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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9
제5과사랑은 온유한 것
고린도전서 13:4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5 | 참고 말씀: 시편 37:11
교육목표 : 영적인 온유함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온유한 마음을 이룰 수 있는지 깨닫게 한다.
심리학자 ‘하아로우’ 교수가 젖먹이 원숭이들 앞에 두 개의 어미 원숭이 인형을 만들어 놓고 실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는 철사로 만들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각각 우윳병을 꽂아 두었습니다.
첫날 아기 원숭이들은 두 인형에 있는 우유를 모두 먹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는 한 마리도 가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한 인형한테만 모여들었지요. 이처럼 동물들도 차갑고 딱딱한 것보다는 부드러운 것을 선호하듯이, 인간관계에서도 날카롭고 매정한 사람보다는 온유한 사람을 선호하고, 그런 사람 품에 깃들여 쉼을 가지려고 합니다.
1.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온유한 마음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솜을 떠올려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솜은 아무리 단단한 물체가 부딪쳐 와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딪쳐 오는 것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버리지요. 또한 온유한 마음은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아름드리나무와도 같습니다. 무더운 여름 따가운 햇볕을 피하고 땀을 식히기 위해 사람들이 나무 그늘로 모여들듯이, 온유한 마음에는 많은 사람이 깃들이기 마련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 합니다.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온유하다.’라는 자기 기준이 있지요.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온유하다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유함은 다릅니다. 아무리 순하고 착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 아니면 온유하다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서는 부글부글하는데 눌러 참는다면, 이런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지요. 마음속에 악을 버리지 않고 참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그렇다고 잘못했는데 무조건 용서하고 덮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반듯하고 위엄 있게 다스리지요. 따라서 영적인 온유함이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상태를 말합니다.
2. 온유함의 척도는 성결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솜털과 같아서 누가 부딪혀 온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마음에 악이 없으니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지요.
만일 우리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자기 의와 틀이 있으면 상대를 품지 못합니다. 딱딱한 돌이나 쇠에 물체가 떨어지면 깨지거나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는 것처럼, 자기가 있으면 누가 조금만 불편하게 해도 감정이 상합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 판단 정죄하고 수군수군합니다.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으면 발끈하고 마음이 상합니다. 누가 귓속말을 하면 내 험담은 하지 않나 힐끗힐끗 쳐다보고 판단하지요. 이는 소인배와 같아서 그 마음 안에 더러운 비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마음을 더 이상 넓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음에 악이 없어야 상대를 선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매사에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봅니다. 판단 정죄가 없고 선과 사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라도 그 따스함에 마음이 녹아나지요. 온전히 성결되면 성령의 주관을 정확히 받을 수 있고 양 떼의 상황을 잘 분별하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사전을 보면 덕이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이라 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합니다. 잘 갖추어진 인격으로 남을 다스리지요. 상대를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바른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지요. 그러니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며 사랑을 받습니다.
덕은 우리 몸에 입는 옷과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지저분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있으면 격이 떨어져 보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온유해도 외적인 덕이 함께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내면의 온유함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온유한데 대화할 때마다 불필요한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양이 결여되어 있으니 상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지요. 또 마음이 온유해서 나쁜 감정을 품거나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고 세심한 배려가 부족하다면, 이런 사람 역시 덕스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장난치고 농담을 하시며, 복장이 단정치 않고 신발을 질질 끌면서 다니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외모에서부터 영적인 위엄과 권세가 흘러나왔기에 제자들은 물론 어떤 사람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셨지요. 마태복음 12장 19절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꽃에 아무리 꿀이 많아도 꽃의 고운 빛깔이 잘 드러나지도 않고 향기도 나지 않는다면 벌이나 나비가 날아오기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라 해도 말과 행실에 덕이 없으면 그 온유함이 온전히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말과 행실에 덕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이 온유하지 않으면 외모만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요. 내면의 온유함과 외면의 덕을 함께 갖출 때 온전하다 할 수 있습니다.
4.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
우리가 마음에 악이 없고 덕을 겸비하여 온유해지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복을 내려 주실까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또 시편 37편 11절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지요.
여기서 땅은 천국의 처소를 뜻하며,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에게 힘을 주고 은혜를 끼칩니다. 온유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 안에 깃들이고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지요.
많은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그만큼 낮아지고 섬겼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권세는 이처럼 섬기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23장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대로 섬길수록 큰 자가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고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영혼이 잘되니 범사가 잘되고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무수한 영혼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이 없는 성결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을 이루어,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덕과 사랑으로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어서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온유함에 관한 성경 구절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민수기 12:3 ② 시편 37:11 ③ 마태복음 5:5 ④ 데살로니가전서 5:16
2. 온유함과 덕에 관한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한다.
②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다.
③ 온유한 자는 이 땅에서 넓은 땅을 상급으로 받는다.
④ 영적 온유함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것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사랑장과 성령의 열매, 팔복에서 온유의 차이
1) 사랑장의 온유(고전 13:4)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며 기초적인 단계의 ‘온유’이다.
2) 성령의 열매의 온유(갈 5:23) : 범사에 온유한 것, 즉 포괄적인 의미의 온유를 말한다. 또한 온유함이 마음에 열매로 맺힌 것이다.
3) 팔복의 온유(마 5:5) : 마음에 열매로 맺힌 온유함이 삶 가운데 온전하게 효력을 발휘하여 축복을 끌어내리는 심화된 단계이다.
교육목표 : 영적인 온유함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온유한 마음을 이룰 수 있는지 깨닫게 한다.
심리학자 ‘하아로우’ 교수가 젖먹이 원숭이들 앞에 두 개의 어미 원숭이 인형을 만들어 놓고 실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는 철사로 만들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각각 우윳병을 꽂아 두었습니다.
첫날 아기 원숭이들은 두 인형에 있는 우유를 모두 먹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는 한 마리도 가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한 인형한테만 모여들었지요. 이처럼 동물들도 차갑고 딱딱한 것보다는 부드러운 것을 선호하듯이, 인간관계에서도 날카롭고 매정한 사람보다는 온유한 사람을 선호하고, 그런 사람 품에 깃들여 쉼을 가지려고 합니다.
1.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온유한 마음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솜을 떠올려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솜은 아무리 단단한 물체가 부딪쳐 와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딪쳐 오는 것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버리지요. 또한 온유한 마음은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아름드리나무와도 같습니다. 무더운 여름 따가운 햇볕을 피하고 땀을 식히기 위해 사람들이 나무 그늘로 모여들듯이, 온유한 마음에는 많은 사람이 깃들이기 마련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 합니다.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온유하다.’라는 자기 기준이 있지요.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온유하다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유함은 다릅니다. 아무리 순하고 착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 아니면 온유하다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서는 부글부글하는데 눌러 참는다면, 이런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지요. 마음속에 악을 버리지 않고 참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그렇다고 잘못했는데 무조건 용서하고 덮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반듯하고 위엄 있게 다스리지요. 따라서 영적인 온유함이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상태를 말합니다.
2. 온유함의 척도는 성결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솜털과 같아서 누가 부딪혀 온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마음에 악이 없으니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지요.
만일 우리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자기 의와 틀이 있으면 상대를 품지 못합니다. 딱딱한 돌이나 쇠에 물체가 떨어지면 깨지거나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는 것처럼, 자기가 있으면 누가 조금만 불편하게 해도 감정이 상합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 판단 정죄하고 수군수군합니다.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으면 발끈하고 마음이 상합니다. 누가 귓속말을 하면 내 험담은 하지 않나 힐끗힐끗 쳐다보고 판단하지요. 이는 소인배와 같아서 그 마음 안에 더러운 비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마음을 더 이상 넓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음에 악이 없어야 상대를 선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매사에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봅니다. 판단 정죄가 없고 선과 사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라도 그 따스함에 마음이 녹아나지요. 온전히 성결되면 성령의 주관을 정확히 받을 수 있고 양 떼의 상황을 잘 분별하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사전을 보면 덕이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이라 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합니다. 잘 갖추어진 인격으로 남을 다스리지요. 상대를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바른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지요. 그러니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며 사랑을 받습니다.
