사람은 불편한 심정이지만 따지거나 짜증을 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3단계 초입에서는 불편한 생각을 진리의 생각으로 바꾸기까지 마음을 다스리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반석을 지나면 순간적으로는 불편한 생각이 스칠 수 있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고 상대를 배려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3단계 초입에서 반석으로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가복음 9장 29절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셨으니 무엇보다 불같은 기도와 금식을 통해 죄를 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믿음의 반석에 설 수 있습니다.
2. 진리 안에 굳건하게 서 있는 ‘믿음의 반석?
같은 믿음의 단계 안에서도 저마다 믿음의 분량이 다릅니다. 각 믿음의 단계를 100으로 나누어 분량을 측정한다면 10%, 20%, 30% …, 이렇게 올라갑니다. 결국 100%가 되면 그다음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3단계에서 60% 이상이 되면 ‘믿음의 반석’에 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마 7:24~25). 반석은 넓고 평평한 큰 돌로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고전 10:4). 믿음의 반석에 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곧 진리 안에 굳건하게 서 있는 단계를 말합니다.
믿음의 3단계에 들어와 믿음의 반석에 서면 신앙생활이 힘든 것이 아니라 신이 납니다. 시험 환난이 오더라도 좌우로 치우치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 뜻에 순종하고 변함없이 기도함으로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지요.
믿음의 3단계 70~80%가 되면 반석에 온전히 선 것이고, 나아가 어떤 상황에서도 비진리의 생각이 나오지 않고 선을 좇으며 온전히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되면 마침내 악이 없는 4단계의 믿음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여 연륜이 쌓이면 장로, 권사 혹은 구역장이나 기관장 등 여러 직분을 받습니다. 이러한 직분자라면 적어도 믿음의 3단계는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2단계에 머물러 자기 신앙도 바로 세우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영혼을 진리로 이끌어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말씀을 들었는데도 여전히 2단계의 믿음에 있다면 하나님 앞에 참으로 민망한 일이지요. 세월이 지나도 노력하지 않으면 여전히 2단계에 머물다가 믿음의 1단계로 퇴보하기도 하며, 그러다 자칫하면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16절에는 이를 경계하여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면 토하여 내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직분을 맡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믿음의 3단계에는 들어와야 합니다. 또 믿음의 3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1, 2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살피고 돌아보아 그들도 3단계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죄와 싸우느라 지쳐 교회에서 직분 받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러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하신 말씀대로, 자신의 죄를 버려갈 뿐 아니라 믿음이 여린 영혼들을 돌아볼 때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깨달아 믿음이 쑥쑥 성장할 수 있습니다.
3.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믿음의 3단계는 육체의 일은 이미 버렸기에 본격적으로 육신의 일을 벗기 위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러다 믿음의 반석을 지나 더 성장하면, 육신의 일까지 대부분 버렸기에 비진리의 생각이 순간 스친다 해도 이내 진리로 바꾸고 범사에 순종하며 진리의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마음 먹기에 따라 믿음의 3단계로 들어가는 것은 신속히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3단계에서 4단계로 진입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립니다. 마치 나무가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새들이 깃들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 66권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려면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야 하는데,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짧은 기간에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령, ‘미워하지 말라,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담긴 뜻을 깨닫기에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이해하며 품어 주려고 하지만 마음에는 아직 미움이라는 죄성이 남아 있지요. 또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늘 기뻐하고 감사하기 위해 노력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지만 마음에서 불평이나 낙심, 서운함의 뿌리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에 죄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게으름이나 우유부단한 성품 때문에 결단력 있게 벗어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3단계에서 오래 지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마음에 있는 죄성까지 버리는 노력, 곧 마음의 할례를 멈췄기 때문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마음에 죄성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자신에게 어떤 죄와 악이 있는지 발견하지 못하니 여전히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3단계에서 오랫동안 정체되면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자신이 볼 때는 딱히 죄를 짓는 것 같지 않고 말씀대로 사는데 마음에 기쁨이 없고 답답합니다. 성령 충만함이 떨어지고 곤고함을 느끼지요. 따라서 죄와의 싸움을 멈추지 말고 신속히 죄성을 버려야 믿음의 4단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하신 대로 작은 죄악이라도 발견하면 어찌하든 버리고자 금식하고 기도하며 노력해야 하지요.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 다섯 번, 열 번 그 이상 도전해 보십시오. 부단히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노력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성까지 버릴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3~24절에는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말씀합니다. 거울을 보아 머리카락이 흐트러졌으면 빗고 더러운 것이 묻었으면 씻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비진리 모습을 발견했다면 그냥 두지 말고 그때그때 진리로 변화시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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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믿음의 3단계에서 60% 이상이 되면 ‘믿음의 반석’에 섰다고 할 수 있다. 반석은 넓고 평평한 큰 돌로 영적으로는 ( )를 의미한다. 믿음의 반석에 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곧 진리 안에 굳건하게 서 있는 단계를 말한다.
2. 3단계 ( ~ )%가 되면 반석에 온전히 선 것이고, 나아가 어떤 상황에서도 비진리의 생각이 나오지 않고 선을 좇으며 온전히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되면 마침내 악이 없는 ( )의 믿음으로 들어선 것이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94~20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미지근한 신앙이란?
미지근한 신앙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면서도 뜨거워지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미지근한 신앙으로는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모습을 깨우치지 못한다.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삶의 변화 역시 없다.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러만 있고 계속해서 돌이키지 않는 사람은 결국 차가운 신앙이 되고 만다.
2016-10-07
제40과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
살전 5:16~18
읽을말씀 : 살전 5:16~18 | 외울말씀 : 마 7:24 l 참고 말씀 : 말 3:8~9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마음 중심에서 기쁨으로 행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믿음의 2단계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려고 노력하는 단계라 했습니다.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은 하지만 지킬 때도 있고 지키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걷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잘 걷는 것처럼, 말씀대로 행하려고 계속 노력하다 보면 점점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믿음의 2단계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알아도 행하지 못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3단계에 이르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니 자연스럽게 말씀대로 행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믿음의 3단계를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1. 하나님 말씀을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
하나님 말씀을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또 하나님 말씀이니 의무감으로 행하는 것과 왜 행해야 하는지를 깨달아 마음에서 우러나와 순종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요. 믿음의 3단계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 말씀을 억지로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에 마음에서 우러나와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온전한 주일 성수와 십일조 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시험 환난을 물리쳐 주고 질병이 떠나게 하시며, 물질의 축복도 주신다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시다. 이러한 말씀을 아는 것만으로는 행함이 온전히 따르지 않습니다. ‘그런가 보다.’ 하고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온전히 마음에 믿어지기 전까지는 지킬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지요.
그러나 어찌하든 행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어느 순간 왜 이 말씀을 주셨는지 하나님 사랑이 깨달아지면서 마음에서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때부터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타협하지 않고 온전한 주일을 지키며 십일조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인정해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믿는다는 것과, 육의 세계를 포함하여 광대한 영의 세계의 주인이심을 인정한다는 뜻이 담겨 있지요. 그래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하나님께서는 한 주 동안 각종 재난과 사고로부터 지켜 주시고 영혼이 잘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또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물적 주권 곧 우리 눈에 보이는 천하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시니 생명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할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께서 주셨으므로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수입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중 십 분의 일만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자유롭게 쓰도록 허락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라기 3장 8~9절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진정 마음 중심에서 깨달으면 도리어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엄청난 죄임을 깨닫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동안 행하지 못한 것을 철저히 회개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을 깨달아 행하면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시며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3단계에 들어가려면
아기가 태어나 성장할 때 음식을 섭취하는 것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보고 듣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지식이 쌓이고 지혜가 생겨야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주 안에서 성장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깨우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알고 있는 말씀을 행하려고 노력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이 마음에 깨우쳐지고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지식으로 아는 차원을 넘어 참된 의미를 깨달아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이 따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마음에 깨달음이 오지 않으면 머리로 아는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순종이 따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2단계에 들어간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이니 억지로라도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고자 노력합니다. 하지만 조건이나 환경이 어려워지면 이내 불평하며 감사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3단계에서는 어떨까요? 잠시 염려 근심이 찾아왔다 해도 이내 마음과 생각을 바꿉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빛의 행함입니다. 그러니 감사하고 기뻐할 때 그 영적인 빛으로 인해 시험 환난이 떠나고 축복이 임합니다. 이런 사실을 체험할 때 하나님께서 왜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하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2단계처럼 마지못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자발적인 행함이 나오는데 이것이 믿음의 3단계의 행함입니다.
3. 믿음의 3단계에 들어온 증거들
이처럼 믿음이 성장하여 3단계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마음으로 깨달아지기 때문에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더 이상 짐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3단계에 들어온 증거들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해서 힘이 든다든가 싫다든가 하지 않습니다.
또한 믿음의 3단계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다. 천국과 지옥, 내세가 있는 것도 알고 믿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천국의 삶을 알고 믿기 때문에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해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이 버거운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마치 일상생활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앙생활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주일을 깜박 잊어버리고 어겼습니다.” 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믿음의 3단계부터는 눈에 크게 드러나는 비진리는 대부분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육체의 일은 거의 나오지 않으며, 육신의 일을 버려 나가는 시기입니다. 육체의 일이란 행함으로 짓는 죄를 말하며, 육신의 일이란 마음과 생각으로 짓는 죄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술 담배를 한다거나, 내 생각과 맞지 않을 때 화를 내며 말다툼을 하거나 몸싸움을 하는 것 등은 육체의 일입니다. 이러한 행함이 자주 나온다면 아직 믿음의 2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3단계에 이르면 이러한 육체의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말씀대로 행한다 해서 무조건 믿음의 3단계라 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주일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도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가에 따라 믿음의 분량이 다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눈치 보이고 주일을 어기면 재앙을 당할까 두려워서 교회에 나오거나, 예배 시간 내내 졸음과 잡념 속에 드린다면 믿음의 3단계라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분량은 한두 가지 외적인 행함만 보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마음 중심에서 깨닫고 믿으며 행하는지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마음으로 깨달아 행함으로 나타내는 시기가 믿음의 3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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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1. 믿음의 2단계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알아도 행하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면 믿음의 3단계에 이르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니 자연스럽게 말씀대로 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3단계를 ( )이라고 말한다.
2. 믿음의 3단계부터는 눈에 크게 드러나는 비진리는 대부분 정리가 되었기에 육체의 일은 거의 나오지 않으며, ( )을 버려 나가는 시기이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87~1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믿음의 3단계 처소와 면류관
처소 _ 믿음의 3단계는 2천층에 들어가며 독립된 개인 주택이 주어진다. 단층이지만 이 땅의 어떤 호화 저택이나 별장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아름답다. 2천층에서는 주인이 가장 원하는 것으로 집에 딸린 부속시설 한가지씩 주어지게 된다. 또 집마다 문패가 있고, 천국 글씨로 집주인의 이름과 섬기던 교회 이름이 새겨진다.
면류관 _ 영광의 면류관이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벧전 5:4).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마음 중심에서 기쁨으로 행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믿음의 2단계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려고 노력하는 단계라 했습니다.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은 하지만 지킬 때도 있고 지키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걷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잘 걷는 것처럼, 말씀대로 행하려고 계속 노력하다 보면 점점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믿음의 2단계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알아도 행하지 못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3단계에 이르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니 자연스럽게 말씀대로 행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믿음의 3단계를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1. 하나님 말씀을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
하나님 말씀을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또 하나님 말씀이니 의무감으로 행하는 것과 왜 행해야 하는지를 깨달아 마음에서 우러나와 순종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요. 믿음의 3단계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 말씀을 억지로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에 마음에서 우러나와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온전한 주일 성수와 십일조 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시험 환난을 물리쳐 주고 질병이 떠나게 하시며, 물질의 축복도 주신다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시다. 이러한 말씀을 아는 것만으로는 행함이 온전히 따르지 않습니다. ‘그런가 보다.’ 하고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온전히 마음에 믿어지기 전까지는 지킬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지요.
그러나 어찌하든 행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어느 순간 왜 이 말씀을 주셨는지 하나님 사랑이 깨달아지면서 마음에서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때부터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타협하지 않고 온전한 주일을 지키며 십일조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인정해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믿는다는 것과, 육의 세계를 포함하여 광대한 영의 세계의 주인이심을 인정한다는 뜻이 담겨 있지요. 그래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하나님께서는 한 주 동안 각종 재난과 사고로부터 지켜 주시고 영혼이 잘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또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물적 주권 곧 우리 눈에 보이는 천하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시니 생명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할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께서 주셨으므로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수입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중 십 분의 일만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자유롭게 쓰도록 허락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라기 3장 8~9절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진정 마음 중심에서 깨달으면 도리어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엄청난 죄임을 깨닫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동안 행하지 못한 것을 철저히 회개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을 깨달아 행하면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시며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3단계에 들어가려면
아기가 태어나 성장할 때 음식을 섭취하는 것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보고 듣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지식이 쌓이고 지혜가 생겨야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주 안에서 성장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깨우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알고 있는 말씀을 행하려고 노력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이 마음에 깨우쳐지고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지식으로 아는 차원을 넘어 참된 의미를 깨달아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이 따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마음에 깨달음이 오지 않으면 머리로 아는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순종이 따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2단계에 들어간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이니 억지로라도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고자 노력합니다. 하지만 조건이나 환경이 어려워지면 이내 불평하며 감사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3단계에서는 어떨까요? 잠시 염려 근심이 찾아왔다 해도 이내 마음과 생각을 바꿉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빛의 행함입니다. 그러니 감사하고 기뻐할 때 그 영적인 빛으로 인해 시험 환난이 떠나고 축복이 임합니다. 이런 사실을 체험할 때 하나님께서 왜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하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2단계처럼 마지못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자발적인 행함이 나오는데 이것이 믿음의 3단계의 행함입니다.
3. 믿음의 3단계에 들어온 증거들
이처럼 믿음이 성장하여 3단계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마음으로 깨달아지기 때문에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더 이상 짐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3단계에 들어온 증거들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해서 힘이 든다든가 싫다든가 하지 않습니다.
또한 믿음의 3단계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다. 천국과 지옥, 내세가 있는 것도 알고 믿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천국의 삶을 알고 믿기 때문에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해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이 버거운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마치 일상생활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앙생활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주일을 깜박 잊어버리고 어겼습니다.” 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믿음의 3단계부터는 눈에 크게 드러나는 비진리는 대부분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육체의 일은 거의 나오지 않으며, 육신의 일을 버려 나가는 시기입니다. 육체의 일이란 행함으로 짓는 죄를 말하며, 육신의 일이란 마음과 생각으로 짓는 죄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술 담배를 한다거나, 내 생각과 맞지 않을 때 화를 내며 말다툼을 하거나 몸싸움을 하는 것 등은 육체의 일입니다. 이러한 행함이 자주 나온다면 아직 믿음의 2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3단계에 이르면 이러한 육체의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말씀대로 행한다 해서 무조건 믿음의 3단계라 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주일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도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가에 따라 믿음의 분량이 다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눈치 보이고 주일을 어기면 재앙을 당할까 두려워서 교회에 나오거나, 예배 시간 내내 졸음과 잡념 속에 드린다면 믿음의 3단계라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분량은 한두 가지 외적인 행함만 보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마음 중심에서 깨닫고 믿으며 행하는지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마음으로 깨달아 행함으로 나타내는 시기가 믿음의 3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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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1. 믿음의 2단계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알아도 행하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면 믿음의 3단계에 이르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니 자연스럽게 말씀대로 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3단계를 ( )이라고 말한다.
2. 믿음의 3단계부터는 눈에 크게 드러나는 비진리는 대부분 정리가 되었기에 육체의 일은 거의 나오지 않으며, ( )을 버려 나가는 시기이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87~1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믿음의 3단계 처소와 면류관
처소 _ 믿음의 3단계는 2천층에 들어가며 독립된 개인 주택이 주어진다. 단층이지만 이 땅의 어떤 호화 저택이나 별장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아름답다. 2천층에서는 주인이 가장 원하는 것으로 집에 딸린 부속시설 한가지씩 주어지게 된다. 또 집마다 문패가 있고, 천국 글씨로 집주인의 이름과 섬기던 교회 이름이 새겨진다.
면류관 _ 영광의 면류관이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벧전 5:4).
2016-09-30
제39과젖 먹는 신자와 밥 먹는 신자
고전 3:1~2
읽을말씀 : 고전 3:1~2 | 외울말씀 : 잠 3:11 l 참고 말씀: 히 12:6~8
교육목표 : 말씀을 스스로 행할 수 있는 밥 먹는 신자가 되어 열심히 마음에 할례하여 성결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믿음에는 분량이 있어서 성장 과정에 따라 자녀들의 믿음, 아이들의 믿음, 청년들의 믿음, 아비들의 믿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기가 태어나면 젖을 먹다가 성장하면서 밥을 먹는 것처럼, 젖 먹는 신자와 밥 먹는 신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젖 먹는 신자와 밥 먹는 신자의 믿음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까요?
1. 믿음의 1, 2단계는 ‘젖 먹는 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천국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면 믿음의 1단계입니다. 하나님과 자녀 관계가 성립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요. 하지만 이제 막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기에 영적으로는 갓난아기와 같은 상태입니다. 이때는 아직 진리가 무엇이며 비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죄를 지어도 죄인 줄 깨닫지 못합니다. 갓난아기가 발가벗고 있어도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지요.
이 단계에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어 진리로 분별할 수 없으니 설령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마치 아기가 기어다니다가 물그릇을 엎거나 깨어도 야단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부모나 가족들 편에서 그릇을 치우지 않고 주의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고 여기지요.
믿음이 성장하여 2단계가 되면 성령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며, 들은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죄를 지을 때는 성령의 탄식 소리를 듣게 되고 곤고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직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말씀을 들어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행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마음에 비진리가 많으므로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이처럼 아직은 연약한 믿음의 1, 2단계에 있는 사람을 ‘젖 먹는 신자’라고 합니다. 아무리 중한 사명과 직분을 받았다 해도 여전히 말씀대로 행치 못하고 비진리 가운데 살아간다면 그는 믿음의 2단계요, 어린아이의 신앙에 불과합니다. 주의 종이나 장로, 권사라 해도, 구역장이나 교사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직분이 무엇인지, 신앙생활한 지 오래되었는지, 성경 말씀을 많이 알아서 잘 가르칠 수 있는지, 이런 것을 보고 “믿음이 크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여 행하는지, 얼마나 진리 가운데 거하는지를 보시지요.
2. 젖 먹는 신자를 양육하는 방법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1, 2단계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 해서 무조건 징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맞추어 이해하고 인도해 가시지요.
고린도전서 3장 1~2절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아직 믿음이 연약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이듯이 부드럽게 권면하며 하나하나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만일 젖 먹이에게 젖을 먹이지 않고 밥을 먹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에 소화불량에 걸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젖 먹는 신자를 갈무리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분량에 따라 지혜롭게 권면해야 합니다.