덕은 우리 몸에 입는 옷과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지저분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있으면 격이 떨어져 보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온유해도 외적인 덕이 함께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내면의 온유함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온유한데 대화할 때마다 불필요한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양이 결여되어 있으니 상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지요. 또 마음이 온유해서 나쁜 감정을 품거나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고 세심한 배려가 부족하다면, 이런 사람 역시 덕스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장난치고 농담을 하시며, 복장이 단정치 않고 신발을 질질 끌면서 다니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외모에서부터 영적인 위엄과 권세가 흘러나왔기에 제자들은 물론 어떤 사람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셨지요. 마태복음 12장 19절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꽃에 아무리 꿀이 많아도 꽃의 고운 빛깔이 잘 드러나지도 않고 향기도 나지 않는다면 벌이나 나비가 날아오기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라 해도 말과 행실에 덕이 없으면 그 온유함이 온전히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말과 행실에 덕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이 온유하지 않으면 외모만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요. 내면의 온유함과 외면의 덕을 함께 갖출 때 온전하다 할 수 있습니다.
4.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
우리가 마음에 악이 없고 덕을 겸비하여 온유해지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복을 내려 주실까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또 시편 37편 11절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지요.
여기서 땅은 천국의 처소를 뜻하며,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에게 힘을 주고 은혜를 끼칩니다. 온유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 안에 깃들이고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지요.
많은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그만큼 낮아지고 섬겼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권세는 이처럼 섬기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23장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대로 섬길수록 큰 자가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고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영혼이 잘되니 범사가 잘되고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무수한 영혼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이 없는 성결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을 이루어,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덕과 사랑으로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어서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온유함에 관한 성경 구절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민수기 12:3 ② 시편 37:11 ③ 마태복음 5:5 ④ 데살로니가전서 5:16
2. 온유함과 덕에 관한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한다.
②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다.
③ 온유한 자는 이 땅에서 넓은 땅을 상급으로 받는다.
④ 영적 온유함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것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사랑장과 성령의 열매, 팔복에서 온유의 차이
1) 사랑장의 온유(고전 13:4)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며 기초적인 단계의 ‘온유’이다.
2) 성령의 열매의 온유(갈 5:23) : 범사에 온유한 것, 즉 포괄적인 의미의 온유를 말한다. 또한 온유함이 마음에 열매로 맺힌 것이다.
3) 팔복의 온유(마 5:5) : 마음에 열매로 맺힌 온유함이 삶 가운데 온전하게 효력을 발휘하여 축복을 끌어내리는 심화된 단계이다.
2021-01-22
제4과사랑은 오래 참는 것
고린도전서 13:4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44 | 참고 말씀: 마태복음 5:39~40
교육목표 :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 의미를 깨닫고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참사랑, 곧 영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참사랑은 우리 편에서 가지려고 애쓴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마음에서 악을 버려 나갈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을 통해 영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오래 참음이 부족하면 종종 상대를 절망케 합니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겼다가 성과가 더디면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줍니다. 그러면 상대는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할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사랑의 항목 중 첫째로 오래 참음을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을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참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1. 오래 참는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장 4절 이하를 보면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데 필요한 15가지 항목이 나옵니다. 그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은 오래 참고”입니다. 여기서 ‘오래 참음’에 담긴 영적인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가령,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누군가 시기 질투하며 미워합니다.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면 사랑스럽기는커녕 피하고 싶고 우연히라도 만나고 싶지 않지요. 그러니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들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가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할지라도 마음을 다스려 참고 상대를 사랑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할 때 만나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오래 참음’에 비하면 작은 범주의 사랑에 속합니다. 성령의 열매의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음인 반면,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 참는 개인적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요.
2. 오래 참는 사랑의 위력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합니다.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시고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인생들은 오직 선한 일만 행하신 예수님을 오히려 조롱하고 멸시 천대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며 중보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생들을 오래 참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마다 원수 마귀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오래 참는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마태복음 5장 39~40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랑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남이 자기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참지 못하고 곧바로 송사를 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참고 가만히 있으면 “바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며 선으로 대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죽인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큰 해를 끼치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생명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지요.
3.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려면
어떤 사람은 미움, 혈기,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다가 자기 한계점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고 맙니다. 또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화병까지 얻는 사람도 있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즉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참음이지요.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기게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영적이 사랑만 가득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애당초 원수 맺을 일이 없지요.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이고,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상대가 싫지 않습니다. 나를 미워하고 싫어해도 밉지가 않지요.
반면,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비진리가 있으면 아무리 좋은 사람을 보아도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단점이 보이고 싫은 마음이 앞섭니다. 또 자기가 거짓말을 잘하면 상대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거짓말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얼마나 오래 참아 주어야 할까요? 이에 대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러자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시지요. ‘7’은 완전함을 의미하는 수로, 완전히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즉 무한대의 용서와 사랑을 말하지요.
우리가 하루아침에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기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을 베풀고자 노력해야 하지요.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서 감정이나 혈기가 나더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노력하면 점점 진리로 바뀌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갑니다.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니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때 ‘천국 같다’고 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모든 비진리를 버리고 선과 사랑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하지요.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한 사람일수록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지요.
그렇다면 천국에도 오래 참음이 있을까요? 그곳에는 눈물, 슬픔, 고통, 악이 없고 오직 선과 사랑만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짜증 낼 일도 없지요.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 자체가 없으며, 당연히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면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오래 참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사랑은 오래 참고”에 대한 말씀의 의미로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이다.
②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이다.
③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은 미움, 서운함 등을 발동케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④ 천국에 가서도 사랑을 이루기 위해 오래 참아야 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
첫째,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마음의 악을 버리기 위해)
둘째,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셋째,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기까지)
교육목표 :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 의미를 깨닫고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참사랑, 곧 영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참사랑은 우리 편에서 가지려고 애쓴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마음에서 악을 버려 나갈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을 통해 영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오래 참음이 부족하면 종종 상대를 절망케 합니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겼다가 성과가 더디면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줍니다. 그러면 상대는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할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사랑의 항목 중 첫째로 오래 참음을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을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참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1. 오래 참는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장 4절 이하를 보면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데 필요한 15가지 항목이 나옵니다. 그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은 오래 참고”입니다. 여기서 ‘오래 참음’에 담긴 영적인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가령,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누군가 시기 질투하며 미워합니다.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면 사랑스럽기는커녕 피하고 싶고 우연히라도 만나고 싶지 않지요. 그러니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들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가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할지라도 마음을 다스려 참고 상대를 사랑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할 때 만나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오래 참음’에 비하면 작은 범주의 사랑에 속합니다. 성령의 열매의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음인 반면,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 참는 개인적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요.
2. 오래 참는 사랑의 위력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합니다.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시고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인생들은 오직 선한 일만 행하신 예수님을 오히려 조롱하고 멸시 천대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며 중보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생들을 오래 참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마다 원수 마귀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오래 참는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마태복음 5장 39~40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랑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남이 자기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참지 못하고 곧바로 송사를 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참고 가만히 있으면 “바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며 선으로 대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죽인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큰 해를 끼치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생명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지요.
3.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려면
어떤 사람은 미움, 혈기,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다가 자기 한계점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고 맙니다. 또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화병까지 얻는 사람도 있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즉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참음이지요.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기게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영적이 사랑만 가득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애당초 원수 맺을 일이 없지요.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이고,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상대가 싫지 않습니다. 나를 미워하고 싫어해도 밉지가 않지요.
반면,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비진리가 있으면 아무리 좋은 사람을 보아도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단점이 보이고 싫은 마음이 앞섭니다. 또 자기가 거짓말을 잘하면 상대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거짓말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얼마나 오래 참아 주어야 할까요? 이에 대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러자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시지요. ‘7’은 완전함을 의미하는 수로, 완전히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즉 무한대의 용서와 사랑을 말하지요.
우리가 하루아침에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기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을 베풀고자 노력해야 하지요.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서 감정이나 혈기가 나더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노력하면 점점 진리로 바뀌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갑니다.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니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때 ‘천국 같다’고 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모든 비진리를 버리고 선과 사랑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하지요.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한 사람일수록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지요.
그렇다면 천국에도 오래 참음이 있을까요? 그곳에는 눈물, 슬픔, 고통, 악이 없고 오직 선과 사랑만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짜증 낼 일도 없지요.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 자체가 없으며, 당연히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면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오래 참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사랑은 오래 참고”에 대한 말씀의 의미로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이다.
②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이다.
③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은 미움, 서운함 등을 발동케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④ 천국에 가서도 사랑을 이루기 위해 오래 참아야 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
첫째,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마음의 악을 버리기 위해)
둘째,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셋째,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기까지)
2021-01-15
제3과영적인 사랑의 중요성
고린도전서 13:1~3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1~3 | 외울말씀 : 골로새서 3:23 | 참고 말씀: 고린도전서 2:6~8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의 중요성과, 어떻게 하면 마음 안에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는지 알아본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만일 율법대로 하면 예수님을 사랑이 없다 할 것이고, 용서하라 하면 율법을 무시한다고 정죄할 것이 뻔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바닥에 그들에게 해당되는 죄목을 하나하나 써 내려가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목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자리를 떠났고 여인만 남았지요.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영적인 사랑을 지닌 분이십니다. 영적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란 방언의 은사가 아닌 영어, 일어, 불어 등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또한 ‘천사의 말’이란 매우 아름다운 말을 뜻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운 말을 할 때 “천사같이 말한다.”고 하지요.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말은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다워도 참 기쁨과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가볍고 속이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리나 꽹과리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쭉정이와 같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 차서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될 때라야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서 가치가 있지요. “무슨 말로 상대에게 힘이 될까?” “어떻게 하면 상대를 진리로 나오게 할까?” 기도하며, 말 한마디를 해도 상대에게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상대를 무조건 말씀으로 설득시키려 하거나 지적하여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부분을 고치려 듭니다. 설령 그 말이 백 번 옳다 해도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할 때 내 의와 틀 속에 하지는 않는지, 그 말이 생명을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되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어떤 유창한 말보다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됩니다.
2.“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받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은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예언하는 능’이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장차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구원받은 사람은 휴거되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7년 환난을 겪고 백보좌대심판 후 지옥에 갈 것 등을 알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사망으로 갈 것을 아시고 만세 전에 구세주가 될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기까지 하나님은 비밀로 붙이셨습니다. 구원의 섭리가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방해하여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2:6∼8).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면 아담의 범죄로 넘겨받은 권세를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 도리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만들었지요. 이처럼 놀라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어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지식’이란 단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만나고 체험하여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데 그칠 뿐, 그 지식이 남을 판단 정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영적인 사랑이 없는 지식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때 잠시 따라 걸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것도, 죄를 버리고 마음의 할례를 한 것도 아니므로 영적인 사랑이 임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하였지요.
이처럼 체험이 있을 때 믿음은 성장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랑은 죄를 버리려는 노력과 헌신, 희생이 따를 때 임합니다. 그렇다고 믿음과 사랑이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요. 그러나 사랑을 이루려는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충성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형식적으로 구제하는 사람은 칭찬받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의롭다 착각하여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신에게 해만 되지요. 그러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6:3~4).
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즉 실컷 수고해 놓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정성, 시간, 물질을 다해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열심 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쩜 저럴 수 있지?” 판단합니다. 이런 마음이면 자신도 힘들고 주변 사람과 화평을 깨니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농부가 자기 밭의 일을 할 때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남의 일을 할 때는 그 마음가짐이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형식적으로 일하고, 당장 대가를 받지 못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3~24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희생을 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을 이뤄야 합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알아주든 몰라주든 묵묵히 헌신합니다. 마치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아낌없이 자신을 내줍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참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생명 다하기까지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영혼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올리셨지요. 누구든지 예수님처럼 어떤 욕심이나 거짓이 없이 자신을 희생한다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에 관한 말씀을 고르시오.
① 고린도전서 13:1~3
② 골로새서 3:23~24
③ 사도행전 13:3
④ 누가복음 17:10
2. 믿음은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3. 믿음과 사랑은 비례할까요? 다르다면 왜 그런지 이유를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계시’와 ‘예언’의 차이는?
계시 -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에게 성령의 감동함 속에 환상이나 음성 등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시는 것, 또는 사람으로서는 풀 수 없는 영의 일들을 풀이해 주시는 것.
예언 -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고하는 일, 또는 그런 말(벧후 1:21).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의 중요성과, 어떻게 하면 마음 안에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는지 알아본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만일 율법대로 하면 예수님을 사랑이 없다 할 것이고, 용서하라 하면 율법을 무시한다고 정죄할 것이 뻔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바닥에 그들에게 해당되는 죄목을 하나하나 써 내려가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목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자리를 떠났고 여인만 남았지요.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영적인 사랑을 지닌 분이십니다. 영적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란 방언의 은사가 아닌 영어, 일어, 불어 등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또한 ‘천사의 말’이란 매우 아름다운 말을 뜻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운 말을 할 때 “천사같이 말한다.”고 하지요.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말은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다워도 참 기쁨과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가볍고 속이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리나 꽹과리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쭉정이와 같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 차서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될 때라야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서 가치가 있지요. “무슨 말로 상대에게 힘이 될까?” “어떻게 하면 상대를 진리로 나오게 할까?” 기도하며, 말 한마디를 해도 상대에게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상대를 무조건 말씀으로 설득시키려 하거나 지적하여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부분을 고치려 듭니다. 설령 그 말이 백 번 옳다 해도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할 때 내 의와 틀 속에 하지는 않는지, 그 말이 생명을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되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어떤 유창한 말보다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됩니다.
2.“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받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은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예언하는 능’이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장차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구원받은 사람은 휴거되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7년 환난을 겪고 백보좌대심판 후 지옥에 갈 것 등을 알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사망으로 갈 것을 아시고 만세 전에 구세주가 될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기까지 하나님은 비밀로 붙이셨습니다. 구원의 섭리가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방해하여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2:6∼8).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면 아담의 범죄로 넘겨받은 권세를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 도리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만들었지요. 이처럼 놀라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어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지식’이란 단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만나고 체험하여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데 그칠 뿐, 그 지식이 남을 판단 정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영적인 사랑이 없는 지식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때 잠시 따라 걸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것도, 죄를 버리고 마음의 할례를 한 것도 아니므로 영적인 사랑이 임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하였지요.
이처럼 체험이 있을 때 믿음은 성장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랑은 죄를 버리려는 노력과 헌신, 희생이 따를 때 임합니다. 그렇다고 믿음과 사랑이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요. 그러나 사랑을 이루려는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충성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형식적으로 구제하는 사람은 칭찬받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의롭다 착각하여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신에게 해만 되지요. 그러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6:3~4).
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즉 실컷 수고해 놓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정성, 시간, 물질을 다해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열심 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쩜 저럴 수 있지?” 판단합니다. 이런 마음이면 자신도 힘들고 주변 사람과 화평을 깨니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농부가 자기 밭의 일을 할 때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남의 일을 할 때는 그 마음가짐이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형식적으로 일하고, 당장 대가를 받지 못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3~24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희생을 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을 이뤄야 합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알아주든 몰라주든 묵묵히 헌신합니다. 마치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아낌없이 자신을 내줍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참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생명 다하기까지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영혼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올리셨지요. 누구든지 예수님처럼 어떤 욕심이나 거짓이 없이 자신을 희생한다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에 관한 말씀을 고르시오.