아직 술 담배를 하는 사람에게 “술, 담배를 끊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하면 교회에 나오기를 꺼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술 담배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쉽게 끊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성장하면 자연히 버릴 수 있으니 하나님께 기도하세요.”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주일 오전 예배만 드리고 가게 문을 여는 사람에게는 “주일을 온전히 지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6일만 일해도 주일에 얻는 수입보다 더 큰 수입으로 축복하시는 것을 체험할 거예요.”라고 믿음을 심어 주면서 부드럽게 권면해 주면 좋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1, 2단계에 있는 신자를 양육할 때는 죄를 지으면 징계하시는 두려움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다.’며 힘과 능력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느낄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3. 믿음의 3단계는 ‘밥 먹는 신자’
믿음이 성장하여 말씀을 이해하고, 스스로 행할 수 있다면 ‘밥 먹는 신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믿음의 3단계에 해당합니다. 믿음의 1, 2단계에 있는 사람이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자 힘쓰면, 하나님께서 시험 환난으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의 2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린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야 부모의 마음이 흐뭇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면 말씀과 기도를 통해 부지런히 믿음을 성장시켜 나가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믿음의 3단계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전히 1, 2단계에 해당하는 삶을 산다면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므로 하나님의 징계가 따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믿음이 성장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어린 자녀가 성장하면 균형 잡힌 식사를 통해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밥을 먹지 않고 젖만 찾는다면 아무래도 건강에 지장이 있지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면 어찌하든 젖을 떼고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을 알면서도 행치 않으면 영적으로 파리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처참한 십자가에 내어주셨는데, 자녀들이 오랜 세월 믿음의 성장이 멈춰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안타깝지만 사단의 송사를 허락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 6~8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3단계에 있어야 할 사람이 2단계 행함을 내보이고 있다면 하나님의 응답이나 축복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위로부터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오지 않기 때문에 세상 방법을 동원하거나 시험 환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혹여 죄를 지었는데도 징계가 없다면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계속 범죄함으로 성령이 완전히 소멸되면 하나님 자녀라고 할 수 없기에 사생자요, 다시금 원수 마귀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기 때문에 징계마저도 오지 않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에게 사로잡혀 종노릇을 하며 죄를 짓다가 결국 지옥에 갈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는 죄를 지어도 징계가 없으니 완전히 버림받았구나!” 자포자기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 중심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철저히 회개하며 죄 사함 받을 때까지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한편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징계가 임했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증거임을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형식적으로 대충 하는 회개가 아니라, 마음을 찢는 통회자복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은혜를 구하면 눈물, 콧물과 함께 마음을 찢는 회개가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헐어져 마음이 가벼워지고 성령 충만함이 임하여 다시금 믿음의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아직도 젖 먹는 신자에 머물러 있다면 부지런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밥 먹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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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1. 믿음의 2단계가 되면 죄를 지을 때 성령의 탄식 소리를 듣게 되고 곤고함을 느낀다. 그러나 아직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말씀을 들어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행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마음에 비진리가 많으므로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진다.
이처럼 아직은 연약한 믿음의 1, 2단계에 있는 사람을 ( )라 한다.
2. 믿음이 성장하여 말씀을 이해하고 스스로 행할 수 있다면 ( )라 할 수 있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81~18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믿음의 2단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면?
신앙생활한 지 얼마 안 된 성도라면 2단계의 믿음 안에서도 노력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며 나름대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한 지 오래되었고 직분도 있으면서 믿음의 2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 앞에 계속 담을 쌓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의 할례하여 신속히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81~18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교육목표 : 말씀을 스스로 행할 수 있는 밥 먹는 신자가 되어 열심히 마음에 할례하여 성결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믿음에는 분량이 있어서 성장 과정에 따라 자녀들의 믿음, 아이들의 믿음, 청년들의 믿음, 아비들의 믿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기가 태어나면 젖을 먹다가 성장하면서 밥을 먹는 것처럼, 젖 먹는 신자와 밥 먹는 신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젖 먹는 신자와 밥 먹는 신자의 믿음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까요?
1. 믿음의 1, 2단계는 ‘젖 먹는 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천국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면 믿음의 1단계입니다. 하나님과 자녀 관계가 성립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요. 하지만 이제 막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기에 영적으로는 갓난아기와 같은 상태입니다. 이때는 아직 진리가 무엇이며 비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죄를 지어도 죄인 줄 깨닫지 못합니다. 갓난아기가 발가벗고 있어도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지요.
이 단계에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어 진리로 분별할 수 없으니 설령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마치 아기가 기어다니다가 물그릇을 엎거나 깨어도 야단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부모나 가족들 편에서 그릇을 치우지 않고 주의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고 여기지요.
믿음이 성장하여 2단계가 되면 성령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며, 들은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죄를 지을 때는 성령의 탄식 소리를 듣게 되고 곤고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직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말씀을 들어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행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마음에 비진리가 많으므로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이처럼 아직은 연약한 믿음의 1, 2단계에 있는 사람을 ‘젖 먹는 신자’라고 합니다. 아무리 중한 사명과 직분을 받았다 해도 여전히 말씀대로 행치 못하고 비진리 가운데 살아간다면 그는 믿음의 2단계요, 어린아이의 신앙에 불과합니다. 주의 종이나 장로, 권사라 해도, 구역장이나 교사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직분이 무엇인지, 신앙생활한 지 오래되었는지, 성경 말씀을 많이 알아서 잘 가르칠 수 있는지, 이런 것을 보고 “믿음이 크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여 행하는지, 얼마나 진리 가운데 거하는지를 보시지요.
2. 젖 먹는 신자를 양육하는 방법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1, 2단계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 해서 무조건 징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맞추어 이해하고 인도해 가시지요.
고린도전서 3장 1~2절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아직 믿음이 연약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이듯이 부드럽게 권면하며 하나하나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만일 젖 먹이에게 젖을 먹이지 않고 밥을 먹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에 소화불량에 걸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젖 먹는 신자를 갈무리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분량에 따라 지혜롭게 권면해야 합니다.
아직 술 담배를 하는 사람에게 “술, 담배를 끊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하면 교회에 나오기를 꺼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술 담배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쉽게 끊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성장하면 자연히 버릴 수 있으니 하나님께 기도하세요.”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주일 오전 예배만 드리고 가게 문을 여는 사람에게는 “주일을 온전히 지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6일만 일해도 주일에 얻는 수입보다 더 큰 수입으로 축복하시는 것을 체험할 거예요.”라고 믿음을 심어 주면서 부드럽게 권면해 주면 좋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1, 2단계에 있는 신자를 양육할 때는 죄를 지으면 징계하시는 두려움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다.’며 힘과 능력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느낄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3. 믿음의 3단계는 ‘밥 먹는 신자’
믿음이 성장하여 말씀을 이해하고, 스스로 행할 수 있다면 ‘밥 먹는 신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믿음의 3단계에 해당합니다. 믿음의 1, 2단계에 있는 사람이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자 힘쓰면, 하나님께서 시험 환난으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의 2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린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야 부모의 마음이 흐뭇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면 말씀과 기도를 통해 부지런히 믿음을 성장시켜 나가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믿음의 3단계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전히 1, 2단계에 해당하는 삶을 산다면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므로 하나님의 징계가 따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믿음이 성장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어린 자녀가 성장하면 균형 잡힌 식사를 통해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밥을 먹지 않고 젖만 찾는다면 아무래도 건강에 지장이 있지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면 어찌하든 젖을 떼고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을 알면서도 행치 않으면 영적으로 파리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처참한 십자가에 내어주셨는데, 자녀들이 오랜 세월 믿음의 성장이 멈춰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안타깝지만 사단의 송사를 허락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 6~8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3단계에 있어야 할 사람이 2단계 행함을 내보이고 있다면 하나님의 응답이나 축복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위로부터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오지 않기 때문에 세상 방법을 동원하거나 시험 환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혹여 죄를 지었는데도 징계가 없다면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계속 범죄함으로 성령이 완전히 소멸되면 하나님 자녀라고 할 수 없기에 사생자요, 다시금 원수 마귀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기 때문에 징계마저도 오지 않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에게 사로잡혀 종노릇을 하며 죄를 짓다가 결국 지옥에 갈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는 죄를 지어도 징계가 없으니 완전히 버림받았구나!” 자포자기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 중심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철저히 회개하며 죄 사함 받을 때까지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한편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징계가 임했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증거임을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형식적으로 대충 하는 회개가 아니라, 마음을 찢는 통회자복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은혜를 구하면 눈물, 콧물과 함께 마음을 찢는 회개가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헐어져 마음이 가벼워지고 성령 충만함이 임하여 다시금 믿음의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아직도 젖 먹는 신자에 머물러 있다면 부지런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밥 먹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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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1. 믿음의 2단계가 되면 죄를 지을 때 성령의 탄식 소리를 듣게 되고 곤고함을 느낀다. 그러나 아직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말씀을 들어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행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마음에 비진리가 많으므로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진다.
이처럼 아직은 연약한 믿음의 1, 2단계에 있는 사람을 ( )라 한다.
2. 믿음이 성장하여 말씀을 이해하고 스스로 행할 수 있다면 ( )라 할 수 있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81~18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믿음의 2단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면?
신앙생활한 지 얼마 안 된 성도라면 2단계의 믿음 안에서도 노력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며 나름대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한 지 오래되었고 직분도 있으면서 믿음의 2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 앞에 계속 담을 쌓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의 할례하여 신속히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81~18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2016-09-23
제38과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의 2단계
롬 7:22~24
읽을말씀 : 롬 7:22~24 | 외울말씀 : 신 10:13 ㅣ 참고 말씀: 요 14:27
교육목표 : 세상적인 것을 온전히 끊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감으로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나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해지는데 여기서부터 믿음의 1단계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 것은 아직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고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이전의 구습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지요. 아직 술, 담배를 끊지 못한 경우도 있고, 혈기내고 험한 말을 하기도 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도 하는 등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 없는 모습입니다.
믿음의 1단계에 속한 사람은 죄를 지어도 마음에 곤고함이나 성령의 탄식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비진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점차 믿음이 성장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결국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의 2단계’로 접어듭니다.
1.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
믿음의 2단계부터는 하나님 말씀을 배워서 알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진리는 이것이 아닌데 ….” 하며 곤고함을 느낍니다. 마음 안에 계신 성령이 탄식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해 나가니 진리대로 할 때도 있지만 죄와의 싸움에 져서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하셨기에 그 말씀대로 지키려고 노력은 하지만 집안이나 직장에 무슨 일이 있으면 온전히 주일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려고는 하지만 바쁜 일들이 생기면 기도를 쉬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다가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주변 사람과 화평을 좇다가도 자기 뜻에 맞지 않거나 상대가 건드리면 참지 못하여 혈기 내고 다투기도 하지요.
이때에도 절대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은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지 못한다 해도 계속 노력해 가면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고 은혜를 주시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면 차츰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변화되어 갑니다. 전에는 열 번 범죄했던 사람이 아홉 번, 여덟 번, 점점 줄어서 두 번, 한 번이 되고 결국 범죄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이 가장 힘들게 느껴지는 시기
믿음의 2단계에서는 신앙생활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지식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알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배웠지만, 여전히 세상이 좋고 비진리를 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진리의 마음과 비진리의 마음이 대등하여 팽팽히 싸울 때는 신앙생활이 가장 힘들게 느껴집니다. 여기서 심해지면 마음이 곤고해지고 충만함이 떨어져서 신앙생활을 등한시하거나 아예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향하기도 합니다.
로마서 7장 21~24절을 보면 선과 악이 내 안에서 싸울 때 신앙생활이 얼마나 힘든지가 잘 나옵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혹 죄를 버리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로 죄를 지적하지 않는 교회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에 매매를 해도,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책망하지 않는 교회를 좋다고 여기지요. 그러나 죄를 지적하지 않는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죄에 대해 다시 무디어져 죄 가운데 빠져들게 되니 구원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죄를 버리고 성결되어 거룩한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버리지 않고 교회만 왔다갔다 한다면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지요. 믿음의 1단계에서 2단계가 되었다면 당연히 3단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편한 대로 신앙생활 하며 오히려 믿음이 퇴보한다면 원수 마귀 사단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요.
그나마 겨자씨만 한 믿음까지 빼앗기 위해 자꾸 비진리의 생각을 불어넣습니다. 어찌하든 은혜를 저버리고 세상을 취하도록 주변 환경을 통해 미혹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둘 저버리고 성령의 충만함도 식은 채, 교회만 왔다갔다 한다면 결국 성령이 소멸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말씀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는 “성령을 소멸치 말며” 말씀했지요. 그러니 죄를 버리는 것이 힘들게 느껴진다 해도 그 과정을 통과하기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이 길만이 축복의 길, 천국 가는 길이기에 원수 마귀와 싸워 이기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하는 것이지요.
비유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가 어마어마한 보물들을 숨겨 놓고 그곳까지 꼬박 한 달을 걸어가기만 하면 엄청난 보물들을 다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아무리 험한 길이라 해도 불평하지 않고 기쁨으로 걸어서 갈 것입니다. 어찌하면 더 빨리 가고자 하겠지요. 중간쯤 가다가 “아이구! 나는 많이 걸어서 너무 힘드니까 되돌아가야겠다.”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소망한다면 결코 진리 가운데 행하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기꺼이 해 주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십수 년간 교회에서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던 성도님이 갑자기 소천한 적이 있습니다. 이분의 경우, 사명을 감당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다투며 하나님 말씀에도 불순종한 것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개인 사업을 하면서 정도를 걷지 못하고 여러 사람과 돈 문제로 얽혀 그대로 두면 더는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자칫 믿음이 퇴보하여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그나마 구원받을 수 있을 때 영혼을 부르신 것입니다. 겉으로는 열심을 내며 충성했지만 정작 마음의 할례 곧 죄악을 버리기 위해 힘쓰지 않았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이분은 믿음의 2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밭에서 일하는 소가 주인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가면 힘들지 않습니다. 자꾸 다른 곳으로 가려 할 때 주인이 고삐를 잡아당기니 힘들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 “미워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당부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신앙생활이 쉬울 텐데, 여전히 나를 고집하며 하지 말라는 것을 하니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힘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주 안에서 참된 평안이 임하는 것을 체험하며 마음에 염려 근심 걱정이 떠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갈 때 천국을 소유하는 기쁨을 누리며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 )에 속한 사람은 죄를 지어도 마음에 곤고함이나 성령의 탄식을 잘 느끼지 못한다. 진리가 무엇인지, 비진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점차 믿음이 성장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결국 행하려고 노력하는 ( )로 접어든다.
2. 신앙생활이란 ( )를 버리고 성결되어 거룩한 하나님 마음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 )를 버리지 않고 교회만 왔다갔다 한다면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그칠 수밖에 없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74~18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믿음의 2단계 천국의 처소와 면류관
처 소 : 믿음의 2단계 사람은 천국의 처소 1천층에 들어가며 이 땅의 다세대 주택이나 아파트에 비유할 수 있는 형태의 집을 소유할 수 있다.
면류관 :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받는다(고전 9:25).
교육목표 : 세상적인 것을 온전히 끊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감으로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나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해지는데 여기서부터 믿음의 1단계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 것은 아직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고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이전의 구습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지요. 아직 술, 담배를 끊지 못한 경우도 있고, 혈기내고 험한 말을 하기도 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도 하는 등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 없는 모습입니다.
믿음의 1단계에 속한 사람은 죄를 지어도 마음에 곤고함이나 성령의 탄식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비진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점차 믿음이 성장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결국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의 2단계’로 접어듭니다.
1.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
믿음의 2단계부터는 하나님 말씀을 배워서 알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진리는 이것이 아닌데 ….” 하며 곤고함을 느낍니다. 마음 안에 계신 성령이 탄식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해 나가니 진리대로 할 때도 있지만 죄와의 싸움에 져서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하셨기에 그 말씀대로 지키려고 노력은 하지만 집안이나 직장에 무슨 일이 있으면 온전히 주일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려고는 하지만 바쁜 일들이 생기면 기도를 쉬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다가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주변 사람과 화평을 좇다가도 자기 뜻에 맞지 않거나 상대가 건드리면 참지 못하여 혈기 내고 다투기도 하지요.
이때에도 절대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은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지 못한다 해도 계속 노력해 가면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고 은혜를 주시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면 차츰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변화되어 갑니다. 전에는 열 번 범죄했던 사람이 아홉 번, 여덟 번, 점점 줄어서 두 번, 한 번이 되고 결국 범죄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이 가장 힘들게 느껴지는 시기
믿음의 2단계에서는 신앙생활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지식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알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배웠지만, 여전히 세상이 좋고 비진리를 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진리의 마음과 비진리의 마음이 대등하여 팽팽히 싸울 때는 신앙생활이 가장 힘들게 느껴집니다. 여기서 심해지면 마음이 곤고해지고 충만함이 떨어져서 신앙생활을 등한시하거나 아예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향하기도 합니다.
로마서 7장 21~24절을 보면 선과 악이 내 안에서 싸울 때 신앙생활이 얼마나 힘든지가 잘 나옵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혹 죄를 버리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로 죄를 지적하지 않는 교회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에 매매를 해도,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책망하지 않는 교회를 좋다고 여기지요. 그러나 죄를 지적하지 않는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죄에 대해 다시 무디어져 죄 가운데 빠져들게 되니 구원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죄를 버리고 성결되어 거룩한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버리지 않고 교회만 왔다갔다 한다면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지요. 믿음의 1단계에서 2단계가 되었다면 당연히 3단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편한 대로 신앙생활 하며 오히려 믿음이 퇴보한다면 원수 마귀 사단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요.
그나마 겨자씨만 한 믿음까지 빼앗기 위해 자꾸 비진리의 생각을 불어넣습니다. 어찌하든 은혜를 저버리고 세상을 취하도록 주변 환경을 통해 미혹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둘 저버리고 성령의 충만함도 식은 채, 교회만 왔다갔다 한다면 결국 성령이 소멸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말씀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는 “성령을 소멸치 말며” 말씀했지요. 그러니 죄를 버리는 것이 힘들게 느껴진다 해도 그 과정을 통과하기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이 길만이 축복의 길, 천국 가는 길이기에 원수 마귀와 싸워 이기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하는 것이지요.