① 고린도전서 13:1~3
② 골로새서 3:23~24
③ 사도행전 13:3
④ 누가복음 17:10
2. 믿음은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3. 믿음과 사랑은 비례할까요? 다르다면 왜 그런지 이유를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계시’와 ‘예언’의 차이는?
계시 -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에게 성령의 감동함 속에 환상이나 음성 등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시는 것, 또는 사람으로서는 풀 수 없는 영의 일들을 풀이해 주시는 것.
예언 -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고하는 일, 또는 그런 말(벧후 1:21).
2021-01-08
제2과영적인 사랑과 육적인 사랑
고린도전서 13:4~7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7 | 외울말씀 : 고린도전서 13:13 | 참고 말씀: 사무엘상 18:1~4
교육목표 :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과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에 대해 알아본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겠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경우가 대부분일 텐데 왜 그 마음이 변한 것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이란?
사전을 보면,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입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이지요.
다윗과 요나단은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그는 사울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당회장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회장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회장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당회장님의 전부가 되셨고, 당회장님은 오직 영혼 구원을 위해 생명 다해 달려오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입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풉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대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진정 사랑한다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유익과 영광을 위해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드리는 데도 인색합니다. 내 자녀, 내 생활 중심적이고 점점 부모님한테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부모에게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친구 간에 사랑은 어떻습니까?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라면 그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난다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믿음의 형제간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서는 일을 금하셨습니다. 이에 불순종할 경우 사단의 역사가 따르고 불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철저한 경비 시스템을 이용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웃끼리 고소하고 주차 문제 등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 )
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 )
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영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요?
( )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매’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이다.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교육목표 :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과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에 대해 알아본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겠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경우가 대부분일 텐데 왜 그 마음이 변한 것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이란?
사전을 보면,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입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이지요.
다윗과 요나단은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그는 사울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당회장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회장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회장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당회장님의 전부가 되셨고, 당회장님은 오직 영혼 구원을 위해 생명 다해 달려오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입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풉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대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진정 사랑한다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유익과 영광을 위해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드리는 데도 인색합니다. 내 자녀, 내 생활 중심적이고 점점 부모님한테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부모에게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친구 간에 사랑은 어떻습니까?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라면 그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난다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믿음의 형제간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서는 일을 금하셨습니다. 이에 불순종할 경우 사단의 역사가 따르고 불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철저한 경비 시스템을 이용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웃끼리 고소하고 주차 문제 등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 )
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 )
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영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요?
( )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매’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이다.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2021-01-01
제1과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누가복음 5:36~39
읽을말씀 : 누가복음 5:36~39 | 외울말씀 : 에베소서 4:24 | 참고 말씀: 고린도후서 5:17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내용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뜻을 모른 채 단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해를 맞아 이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물론, 마음의 할례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영적 의미
누가복음 5장 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낡고 오래된 가죽은 신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여 결국 터지고 맙니다. 하지만 새 부대는 신축성이 좋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없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 의미를 알기 위해 먼저,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가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그 열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역하시면서 맺은 모든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기사와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신 모든 일들이 곧 포도나무의 열매들이지요. 또한 포도즙은 포도 열매를 짜낸 액으로,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보혈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열매를 내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주시는 사랑으로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따라서 주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신약이며, ‘새 포도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은 포도주’란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기 전, 율법에 매인 삶의 방식이지요. 히브리서 10장 1절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은 본체요,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2.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차이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사함 받으려면 짐승을 잡아 그 피로 행위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이 바로 묵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신 신약 시대에는 우리가 그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즉 새 포도주를 마심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구약의 묵은 포도주와 신약의 새 포도주의 차이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었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셨냐고 반문하지요. 이에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한 남녀가 변함없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율법에 이혼을 규정하신 것은 인간의 변질되고 악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음행한 사실을 남편이 알고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괴로운 상황이라고 합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함께 삶으로 인해 더 불행해져서는 안 되겠기에 모세의 율법에는 이혼해도 가하다고 규정해 놓았지요.
따라서 묵은 포도주는 하나님의 근본 뜻인 사랑보다는 율법적인 틀에 매인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남편이 아내의 허물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면 새 포도주를 마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 주님을 닮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3. 묵은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
누가복음 5장 39절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습니다. 수십 년, 수백 년 묵을수록 비싸고 등급이 높은 상품으로 인정받지요. 세상에서 묵은 포도주를 귀히 여기는 것처럼 구약의 율법을 신약의 새 법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 외에도 다른 규칙까지 만들어 지켰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율법에다 부수적인 규칙들을 만들어 지켰지요. 즉 안식일에는 음식을 만들 불도 피워서도 안 되고, 몇 킬로미터 이상은 여행하면 안 되며, 무거운 물건을 운반해도 안 된다는 등 여러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뒤로하고 자신들이 안식일에 대해 만든 규정들을 지키며 안식일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새 법이 옛 율법의 틀에 맞지 않는다고 배척했습니다. 마치 묵은 포도주에 길든 사람들이 새 포도주를 싫어하는 것처럼, 자기적인 율법의 틀에 얽매인 이들은 예수님의 새 교훈을 싫어했습니다.
이런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마 23:23). 아무리 구약의 율법을 좇아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하며 기도와 금식을 드린다 해도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고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께서 외면하십니다. 드러나는 행위만 옳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4.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만들려면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말씀합니다. 세상 것을 취하고 남을 판단 정죄하며 미워하는 등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마음은 낡은 부대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의와 욕심, 잘못된 지식과 틀 등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하지요. 그럴 때라야 우리 마음이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말씀을 들어도 변화되지 않으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묵은 포도주를 고집하지요. 하나님 뜻이 아닌 육신의 생각 속에 틀을 만들고 사랑보다는 율법에 매여 판단 정죄합니다.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가 쏟아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말지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죄악을 신속히 벗고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합니다. 진리와 선으로 마음을 변화시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말씀과 기도로 부지런히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씀하신 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맞는 것끼리 연결해 보세요.
새 포도주 ● ● 의와 진리로 새롭게 변화된 마음
묵은 포도주 ● ●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는 마음
새 부대 ● ● 구약의 율법적인 생활방식
낡은 부대 ● ● 주님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신약’
2. 우리의 마음을 새 가죽 부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여기서 물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며, 포도주는 죄인을 구원한 예수님의 보혈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사람들에게 마시게 한 것은 곧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리실 것을 나타내며 이를 믿는 사람은 죄 용서를 받고 구원에 이를 것을 뜻한다.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내용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뜻을 모른 채 단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해를 맞아 이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물론, 마음의 할례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영적 의미
누가복음 5장 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낡고 오래된 가죽은 신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여 결국 터지고 맙니다. 하지만 새 부대는 신축성이 좋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없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 의미를 알기 위해 먼저,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가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그 열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역하시면서 맺은 모든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기사와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신 모든 일들이 곧 포도나무의 열매들이지요. 또한 포도즙은 포도 열매를 짜낸 액으로,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보혈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열매를 내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주시는 사랑으로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따라서 주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신약이며, ‘새 포도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은 포도주’란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기 전, 율법에 매인 삶의 방식이지요. 히브리서 10장 1절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은 본체요,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2.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차이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사함 받으려면 짐승을 잡아 그 피로 행위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이 바로 묵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신 신약 시대에는 우리가 그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즉 새 포도주를 마심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구약의 묵은 포도주와 신약의 새 포도주의 차이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었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셨냐고 반문하지요. 이에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한 남녀가 변함없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율법에 이혼을 규정하신 것은 인간의 변질되고 악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음행한 사실을 남편이 알고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괴로운 상황이라고 합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함께 삶으로 인해 더 불행해져서는 안 되겠기에 모세의 율법에는 이혼해도 가하다고 규정해 놓았지요.
따라서 묵은 포도주는 하나님의 근본 뜻인 사랑보다는 율법적인 틀에 매인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남편이 아내의 허물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면 새 포도주를 마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 주님을 닮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3. 묵은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
누가복음 5장 39절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습니다. 수십 년, 수백 년 묵을수록 비싸고 등급이 높은 상품으로 인정받지요. 세상에서 묵은 포도주를 귀히 여기는 것처럼 구약의 율법을 신약의 새 법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 외에도 다른 규칙까지 만들어 지켰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율법에다 부수적인 규칙들을 만들어 지켰지요. 즉 안식일에는 음식을 만들 불도 피워서도 안 되고, 몇 킬로미터 이상은 여행하면 안 되며, 무거운 물건을 운반해도 안 된다는 등 여러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뒤로하고 자신들이 안식일에 대해 만든 규정들을 지키며 안식일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새 법이 옛 율법의 틀에 맞지 않는다고 배척했습니다. 마치 묵은 포도주에 길든 사람들이 새 포도주를 싫어하는 것처럼, 자기적인 율법의 틀에 얽매인 이들은 예수님의 새 교훈을 싫어했습니다.
이런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마 23:23). 아무리 구약의 율법을 좇아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하며 기도와 금식을 드린다 해도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고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께서 외면하십니다. 드러나는 행위만 옳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4.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만들려면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말씀합니다. 세상 것을 취하고 남을 판단 정죄하며 미워하는 등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마음은 낡은 부대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의와 욕심, 잘못된 지식과 틀 등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하지요. 그럴 때라야 우리 마음이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말씀을 들어도 변화되지 않으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묵은 포도주를 고집하지요. 하나님 뜻이 아닌 육신의 생각 속에 틀을 만들고 사랑보다는 율법에 매여 판단 정죄합니다.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가 쏟아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말지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죄악을 신속히 벗고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합니다. 진리와 선으로 마음을 변화시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말씀과 기도로 부지런히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씀하신 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맞는 것끼리 연결해 보세요.
새 포도주 ● ● 의와 진리로 새롭게 변화된 마음
묵은 포도주 ● ●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는 마음
새 부대 ● ● 구약의 율법적인 생활방식
낡은 부대 ● ● 주님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신약’
2. 우리의 마음을 새 가죽 부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여기서 물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며, 포도주는 죄인을 구원한 예수님의 보혈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사람들에게 마시게 한 것은 곧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리실 것을 나타내며 이를 믿는 사람은 죄 용서를 받고 구원에 이를 것을 뜻한다.
2020-12-25
제52과주님은 누구의 구주이신가
마태복음 2:1~12
읽을말씀 : 마태복음 2:1~12 | 외울말씀 : 누가복음 2:14 | 참고 말씀: 마태복음 1:21
교육목표 :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세 가지 예물인 황금, 유향, 몰약에 담긴 영적 의미를 알아본다.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온 인류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1.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지금부터 약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지요.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호화로운 곳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정욕대로 살아가는 짐승과 다름없게 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지요(전 3:18).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살아가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죄를 범한 아담의 후손은 점점 죄로 물들어 갔고 결국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람의 본분을 벗어나서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을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으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고, 이들의 참된 양식이 되기 위해 짐승의 먹이를 담는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던 것입니다(눅 2:7).
또한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태어나신 것은 인류의 가난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하여 저주를 받음으로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도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되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요한 자로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자 가난한 길을 가신 것입니다(고후 8:9).
2.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은 사람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동방에서부터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선민은 아니었지만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며 선한 양심을 좇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님께 찾아가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마 2:11).
육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왕궁도, 호화로운 저택도 아니고 짐승들이 사는 마구간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려 보면 그곳에는 영광의 빛이 가득하고 하늘의 선지자들과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육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영으로 보고 느꼈기에 영의 행함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는데,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광 돌렸지요. 안나 선지자는 과부 된 지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더니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육신의 생각 속에서 구세주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영으로 깨어 있어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밤에 밖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 것을 알려 줍니다. 양 치는 목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이 겸손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는 바리새인, 율법학자,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정작 이들은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지 못했습니다.
3. 세 가지 예물에 담긴 영적 의미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온 인류를 대표하여 이 땅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이 세 가지 예물에는 어떠한 영적 의미가 있을까요?
1) 마음을 의미하는 황금
황금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보석 중의 하나로 부귀와 재물을 상징합니다. 또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마 6:21).
따라서 황금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곧 마음을 드린다는 의미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명 그 이상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요. 이처럼 우리가 가진 전부를 드리는 일, 할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을 먼저 섬기는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우며 황금을 예물로 드리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 황금을 드린 것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황금보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마음에 천국이 임하고 장차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향기를 의미하는 유향
유향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줍니다.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상징하지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착한 행실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모습이 바로 주님 앞에 유향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본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유향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더럽고 냄새나는 모든 죄악의 문제를 대속하시고 성결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5장 11절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는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지 말씀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행함은 물론 중심을 감찰하시며 무엇보다 마음의 향기를 흠향하십니다.
따라서 유향을 예물로 드림과 같이 마음의 할례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중심이요, 생명이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중심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받아 범사가 형통하며 영육 간에 강건한 축복도 받습니다(요삼 1:2).
3) 변함없는 믿음을 의미하는 몰약
몰약은 변함없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부패를 막아 주는 방부제 역할을 하는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변함없이 생명까지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번 주님을 만나 자신의 생애를 주님을 위해 살기로 다짐했다면 은혜받은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변함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함없는 마음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악의 모양이 남아 있으면 자신의 유익을 좇아 변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먼저 나의 전부를 드릴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되 마음의 할례를 통해 그 속의 비진리를 모두 벗어 버리고 진리로 채워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린다면 이것이 곧 주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몰약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심으로 죽은 영이 살아나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체의 몸으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값진 선물을 받은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께 우리의 마음인 황금과, 그리스도의 향기인 유향과, 변함없는 믿음인 몰약을 선물로 드림으로 뜨거운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은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보석 중의 하나로 부귀와 재물을 상징하며 영적으로는 우리의 ( )을 의미한다.
2. ( )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준다. 영적으로는 ( )를 상징한다.
3. ( )은 부패를 막아주는 방부제 역할을 하며, ( )을 의미한다.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을 드린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베들레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베들레헴은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곳으로 다윗왕의 출생지이기도 하다(삼상 16:1, 눅 2:4).
미가 5장 2절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예언되어 있다.
교육목표 :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세 가지 예물인 황금, 유향, 몰약에 담긴 영적 의미를 알아본다.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온 인류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1.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지금부터 약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지요.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호화로운 곳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정욕대로 살아가는 짐승과 다름없게 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지요(전 3:18).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살아가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죄를 범한 아담의 후손은 점점 죄로 물들어 갔고 결국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람의 본분을 벗어나서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을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으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고, 이들의 참된 양식이 되기 위해 짐승의 먹이를 담는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던 것입니다(눅 2:7).
또한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태어나신 것은 인류의 가난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하여 저주를 받음으로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도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되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요한 자로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자 가난한 길을 가신 것입니다(고후 8:9).
2.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은 사람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동방에서부터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선민은 아니었지만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며 선한 양심을 좇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님께 찾아가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마 2:11).