비유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가 어마어마한 보물들을 숨겨 놓고 그곳까지 꼬박 한 달을 걸어가기만 하면 엄청난 보물들을 다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아무리 험한 길이라 해도 불평하지 않고 기쁨으로 걸어서 갈 것입니다. 어찌하면 더 빨리 가고자 하겠지요. 중간쯤 가다가 “아이구! 나는 많이 걸어서 너무 힘드니까 되돌아가야겠다.”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소망한다면 결코 진리 가운데 행하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기꺼이 해 주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십수 년간 교회에서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던 성도님이 갑자기 소천한 적이 있습니다. 이분의 경우, 사명을 감당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다투며 하나님 말씀에도 불순종한 것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개인 사업을 하면서 정도를 걷지 못하고 여러 사람과 돈 문제로 얽혀 그대로 두면 더는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자칫 믿음이 퇴보하여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그나마 구원받을 수 있을 때 영혼을 부르신 것입니다. 겉으로는 열심을 내며 충성했지만 정작 마음의 할례 곧 죄악을 버리기 위해 힘쓰지 않았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이분은 믿음의 2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밭에서 일하는 소가 주인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가면 힘들지 않습니다. 자꾸 다른 곳으로 가려 할 때 주인이 고삐를 잡아당기니 힘들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 “미워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당부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신앙생활이 쉬울 텐데, 여전히 나를 고집하며 하지 말라는 것을 하니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힘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주 안에서 참된 평안이 임하는 것을 체험하며 마음에 염려 근심 걱정이 떠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갈 때 천국을 소유하는 기쁨을 누리며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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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 )에 속한 사람은 죄를 지어도 마음에 곤고함이나 성령의 탄식을 잘 느끼지 못한다. 진리가 무엇인지, 비진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점차 믿음이 성장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결국 행하려고 노력하는 ( )로 접어든다.
2. 신앙생활이란 ( )를 버리고 성결되어 거룩한 하나님 마음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 )를 버리지 않고 교회만 왔다갔다 한다면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그칠 수밖에 없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74~18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믿음의 2단계 천국의 처소와 면류관
처 소 : 믿음의 2단계 사람은 천국의 처소 1천층에 들어가며 이 땅의 다세대 주택이나 아파트에 비유할 수 있는 형태의 집을 소유할 수 있다.
면류관 :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받는다(고전 9:25).
2016-09-15
제0과추석 감사예배 순서와 설교 예문
민수기 6:24~26
읽을말씀 : 민수기 6:24~26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무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길러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을 이웃들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성경에도 우리나라 추석처럼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도신경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6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민수기 6:24~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인도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설 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설교자
2. 설교 예문
민수기 6장 24~26절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으며, 독이 있는 불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역시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혼란이 더해 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24절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셨듯이 사고, 질병, 재앙이 많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셔야 건강할 수 있고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온 가족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여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5절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늘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청소년이 되어서는 스승의 은혜 속에 성장을 합니다. 이처럼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 소망 가운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늘 은혜를 베푸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6절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축복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주기도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무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길러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을 이웃들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성경에도 우리나라 추석처럼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도신경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6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민수기 6:24~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인도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설 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설교자
2. 설교 예문
민수기 6장 24~26절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으며, 독이 있는 불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역시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혼란이 더해 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24절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셨듯이 사고, 질병, 재앙이 많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셔야 건강할 수 있고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온 가족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여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5절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늘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청소년이 되어서는 스승의 은혜 속에 성장을 합니다. 이처럼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 소망 가운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늘 은혜를 베푸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6절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축복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 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주기도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16-09-09
제37과구원받기 위한 믿음의 1단계
행 2:38
읽을말씀 : 행 2:38 | 외울말씀 : 요 1:12 l 참고 말씀 : 행 19:1~2
교육목표 :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은 믿음의 1단계에서 열심히 말씀을 듣고 배워 행함으로 신속히 믿음의 성장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도, 기도하여 응답받는 것도 믿음으로 이뤄지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믿음이라야 하지요. 이러한 믿음에는 크고 작은 분량이 있으며, 각각의 특징에 따라 크게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가 바로 믿음의 1단계입니다. 어떠한 특징이 있을까요?
1. 주님을 영접해 구원받기 위한 믿음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게다가 죄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속하여 죄를 지으며 살아가니 모든 사람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름대로 선하게 산다는 사람도 있지만 진리에 비춰 보면 모두가 죄인입니다. 부모를 통해 물려받은 원죄가 있고, 살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크고 작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밝은 빛으로 방 안을 비춰 보면 미세한 먼지까지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보면 숨겨진 악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혈기, 다툼, 도적질 등 겉으로 드러난 죄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미움, 시기와 같은 것도 죄가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신 대로 죄인들은 반드시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셨지요.
이 사실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주십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신생아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하듯이,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되면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됩니다. 하늘나라 시민권자가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구원받기 위한 믿음, 곧 믿음의 1단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믿음을 말합니다.
2. 회개하고 성령 받기 위한 믿음
사도행전 19장 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지방에서 만난 몇몇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세례 요한의 세례도 받았지만 성령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 성령이 임하고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욜 2:28, 행 2:17).
이 말씀이 오늘날 그대로 성취되었고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받은 사람이 모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 2장 38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하신 대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마음 문을 열어 자신이 죄인임을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마음 안에 보내 주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 받은 사람에게 보증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갓 성령을 받고 구원받은 단계를 믿음의 1단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1단계를 구원받기 위한 믿음, 성령 받기 위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막 성령을 받아 아직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죄와 싸워 버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1단계에서 삶을 마감한다면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강도의 믿음이 여기에 해당되지요.
3.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의 믿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예수님의 좌우편 십자가에 두 강도도 함께 못 박혔습니다(눅 23:33). 이때 한 편 강도는 악한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했지만, 다른 강도는 오히려 그를 꾸짖으며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고 자신의 영혼을 부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낙원에 함께 있겠다’ 하신 것은 강도가 구원받아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을 말씀한 것이지, 예수님이 낙원에 계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낙원을 포함한 모든 천국의 주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낙원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 곧 믿음의 1단계에 해당되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으로 천국의 가장 변두리에 해당하며 상급이 없습니다. 그 강도는 죽기 직전에 선한 양심을 좇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뿐,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낙원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영접해 성령 받은 지 얼마 안 된 초신자만 믿음의 1단계에 해당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여 하나님 말씀을 알면서도 행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1단계의 믿음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또 믿음이 좋아 보이던 사람이 어느 순간 육체의 일(행함으로 짓는 죄)을 행하면 믿음의 1단계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성령 받은 직후에는 성령이 충만하여 가르침 받는 대로 순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세상을 바라봄으로 성령 충만함을 잃으면 다시 구습을 좇아 세상과 짝하며 죄를 짓기도 하지요. 이것이 지속되면 성령이 소멸되어 믿음의 1단계를 유지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 믿음의 1단계에 들어왔다면 예배와 기도회, 모임에 열심히 참석해서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대로 순종함으로 신속히 믿음의 2, 3단계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신앙의 연륜이나 직분이 아닙니다. 그 중심이 얼마나 합당한지가 중요하지요. 비록 성령을 받고 열심히 교회에 다닌다 해도 말씀대로 행치 않고 하나님 앞에 죄의 담을 쌓아 간다면 점점 성령이 소멸되어(살전 5:19) 결국 구원과 멀어집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말씀했습니다. 만일 자녀가 세월이 흘러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부모는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믿음이 성장하지 않거나 퇴보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러니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열심히 말씀을 듣고 배우며 믿음의 성장을 이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구원받은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고자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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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신생아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하듯이, 하나님 자녀가 되면 하늘나라 ( )에 이름이 기록된다. 하늘나라 시민권자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받기 위한 믿음 곧 믿음의 1단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 )가 되는 믿음을 말한다.
2. 어떻게 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3.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는 천국의 어느 처소에 들어갈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67~17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믿음의 1단계가 들어가는 천국 처소 낙원
낙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가운데 마련된 천국의 처소이다.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기에는 부끄럽지만 차마 지옥으로 보내기에는 안타까운 영혼들을 위해 준비된 곳이다. 믿음의 단계로 보면 낙원은 간신히 구원받은 믿음을 가진 영혼들이 들어가는 처소로서 하나님 보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약하며 천국의 처소 중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한다.
교육목표 :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은 믿음의 1단계에서 열심히 말씀을 듣고 배워 행함으로 신속히 믿음의 성장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도, 기도하여 응답받는 것도 믿음으로 이뤄지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믿음이라야 하지요. 이러한 믿음에는 크고 작은 분량이 있으며, 각각의 특징에 따라 크게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가 바로 믿음의 1단계입니다. 어떠한 특징이 있을까요?
1. 주님을 영접해 구원받기 위한 믿음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게다가 죄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속하여 죄를 지으며 살아가니 모든 사람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름대로 선하게 산다는 사람도 있지만 진리에 비춰 보면 모두가 죄인입니다. 부모를 통해 물려받은 원죄가 있고, 살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크고 작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밝은 빛으로 방 안을 비춰 보면 미세한 먼지까지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보면 숨겨진 악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혈기, 다툼, 도적질 등 겉으로 드러난 죄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미움, 시기와 같은 것도 죄가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신 대로 죄인들은 반드시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셨지요.
이 사실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주십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신생아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하듯이,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되면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됩니다. 하늘나라 시민권자가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구원받기 위한 믿음, 곧 믿음의 1단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믿음을 말합니다.
2. 회개하고 성령 받기 위한 믿음
사도행전 19장 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지방에서 만난 몇몇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세례 요한의 세례도 받았지만 성령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 성령이 임하고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욜 2:28, 행 2:17).
이 말씀이 오늘날 그대로 성취되었고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받은 사람이 모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 2장 38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하신 대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마음 문을 열어 자신이 죄인임을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마음 안에 보내 주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 받은 사람에게 보증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갓 성령을 받고 구원받은 단계를 믿음의 1단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1단계를 구원받기 위한 믿음, 성령 받기 위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막 성령을 받아 아직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죄와 싸워 버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1단계에서 삶을 마감한다면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강도의 믿음이 여기에 해당되지요.
3.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의 믿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예수님의 좌우편 십자가에 두 강도도 함께 못 박혔습니다(눅 23:33). 이때 한 편 강도는 악한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했지만, 다른 강도는 오히려 그를 꾸짖으며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고 자신의 영혼을 부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낙원에 함께 있겠다’ 하신 것은 강도가 구원받아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을 말씀한 것이지, 예수님이 낙원에 계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낙원을 포함한 모든 천국의 주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낙원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 곧 믿음의 1단계에 해당되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으로 천국의 가장 변두리에 해당하며 상급이 없습니다. 그 강도는 죽기 직전에 선한 양심을 좇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뿐,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낙원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영접해 성령 받은 지 얼마 안 된 초신자만 믿음의 1단계에 해당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여 하나님 말씀을 알면서도 행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1단계의 믿음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또 믿음이 좋아 보이던 사람이 어느 순간 육체의 일(행함으로 짓는 죄)을 행하면 믿음의 1단계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성령 받은 직후에는 성령이 충만하여 가르침 받는 대로 순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세상을 바라봄으로 성령 충만함을 잃으면 다시 구습을 좇아 세상과 짝하며 죄를 짓기도 하지요. 이것이 지속되면 성령이 소멸되어 믿음의 1단계를 유지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 믿음의 1단계에 들어왔다면 예배와 기도회, 모임에 열심히 참석해서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대로 순종함으로 신속히 믿음의 2, 3단계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신앙의 연륜이나 직분이 아닙니다. 그 중심이 얼마나 합당한지가 중요하지요. 비록 성령을 받고 열심히 교회에 다닌다 해도 말씀대로 행치 않고 하나님 앞에 죄의 담을 쌓아 간다면 점점 성령이 소멸되어(살전 5:19) 결국 구원과 멀어집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말씀했습니다. 만일 자녀가 세월이 흘러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부모는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믿음이 성장하지 않거나 퇴보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러니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열심히 말씀을 듣고 배우며 믿음의 성장을 이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구원받은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고자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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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신생아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하듯이, 하나님 자녀가 되면 하늘나라 ( )에 이름이 기록된다. 하늘나라 시민권자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받기 위한 믿음 곧 믿음의 1단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 )가 되는 믿음을 말한다.
2. 어떻게 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3.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는 천국의 어느 처소에 들어갈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67~17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믿음의 1단계가 들어가는 천국 처소 낙원
낙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가운데 마련된 천국의 처소이다.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기에는 부끄럽지만 차마 지옥으로 보내기에는 안타까운 영혼들을 위해 준비된 곳이다. 믿음의 단계로 보면 낙원은 간신히 구원받은 믿음을 가진 영혼들이 들어가는 처소로서 하나님 보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약하며 천국의 처소 중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한다.
2016-09-02
제36과하나님께서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
롬 12:3
읽을말씀 : 롬 12:3 | 외울말씀 : 요일 2:12 ㅣ 참고 말씀: 고전 3:12~15
교육목표 : 믿음에는 크고 작은 분량이 있음을 알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고 정진해 나가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심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도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여 사람마다 믿음의 분량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1. 사람의 성장 과정에 비유한 믿음의 분량
요한일서 2장을 보면 믿음의 분량을 사람의 성장 과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 자녀들의 믿음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고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습니다(요 1:12). 이렇게 죄 사함 받아 구원받은 믿음이 ‘자녀들의 믿음’입니다(요일 2:12). 이때는 하나님 말씀을 잘 모르고 빛 가운데 살지도 못합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이 단지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여 겨우 구원받을 수 있는 상태로 초신자의 믿음에 불과합니다. 성령을 받아 거듭났다 해도 아직 말씀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없으니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과 짝하기도 하지요. 따라서 이들이 안전하게 정착할 때까지는 마음을 놓지 않고 늘 관심과 사랑으로 살펴 줘야 합니다.
2) 아이들의 믿음
‘자녀들의 믿음’이 성장하면 ‘아이들의 믿음’이 됩니다. ‘아이들의 믿음’은 아버지 하나님을 이제 막 알게 된 믿음을 말합니다(요일 2:14).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안다는 말입니다.
마치 갓 태어난 자녀가 젖먹이 때를 지나면 사물을 인지하고 부모를 알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는 부모를 안다 해도 고향, 취향, 학력, 성품 등 깊은 내용까지는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깊은 뜻이나 섭리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예배와 각종 모임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순종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으며 시험이 오면 불평하거나 낙심하기도 합니다.
3) 청년들의 믿음
아이가 성장하면 청년이 되듯이, 영적으로도 아이들의 믿음이 자라면 청년의 신앙에 이릅니다. 이때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압니다.
요한일서 2장 14절에 “청년들아 …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이 마음에 있으므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천국 소망으로 가득합니다. 뿐만 아니라 악한 자, 곧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려 나가며 미혹을 받지 않습니다. 시험 환난을 만나도 요동하지 않으며 쉬지 않고 기도하여 감사함으로 이겨냅니다.
4) 아비들의 믿음
자기주장이 강하여 굽힐 줄 모르는 청년의 때를 지나 장년이 되면, 인생의 경륜이 쌓여 삶의 지혜가 보입니다. 앞뒤 상황 판단을 잘하여 매사에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알고,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고 다스릴 수 있는지도 알지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비의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근본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지요.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4절에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믿음은 아이의 믿음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아이의 믿음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철없는 아이가 자기 수준에서 부모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아비의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 아는 차원입니다.
2. 에스겔의 이상을 통해 살펴본 믿음의 분량
에스겔 47장 3~5절에는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사람의 몸에 차오르는 높이로 믿음의 분량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험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여기서 ‘물’은 영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의미하며, ‘그 사람’ 곧 손에 줄을 잡은 사람은 주의 사자를 말합니다. 그가 일천 척을 척량할 때마다 물이 발목에서부터 무릎과 허리, 그 이상으로 차오른다는 것은 믿음의 분량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발목까지 물이 찼다’는 것은 자녀의 믿음, ‘무릎까지 찼다’는 것은 아이의 믿음, ‘허리까지 찼다’는 것은 청년의 믿음을 나타내며 ‘키를 넘을 만큼 창일하다’는 것은 장성한 아비의 믿음을 뜻합니다. ‘일천 척을 척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넓고 큰 마음과 한 치 오차도 없는 정확함, 모든 분야를 헤아리는 깊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믿음을 측정하실 때 어느 한 면이 아니라 모든 분야를 종합적으로 정확하게 살핀다는 의미이지요.
3. 공력에 비유한 믿음의 분량
고린도전서 3장 12~13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터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사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믿음을 쌓아 가는데 공력, 곧 믿음의 행함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쌓았는가에 따라 각자 받을 상이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금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불같은 시험의 때에도 요동이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이기며 이를 통해 더 큰 축복을 받아 갑니다. 그러나 은, 보석, 나무, 풀의 단계로 내려갈수록 시험을 이기는 힘이 약해집니다. 그러면 은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어떨까요? 금 같은 믿음을 지닌 사람보다는 못하지만, 불에 깨지고 부서지는 보석과 같은 믿음을 지닌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보석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평소에 충만해 보이다가도 시험이 오면 열심이 식고 충만함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 속에서도 어느 정도 보석의 형체가 보존되듯이 불같은 시험에도 그 공력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보석의 믿음은 금이나 은의 믿음보다는 못하지만 믿음의 행함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 받을 영광과 상급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무나 풀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보석보다 못한 믿음으로서 불같은 시험이 오면 승리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생명이 없는 마른 짚의 믿음은 구원조차 받을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마음에는 구원받을 만한 영적인 믿음이 없는 경우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구원받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을, 어떤 사람은 달의 영광을, 어떤 사람은 별의 영광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은 무수한 별들의 밝기가 다르듯이, 별의 영광이라도 믿음에 따라 각각의 영광이 다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나무나 풀의 믿음에 멈추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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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경에 믿음의 분량이 있음을 비유해 놓은 구절들을 찾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60~16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믿음의 단계/ 고전 3:12~15/ 고전 15:41/ 요일 2:12~14/ 겔 47:3~5
구원받지 못하는 단계/ 짚/ _ / _ / _
1단계(낙원) /풀 / _ /자녀들의 믿음/ 발목까지 물이 참
2단계(1천층)/ 나무/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 아이들의 믿음/ 무릎까지 물이 참
3단계(2천층)/ 보석/ 달의 영광/ 청년들의 믿음/ 허리까지 물이 참
4단계(3천층)/ 은/ 해의 영광/ 아비들의 믿음/ 키를 넘을 만큼 물이 창일함
5단계/ (새 예루살렘)/ 금/ 해의 영광/ 아비들의 믿음/ 키를 넘을 만큼 물이 창일함
교육목표 : 믿음에는 크고 작은 분량이 있음을 알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고 정진해 나가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심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도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여 사람마다 믿음의 분량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1. 사람의 성장 과정에 비유한 믿음의 분량
요한일서 2장을 보면 믿음의 분량을 사람의 성장 과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 자녀들의 믿음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고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습니다(요 1:12). 이렇게 죄 사함 받아 구원받은 믿음이 ‘자녀들의 믿음’입니다(요일 2:12). 이때는 하나님 말씀을 잘 모르고 빛 가운데 살지도 못합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이 단지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여 겨우 구원받을 수 있는 상태로 초신자의 믿음에 불과합니다. 성령을 받아 거듭났다 해도 아직 말씀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없으니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과 짝하기도 하지요. 따라서 이들이 안전하게 정착할 때까지는 마음을 놓지 않고 늘 관심과 사랑으로 살펴 줘야 합니다.
2) 아이들의 믿음
‘자녀들의 믿음’이 성장하면 ‘아이들의 믿음’이 됩니다. ‘아이들의 믿음’은 아버지 하나님을 이제 막 알게 된 믿음을 말합니다(요일 2:14).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안다는 말입니다.