육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왕궁도, 호화로운 저택도 아니고 짐승들이 사는 마구간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려 보면 그곳에는 영광의 빛이 가득하고 하늘의 선지자들과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육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영으로 보고 느꼈기에 영의 행함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는데,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광 돌렸지요. 안나 선지자는 과부 된 지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더니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육신의 생각 속에서 구세주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영으로 깨어 있어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밤에 밖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 것을 알려 줍니다. 양 치는 목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이 겸손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는 바리새인, 율법학자,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정작 이들은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지 못했습니다.
3. 세 가지 예물에 담긴 영적 의미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온 인류를 대표하여 이 땅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이 세 가지 예물에는 어떠한 영적 의미가 있을까요?
1) 마음을 의미하는 황금
황금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보석 중의 하나로 부귀와 재물을 상징합니다. 또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마 6:21).
따라서 황금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곧 마음을 드린다는 의미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명 그 이상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요. 이처럼 우리가 가진 전부를 드리는 일, 할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을 먼저 섬기는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우며 황금을 예물로 드리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 황금을 드린 것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황금보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마음에 천국이 임하고 장차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향기를 의미하는 유향
유향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줍니다.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상징하지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착한 행실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모습이 바로 주님 앞에 유향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본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유향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더럽고 냄새나는 모든 죄악의 문제를 대속하시고 성결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5장 11절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는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지 말씀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행함은 물론 중심을 감찰하시며 무엇보다 마음의 향기를 흠향하십니다.
따라서 유향을 예물로 드림과 같이 마음의 할례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중심이요, 생명이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중심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받아 범사가 형통하며 영육 간에 강건한 축복도 받습니다(요삼 1:2).
3) 변함없는 믿음을 의미하는 몰약
몰약은 변함없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부패를 막아 주는 방부제 역할을 하는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변함없이 생명까지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번 주님을 만나 자신의 생애를 주님을 위해 살기로 다짐했다면 은혜받은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변함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함없는 마음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악의 모양이 남아 있으면 자신의 유익을 좇아 변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먼저 나의 전부를 드릴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되 마음의 할례를 통해 그 속의 비진리를 모두 벗어 버리고 진리로 채워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린다면 이것이 곧 주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몰약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심으로 죽은 영이 살아나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체의 몸으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값진 선물을 받은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께 우리의 마음인 황금과, 그리스도의 향기인 유향과, 변함없는 믿음인 몰약을 선물로 드림으로 뜨거운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은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보석 중의 하나로 부귀와 재물을 상징하며 영적으로는 우리의 ( )을 의미한다.
2. ( )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준다. 영적으로는 ( )를 상징한다.
3. ( )은 부패를 막아주는 방부제 역할을 하며, ( )을 의미한다.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을 드린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베들레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베들레헴은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곳으로 다윗왕의 출생지이기도 하다(삼상 16:1, 눅 2:4).
미가 5장 2절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예언되어 있다.
2020-12-18
제51과준비된 자
디모데후서 2:20~21
읽을말씀 : 디모데후서 2:20~21 | 외울말씀 : 디모데후서 2:21 | 참고 말씀: 에베소서 6:12, 고린도전서 4:20
교육목표 : 말씀과 기도로 그릇을 잘 준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했습니다. 이처럼 그릇의 종류도 많고 크기도 다양한 데 주인은 어떤 것을 골라 쓰겠습니까?
일단 용도에 맞아야 하고 주인의 손에 잘 맞는 그릇이면 좋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인의 손에 맞고 용도에 맞아도 깨끗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조건들은 영적으로도 동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준비된 그릇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준비된 그릇이란?
영적으로 용도에 맞는 그릇이 된다는 것은 각 분야에서 쓰임 받기 합당한 자질을 갖춰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의 종이면 주의 종, 교사면 교사, 찬양 사역자면 찬양 사역자의 자질을 갖춰야 합니다. 기술직이라면, 더 나은 기술들을 쌓아가며 하나님의 나라에 잘 적용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명이든지 가장 기본적으로는 영적인 자질을 먼저 갖춰야 합니다. 곧 말씀을 무장하고 기도를 쌓아야 하지요.
다음으로, 주인의 손에 맞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달란트가 뛰어나고 능력이 있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쓰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동으로 가는 것인데 자기 뜻대로 서쪽으로 간다면 하나님의 일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준비된 그릇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깨끗한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란,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된 사람을 말합니다. 물론 기왕이면 많이 담아지는 큰 그릇이 좋고, 귀한 금그릇이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하고 큰 그릇이라도 씻지 않아 더럽다면 쓸 수가 없습니다. 성결되어 깨끗한 그릇이 되는 만큼 사명 감당할 능력도 더 받을 수 있고, 순종도 더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였고,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ㅇㅣ루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 마귀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이므로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힘과 능력은 죄를 버리고 성결된 만큼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성결되어 영적인 힘이 있는 일꾼들을 항상 찾으십니다.
2. 성결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더딘 이유
성결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이뤄야 할 본분입니다. 특히 직분을 맡은 일꾼이라면 성결에 대한 사모함이 더욱 간절하지요. 그런데 사람마다 나름대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노력한다 했는데 더디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성결되고 싶을 뿐, 낱낱이 자신을 해부하여 죄를 버리는 작업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결되게 해 주세요, 죄 버리게 해 주세요, 선한 마음을 주세요.” 하면서 막연하게 기도한다면 변화가 늦습니다. 어떤 죄가 있고 어떤 악한 마음이 있는지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입술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며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내 안에 육의 속성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싫게 여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비슷한 상황이 와도 절대로 같은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늘 근신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하나하나 버려 나가면 한 달, 두 달 지날수록 모습이 달라집니다. 어떤 경우는 구체적으로 발견한 것에서 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발견해서 버리기로 했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데, 버리는 작업을 어느 정도 하다가 맙니다.
어떤 계기로 모르고 있던 자신의 비진리를 발견한 것도 큰 은혜입니다. 더 나아가 왜 그런 비진리가 자기 안에 심어졌는지 성령께서 과거를 떠올려 주시며 깨닫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깨우침이 올 때나 또 그것을 회개할 때는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마치 그 순간에 다 버리고 변화된 것 같지요.
그러나 한 번 회개했다고 버려진 것은 아닙니다. 잡초를 제거할 때 뿌리를 남겨두면 금방 다시 자랍니다. 죄성도 발견하여 한 번 회개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근본의 죄성까지 뽑아야 하지요. 다 뽑아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자신을 점검하며 기도해 나가야 합니다. 발견되는 것이 너무 많다면 그중에 큰 뿌리부터 먼저 뽑아야 합니다. 큰 뿌리가 뽑힐 때 많은 잔뿌리도 함께 뽑혀나가지요. 자기 안에 가장 크고 버리기 어려운 것 몇 가지만 집중적으로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쉽게 버려나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없으면 점차 신앙이 정체되기 쉽습니다. 늘 준비하려고만 할 뿐, 막상 준비된 자로서 세워질 수 없습니다.
둘째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는 자신에게 어떤 비진리가 있는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진리의 마음을 진리로 포장하여 스스로도 속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의 의와 틀을 깨지 못하므로 자신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잘한 것만 생각하고 잘못한 것은 덮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일꾼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뜨거운 열정으로 어떤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화평을 깨는 일이 생겼지요. 내 고집과 자기주장이 상대에게 부딪힐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이럴 때도 자기 틀과 의가 있으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랬으니까, 내가 화평을 깨려고 한 것이 아니니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화평을 깨지 않으려는 마음이라면, 자기가 더 옳다고 해도 상대의 마음에 맞춰 줍니다. 때론 자신이 손해를 본다 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 해도 상대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요. 더구나 윗사람이 지시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지으라는 명령이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비진리가 아니고 죄가 아니라면” 먼저 상대의 입장을 배려해 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더 옳기 때문에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결국 “화평을 깨도 좋다”는 마음입니다. 또한 내가 너무나 이것이 하고 싶기 때문에 윗사람이 “그러지 말라” 해도 여전히 자기 원하는 대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히려 윗사람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화평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화평을 떠나서 기본적인 질서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변명만 합니다. “내가 화평을 깨려고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정말 화평하고 싶지만 상대에게 맞춰 줄 수는 없다” 합니다.
이는 진실한 태도가 아닙니다. 물론 머리로는 화평을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기 위해서는 화평을 깨도 할 수 없다”라는 마음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혀로만 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나는 화평하려고 했다”고 스스로를 좋게만 생각하므로 신속하게 성결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 8절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성결된 사람을 찾고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고, 불같은 기도를 통해 발견된 모든 비진리의 뿌리까지 뽑아냄으로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준비된 그릇이란 어떤 그릇을 의미할까요?
1. ( )에 맞는 그릇이다. 이는 각 분야에서 쓰임 받기 ( )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2. 주인의 손에 맞는 그릇 곧 ( )하는 그릇이다.
3. 준비된 그릇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 )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의 향 올리기.
● 알고 넘어갑시다!
그릇의 크기와 재질
그릇의 재질은 사람의 중심과 연관되며, 그릇의 크기는 진리에 속한 것을 얼마나 많이 담을 수 있는지와 상관이 있다. 그릇의 크기에 따라 얼마나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지가 정해진다.
그릇은 타고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의 노력으로 변화될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그릇의 재질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일구는 것이 더 수월하므로 믿음의 성장이 빠르다.
그러나 타고난 그릇이 작거나 재질이 좋지 않다 해도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 성결을 이루어 곧 깨끗한 그릇이 되어 주인에게 쓰임 받을 수 있고, 또 마음 씀을 넓히고 그릇을 키워 더 큰 일들을 감당해 갈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아 비진리를 버리고 진리로 채우는 만큼 그릇의 재질도 바뀔 수 있다.
교육목표 : 말씀과 기도로 그릇을 잘 준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했습니다. 이처럼 그릇의 종류도 많고 크기도 다양한 데 주인은 어떤 것을 골라 쓰겠습니까?
일단 용도에 맞아야 하고 주인의 손에 잘 맞는 그릇이면 좋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인의 손에 맞고 용도에 맞아도 깨끗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조건들은 영적으로도 동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준비된 그릇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준비된 그릇이란?
영적으로 용도에 맞는 그릇이 된다는 것은 각 분야에서 쓰임 받기 합당한 자질을 갖춰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의 종이면 주의 종, 교사면 교사, 찬양 사역자면 찬양 사역자의 자질을 갖춰야 합니다. 기술직이라면, 더 나은 기술들을 쌓아가며 하나님의 나라에 잘 적용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명이든지 가장 기본적으로는 영적인 자질을 먼저 갖춰야 합니다. 곧 말씀을 무장하고 기도를 쌓아야 하지요.
다음으로, 주인의 손에 맞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달란트가 뛰어나고 능력이 있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쓰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동으로 가는 것인데 자기 뜻대로 서쪽으로 간다면 하나님의 일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준비된 그릇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깨끗한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란,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된 사람을 말합니다. 물론 기왕이면 많이 담아지는 큰 그릇이 좋고, 귀한 금그릇이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하고 큰 그릇이라도 씻지 않아 더럽다면 쓸 수가 없습니다. 성결되어 깨끗한 그릇이 되는 만큼 사명 감당할 능력도 더 받을 수 있고, 순종도 더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였고,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ㅇㅣ루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 마귀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이므로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힘과 능력은 죄를 버리고 성결된 만큼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성결되어 영적인 힘이 있는 일꾼들을 항상 찾으십니다.
2. 성결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더딘 이유
성결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이뤄야 할 본분입니다. 특히 직분을 맡은 일꾼이라면 성결에 대한 사모함이 더욱 간절하지요. 그런데 사람마다 나름대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노력한다 했는데 더디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성결되고 싶을 뿐, 낱낱이 자신을 해부하여 죄를 버리는 작업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결되게 해 주세요, 죄 버리게 해 주세요, 선한 마음을 주세요.” 하면서 막연하게 기도한다면 변화가 늦습니다. 어떤 죄가 있고 어떤 악한 마음이 있는지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입술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며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내 안에 육의 속성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싫게 여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비슷한 상황이 와도 절대로 같은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늘 근신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하나하나 버려 나가면 한 달, 두 달 지날수록 모습이 달라집니다. 어떤 경우는 구체적으로 발견한 것에서 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발견해서 버리기로 했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데, 버리는 작업을 어느 정도 하다가 맙니다.
어떤 계기로 모르고 있던 자신의 비진리를 발견한 것도 큰 은혜입니다. 더 나아가 왜 그런 비진리가 자기 안에 심어졌는지 성령께서 과거를 떠올려 주시며 깨닫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깨우침이 올 때나 또 그것을 회개할 때는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마치 그 순간에 다 버리고 변화된 것 같지요.
그러나 한 번 회개했다고 버려진 것은 아닙니다. 잡초를 제거할 때 뿌리를 남겨두면 금방 다시 자랍니다. 죄성도 발견하여 한 번 회개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근본의 죄성까지 뽑아야 하지요. 다 뽑아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자신을 점검하며 기도해 나가야 합니다. 발견되는 것이 너무 많다면 그중에 큰 뿌리부터 먼저 뽑아야 합니다. 큰 뿌리가 뽑힐 때 많은 잔뿌리도 함께 뽑혀나가지요. 자기 안에 가장 크고 버리기 어려운 것 몇 가지만 집중적으로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쉽게 버려나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없으면 점차 신앙이 정체되기 쉽습니다. 늘 준비하려고만 할 뿐, 막상 준비된 자로서 세워질 수 없습니다.
둘째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는 자신에게 어떤 비진리가 있는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진리의 마음을 진리로 포장하여 스스로도 속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의 의와 틀을 깨지 못하므로 자신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잘한 것만 생각하고 잘못한 것은 덮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일꾼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뜨거운 열정으로 어떤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화평을 깨는 일이 생겼지요. 내 고집과 자기주장이 상대에게 부딪힐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이럴 때도 자기 틀과 의가 있으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랬으니까, 내가 화평을 깨려고 한 것이 아니니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화평을 깨지 않으려는 마음이라면, 자기가 더 옳다고 해도 상대의 마음에 맞춰 줍니다. 때론 자신이 손해를 본다 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 해도 상대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요. 더구나 윗사람이 지시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지으라는 명령이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비진리가 아니고 죄가 아니라면” 먼저 상대의 입장을 배려해 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더 옳기 때문에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결국 “화평을 깨도 좋다”는 마음입니다. 또한 내가 너무나 이것이 하고 싶기 때문에 윗사람이 “그러지 말라” 해도 여전히 자기 원하는 대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히려 윗사람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화평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화평을 떠나서 기본적인 질서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변명만 합니다. “내가 화평을 깨려고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정말 화평하고 싶지만 상대에게 맞춰 줄 수는 없다” 합니다.
이는 진실한 태도가 아닙니다. 물론 머리로는 화평을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기 위해서는 화평을 깨도 할 수 없다”라는 마음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혀로만 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나는 화평하려고 했다”고 스스로를 좋게만 생각하므로 신속하게 성결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 8절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성결된 사람을 찾고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고, 불같은 기도를 통해 발견된 모든 비진리의 뿌리까지 뽑아냄으로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준비된 그릇이란 어떤 그릇을 의미할까요?
1. ( )에 맞는 그릇이다. 이는 각 분야에서 쓰임 받기 ( )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2. 주인의 손에 맞는 그릇 곧 ( )하는 그릇이다.
3. 준비된 그릇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 )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의 향 올리기.
● 알고 넘어갑시다!