마치 갓 태어난 자녀가 젖먹이 때를 지나면 사물을 인지하고 부모를 알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는 부모를 안다 해도 고향, 취향, 학력, 성품 등 깊은 내용까지는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깊은 뜻이나 섭리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예배와 각종 모임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순종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으며 시험이 오면 불평하거나 낙심하기도 합니다.
3) 청년들의 믿음
아이가 성장하면 청년이 되듯이, 영적으로도 아이들의 믿음이 자라면 청년의 신앙에 이릅니다. 이때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압니다.
요한일서 2장 14절에 “청년들아 …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이 마음에 있으므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천국 소망으로 가득합니다. 뿐만 아니라 악한 자, 곧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려 나가며 미혹을 받지 않습니다. 시험 환난을 만나도 요동하지 않으며 쉬지 않고 기도하여 감사함으로 이겨냅니다.
4) 아비들의 믿음
자기주장이 강하여 굽힐 줄 모르는 청년의 때를 지나 장년이 되면, 인생의 경륜이 쌓여 삶의 지혜가 보입니다. 앞뒤 상황 판단을 잘하여 매사에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알고,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고 다스릴 수 있는지도 알지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비의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근본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지요.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4절에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믿음은 아이의 믿음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아이의 믿음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철없는 아이가 자기 수준에서 부모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아비의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 아는 차원입니다.
2. 에스겔의 이상을 통해 살펴본 믿음의 분량
에스겔 47장 3~5절에는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사람의 몸에 차오르는 높이로 믿음의 분량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험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여기서 ‘물’은 영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의미하며, ‘그 사람’ 곧 손에 줄을 잡은 사람은 주의 사자를 말합니다. 그가 일천 척을 척량할 때마다 물이 발목에서부터 무릎과 허리, 그 이상으로 차오른다는 것은 믿음의 분량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발목까지 물이 찼다’는 것은 자녀의 믿음, ‘무릎까지 찼다’는 것은 아이의 믿음, ‘허리까지 찼다’는 것은 청년의 믿음을 나타내며 ‘키를 넘을 만큼 창일하다’는 것은 장성한 아비의 믿음을 뜻합니다. ‘일천 척을 척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넓고 큰 마음과 한 치 오차도 없는 정확함, 모든 분야를 헤아리는 깊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믿음을 측정하실 때 어느 한 면이 아니라 모든 분야를 종합적으로 정확하게 살핀다는 의미이지요.
3. 공력에 비유한 믿음의 분량
고린도전서 3장 12~13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터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사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믿음을 쌓아 가는데 공력, 곧 믿음의 행함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쌓았는가에 따라 각자 받을 상이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금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불같은 시험의 때에도 요동이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이기며 이를 통해 더 큰 축복을 받아 갑니다. 그러나 은, 보석, 나무, 풀의 단계로 내려갈수록 시험을 이기는 힘이 약해집니다. 그러면 은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어떨까요? 금 같은 믿음을 지닌 사람보다는 못하지만, 불에 깨지고 부서지는 보석과 같은 믿음을 지닌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보석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평소에 충만해 보이다가도 시험이 오면 열심이 식고 충만함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 속에서도 어느 정도 보석의 형체가 보존되듯이 불같은 시험에도 그 공력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보석의 믿음은 금이나 은의 믿음보다는 못하지만 믿음의 행함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 받을 영광과 상급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무나 풀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보석보다 못한 믿음으로서 불같은 시험이 오면 승리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생명이 없는 마른 짚의 믿음은 구원조차 받을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마음에는 구원받을 만한 영적인 믿음이 없는 경우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구원받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을, 어떤 사람은 달의 영광을, 어떤 사람은 별의 영광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은 무수한 별들의 밝기가 다르듯이, 별의 영광이라도 믿음에 따라 각각의 영광이 다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나무나 풀의 믿음에 멈추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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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경에 믿음의 분량이 있음을 비유해 놓은 구절들을 찾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60~16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믿음의 단계/ 고전 3:12~15/ 고전 15:41/ 요일 2:12~14/ 겔 47:3~5
구원받지 못하는 단계/ 짚/ _ / _ / _
1단계(낙원) /풀 / _ /자녀들의 믿음/ 발목까지 물이 참
2단계(1천층)/ 나무/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 아이들의 믿음/ 무릎까지 물이 참
3단계(2천층)/ 보석/ 달의 영광/ 청년들의 믿음/ 허리까지 물이 참
4단계(3천층)/ 은/ 해의 영광/ 아비들의 믿음/ 키를 넘을 만큼 물이 창일함
5단계/ (새 예루살렘)/ 금/ 해의 영광/ 아비들의 믿음/ 키를 넘을 만큼 물이 창일함
2016-08-26
제35과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믿음
히 11:1~3
읽을말씀 : 히 11:1~3 | 외울말씀 : 막 9:23 ㅣ 참고 말씀: 막 11:24
교육목표 : 의심을 가져오는 모든 이론과 생각을 깨뜨림으로 무엇이나 응답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게 한다.
믿음은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믿는다면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영적인 믿음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육적인 믿음입니다. 육적인 믿음은 자신의 지식과 생각에 일치하는 것만 믿는 믿음,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변개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지식, 생각에 맞는 부분만 믿습니다. 그러니 과학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성경 사건들은 납득하기가 어렵지요.
이처럼 육적인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안다 해도 막상 현실에 어려움이 닥치면 믿음을 내보이지 못합니다. 응답이 더디면 마음이 변하여 점차 의심이 생깁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기도의 응답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믿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을까요?
1.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응답하시는 영적인 믿음
1)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습니다
영적인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는 것으로서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를 믿습니다.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사실이 의심 없이 믿어집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믿어지니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지켜 행하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대로 응답받은 줄로 믿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재미있고 행복하지요. 이러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할 때 하나님께서 참 자녀라 인정하시며 응답과 축복으로 보장해 주십니다.
2)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습니다
한번 믿은 것은 현실과 조건에 상관없이 변개하지 않고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믿음입니다. 가령, 어떤 소원을 응답받기 위해 기도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응답이 오지 않는다 해서 “왜 응답해 주시지 않나?” 하고 불평하거나 의심이 생긴다면 이는 육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했습니다(약 1:6~7).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한 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고 이미 응답받은 줄로 믿는 믿음이지요.
3)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지식으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행함이 따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고 순종하여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인정하고 응답하시는 영적인 믿음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오랜 가뭄 중에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그를 공궤했습니다. 생명과도 같은 양식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의 말이기에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뭄이 끝날 때까지 떡을 구울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지요(왕상 17장). 이런 믿음이 있으면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도 기도하여 응답을 받습니다. 나아가 아름답고 영화로운 천국을 소유하여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2.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려면
1) 의심을 가져오는 모든 생각과 이론을 깨뜨려야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입력된 세상적인 지식은 대부분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므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는 데 큰 방해 요소가 됩니다. 특히 진화론은 창조주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이론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진화론처럼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의심을 가져다주는 이론과,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비진리의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배운 지식이나 이론이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면 철저히 무(無)로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과 이론이 옳다 고집하면 하나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지 못하니 영적인 믿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예배를 드린다 해도 영적인 믿음이 오지 않지요. 그러니 기도 응답도 받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그에 맞지 않는 생각과 이론을 깨뜨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육적인 믿음의 소유자였지만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그동안 쌓은 학식과 이론 등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생각을 깨뜨려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되니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권능의 사도가 될 수 있었지요. 따라서 육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시키려면 진리에 위배된 모든 이론과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고후 10:5).
2)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들으며 가르침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가르침 받을 때 믿음이 자라납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기에 말씀을 많이 알수록 하나님의 마음과 뜻도 더 밝히 알 수 있지요. 또한 에베소서 6장 17절에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신 대로 내 안에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모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듣고 배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단, 지식으로만 쌓고 행하지 않으면 교만해질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3)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 행해야 합니다
피아노 교본을 수백 번, 수천 번 보고 외운다 해서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피아노를 치며 연습을 해야 하지요. 마찬가지로 말씀을 아무리 열심히 읽고 들으며 배워도 삶에 적용하여 행치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지켜 행할 때 그것이 살아 역사하여 생명이 되고, 응답과 축복으로 임하지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하라, 지키라, 하지 말라, 버리라”는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시지요. 그러니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행함이 더 온전케 되고, 불가능한 일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1세대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원망했습니다. 열두 정탐꾼 중에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 드리며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 고백하였지요. 반면에 열 정탐꾼은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다’고 악평합니다. 이에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하였습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 내린 열 재앙과,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으로 건넌 일,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일 등 하나님의 역사를 수없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놀라운 일을 보고도 영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고, 여전히 육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었지요.
따라서 참 믿음을 소유하려면 육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믿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할 때 주어집니다.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워서 온전히 지켜 행함으로 구원과 응답, 축복의 길로 인도하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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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의심을 가져오는 모든 ( )과 ( )을 깨뜨려야 한다.
②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들으며 ( ) 받아야 한다.
③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 ( ) 한다.
2.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행함이 나올까요?
① 자신의 ( )이나 ( )에 맞지 않아도 믿는다.
② 어떤 상황에서도 ( ) 않는다.
③ 하나님 말씀에 ( )하는 행함이 나온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52~15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구원의 투구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한다. 전쟁에서 군인이 몸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투구를 쓰듯이 우리도 구원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붙잡고 있어야 한다.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생명 다해 충성할 수 있다.
성령의 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곧 영적으로 말씀을 무장한 만큼 위로부터 능력과 권세가 주어져 어두움을 능히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다.
교육목표 : 의심을 가져오는 모든 이론과 생각을 깨뜨림으로 무엇이나 응답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게 한다.
믿음은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믿는다면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영적인 믿음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육적인 믿음입니다. 육적인 믿음은 자신의 지식과 생각에 일치하는 것만 믿는 믿음,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변개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지식, 생각에 맞는 부분만 믿습니다. 그러니 과학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성경 사건들은 납득하기가 어렵지요.
이처럼 육적인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안다 해도 막상 현실에 어려움이 닥치면 믿음을 내보이지 못합니다. 응답이 더디면 마음이 변하여 점차 의심이 생깁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기도의 응답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믿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을까요?
1.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응답하시는 영적인 믿음
1)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습니다
영적인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는 것으로서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를 믿습니다.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사실이 의심 없이 믿어집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믿어지니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지켜 행하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대로 응답받은 줄로 믿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재미있고 행복하지요. 이러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할 때 하나님께서 참 자녀라 인정하시며 응답과 축복으로 보장해 주십니다.
2)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습니다
한번 믿은 것은 현실과 조건에 상관없이 변개하지 않고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믿음입니다. 가령, 어떤 소원을 응답받기 위해 기도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응답이 오지 않는다 해서 “왜 응답해 주시지 않나?” 하고 불평하거나 의심이 생긴다면 이는 육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했습니다(약 1:6~7).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한 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고 이미 응답받은 줄로 믿는 믿음이지요.
3)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지식으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행함이 따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고 순종하여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인정하고 응답하시는 영적인 믿음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오랜 가뭄 중에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그를 공궤했습니다. 생명과도 같은 양식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의 말이기에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뭄이 끝날 때까지 떡을 구울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지요(왕상 17장). 이런 믿음이 있으면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도 기도하여 응답을 받습니다. 나아가 아름답고 영화로운 천국을 소유하여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2.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려면
1) 의심을 가져오는 모든 생각과 이론을 깨뜨려야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입력된 세상적인 지식은 대부분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므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는 데 큰 방해 요소가 됩니다. 특히 진화론은 창조주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이론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진화론처럼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의심을 가져다주는 이론과,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비진리의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배운 지식이나 이론이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면 철저히 무(無)로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과 이론이 옳다 고집하면 하나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지 못하니 영적인 믿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예배를 드린다 해도 영적인 믿음이 오지 않지요. 그러니 기도 응답도 받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그에 맞지 않는 생각과 이론을 깨뜨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육적인 믿음의 소유자였지만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그동안 쌓은 학식과 이론 등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생각을 깨뜨려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되니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권능의 사도가 될 수 있었지요. 따라서 육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시키려면 진리에 위배된 모든 이론과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고후 10:5).
2)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들으며 가르침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가르침 받을 때 믿음이 자라납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기에 말씀을 많이 알수록 하나님의 마음과 뜻도 더 밝히 알 수 있지요. 또한 에베소서 6장 17절에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신 대로 내 안에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모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듣고 배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단, 지식으로만 쌓고 행하지 않으면 교만해질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3)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 행해야 합니다
피아노 교본을 수백 번, 수천 번 보고 외운다 해서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피아노를 치며 연습을 해야 하지요. 마찬가지로 말씀을 아무리 열심히 읽고 들으며 배워도 삶에 적용하여 행치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지켜 행할 때 그것이 살아 역사하여 생명이 되고, 응답과 축복으로 임하지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하라, 지키라, 하지 말라, 버리라”는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시지요. 그러니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행함이 더 온전케 되고, 불가능한 일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1세대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원망했습니다. 열두 정탐꾼 중에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 드리며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 고백하였지요. 반면에 열 정탐꾼은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다’고 악평합니다. 이에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하였습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 내린 열 재앙과,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으로 건넌 일,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일 등 하나님의 역사를 수없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놀라운 일을 보고도 영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고, 여전히 육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었지요.
따라서 참 믿음을 소유하려면 육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믿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할 때 주어집니다.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워서 온전히 지켜 행함으로 구원과 응답, 축복의 길로 인도하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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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의심을 가져오는 모든 ( )과 ( )을 깨뜨려야 한다.
②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들으며 ( ) 받아야 한다.
③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 ( ) 한다.
2.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행함이 나올까요?
① 자신의 ( )이나 ( )에 맞지 않아도 믿는다.
② 어떤 상황에서도 ( ) 않는다.
③ 하나님 말씀에 ( )하는 행함이 나온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52~15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구원의 투구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한다. 전쟁에서 군인이 몸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투구를 쓰듯이 우리도 구원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붙잡고 있어야 한다.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생명 다해 충성할 수 있다.
성령의 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곧 영적으로 말씀을 무장한 만큼 위로부터 능력과 권세가 주어져 어두움을 능히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다.
2016-08-19
제34과상대를 감동시키며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선
마 5:39~42
읽을말씀 : 마 5:39~42 | 외울말씀 : 롬 12:20~21 ㅣ 참고 말씀: 롬 9:3
교육목표 : 악한 상대에게 선을 행하여 오히려 감동을 주며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죄악이 관영하여 선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만일 이러한 세대 속에서 참된 선을 행하여 많은 사람을 빛 가운데로 이끌 수 있다면 하나님께 큰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응치는 않으나 마음에 악한 감정이 있어 눌러 참는 것은 ‘1단계의 선’입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착하다 할 수 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선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은 마음에 어떠한 악한 감정도 품지 않는 ‘2단계의 선’부터입니다. 이 단계만 이르러도 마음에 기쁨과 감사, 행복, 사랑이 가득합니다.
1.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선의 3단계’
선의 3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도 선을 행하여 오히려 감동을 줄 수 있는 차원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기에 악으로 맞대응하지 않는 ‘선의 2단계’가 소극적인 선이라면,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선의 3단계’는 적극적인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의 3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마음이 진리로 채워진 ‘온 영’의 차원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지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39~42절에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진정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선의 3단계에 들어온 것이지요.
자기의 손익을 먼저 따지지 않으며 선을 좇기 위해서는 희생도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어찌하면 그의 마음을 풀어 화평을 이룰까.’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선이 깊어질수록 자신을 희생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는 자체가 기쁘고 즐겁기 때문에 이것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지요. 더욱이 영적으로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룬 만큼 영적인 빛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선의 2단계에만 들어가도 영적인 빛으로 인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므로 시험 환난이나 핍박이 물러간다 했습니다. 하물며 선의 3단계에 들어가면 감히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할 뿐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분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악을 행하는 상대에게 선한 말과 행함으로 감동을 주어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지요. 이는 선을 행하는 사람의 영적인 빛이 강하여 상대에게 역사하는 원수 마귀 사단이 물러가고 상대의 마음에 남아 있는 작은 선에까지 그 빛이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은 단지 착해서 져주고 다 내어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고 그 궤계까지도 분쇄시키는 큰 위력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경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모함한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이나 원망도 없었습니다. 왕이 악한 무리들의 궤계에 휘말려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지 않았다 해서 서운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로 사자 굴에서 살아났을 때에 감동적인 말로 왕에게 아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단 6:21~22)
이처럼 선한 말을 들을 때 왕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즉시로 왕은 다니엘을 해치려 했던 사람들을 징벌하고 다니엘을 더욱 높여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이 온 나라에 하나님을 존중하도록 조서를 내렸지요. 다니엘처럼 상대를 감동시키는 선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해 주시고 무엇이든 마음에 품은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어 천국에서도 매우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혹여 ‘나는 아직 악도 온전히 버리지 못했는데, 언제 선의 2단계를 거쳐서 3단계에 이르나?’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 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어도 열심히 선을 행하고자 노력한다면 변화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선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등 최선을 다해 선을 쌓아 나가면 그만큼 신속히 악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선의 2단계에서도 때에 따라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적극적인 선이 나올 수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에게 맞대응하지 않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의 마음을 평안케 할 수 있는 선한 말을 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선한 행함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의 3단계에서는 이런 선한 말과 행함이 항상 나옵니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상대에게 어쩌다가 선한 말과 행함이 나왔다고 해서 자신을 선의 3단계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연 어떠한 상황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항상 선대할 수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2. 악한 상대에게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
가장 차원 높은 선은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입니다. 바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선의 차원이지요. 또한 의인이나 선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선의 차원이 이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때 그 이유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부분 예수님께서 징벌을 받아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지요(사 5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흠 없는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단번에 대속해 주셨지요.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 자신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병정들도 십자가의 섭리를 깨달아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처럼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에 이른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번번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출 32:31~32). 수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자기 유익에 맞지 않으면 늘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심지어 모세를 원망하며 돌로 치려고까지 했지요. 그럼에도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기도했습니다(롬 9:3).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당시 사도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그들은 구원받기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 외에 엘리야, 에녹과 아브라함과 같은 분들도 최고의 선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선의 차원에 이르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수 없고 마음에 소원을 품기만 해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위로부터 권능을 받아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 보좌 가까이에서 세세토록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으로 관영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믿음의 선진들처럼 최고의 선을 이루어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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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선의 3단계에서는 악을 행하는 상대에게 선한 ( )과 ( )으로 감동을 주어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난다.
2. 선의 4단계는 가장 높은 차원의 선으로,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 )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단계이다. 바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선의 차원이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44~15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최고의 선에 이른 에녹
원래 모난 것이 없고 순수하고 착한 성정을 지녔다. 늘 하나님에 대해 궁구하며, 영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였다. 무엇을 보아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으려 했고, 영적인 것을 궁구했다.
강하거나 자기를 주장하는 성정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찾을 때는 적극적이었기에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만물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느끼는데 적극적이었던 에녹의 성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큰 바탕이 되었다.
교육목표 : 악한 상대에게 선을 행하여 오히려 감동을 주며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죄악이 관영하여 선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만일 이러한 세대 속에서 참된 선을 행하여 많은 사람을 빛 가운데로 이끌 수 있다면 하나님께 큰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응치는 않으나 마음에 악한 감정이 있어 눌러 참는 것은 ‘1단계의 선’입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착하다 할 수 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선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은 마음에 어떠한 악한 감정도 품지 않는 ‘2단계의 선’부터입니다. 이 단계만 이르러도 마음에 기쁨과 감사, 행복, 사랑이 가득합니다.
1.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선의 3단계’
선의 3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도 선을 행하여 오히려 감동을 줄 수 있는 차원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기에 악으로 맞대응하지 않는 ‘선의 2단계’가 소극적인 선이라면,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선의 3단계’는 적극적인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의 3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마음이 진리로 채워진 ‘온 영’의 차원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지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39~42절에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진정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선의 3단계에 들어온 것이지요.
자기의 손익을 먼저 따지지 않으며 선을 좇기 위해서는 희생도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어찌하면 그의 마음을 풀어 화평을 이룰까.’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선이 깊어질수록 자신을 희생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는 자체가 기쁘고 즐겁기 때문에 이것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지요. 더욱이 영적으로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룬 만큼 영적인 빛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선의 2단계에만 들어가도 영적인 빛으로 인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므로 시험 환난이나 핍박이 물러간다 했습니다. 하물며 선의 3단계에 들어가면 감히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할 뿐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분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악을 행하는 상대에게 선한 말과 행함으로 감동을 주어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지요. 이는 선을 행하는 사람의 영적인 빛이 강하여 상대에게 역사하는 원수 마귀 사단이 물러가고 상대의 마음에 남아 있는 작은 선에까지 그 빛이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은 단지 착해서 져주고 다 내어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고 그 궤계까지도 분쇄시키는 큰 위력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경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모함한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이나 원망도 없었습니다. 왕이 악한 무리들의 궤계에 휘말려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지 않았다 해서 서운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로 사자 굴에서 살아났을 때에 감동적인 말로 왕에게 아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단 6:21~22)
이처럼 선한 말을 들을 때 왕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즉시로 왕은 다니엘을 해치려 했던 사람들을 징벌하고 다니엘을 더욱 높여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이 온 나라에 하나님을 존중하도록 조서를 내렸지요. 다니엘처럼 상대를 감동시키는 선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해 주시고 무엇이든 마음에 품은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어 천국에서도 매우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혹여 ‘나는 아직 악도 온전히 버리지 못했는데, 언제 선의 2단계를 거쳐서 3단계에 이르나?’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 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어도 열심히 선을 행하고자 노력한다면 변화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선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등 최선을 다해 선을 쌓아 나가면 그만큼 신속히 악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선의 2단계에서도 때에 따라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적극적인 선이 나올 수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에게 맞대응하지 않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의 마음을 평안케 할 수 있는 선한 말을 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선한 행함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의 3단계에서는 이런 선한 말과 행함이 항상 나옵니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상대에게 어쩌다가 선한 말과 행함이 나왔다고 해서 자신을 선의 3단계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연 어떠한 상황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항상 선대할 수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2. 악한 상대에게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
가장 차원 높은 선은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입니다. 바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선의 차원이지요. 또한 의인이나 선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선의 차원이 이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때 그 이유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부분 예수님께서 징벌을 받아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지요(사 5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흠 없는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단번에 대속해 주셨지요.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 자신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병정들도 십자가의 섭리를 깨달아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처럼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에 이른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번번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출 32:31~32). 수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자기 유익에 맞지 않으면 늘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심지어 모세를 원망하며 돌로 치려고까지 했지요. 그럼에도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기도했습니다(롬 9:3).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당시 사도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그들은 구원받기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 외에 엘리야, 에녹과 아브라함과 같은 분들도 최고의 선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선의 차원에 이르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수 없고 마음에 소원을 품기만 해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위로부터 권능을 받아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 보좌 가까이에서 세세토록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으로 관영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믿음의 선진들처럼 최고의 선을 이루어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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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선의 3단계에서는 악을 행하는 상대에게 선한 ( )과 ( )으로 감동을 주어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난다.
2. 선의 4단계는 가장 높은 차원의 선으로,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 )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단계이다. 바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선의 차원이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44~15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최고의 선에 이른 에녹
원래 모난 것이 없고 순수하고 착한 성정을 지녔다. 늘 하나님에 대해 궁구하며, 영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였다. 무엇을 보아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으려 했고, 영적인 것을 궁구했다.
강하거나 자기를 주장하는 성정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찾을 때는 적극적이었기에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만물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느끼는데 적극적이었던 에녹의 성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큰 바탕이 되었다.
2016-08-12
제33과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
롬 12:2
읽을말씀 : 롬 12:2 | 외울말씀 : 롬 12:17 ㅣ 참고 말씀: 딤전 4:5
교육목표 : 절대적인 선의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행함으로 온전한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선을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선과 악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는 ‘선의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1. 온전한 선의 기준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자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셨지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신데 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하신 것일까요?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지요. 더욱이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상태입니다.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업을 끝내시기 전까지는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셔야 하는 화목제물의 입장이기에 스스로 선하다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온전히 선하시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만이 선의 기준이 됨을 알려 주기 위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성장하면서 만들어 놓은 양심에 비추어 “선하다.” 또는 “선하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양심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진리와 비진리를 섞어서 ‘이것이 옳다’라고 만들어 놓은 가치 판단 기준입니다. 따라서 양심은 진리와 비진리가 혼합된 마음으로, 각자의 배움이나 환경, 어떤 부모와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게 형성됩니다.
이러한 양심은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 말씀만이 절대적인 선,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선을 이루려면 선 자체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긴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배워 그대로 행함으로 마음에 일구어야 합니다.
믿음에도 성장 단계가 있듯이 선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하다고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선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 뿐 아니라 나쁜 감정 자체를 품지 않는 것입니다. 나아가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오히려 감동을 주는 선과,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우선 사람들은 선하다고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선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에 대해 살펴겠습니다.
2. 악으로 대항치 않고 감정을 눌러 참는 ‘선의 1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어도 함께 악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선의 1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자신을 욕하고 때리는데 맞대응하지 않고 잠잠히 참았다고 합시다.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알기에 또는 교양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꾹 눌러 참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하고 온유해 보이므로 세상에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인정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하다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눌러 참는다는 것은 여전히 그 속에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경우 한계에 이르면 결국 그 악이 표출됩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악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악을 버리고 어찌하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잠언 8장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정녕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3.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는 ‘선의 2단계’
상대가 악을 행할 때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어야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의 2단계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에 해당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상대가 아무리 나를 미워하며 힘들게 해도 악으로 생각지 않으며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기 때문에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은 마리아가 자신과 동침하지도 않았는데 잉태한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명백히 간음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니 율법대로 처리하거나, 참는다 해도 평안한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말씀합니다(마 1:19). 마음에 악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상태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의 단계입니다.
물론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악을 행할 때 같이 악으로 갚지는 않는다 해도 순간 마음에 감정이 일거나 요동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럴 때도 이내 마음을 다스리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 선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 나가면 나중에는 순간의 감정조차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하셨으니 말씀으로 자신을 조명하고 기도할 때 선의 차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듣는 데 그치지 말고 말씀으로 자신을 비춰 비진리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이 모습을 놓고 불같이 기도하여 버려 나가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합니다. 성령의 불로 죄성들을 태워 주심으로 성결한 마음을 이루게 해 주십니다. 그럴 때 순간의 악한 감정조차도 일어나지 않는 선의 2단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최소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의 2단계’를 이루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고 시험 환난도 당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만일 원수 마귀 사단이 부추기는 대로 악을 행한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 해도 지킴 받거나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만 이루어도 그 선이 영적인 빛으로 역사되어 어둠이 물러가기 때문에 자연히 각종 문제가 해결됩니다.
다음 예를 통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선한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어떤 분야의 책임자로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랫사람의 실수로 일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때 “제가 더 돌아보지 못한 까닭입니다.”라며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 조금이라도 아랫사람을 탓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선하다 할 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은 억지가 아닌 진심으로 내 탓으로 여기고 돌아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며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 주시지요.
또 다른 예로, 다른 사람이 책망 듣는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때 ‘나는 상관없는 일이니 다행이다.’ 하지는 않습니까? 혹은 자신도 책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속으로 함께 책망하고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마음이 선한 사람은 자신과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라 해도 ‘내가 도와줬더라면 실수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며 민망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봅니다. 더욱이 자신이 직접 관련된 일이라면 당연히 모든 상황을 진실하게 말하고 일에 대한 결과도 책임지려 하겠지요.
그러니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때론 손해 보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선을 행하는 것이 손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사랑과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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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선의 1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 )이 있어도 함께 ( )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선의 2단계는 상대가 ( )을 행할 때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 )도 없다.
2. 양심은 왜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을까요?
3.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신데 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신 것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33~14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선의 단계’
선의 1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감정이 있지만 대항하지 않고 눌러 참는다.
선의 2단계 :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뿐더러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다.
선의 3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선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단계이다.
선의 4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이다.
교육목표 : 절대적인 선의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행함으로 온전한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선을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선과 악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는 ‘선의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1. 온전한 선의 기준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자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셨지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신데 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하신 것일까요?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지요. 더욱이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상태입니다.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업을 끝내시기 전까지는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셔야 하는 화목제물의 입장이기에 스스로 선하다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온전히 선하시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만이 선의 기준이 됨을 알려 주기 위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성장하면서 만들어 놓은 양심에 비추어 “선하다.” 또는 “선하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양심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진리와 비진리를 섞어서 ‘이것이 옳다’라고 만들어 놓은 가치 판단 기준입니다. 따라서 양심은 진리와 비진리가 혼합된 마음으로, 각자의 배움이나 환경, 어떤 부모와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게 형성됩니다.
이러한 양심은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 말씀만이 절대적인 선,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선을 이루려면 선 자체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긴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배워 그대로 행함으로 마음에 일구어야 합니다.
믿음에도 성장 단계가 있듯이 선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하다고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선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 뿐 아니라 나쁜 감정 자체를 품지 않는 것입니다. 나아가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오히려 감동을 주는 선과,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우선 사람들은 선하다고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선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에 대해 살펴겠습니다.
2. 악으로 대항치 않고 감정을 눌러 참는 ‘선의 1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어도 함께 악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선의 1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자신을 욕하고 때리는데 맞대응하지 않고 잠잠히 참았다고 합시다.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알기에 또는 교양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꾹 눌러 참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하고 온유해 보이므로 세상에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인정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하다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눌러 참는다는 것은 여전히 그 속에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경우 한계에 이르면 결국 그 악이 표출됩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악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악을 버리고 어찌하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잠언 8장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정녕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3.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는 ‘선의 2단계’
상대가 악을 행할 때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어야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의 2단계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에 해당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상대가 아무리 나를 미워하며 힘들게 해도 악으로 생각지 않으며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기 때문에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은 마리아가 자신과 동침하지도 않았는데 잉태한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명백히 간음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니 율법대로 처리하거나, 참는다 해도 평안한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말씀합니다(마 1:19). 마음에 악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상태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의 단계입니다.
물론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악을 행할 때 같이 악으로 갚지는 않는다 해도 순간 마음에 감정이 일거나 요동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럴 때도 이내 마음을 다스리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 선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 나가면 나중에는 순간의 감정조차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하셨으니 말씀으로 자신을 조명하고 기도할 때 선의 차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듣는 데 그치지 말고 말씀으로 자신을 비춰 비진리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이 모습을 놓고 불같이 기도하여 버려 나가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합니다. 성령의 불로 죄성들을 태워 주심으로 성결한 마음을 이루게 해 주십니다. 그럴 때 순간의 악한 감정조차도 일어나지 않는 선의 2단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최소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의 2단계’를 이루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고 시험 환난도 당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만일 원수 마귀 사단이 부추기는 대로 악을 행한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 해도 지킴 받거나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만 이루어도 그 선이 영적인 빛으로 역사되어 어둠이 물러가기 때문에 자연히 각종 문제가 해결됩니다.
다음 예를 통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선한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어떤 분야의 책임자로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랫사람의 실수로 일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때 “제가 더 돌아보지 못한 까닭입니다.”라며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 조금이라도 아랫사람을 탓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선하다 할 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은 억지가 아닌 진심으로 내 탓으로 여기고 돌아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며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 주시지요.
또 다른 예로, 다른 사람이 책망 듣는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때 ‘나는 상관없는 일이니 다행이다.’ 하지는 않습니까? 혹은 자신도 책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속으로 함께 책망하고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마음이 선한 사람은 자신과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라 해도 ‘내가 도와줬더라면 실수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며 민망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봅니다. 더욱이 자신이 직접 관련된 일이라면 당연히 모든 상황을 진실하게 말하고 일에 대한 결과도 책임지려 하겠지요.
그러니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때론 손해 보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선을 행하는 것이 손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사랑과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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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선의 1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 )이 있어도 함께 ( )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선의 2단계는 상대가 ( )을 행할 때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 )도 없다.
2. 양심은 왜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을까요?
3.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신데 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신 것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33~14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선의 단계’
선의 1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감정이 있지만 대항하지 않고 눌러 참는다.
선의 2단계 :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뿐더러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다.
선의 3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선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단계이다.
선의 4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이다.
2016-08-05
제32과부활의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
요 20:17~18
읽을말씀 : 요 20:17~18 | 외울말씀 : 잠 8:17 l 참고 말씀: 요 12:1~8
교육목표 : 육체의 소욕을 벗고 순전하고 거룩한 마음을 이루어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참 자녀가 되게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지극한 정성과 선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죄 사함을 받고 모든 저주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으로 병든 몸과 상처난 마음까지 치유되어 진정한 기쁨과 행복, 감사가 넘치는 삶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내보인 선과 사랑은 무엇일까요?
1.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마리아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데에는 예수님을 향한 진한 사랑과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은 아주 좋은 그릇입니다. 영적으로는 우리 몸을 상징하지요. 따라서 옥합을 깨뜨린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몸을 드려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라도 옥합을 깨뜨려야만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권위나 체면을 개의치 않고 생각과 이론의 틀도 깨뜨려 온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에만 이러한 헌신이 가능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 드린 향유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당시 향유는 대체로 값이 매우 비쌌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베다니 마리아가 부어 드린 향유는 순전한 나드 한 근으로 그 값이 삼백 데나리온에 달했지요. 일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삼백 데나리온이라면 거의 1년 내내 일해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큰 금액입니다. 이러한 값비싼 향유를 준비하기 위해 마리아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겠습니까. 지치고 병든 몸으로 쉼 없이 일하며 먹을 것조차 아껴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남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음 졸이며 향유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유를 드렸다는 것은 마음의 진실한 정성을 드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께 드린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드려 헌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옥합을 깨뜨려야 향유가 나온다는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옥합은 우리 몸을 상징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변화되기 전 우리의 몸은 육체의 소욕을 좇고자 합니다. 따라서 옥합을 깨뜨렸을 때 향유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릴 때만이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마리아처럼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릴 때라야 순전하고 거룩한 마음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마음 다해 섬기며 끝까지 붙좇은 진실한 사랑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마음 다해 섬기며 붙좇았습니다. 과연 마리아는 어떠한 사랑과 헌신으로 예수님을 섬기며 붙좇았을까요? 마리아는 자신에게 잘해 주는 것이 전혀 없는 가족이라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어떠했겠습니까.
영적인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상황에도 변치 않고 한결같지요. 예수님을 향한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이 이러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미혹하는 자,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며 정죄했습니다. 백성들도 그들의 말에 미혹받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지요. 십자가 처형을 언도받은 예수님은 세상 말로 이제 별 볼 일 없게 되었습니다. 흉악한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시며 기사와 표적을 베푸실 때뿐 아니라, 죄인 취급을 받으며 고초당하시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에도 변함없이 붙좇았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숨었지만 마리아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자칫 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개의치 않았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지요. 마리아의 사랑이 얼마나 참되고 진실했는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실 때까지 그 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 지내는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그가 시신을 새 무덤에 넣고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에 놓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여인이 된 이유
안식일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이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예수님께 가기 위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당도해 보니 무덤의 돌문이 열려 있고,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마리아는 누군가 시신을 가져간 줄 알고 하염없이 울고 있었지요. 그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지만, 경황이 없는 마리아는 그들이 천사인지 사람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답할 뿐이었습니다(요 20:13).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부활하신 주님이 서 계셨지만 마리아는 그분이 주님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부활체를 입으셨기에 전혀 알아보지 못했지요. 주님이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어도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니 그제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17).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일요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심으로 구세주가 되기 위한 섭리를 이루셨습니다. 모든 일을 완수하셨으니 아버지 하나님을 뵙는 것이 우선이었지요. 그래서 마리아에게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때가 이를 때까지 증인으로서 살 것을 당부하시면서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제자들에게 가서 “주를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구세주로서 십자가에 달려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뵈옵기 전에 마리아를 만나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생명 다해 주님을 사랑했고 온전한 헌신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큰 경기나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거나 1위를 하면 그동안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나 마음을 써 준 사람,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준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우승의 기쁨을 나누지요.
이렇듯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행복하고 즐거울 때뿐 아니라 상대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나아가 가장 처참한 상황에 놓였다 해도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생명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으며 끝까지 붙좇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는 영광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을 하시는 이유는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엄청난 희생을 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고 참 행복을 찾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끝까지 붙좇는 진실한 사랑을 이룬 막달라 마리아를 발견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셨겠습니까. 늘 가까이 두고 그 선한 향을 흠향하고 싶으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창세 이래 구원받아 천국에 간 여인 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 보좌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막달라 마리아처럼 온전한 선의 차원에 들어가면 천국에서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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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옥합은 영적으로 우리 ( )을 상징한다. 옥합을 깨뜨린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몸을 드려 ( )한다는 뜻이다.
2. 옥합을 깨뜨렸을 때 향유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 )을 벗어 버릴 때만이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
3.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나님을 뵙기 전에 마리아를 만나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25~13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달란트 vs 데나리온
최대의 무게와 화폐 단위를 나타내는 달란트는 성경에서 재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1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6천 일, 약 16년간 품삯에 해당된다. ‘1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화로, 군인이나 품꾼의 하루 품삯의 금액이었고, 헬라의 은화 1 드라크마의 가치를 지녔다.
교육목표 : 육체의 소욕을 벗고 순전하고 거룩한 마음을 이루어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참 자녀가 되게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지극한 정성과 선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죄 사함을 받고 모든 저주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으로 병든 몸과 상처난 마음까지 치유되어 진정한 기쁨과 행복, 감사가 넘치는 삶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내보인 선과 사랑은 무엇일까요?
1.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마리아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데에는 예수님을 향한 진한 사랑과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은 아주 좋은 그릇입니다. 영적으로는 우리 몸을 상징하지요. 따라서 옥합을 깨뜨린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몸을 드려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라도 옥합을 깨뜨려야만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권위나 체면을 개의치 않고 생각과 이론의 틀도 깨뜨려 온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에만 이러한 헌신이 가능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 드린 향유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당시 향유는 대체로 값이 매우 비쌌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베다니 마리아가 부어 드린 향유는 순전한 나드 한 근으로 그 값이 삼백 데나리온에 달했지요. 일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삼백 데나리온이라면 거의 1년 내내 일해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큰 금액입니다. 이러한 값비싼 향유를 준비하기 위해 마리아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겠습니까. 지치고 병든 몸으로 쉼 없이 일하며 먹을 것조차 아껴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남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음 졸이며 향유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유를 드렸다는 것은 마음의 진실한 정성을 드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께 드린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드려 헌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옥합을 깨뜨려야 향유가 나온다는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옥합은 우리 몸을 상징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변화되기 전 우리의 몸은 육체의 소욕을 좇고자 합니다. 따라서 옥합을 깨뜨렸을 때 향유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릴 때만이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마리아처럼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릴 때라야 순전하고 거룩한 마음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마음 다해 섬기며 끝까지 붙좇은 진실한 사랑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마음 다해 섬기며 붙좇았습니다. 과연 마리아는 어떠한 사랑과 헌신으로 예수님을 섬기며 붙좇았을까요? 마리아는 자신에게 잘해 주는 것이 전혀 없는 가족이라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어떠했겠습니까.
영적인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상황에도 변치 않고 한결같지요. 예수님을 향한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이 이러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미혹하는 자,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며 정죄했습니다. 백성들도 그들의 말에 미혹받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지요. 십자가 처형을 언도받은 예수님은 세상 말로 이제 별 볼 일 없게 되었습니다. 흉악한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시며 기사와 표적을 베푸실 때뿐 아니라, 죄인 취급을 받으며 고초당하시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에도 변함없이 붙좇았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숨었지만 마리아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자칫 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개의치 않았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지요. 마리아의 사랑이 얼마나 참되고 진실했는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실 때까지 그 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 지내는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그가 시신을 새 무덤에 넣고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에 놓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여인이 된 이유
안식일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이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예수님께 가기 위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당도해 보니 무덤의 돌문이 열려 있고,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마리아는 누군가 시신을 가져간 줄 알고 하염없이 울고 있었지요. 그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지만, 경황이 없는 마리아는 그들이 천사인지 사람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답할 뿐이었습니다(요 20:13).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부활하신 주님이 서 계셨지만 마리아는 그분이 주님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부활체를 입으셨기에 전혀 알아보지 못했지요. 주님이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어도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니 그제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17).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일요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심으로 구세주가 되기 위한 섭리를 이루셨습니다. 모든 일을 완수하셨으니 아버지 하나님을 뵙는 것이 우선이었지요. 그래서 마리아에게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때가 이를 때까지 증인으로서 살 것을 당부하시면서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제자들에게 가서 “주를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구세주로서 십자가에 달려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뵈옵기 전에 마리아를 만나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생명 다해 주님을 사랑했고 온전한 헌신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큰 경기나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거나 1위를 하면 그동안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나 마음을 써 준 사람,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준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우승의 기쁨을 나누지요.
이렇듯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행복하고 즐거울 때뿐 아니라 상대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나아가 가장 처참한 상황에 놓였다 해도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생명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으며 끝까지 붙좇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는 영광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을 하시는 이유는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엄청난 희생을 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고 참 행복을 찾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끝까지 붙좇는 진실한 사랑을 이룬 막달라 마리아를 발견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셨겠습니까. 늘 가까이 두고 그 선한 향을 흠향하고 싶으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창세 이래 구원받아 천국에 간 여인 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 보좌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막달라 마리아처럼 온전한 선의 차원에 들어가면 천국에서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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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옥합은 영적으로 우리 ( )을 상징한다. 옥합을 깨뜨린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몸을 드려 ( )한다는 뜻이다.
2. 옥합을 깨뜨렸을 때 향유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 )을 벗어 버릴 때만이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
3.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나님을 뵙기 전에 마리아를 만나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25~13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달란트 vs 데나리온
최대의 무게와 화폐 단위를 나타내는 달란트는 성경에서 재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1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6천 일, 약 16년간 품삯에 해당된다. ‘1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화로, 군인이나 품꾼의 하루 품삯의 금액이었고, 헬라의 은화 1 드라크마의 가치를 지녔다.
2016-07-29
제31과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막달라 마리아
눅 7:37~38
읽을말씀 : 눅 7:37~38 | 외울말씀 : 눅 7:47 ㅣ 참고 말씀: 눅 8:2
교육목표 :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생의 각종 문제를 해결받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누리게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가족에게조차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심지어 없는 사람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가족을 떠나 자기 한 몸 의지해 보고자 만난 남자 역시 약한 그녀를 이용하기만 하는 악한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모든 질병과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고 참된 행복을 누리며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1.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막달라 마리아의 비참한 삶
마리아는 갈릴리 인근 막달라라는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마리아라는 이름이 흔했기 때문에, 그녀가 살던 지역의 이름을 붙여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막달라 지방은 꽤 번성한 어업의 중심지로서 대대로 우상 숭배가 심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을 전체가 어둠의 영향을 받았지요.
막달라 마리아 역시 어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에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이는 그녀가 귀신 들렸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대로 우상 숭배에 젖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정에서 태어남으로 그 가정에 임한 저주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영적으로 최악의 환경에서 태어난 데다 몸까지 약해서 갖가지 병을 앓았습니다. 위장에 병이 생겨 제대로 먹지 못하니 신체기능이 원활하지 않아 외모까지 보기 흉해졌습니다. 피부병으로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었고, 몸이 쇠약하니 경수마저 끊어져 여인으로서의 기능도 상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늘 집에 숨어 지내야 했고,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마치 자신 때문인 것처럼 주눅이 들어 살았습니다. 게다가 부모 형제의 사랑은 커녕 심한 냉대와 업신여김까지 받으며 살았으니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요.
하지만 마리아는 그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가족을 힘들게 하지 않는 길이 무엇일까? 나 때문에 가족이 받는 부담을 어떻게 하면 덜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결국 집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으니 그녀는 여기저기 떠돌며 거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남자를 만나 자기 몸이나마 의탁해 보려 했지만 오히려 마리아를 힘들게 하며 이용할 뿐이었습니다. 도박에 빠져 돈을 잃고 수중의 돈이 떨어지면 그녀에게 돈을 구해 오라며 윽박지르며 때리곤 했지요. 심지어 여기저기 다니며 사기를 치다가 들통나면 전부 마리아가 시킨 일이라며 그녀 탓으로 돌렸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동네 사람들에게 계략을 꾸며 남편을 조종하는 탐욕스런 여자로 낙인찍히고 말았지요. 이렇게 온갖 누명을 쓰면서도 마리아는 굳이 해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의 허물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렸지요. 그러다 보니 날로 마음의 고통이 커져 갔고 몸은 더 나빠졌습니다.
마리아의 곱고 아름다운 심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큰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녀에게 삿대질을 하며 저주스러운 여인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남편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몸이 약해서 잘 섬겨 주지 못하는 것에 미안해하며 하루하루 삯바느질로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2.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사모함으로 준비하는 마리아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던 마리아에게 희소식이 전해집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지요. 그녀는 마음이 곱고 선했기 때문에 이 소문이 믿어졌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도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고 그분을 만나 뵙기를 사모했습니다. 아무 준비 없이 예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어렵게 삯바느질해서 번 돈을 조금씩 모아 귀한 향유를 준비하지요.
어느 날, 마리아는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정성껏 준비한 향유 옥합을 가지고 갔습니다. 집 앞에 이르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지요. 사람들은 마리아를 보자 ‘너 같은 죄인이 올 곳이 아니다.’라는 따가운 시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사모함이 너무나 승했기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길을 열어 주었지요.
집 안에 들어가자 저만치 앉아 계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용서하고 품어 주실 것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마리아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너무나 고귀한 분이시기에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조심스레 예수님의 뒤편으로 다가갔습니다.
3. 예수님을 만난 후,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벗어난 마리아
예수님의 발치에 이르자 마리아는 더욱 눈물이 복받쳤습니다. 태어나서 참된 행복을 맛보지 못하고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품어 주실 듯 사랑이 가득한 예수님이 지금 눈앞에 계신 것입니다. 갑작스런 마리아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 의아해했습니다. 집 안에는 마리아의 흐느끼는 소리만 가득했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마리아는 머리 수건을 벗은 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이어 그 위에 입맞추기까지 했지요.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가 누구인가?”, “왜 저러는가?”, “저는 죄인이 아닌가?”, “망측해라!” 하며 저마다 잣대를 가지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로 샌들을 신었기에 발에 먼지가 많이 묻었고 물도 귀해서 제대로 씻지 못하니 발이 깨끗할 리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가정에 초대된 손님에게는 발 씻을 물을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바리새인 시몬은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마리아는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었으며 그 위에 입맞추기까지 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은 함부로 머리카락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귀히 여기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온전히 낮아지는 겸손함으로 예수님을 섬기겠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다. 치료받겠다.”라는 믿음의 행함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을 알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남편을 조종하는 못된 여인으로 여겼으니 예수님만 아니라면 당장 그녀를 그곳에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은 자신의 마음과 진실을 알아주시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 주실 것이기에 상관이 없었지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해도 예수님만은 죄인 취급하지 않는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뜻한 바를 주저함 없이 행했지요. 자신의 눈물로 적신 예수님의 발을 머리털로 씻어 드린 후,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어 드린 것입니다.
이러한 마리아를 어찌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말씀하신 후 그녀에게 치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든 속병이 치료되니 이제 먹는 대로 소화가 되고 몸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왔지요. 뿐만 아니라 상처난 마음까지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보잘것없는 그녀에게 세상 어떤 사람도 주지 않은 영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태껏 어느 누구에게도 받아 보지 못했던 가장 큰 선물을 주신 예수님으로 인해 마리아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났습니다. 온 마음이 예수님께 향한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나를 버리지 않는 단 한 분, 나를 사랑하시는 단 한 분, 비참한 내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치료해 주신 분, 내 영혼까지 새롭게 하신 예수님을 생명 다해 섬기리라.’고 다짐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마음 다해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눅 8:2~3).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혹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질병이나 인생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의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닮아감으로 질병 치료는 물론, 인생의 각종 문제를 해결받고 주 안에서 참된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1. 마리아를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마리아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으며 입맞추었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17~12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의 차이
◈ 베다니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부어드렸다.
2. 향유 부은 장소 :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3. 성경 본문 :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요한복음 12장
4. 가족 사항 :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는 자매 사이
◈ 막달라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 예수님께서 한창 복음을 증거하며 다니시던 때
2. 향유 부은 장소 : 갈릴리 호수 주변 동네 바리새인 시몬의 집
3. 성경 본문 : 누가복음 7장
4. 가족 사항 : 우상 숭배하는 가정
교육목표 :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생의 각종 문제를 해결받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누리게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가족에게조차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심지어 없는 사람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가족을 떠나 자기 한 몸 의지해 보고자 만난 남자 역시 약한 그녀를 이용하기만 하는 악한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모든 질병과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고 참된 행복을 누리며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1.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막달라 마리아의 비참한 삶
마리아는 갈릴리 인근 막달라라는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마리아라는 이름이 흔했기 때문에, 그녀가 살던 지역의 이름을 붙여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막달라 지방은 꽤 번성한 어업의 중심지로서 대대로 우상 숭배가 심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을 전체가 어둠의 영향을 받았지요.
막달라 마리아 역시 어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에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이는 그녀가 귀신 들렸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대로 우상 숭배에 젖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정에서 태어남으로 그 가정에 임한 저주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영적으로 최악의 환경에서 태어난 데다 몸까지 약해서 갖가지 병을 앓았습니다. 위장에 병이 생겨 제대로 먹지 못하니 신체기능이 원활하지 않아 외모까지 보기 흉해졌습니다. 피부병으로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었고, 몸이 쇠약하니 경수마저 끊어져 여인으로서의 기능도 상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늘 집에 숨어 지내야 했고,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마치 자신 때문인 것처럼 주눅이 들어 살았습니다. 게다가 부모 형제의 사랑은 커녕 심한 냉대와 업신여김까지 받으며 살았으니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요.
하지만 마리아는 그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가족을 힘들게 하지 않는 길이 무엇일까? 나 때문에 가족이 받는 부담을 어떻게 하면 덜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결국 집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으니 그녀는 여기저기 떠돌며 거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남자를 만나 자기 몸이나마 의탁해 보려 했지만 오히려 마리아를 힘들게 하며 이용할 뿐이었습니다. 도박에 빠져 돈을 잃고 수중의 돈이 떨어지면 그녀에게 돈을 구해 오라며 윽박지르며 때리곤 했지요. 심지어 여기저기 다니며 사기를 치다가 들통나면 전부 마리아가 시킨 일이라며 그녀 탓으로 돌렸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동네 사람들에게 계략을 꾸며 남편을 조종하는 탐욕스런 여자로 낙인찍히고 말았지요. 이렇게 온갖 누명을 쓰면서도 마리아는 굳이 해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의 허물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렸지요. 그러다 보니 날로 마음의 고통이 커져 갔고 몸은 더 나빠졌습니다.
마리아의 곱고 아름다운 심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큰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녀에게 삿대질을 하며 저주스러운 여인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남편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몸이 약해서 잘 섬겨 주지 못하는 것에 미안해하며 하루하루 삯바느질로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2.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사모함으로 준비하는 마리아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던 마리아에게 희소식이 전해집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지요. 그녀는 마음이 곱고 선했기 때문에 이 소문이 믿어졌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도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고 그분을 만나 뵙기를 사모했습니다. 아무 준비 없이 예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어렵게 삯바느질해서 번 돈을 조금씩 모아 귀한 향유를 준비하지요.
어느 날, 마리아는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정성껏 준비한 향유 옥합을 가지고 갔습니다. 집 앞에 이르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지요. 사람들은 마리아를 보자 ‘너 같은 죄인이 올 곳이 아니다.’라는 따가운 시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사모함이 너무나 승했기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길을 열어 주었지요.
집 안에 들어가자 저만치 앉아 계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용서하고 품어 주실 것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마리아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너무나 고귀한 분이시기에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조심스레 예수님의 뒤편으로 다가갔습니다.
3. 예수님을 만난 후,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벗어난 마리아
예수님의 발치에 이르자 마리아는 더욱 눈물이 복받쳤습니다. 태어나서 참된 행복을 맛보지 못하고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품어 주실 듯 사랑이 가득한 예수님이 지금 눈앞에 계신 것입니다. 갑작스런 마리아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 의아해했습니다. 집 안에는 마리아의 흐느끼는 소리만 가득했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마리아는 머리 수건을 벗은 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이어 그 위에 입맞추기까지 했지요.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가 누구인가?”, “왜 저러는가?”, “저는 죄인이 아닌가?”, “망측해라!” 하며 저마다 잣대를 가지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로 샌들을 신었기에 발에 먼지가 많이 묻었고 물도 귀해서 제대로 씻지 못하니 발이 깨끗할 리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가정에 초대된 손님에게는 발 씻을 물을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바리새인 시몬은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마리아는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었으며 그 위에 입맞추기까지 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은 함부로 머리카락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귀히 여기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온전히 낮아지는 겸손함으로 예수님을 섬기겠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다. 치료받겠다.”라는 믿음의 행함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을 알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남편을 조종하는 못된 여인으로 여겼으니 예수님만 아니라면 당장 그녀를 그곳에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은 자신의 마음과 진실을 알아주시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 주실 것이기에 상관이 없었지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해도 예수님만은 죄인 취급하지 않는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뜻한 바를 주저함 없이 행했지요. 자신의 눈물로 적신 예수님의 발을 머리털로 씻어 드린 후,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어 드린 것입니다.
이러한 마리아를 어찌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말씀하신 후 그녀에게 치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든 속병이 치료되니 이제 먹는 대로 소화가 되고 몸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왔지요. 뿐만 아니라 상처난 마음까지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보잘것없는 그녀에게 세상 어떤 사람도 주지 않은 영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태껏 어느 누구에게도 받아 보지 못했던 가장 큰 선물을 주신 예수님으로 인해 마리아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났습니다. 온 마음이 예수님께 향한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나를 버리지 않는 단 한 분, 나를 사랑하시는 단 한 분, 비참한 내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치료해 주신 분, 내 영혼까지 새롭게 하신 예수님을 생명 다해 섬기리라.’고 다짐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마음 다해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눅 8:2~3).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혹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질병이나 인생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의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닮아감으로 질병 치료는 물론, 인생의 각종 문제를 해결받고 주 안에서 참된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1. 마리아를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마리아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으며 입맞추었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17~12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의 차이
◈ 베다니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부어드렸다.
2. 향유 부은 장소 :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3. 성경 본문 :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요한복음 12장
4. 가족 사항 :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는 자매 사이
◈ 막달라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 예수님께서 한창 복음을 증거하며 다니시던 때
2. 향유 부은 장소 : 갈릴리 호수 주변 동네 바리새인 시몬의 집
3. 성경 본문 : 누가복음 7장
4. 가족 사항 : 우상 숭배하는 가정
2016-07-22
제30과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
요 3:28~30
읽을말씀 : 요 3:28~30 | 외울말씀 : 눅 3:16 ㅣ 참고 말씀: 눅 1:13~17
교육목표 :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하며 마지막 때에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는 도구가 되게 한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하였기에 자기 의가 없었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했습니다. 모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후에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지요.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듯하여 그는 다시 이 땅에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마침내는 순교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키는 마음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가브리엘 천사장이 사가랴에게 나타나 장차 아이를 갖게 될 것을 알려 줍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3~17)
그 후 엘리사벳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빈 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뤘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히 주관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 알고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1장 21절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을 보면 자신이 엘리야인 줄 몰랐습니다. 그가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은 받았지만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왔는지 잘 아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열두 살 때에 있었던 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마리아와 요셉은 아직 어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절기를 지킨 후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룻길을 간 후에야 일행 중에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랍니다. 다시 길을 되짚어 성전에 와보니 예수님은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마리아가 그동안 근심하며 예수님을 찾았었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도리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대답합니다.
어릴 적부터 자신에 대해 잘 아셨던 예수님과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주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돼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갔습니다. 자신이 주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를 주관받아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쳤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사람들이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이런 세례 요한을 보고 백성 중에 어떤 이들은 그가 혹 그리스도이신가 궁금히 여깁니다(눅 3:15).
이때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고백했습니다(눅 3:16). 그는 자신의 본분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임을 분명히 알았기에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이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얼마나 더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는 세례 요한도 큰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니 ‘과연 그분은 어떤 분일까?’ 하고 심히 기대하게 되었지요. “신들메”란, 신발을 묶는 끈인데, ‘세례 요한이 그것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며 증거하는 그분은 얼마나 높으신 분일까’를 생각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자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몰려갔습니다. 그러자 요한의 제자들이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하지요(요 3:26).
그러면 세례 요한이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슬퍼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요 3:28~30).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지 느낄 수 있지요.
이러한 세례 요한의 마음은 순교하기까지 변함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기뻐하시며 이를 선으로 인정하셨습니다.
2.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오직 주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마지막 때에 사는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처럼 우리도 더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지요.
직분자들이라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설령 직분이 없어도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각자 있는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의 본분을 지키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혹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전하면서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여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주의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귀한 사역에 쓰임 받으려면 사심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주님만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면서 은근히 자신도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이 없어야 하지요.
또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까지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영광을 더 크게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 연연하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랄 뿐입니다. 이는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지요. 다른 사람이 사랑과 칭찬을 받아도 시기하거나 불편해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정녕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엘리야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는 도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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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어떠한 점을 기뻐하시며 선으로 인정해 주셨나요?
2.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전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하며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주의 영광만을 구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귀한 사역에 쓰임 받으려면 ( )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 )만 높일 수 있어야 한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09~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사가랴’는 누구일까?
세례 요한의 아버지로 헤롯 왕 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다(눅 1:5).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동정녀 마리아와 친척이다. 이들 부부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선한 사람이었다.
사가랴가 자기 순서대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때,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과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으므로 벙어리가 되어 아들이 태어나서 할례를 받기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후에 천사의 말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을 때 혀가 풀렸다.
교육목표 :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하며 마지막 때에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는 도구가 되게 한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하였기에 자기 의가 없었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했습니다. 모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후에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지요.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듯하여 그는 다시 이 땅에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마침내는 순교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키는 마음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가브리엘 천사장이 사가랴에게 나타나 장차 아이를 갖게 될 것을 알려 줍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3~17)
그 후 엘리사벳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빈 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뤘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히 주관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 알고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1장 21절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을 보면 자신이 엘리야인 줄 몰랐습니다. 그가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은 받았지만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왔는지 잘 아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열두 살 때에 있었던 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마리아와 요셉은 아직 어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절기를 지킨 후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룻길을 간 후에야 일행 중에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랍니다. 다시 길을 되짚어 성전에 와보니 예수님은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마리아가 그동안 근심하며 예수님을 찾았었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도리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대답합니다.
어릴 적부터 자신에 대해 잘 아셨던 예수님과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주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돼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갔습니다. 자신이 주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를 주관받아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쳤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사람들이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이런 세례 요한을 보고 백성 중에 어떤 이들은 그가 혹 그리스도이신가 궁금히 여깁니다(눅 3:15).
이때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고백했습니다(눅 3:16). 그는 자신의 본분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임을 분명히 알았기에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이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얼마나 더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는 세례 요한도 큰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니 ‘과연 그분은 어떤 분일까?’ 하고 심히 기대하게 되었지요. “신들메”란, 신발을 묶는 끈인데, ‘세례 요한이 그것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며 증거하는 그분은 얼마나 높으신 분일까’를 생각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자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몰려갔습니다. 그러자 요한의 제자들이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하지요(요 3:26).
그러면 세례 요한이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슬퍼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요 3:28~30).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지 느낄 수 있지요.
이러한 세례 요한의 마음은 순교하기까지 변함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기뻐하시며 이를 선으로 인정하셨습니다.
2.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오직 주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마지막 때에 사는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처럼 우리도 더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지요.
직분자들이라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설령 직분이 없어도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각자 있는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의 본분을 지키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혹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전하면서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여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주의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귀한 사역에 쓰임 받으려면 사심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주님만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면서 은근히 자신도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이 없어야 하지요.
또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까지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영광을 더 크게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 연연하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랄 뿐입니다. 이는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지요. 다른 사람이 사랑과 칭찬을 받아도 시기하거나 불편해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정녕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엘리야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는 도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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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어떠한 점을 기뻐하시며 선으로 인정해 주셨나요?
2.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전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하며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주의 영광만을 구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귀한 사역에 쓰임 받으려면 ( )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 )만 높일 수 있어야 한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09~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사가랴’는 누구일까?
세례 요한의 아버지로 헤롯 왕 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다(눅 1:5).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동정녀 마리아와 친척이다. 이들 부부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선한 사람이었다.
사가랴가 자기 순서대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때,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과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으므로 벙어리가 되어 아들이 태어나서 할례를 받기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후에 천사의 말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을 때 혀가 풀렸다.
2016-07-15
제29과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한 엘리야
왕하 2:11~12
읽을말씀 : 왕하 2:11~12 | 외울말씀 : 눅 1:17 ㅣ 참고 말씀: 사 40:3
교육목표 : 하나님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불같이 기도함으로 어떠한 사명이라 할지라도 넉넉히 감당하는 일꾼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매우 겸비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한 마음을 소유했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후에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지요.
자신의 사명을 다한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이런 엘리야가 신약 시대에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
엘리야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에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주심으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엘리야는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 사모하게 됐고, 유약한 자신에게 큰 권능을 입혀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됐습니다.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순종했지요.
세상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뭐든지 해 주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요. 그런데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 마음도 행함도 변합니다. 자신이 해 준 만큼 상대에게 받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엘리야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한다 하면서 막상 어떤 일을 맡기면 자신의 성품을 핑계로 못한다고 말합니다. “나도 하고 싶지만 그 일은 성품상 맞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육으로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녔던 엘리야는 혈혈단신으로 거짓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면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깊이 깨우침으로 무척 사모했지요. 마침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가 하나님을 친히 뵈었을 때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겠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했을 뿐 아니라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자 하나님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함을 알게 됐습니다. 엘리야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주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하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말씀했습니다. 말라기 4장 5~6절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난 일은 인류 역사상 오직 엘리야를 통해 단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먼저,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체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을 보내 주셔야만 합니다. 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모습은 사람이되 짐승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잉태된 지 6개월째가 되면 영을 보내 주십니다. 주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이 잉태되었을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셨지요. 엘리야의 영 자체가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육의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습니다. 잉태됨과 동시에 주어진 영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셨지요.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이미 사람의 생명의 씨가 결합된 상태에서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기를 받아 그 영향도 받게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요 1:6). 성경 곳곳에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3장 4절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지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 17:11~12)
그제야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도 점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이처럼 참 빛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깨끗하고 온전해야 하겠는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산 채로 들림 받을 만큼 깨끗하고 온전한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케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이 일에 선택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주를 향한 뜨거운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다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는 장차 주님이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 이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고 순교해야 한다 해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낸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지요. 하지만 그 고백대로 변함없이 진실한 행함을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 그 사랑이 배어나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요. 온유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을 볼 때는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장면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쫓아냈으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지요. 하나님 일을 이룸에 있어 어찌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진실한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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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성경 구절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시고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다. ( )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다.
2. ( )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다.
3.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한 성경 구절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01~10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엘리야’의 선
① 자기 의가 없고 겸비한 마음을 지녔기에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다.
②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불같이 기도함으로 어떠한 사명이라 할지라도 넉넉히 감당하는 일꾼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매우 겸비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한 마음을 소유했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후에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지요.
자신의 사명을 다한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이런 엘리야가 신약 시대에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
엘리야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에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주심으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엘리야는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 사모하게 됐고, 유약한 자신에게 큰 권능을 입혀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됐습니다.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순종했지요.
세상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뭐든지 해 주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요. 그런데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 마음도 행함도 변합니다. 자신이 해 준 만큼 상대에게 받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엘리야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한다 하면서 막상 어떤 일을 맡기면 자신의 성품을 핑계로 못한다고 말합니다. “나도 하고 싶지만 그 일은 성품상 맞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육으로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녔던 엘리야는 혈혈단신으로 거짓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면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깊이 깨우침으로 무척 사모했지요. 마침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가 하나님을 친히 뵈었을 때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겠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했을 뿐 아니라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자 하나님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함을 알게 됐습니다. 엘리야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주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하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말씀했습니다. 말라기 4장 5~6절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난 일은 인류 역사상 오직 엘리야를 통해 단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먼저,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체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을 보내 주셔야만 합니다. 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모습은 사람이되 짐승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잉태된 지 6개월째가 되면 영을 보내 주십니다. 주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이 잉태되었을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셨지요. 엘리야의 영 자체가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육의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습니다. 잉태됨과 동시에 주어진 영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셨지요.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이미 사람의 생명의 씨가 결합된 상태에서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기를 받아 그 영향도 받게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요 1:6). 성경 곳곳에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3장 4절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지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 17:11~12)
그제야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도 점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이처럼 참 빛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깨끗하고 온전해야 하겠는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산 채로 들림 받을 만큼 깨끗하고 온전한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케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이 일에 선택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주를 향한 뜨거운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다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는 장차 주님이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 이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고 순교해야 한다 해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낸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지요. 하지만 그 고백대로 변함없이 진실한 행함을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 그 사랑이 배어나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요. 온유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을 볼 때는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장면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쫓아냈으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지요. 하나님 일을 이룸에 있어 어찌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진실한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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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성경 구절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시고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다. ( )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다.
2. ( )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다.
3.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한 성경 구절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01~10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엘리야’의 선
① 자기 의가 없고 겸비한 마음을 지녔기에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다.
②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
2016-07-08
제28과하나님의 권능을 행한 엘리야
왕상 18:41~46
읽을말씀 : 왕상 18:41~46 | 외울말씀 : 잠 18:12 ㅣ 참고 말씀:왕상 18:19~24
교육목표 :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믿음으로 순종해 나감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엘리야는 B.C. 9세기경 우상 숭배가 만연한 북이스라엘 아합 왕 때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이방 신을 섬기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해 믿음으로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렸고, 간절한 기도로써 3년 반 동안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에 큰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주었으며,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기도 했지요. 또한 요단 강을 가르는가 하면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산 채로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권능을 받아 행하며,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는 축복을 받았을까요?
1. 심히 겸비하여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마음
엘리야는 원래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습니다. 자칫 이 모습이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으나 영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됐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겸비함을 높이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모세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변화되기 전에도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낮아지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매우 유약하고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도 ‘부족한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 일을 어그러뜨리면 안 되는데 ….’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이러한 유약함이 영적으로 변화돼야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엘리야가 활동했던 시대는 이스라엘의 악한 왕으로 손꼽히는 아합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아합 왕의 아버지 오므리는 군사적, 상업적 동맹을 위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아합과 정략적으로 결혼시킵니다. 이때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 신이 백성들에게 퍼져 온 나라가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가 컸던지 심판이 임하여 수년 동안 그 땅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합 왕에게 전하라고 엘리야에게 첫 번째 사명을 주십니다. 아합 왕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합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얼마 후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에 사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게 하십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마지막 남은 양식인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가뭄이 시작된 지 3년 반쯤 됐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다시 아합 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에 닥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만일 엘리야가 왕 앞에 나아간다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가 이러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명령대로 아합 왕을 찾아가 하나님 뜻을 분명히 전달합니다. 가뭄이 든 원인이 왕과 백성의 우상 숭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하기까지 합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신이 참 신임을 밝히자는 것이었지요(왕상 18:19~24).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왕이 보는 가운데 엘리야 홀로 나서야 합니다. 만약 불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엘리야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자신의 유약함을 깨뜨리고 담대히 행할 수 있었고, 결국 불의 응답을 끌어내려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2.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부족하기 때문에 늘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고, 하나님 뜻을 정확히 깨닫고자 했지요.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겸비한 마음으로 늘 하나님 앞에 구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능력을 받기 위해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 그리고 믿음으로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그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린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잡아 죽이고 아합 왕에게 “큰비의 소리가 있나이다”라고 예언한 후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의 증거가 나타나기까지 일곱 차례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의 기도로 바다 편에서 손만 한 작은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곧 큰비가 내릴 것임을 알았고, 그 믿음대로 조금 후에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만 가능한 일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마차보다 빨리 달리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 45~46절에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한 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굳이 능력이 많은 사람을 찾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사람을 택하실 때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전하고 그분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찾으시지요. 사람의 마음을 그릇이라 할 때 그 그릇 안에 자기가 많이 담겨 있으면 하나님 능력을 많이 담을 수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신다 해도 그릇 안에 자기가 담겨 있다면 어찌 순수한 하나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 마음이 겸비한 그릇입니다.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이라 해도 바닥이 깊은 그릇에 많이 담기듯, 자신의 마음을 겸비하게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 능력이 더 많이 임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신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으며 화평을 이뤘습니다. 또한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중심에서 고백하며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지요.
이처럼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임을 깨달아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기를 쉬지 않음으로 영적인 담대함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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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엘리야는 심히 ( )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다.
2.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 )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3. 갈멜 산에서 이방 선지자 850인과 겨뤄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한 선지자는 누구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94~10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아합 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 왕들 중 악한 왕으로 유명하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함으로 바알 산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는 등 패역한 죄를 범하므로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 21:24) 하신 대로 저주가 임했다.
교육목표 :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믿음으로 순종해 나감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엘리야는 B.C. 9세기경 우상 숭배가 만연한 북이스라엘 아합 왕 때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이방 신을 섬기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해 믿음으로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렸고, 간절한 기도로써 3년 반 동안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에 큰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주었으며,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기도 했지요. 또한 요단 강을 가르는가 하면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산 채로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권능을 받아 행하며,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는 축복을 받았을까요?
1. 심히 겸비하여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마음
엘리야는 원래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습니다. 자칫 이 모습이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으나 영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됐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겸비함을 높이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모세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변화되기 전에도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낮아지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매우 유약하고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도 ‘부족한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 일을 어그러뜨리면 안 되는데 ….’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이러한 유약함이 영적으로 변화돼야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엘리야가 활동했던 시대는 이스라엘의 악한 왕으로 손꼽히는 아합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아합 왕의 아버지 오므리는 군사적, 상업적 동맹을 위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아합과 정략적으로 결혼시킵니다. 이때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 신이 백성들에게 퍼져 온 나라가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가 컸던지 심판이 임하여 수년 동안 그 땅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합 왕에게 전하라고 엘리야에게 첫 번째 사명을 주십니다. 아합 왕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합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얼마 후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에 사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게 하십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마지막 남은 양식인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가뭄이 시작된 지 3년 반쯤 됐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다시 아합 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에 닥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만일 엘리야가 왕 앞에 나아간다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가 이러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명령대로 아합 왕을 찾아가 하나님 뜻을 분명히 전달합니다. 가뭄이 든 원인이 왕과 백성의 우상 숭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하기까지 합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신이 참 신임을 밝히자는 것이었지요(왕상 18:19~24).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왕이 보는 가운데 엘리야 홀로 나서야 합니다. 만약 불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엘리야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자신의 유약함을 깨뜨리고 담대히 행할 수 있었고, 결국 불의 응답을 끌어내려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2.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부족하기 때문에 늘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고, 하나님 뜻을 정확히 깨닫고자 했지요.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겸비한 마음으로 늘 하나님 앞에 구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능력을 받기 위해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 그리고 믿음으로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그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린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잡아 죽이고 아합 왕에게 “큰비의 소리가 있나이다”라고 예언한 후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의 증거가 나타나기까지 일곱 차례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의 기도로 바다 편에서 손만 한 작은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곧 큰비가 내릴 것임을 알았고, 그 믿음대로 조금 후에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만 가능한 일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마차보다 빨리 달리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 45~46절에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한 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굳이 능력이 많은 사람을 찾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사람을 택하실 때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전하고 그분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찾으시지요. 사람의 마음을 그릇이라 할 때 그 그릇 안에 자기가 많이 담겨 있으면 하나님 능력을 많이 담을 수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신다 해도 그릇 안에 자기가 담겨 있다면 어찌 순수한 하나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 마음이 겸비한 그릇입니다.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이라 해도 바닥이 깊은 그릇에 많이 담기듯, 자신의 마음을 겸비하게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 능력이 더 많이 임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신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으며 화평을 이뤘습니다. 또한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중심에서 고백하며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지요.
이처럼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임을 깨달아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기를 쉬지 않음으로 영적인 담대함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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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엘리야는 심히 ( )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다.
2.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 )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3. 갈멜 산에서 이방 선지자 850인과 겨뤄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한 선지자는 누구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94~10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아합 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 왕들 중 악한 왕으로 유명하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함으로 바알 산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는 등 패역한 죄를 범하므로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 21:24) 하신 대로 저주가 임했다.
2016-07-01
제27과맥추절을 지키라
출 23:14~18
읽을말씀 : 출 23:14~18 | 외울말씀 : 살전 5:16~18 ㅣ 참고 말씀:신 16:10
교육목표 : 성경에 기록된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맥추감사예배를 드리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약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씨앗을 심어 누렇게 익은 밀밭 풍경을 볼 때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요?
훗날의 일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할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맥추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맥추절을 언제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로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둔 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여기서 첫 열매는 바로 밀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보리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 밀 추수가 시작됩니다.
맥추절은 이렇게 밀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이지요. 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으며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부릅니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라 붙여진 이름이고, 오순절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으므로 유대 전통의 오순절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으며, 후반기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며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매년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것들을 찾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느끼고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하는 자녀들이 깊은 교제를 나누며 축복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맥추절을 맞아 모든 감사의 조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예배를 드릴 때, 사랑과 축복의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맥추절을 지키는 방법과 영적 의미
그러면 맥추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민수기 28장 26~31절에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칠칠절 곧 맥추절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축제와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때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첫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 떡을 소제로 드렸습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함을 뜻합니다.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해져야 함을 나타내지요.
따라서 맥추절을 지키는 영적 의미는 밭에 뿌린 곡식의 첫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이 살아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고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3. 맥추감사제
신명기 16장 16~17절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즉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남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맥추절을 맞아 성전에 나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마음의 향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맥추감사제를 드릴 때 왜 마음과 더불어 예물을 드리라고 당부하셨을까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함’으로 표현할 때 온전해지고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사의 조건을 주셨습니다.”라고 참으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예물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감사가 마음에서 우러난 참 감사임을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말로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할 때보다 마음을 자신의 소중한 것에 담아 드릴 때 그 향이 더욱 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귀한 것을 드림으로써 그 감사의 고백에 진액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사랑하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베다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마리아 가정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말씀도 가르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으로 참 믿음과 천국 소망을 심어 주셨지요.
그래서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 곧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어 드렸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마리아의 행함을 못마땅히 여기는 가룟 유다에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하시며 장래 일도 알려 주셨습니다.
모든 것에 진정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기를 즐겨합니다. 혹여 하나님께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민망한 마음은 아닌지, 은혜를 받은 순간에는 “감사합니다.” 하며 입술로만 고백하고 그 은혜를 잊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한결같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감사하며 정성 다한 예물을 드리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감사예물을 즐겨 드리는 것은 결국 밭에서 풍성한 소산을 거둔 후 또다시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확을 많이 했어도 금년에 또 심지 않으면 내년에 거둘 수가 없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고 감사로 심고 또 심을 때, 갈수록 더 큰 감사의 조건으로 이어집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한 대로 많이 심을수록 많이 거두는 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범사에 즐겨 감사를 표현하는 분들은 심은 대로 거두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며 30배, 60배, 100배로 주시기 원하는 분입니다. 절기는 물론,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즐겨 감사를 표현하심으로 더욱 감사가 넘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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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맥추절은 이스라엘에서 ( )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이다. 이를 칠칠절 또는 ( )이라고도 부른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이고, ( )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2.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였을까요?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기 때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리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7~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소제(素祭)’란?
레위기 2장 1절에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하신 말씀대로 곡식을 곱게 갈아 드리는 제사이다. 이는 생명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제사로서 오늘날 예배를 드릴 때 그동안 지켜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물을 의미한다.
교육목표 : 성경에 기록된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맥추감사예배를 드리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약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씨앗을 심어 누렇게 익은 밀밭 풍경을 볼 때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요?
훗날의 일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할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맥추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맥추절을 언제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로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둔 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여기서 첫 열매는 바로 밀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보리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 밀 추수가 시작됩니다.
맥추절은 이렇게 밀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이지요. 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으며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부릅니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라 붙여진 이름이고, 오순절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으므로 유대 전통의 오순절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으며, 후반기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며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매년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것들을 찾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느끼고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하는 자녀들이 깊은 교제를 나누며 축복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맥추절을 맞아 모든 감사의 조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예배를 드릴 때, 사랑과 축복의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맥추절을 지키는 방법과 영적 의미
그러면 맥추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민수기 28장 26~31절에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칠칠절 곧 맥추절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축제와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때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첫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 떡을 소제로 드렸습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함을 뜻합니다.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해져야 함을 나타내지요.
따라서 맥추절을 지키는 영적 의미는 밭에 뿌린 곡식의 첫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이 살아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고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3. 맥추감사제
신명기 16장 16~17절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즉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남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맥추절을 맞아 성전에 나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마음의 향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맥추감사제를 드릴 때 왜 마음과 더불어 예물을 드리라고 당부하셨을까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함’으로 표현할 때 온전해지고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사의 조건을 주셨습니다.”라고 참으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예물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감사가 마음에서 우러난 참 감사임을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말로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할 때보다 마음을 자신의 소중한 것에 담아 드릴 때 그 향이 더욱 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귀한 것을 드림으로써 그 감사의 고백에 진액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사랑하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베다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마리아 가정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말씀도 가르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으로 참 믿음과 천국 소망을 심어 주셨지요.
그래서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 곧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어 드렸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마리아의 행함을 못마땅히 여기는 가룟 유다에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하시며 장래 일도 알려 주셨습니다.
모든 것에 진정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기를 즐겨합니다. 혹여 하나님께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민망한 마음은 아닌지, 은혜를 받은 순간에는 “감사합니다.” 하며 입술로만 고백하고 그 은혜를 잊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한결같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감사하며 정성 다한 예물을 드리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감사예물을 즐겨 드리는 것은 결국 밭에서 풍성한 소산을 거둔 후 또다시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확을 많이 했어도 금년에 또 심지 않으면 내년에 거둘 수가 없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고 감사로 심고 또 심을 때, 갈수록 더 큰 감사의 조건으로 이어집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한 대로 많이 심을수록 많이 거두는 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범사에 즐겨 감사를 표현하는 분들은 심은 대로 거두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며 30배, 60배, 100배로 주시기 원하는 분입니다. 절기는 물론,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즐겨 감사를 표현하심으로 더욱 감사가 넘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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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맥추절은 이스라엘에서 ( )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이다. 이를 칠칠절 또는 ( )이라고도 부른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이고, ( )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2.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였을까요?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기 때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리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7~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소제(素祭)’란?
레위기 2장 1절에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하신 말씀대로 곡식을 곱게 갈아 드리는 제사이다. 이는 생명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제사로서 오늘날 예배를 드릴 때 그동안 지켜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물을 의미한다.
2016-06-24
제26과믿음의 조상, 하나님의 벗이 된 아브라함
히 11:17~19
읽을말씀 : 히 11:17~19 | 외울말씀 : 롬 4:18 ㅣ 참고 말씀: 약 2:22
교육목표 : 하나님을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변함없이 끝까지 믿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하는 양순의 마음을 가졌기에 조카 롯에게 선뜻 좋은 땅을 양보할 수 있었지요. 뿐만 아니라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했기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상대가 거저 주겠다는 것도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받았지요. 이 외에도 아브라함의 어떤 면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을까요?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온전한 순종의 행함을 나타내 보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선이라 하실까요? 간단히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부모는 말을 잘 듣는 자녀에게 “아유, 착해라. 참 착하구나!” 하며 기뻐합니다. 또 자녀가 부모의 말을 잘 듣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딸, 우리 아들은 착하니까 엄마 아빠 말씀대로 할 거지?” 하며 격려하기도 하지요. 심성이 착한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어른들의 말씀대로 순종을 잘합니다. 어른들은 이러한 아이들에게 ‘착하다. 선하다.’라고 인정해 주지요.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도 자녀 된 우리를 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단번에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경우에 해당될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지요. 누가 보든 보지 않든 항상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리라 약속하셨을 때에도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습니다. 상황이 바뀐다 하여 의심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 그는 즉시 순종합니다. 삶의 터전과 가족, 친척을 뒤로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떠났습니다. 이런저런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결코 순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기에 즉시 순종해 떠났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약속의 씨인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마지막 믿음의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창 22:1~3). 그러자 아브라함은 주저 없이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납니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장작을 챙겨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산으로 떠났지요.
그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아내 사라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사라가 반대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앞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한 것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입니다.
고향을 떠날 때는 하나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마지막 시험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한 차원입니다. 아들 이삭은 약속의 씨이니 번제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번제할 양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늘 깨어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성경 곳곳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됐어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쁘다거나 피곤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하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결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게 풀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므로 무조건 순종하면 복입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난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입니다.
일단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고 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집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처럼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내릴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는 마음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한 약속을 빨리 지키지 않는다고 재촉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선한 자녀는 부모를 믿고 기다립니다.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빨리 주시지 못하는가 싶어 “나중에 주셔도 된다.”며 부모의 마음을 편케 해 드립니다.
부모는 형편상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 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혹 자신의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 와도 그 약속을 의심치 않고 하나님 뜻을 헤아려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기쁨과 감사로 보낸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바로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들을 주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리라 약속하셨지요. 1년, 2년, 5년, 10년이 지나도록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내 사라가 참지 못해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했지요.
아브라함이 99세가 됐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미 두 사람은 나이가 많은 데다 사라는 경수까지 끊어져서 잉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결코 의심치 않고 믿었습니다.
과연 그의 믿음대로 아브라함은 백 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그의 후손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었지요(롬 4:18).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그 말씀을 믿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으셨는지요?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며 낙심해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혹여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음으로 응답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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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브라함의 선은 무엇일까요?
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이었다.
② ( )
2.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과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한 차원의 깊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3. 여러분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으십니까?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7~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시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귀한 독자를 짐승처럼 각을 떠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신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이루겠다고 하신 약속의 씨다. 그러니 이삭을 번제로 바치면 언약의 말씀도, 이삭을 낳아 지금까지 길러온 세월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곧바로 순종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악의 모양이나 어떤 죄가 있어서 시험하신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답고 진한 믿음의 향, 사랑의 향을 받으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기 위한 시험이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변함없이 끝까지 믿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하는 양순의 마음을 가졌기에 조카 롯에게 선뜻 좋은 땅을 양보할 수 있었지요. 뿐만 아니라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했기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상대가 거저 주겠다는 것도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받았지요. 이 외에도 아브라함의 어떤 면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을까요?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온전한 순종의 행함을 나타내 보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선이라 하실까요? 간단히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부모는 말을 잘 듣는 자녀에게 “아유, 착해라. 참 착하구나!” 하며 기뻐합니다. 또 자녀가 부모의 말을 잘 듣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딸, 우리 아들은 착하니까 엄마 아빠 말씀대로 할 거지?” 하며 격려하기도 하지요. 심성이 착한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어른들의 말씀대로 순종을 잘합니다. 어른들은 이러한 아이들에게 ‘착하다. 선하다.’라고 인정해 주지요.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도 자녀 된 우리를 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단번에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경우에 해당될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지요. 누가 보든 보지 않든 항상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리라 약속하셨을 때에도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습니다. 상황이 바뀐다 하여 의심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 그는 즉시 순종합니다. 삶의 터전과 가족, 친척을 뒤로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떠났습니다. 이런저런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결코 순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기에 즉시 순종해 떠났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약속의 씨인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마지막 믿음의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창 22:1~3). 그러자 아브라함은 주저 없이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납니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장작을 챙겨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산으로 떠났지요.
그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아내 사라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사라가 반대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앞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한 것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입니다.
고향을 떠날 때는 하나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마지막 시험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한 차원입니다. 아들 이삭은 약속의 씨이니 번제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번제할 양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늘 깨어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성경 곳곳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됐어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쁘다거나 피곤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하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결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게 풀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므로 무조건 순종하면 복입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난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입니다.
일단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고 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집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처럼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내릴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는 마음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한 약속을 빨리 지키지 않는다고 재촉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선한 자녀는 부모를 믿고 기다립니다.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빨리 주시지 못하는가 싶어 “나중에 주셔도 된다.”며 부모의 마음을 편케 해 드립니다.
부모는 형편상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 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혹 자신의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 와도 그 약속을 의심치 않고 하나님 뜻을 헤아려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기쁨과 감사로 보낸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바로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들을 주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리라 약속하셨지요. 1년, 2년, 5년, 10년이 지나도록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내 사라가 참지 못해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했지요.
아브라함이 99세가 됐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미 두 사람은 나이가 많은 데다 사라는 경수까지 끊어져서 잉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결코 의심치 않고 믿었습니다.
과연 그의 믿음대로 아브라함은 백 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그의 후손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었지요(롬 4:18).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그 말씀을 믿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으셨는지요?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며 낙심해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혹여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음으로 응답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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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브라함의 선은 무엇일까요?
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이었다.
② ( )
2.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과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한 차원의 깊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3. 여러분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으십니까?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7~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시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귀한 독자를 짐승처럼 각을 떠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신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이루겠다고 하신 약속의 씨다. 그러니 이삭을 번제로 바치면 언약의 말씀도, 이삭을 낳아 지금까지 길러온 세월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곧바로 순종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악의 모양이나 어떤 죄가 있어서 시험하신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답고 진한 믿음의 향, 사랑의 향을 받으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기 위한 시험이었다.
2016-06-17
제25과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선한 아브라함
창 13:8~9
읽을말씀 : 창 13:8~9 | 외울말씀 : 약 3:17 ㅣ 참고 말씀:창 12:2
교육목표 : 진리가 풍성히 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주고, 매사에 사심없이 정직하며 성실함으로 축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성경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어느 것 하나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의 마음과 행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한 선이라 인정되었기에 주어진 결과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어떠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극한 선이라 인정된 것일까요?
1. 관용과 양순의 마음
관용과 양순은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임하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에서 나옵니다.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지요.
이러한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면 선하고 아름다운 말과 행함이 나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삶 속에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나옵니다. 바로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취하도록 아브라함이 선택권을 양보하는 장면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부터 함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실 때 롯도 더불어 복을 받았지요. 그런데 둘 다 소유가 불어나자 더는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육축이 많아서 물도, 목초지도 부족하다 보니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종종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윗사람으로서 얼마든지 먼저 좋은 땅을 취할 수 있는데도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양보한 것입니다. 이때 롯은 사양은커녕, 물이 넉넉하고 기름진 소돔 땅을 선택해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롯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아무리 강권한다 해도 삼촌 아브라함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롯은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그 마음됨이 어떠한지 알 수 있지요.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 조금도 서운함이나 불편한 감정이 없었습니다. 상대에게 주고 더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중심에서 상대를 섬긴다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권리도 기꺼이 양보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열 개라고 합시다. 그런데 상대가 그것을 달라면 몇 개나 줄 수 있겠습니까? 이는 각자 마음의 크기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겨우 하나만 줄 사람도 있고, 다섯 개 정도까지는 줄 사람도 있겠지요. 나아가 마음이 넓어 아홉 개까지 줄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상대가 열 개를 모두 달라 해도 줄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는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선하다 인정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2. 사심이 없는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
아브라함은 본래 넓고 큰마음인 데다 매사에 정직하고 성실했습니다. 모든 일을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완벽하게 이루고자 했지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되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와도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것이 곧 축복의 길이 됐지요.
이러한 점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선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행한다면서 사심이 있어 상대를 속이거나 불성실한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축복 주실 것을 믿기에 늘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합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그러했기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는 축복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사심 없이 정직하고 성실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창세기 14장에 나옵니다. 소돔 땅에 살던 조카 롯이 가나안 땅에 일어난 연합 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잡혀갔을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신들을 이끌고 나가 롯을 구하고 소돔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에 소돔 왕은 그에게 전리품을 취하라고 권했지만 아브라함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아브라함의 옛 이름)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3)
아브라함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이니 전리품을 취한다 해도 부당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사로운 유익을 취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훗날 자신이 더 부유해졌을 때 소돔 왕이 전리품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기에 단호히 사양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자기 유익을 좇아 재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부유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복을 받기 원한다면 아브라함처럼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당장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합니다. 나아가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누가 꾀지 않아도 스스로 미혹을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지요(잠 28:10).
아브라함은 자신이 전리품을 가진다 해서 허물이 되지 않는데도 취하지 않았고,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었습니다. 이는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도 마찬가지였지요(창 23장). 헷 족속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막벨라 굴을 얻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게 값을 치르지 않으면 받지 않는 정직함과 성실함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값을 치르고 확실하게 자기 소유로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그들의 마음이 변해 얼마든지 땅을 돌려 달라고 할 수 있기에 애초에 이런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 소유의 우물을 빼앗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창 21장). 이때도 아브라함은 잘잘못을 가리며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비멜렉에게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합니다. 상대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자기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이후 다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지혜롭게 해결한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비멜렉은 뉘우치기보다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기에 참된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피해를 보상받아야 할 입장인데도 오히려 아비멜렉에게 우물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고 그 후로는 우물을 넘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선의 지혜로써 무슨 일이든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하여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했지요.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에도 선의 지혜가 있으면 더 신속하고 아름답게 이룰 수 있습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상대라도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될 때, 또한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더욱 선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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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1. ( )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다.
( )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다.
2.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브라함의 선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1~8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전리품을 거절한 아브라함
소돔 왕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브라함에게 전리품을 주고자 하지만 거절한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사사로운 유익을 좇는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거절한 또 다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진리로 변화되기 전에는 언제든지 변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돔 왕이 당장에는 고마워하지만 훗날 “나는 원치 않았는데 아브라함이 대가를 바라서 주었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동원된 소년들의 양식과 자신을 도운 동맹군에게 돌릴 분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취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도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책임 지고 수고를 보상해 주려는 배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교육목표 : 진리가 풍성히 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주고, 매사에 사심없이 정직하며 성실함으로 축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성경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어느 것 하나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의 마음과 행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한 선이라 인정되었기에 주어진 결과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어떠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극한 선이라 인정된 것일까요?
1. 관용과 양순의 마음
관용과 양순은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임하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에서 나옵니다.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지요.
이러한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면 선하고 아름다운 말과 행함이 나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삶 속에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나옵니다. 바로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취하도록 아브라함이 선택권을 양보하는 장면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부터 함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실 때 롯도 더불어 복을 받았지요. 그런데 둘 다 소유가 불어나자 더는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육축이 많아서 물도, 목초지도 부족하다 보니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종종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윗사람으로서 얼마든지 먼저 좋은 땅을 취할 수 있는데도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양보한 것입니다. 이때 롯은 사양은커녕, 물이 넉넉하고 기름진 소돔 땅을 선택해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롯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아무리 강권한다 해도 삼촌 아브라함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롯은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그 마음됨이 어떠한지 알 수 있지요.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 조금도 서운함이나 불편한 감정이 없었습니다. 상대에게 주고 더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중심에서 상대를 섬긴다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권리도 기꺼이 양보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열 개라고 합시다. 그런데 상대가 그것을 달라면 몇 개나 줄 수 있겠습니까? 이는 각자 마음의 크기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겨우 하나만 줄 사람도 있고, 다섯 개 정도까지는 줄 사람도 있겠지요. 나아가 마음이 넓어 아홉 개까지 줄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상대가 열 개를 모두 달라 해도 줄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는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선하다 인정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2. 사심이 없는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
아브라함은 본래 넓고 큰마음인 데다 매사에 정직하고 성실했습니다. 모든 일을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완벽하게 이루고자 했지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되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와도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것이 곧 축복의 길이 됐지요.
이러한 점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선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행한다면서 사심이 있어 상대를 속이거나 불성실한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축복 주실 것을 믿기에 늘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합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그러했기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는 축복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사심 없이 정직하고 성실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창세기 14장에 나옵니다. 소돔 땅에 살던 조카 롯이 가나안 땅에 일어난 연합 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잡혀갔을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신들을 이끌고 나가 롯을 구하고 소돔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에 소돔 왕은 그에게 전리품을 취하라고 권했지만 아브라함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아브라함의 옛 이름)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3)
아브라함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이니 전리품을 취한다 해도 부당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사로운 유익을 취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훗날 자신이 더 부유해졌을 때 소돔 왕이 전리품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기에 단호히 사양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자기 유익을 좇아 재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부유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복을 받기 원한다면 아브라함처럼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당장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합니다. 나아가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누가 꾀지 않아도 스스로 미혹을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지요(잠 28:10).
아브라함은 자신이 전리품을 가진다 해서 허물이 되지 않는데도 취하지 않았고,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었습니다. 이는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도 마찬가지였지요(창 23장). 헷 족속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막벨라 굴을 얻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게 값을 치르지 않으면 받지 않는 정직함과 성실함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값을 치르고 확실하게 자기 소유로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그들의 마음이 변해 얼마든지 땅을 돌려 달라고 할 수 있기에 애초에 이런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 소유의 우물을 빼앗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창 21장). 이때도 아브라함은 잘잘못을 가리며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비멜렉에게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합니다. 상대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자기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이후 다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지혜롭게 해결한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비멜렉은 뉘우치기보다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기에 참된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피해를 보상받아야 할 입장인데도 오히려 아비멜렉에게 우물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고 그 후로는 우물을 넘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선의 지혜로써 무슨 일이든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하여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했지요.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에도 선의 지혜가 있으면 더 신속하고 아름답게 이룰 수 있습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상대라도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될 때, 또한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더욱 선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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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1. ( )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다.
( )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다.
2.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브라함의 선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1~8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전리품을 거절한 아브라함
소돔 왕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브라함에게 전리품을 주고자 하지만 거절한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사사로운 유익을 좇는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거절한 또 다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진리로 변화되기 전에는 언제든지 변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돔 왕이 당장에는 고마워하지만 훗날 “나는 원치 않았는데 아브라함이 대가를 바라서 주었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동원된 소년들의 양식과 자신을 도운 동맹군에게 돌릴 분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취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도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책임 지고 수고를 보상해 주려는 배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