그릇의 크기와 재질
그릇의 재질은 사람의 중심과 연관되며, 그릇의 크기는 진리에 속한 것을 얼마나 많이 담을 수 있는지와 상관이 있다. 그릇의 크기에 따라 얼마나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지가 정해진다.
그릇은 타고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의 노력으로 변화될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그릇의 재질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일구는 것이 더 수월하므로 믿음의 성장이 빠르다.
그러나 타고난 그릇이 작거나 재질이 좋지 않다 해도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 성결을 이루어 곧 깨끗한 그릇이 되어 주인에게 쓰임 받을 수 있고, 또 마음 씀을 넓히고 그릇을 키워 더 큰 일들을 감당해 갈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아 비진리를 버리고 진리로 채우는 만큼 그릇의 재질도 바뀔 수 있다.
2020-12-11
제50과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누가복음 18:1~8
읽을말씀 : 누가복음 18:1~8 | 외울말씀 : 누가복음 18:1 | 참고 말씀: 마태복음 7:7~8, 갈라디아서 6:9
교육목표 :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낙망치 않고 기도하여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 자녀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어떠한 것인지 배우고 그 요령을 좇아 응답의 열매를 딸 때까지 인내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습관을 좇아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으며 응답이 더뎌도 낙망치 않고 더욱 뜨겁게 간구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어떤 도시에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는데 한 과부가 찾아와 원한을 풀어 달라 하였습니다. 이 재판관은 뇌물을 바랐지만 과부는 너무 가난하여 그것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과부가 자주 찾아가 간청하였더니 얼마 동안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과부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찾아와 간청할 것을 생각하니 의롭지 못한 재판관일지라도 과부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응답의 비결을 깨닫게 하고자 이 비유를 들고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눅 18:7) 말씀하셨습니다. 즉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청원을 들어주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찌 그 자녀들이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어떤 문제에 응답받고자 작정하여 금식하고 철야하며 부르짖어 기도한다면 어찌 신속히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시편 50편 15절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우리 기도에 응답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할까요? 하나님은 분명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셨으니 기도에 응답이 없을 리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있거나, 기도 양이 부족해서, 또는 아직 때가 아니므로 응답이 오지 않은 것뿐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하는 까닭은 인내하며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이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도록 회개의 은혜를 주어 응답받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의 양이 차서 받을 만한 때가 되었을 때에 응답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면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낙망치 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충만함도 잃게 되니 하나님과의 교통이 점점 끊어져 결국 성령이 소멸될 수 있습니다. 마치 자주 대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잘 통하고 마음이 잘 맞는 것처럼, 항상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하나님 뜻을 깨우쳐 그 뜻대로 살게 되니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얻습니다. 또한 기도할 때 원수 마귀 사단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어둠의 세력, 곧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기 때문에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엡 6:12). 그럴 때 하나님 능력과 권세에 힘입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뜻을 좇아 항상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빈 들이나 산, 어디에 계시든지 기도했고 새벽이나 밤중, 어느 때든지 기도하셨습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항상 기도하여 하나님 뜻대로 행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하고 격려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므로 기도 쉬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쉬면 육신의 생각이 틈타고 하나님 뜻을 좇지 못하므로 어려운 문제가 닥치거나 형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멀리하는 요인이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말씀하고,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가 생겼을 때만 기도하지 말고 습관을 좇아 항상 기도함으로써 범사에 형통함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3.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항상 기도하되 낙심치 않으면 때가 이르러 거둡니다. 만약 농부가 씨앗을 심고 조급해하며 땅을 파헤친다거나, 싹이 났어도 정성껏 가꾸며 기다리지 않는다면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 역시 응답받기까지 정성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조국의 장래를 이상 중에 보고 세 이레, 즉 21일 동안 슬퍼하며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첫날 듣고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이 응답을 가져오는 천사를 방해하였으므로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다니엘에게 올 수 있었고 그는 천사가 깨닫게 해 주므로 그때서야 하나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단 10:12~14).
다니엘은 이상을 보고 근심하여 힘이 없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여 마침내 응답받았습니다. 이같이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울 자를 보내 응답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에게 응답을 가져온 천사도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십니까? 다니엘처럼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시는지요? 그는 자기가 본 이상을 깨달으려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여 좋은 떡을 먹지 않고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않으며 기름을 바르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세로 작정하여 기도하니 하나님은 첫날부터 듣고 응답하신 것입니다(단 10:1~12).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기도를 듣고 첫날에 응답하셨으나 그에게 응답이 오기까지는 21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하루 이틀 기도해 보고 응답이 없다며 쉽게 낙심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믿음이 적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기도를 듣고 분명히 응답하시는 분임을 믿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에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는 분이십니다(렘 5:24). 그러므로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만약 응답이 없다고 낙망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므로 응답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믿음이 있다면 현실을 보지 않고 항상 기도하며 결코 낙망치 않을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며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기도에 응답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5장 7~8절에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하신 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믿음과 인내로써 간구하여 항상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기도하지 않으면 ( )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다.
2.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 )을 깨우쳐 그 뜻대로 살 수 있다.
3. 기도할 때 ( )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다.
4. ( ) 않고 기도하면 때가 이르러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29~139페이지까지 읽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인내와 강청하는 기도로 응답받은 사람들
① 야곱 -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하며 간절하게 기도하니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허락하셨다.
② 수로보니게 여인 -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소리 질러 간구했는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녀가 또다시 절하며 간청해도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며 응답하시지 않았다.
그래도 이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 하며 강청하니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칭찬하며 응답을 주셨다.
교육목표 :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낙망치 않고 기도하여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 자녀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어떠한 것인지 배우고 그 요령을 좇아 응답의 열매를 딸 때까지 인내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습관을 좇아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으며 응답이 더뎌도 낙망치 않고 더욱 뜨겁게 간구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어떤 도시에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는데 한 과부가 찾아와 원한을 풀어 달라 하였습니다. 이 재판관은 뇌물을 바랐지만 과부는 너무 가난하여 그것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과부가 자주 찾아가 간청하였더니 얼마 동안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과부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찾아와 간청할 것을 생각하니 의롭지 못한 재판관일지라도 과부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응답의 비결을 깨닫게 하고자 이 비유를 들고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눅 18:7) 말씀하셨습니다. 즉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청원을 들어주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찌 그 자녀들이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어떤 문제에 응답받고자 작정하여 금식하고 철야하며 부르짖어 기도한다면 어찌 신속히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시편 50편 15절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우리 기도에 응답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할까요? 하나님은 분명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셨으니 기도에 응답이 없을 리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있거나, 기도 양이 부족해서, 또는 아직 때가 아니므로 응답이 오지 않은 것뿐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하는 까닭은 인내하며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이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도록 회개의 은혜를 주어 응답받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의 양이 차서 받을 만한 때가 되었을 때에 응답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면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낙망치 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충만함도 잃게 되니 하나님과의 교통이 점점 끊어져 결국 성령이 소멸될 수 있습니다. 마치 자주 대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잘 통하고 마음이 잘 맞는 것처럼, 항상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하나님 뜻을 깨우쳐 그 뜻대로 살게 되니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얻습니다. 또한 기도할 때 원수 마귀 사단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어둠의 세력, 곧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기 때문에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엡 6:12). 그럴 때 하나님 능력과 권세에 힘입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뜻을 좇아 항상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빈 들이나 산, 어디에 계시든지 기도했고 새벽이나 밤중, 어느 때든지 기도하셨습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항상 기도하여 하나님 뜻대로 행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하고 격려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므로 기도 쉬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쉬면 육신의 생각이 틈타고 하나님 뜻을 좇지 못하므로 어려운 문제가 닥치거나 형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멀리하는 요인이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말씀하고,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가 생겼을 때만 기도하지 말고 습관을 좇아 항상 기도함으로써 범사에 형통함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3.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항상 기도하되 낙심치 않으면 때가 이르러 거둡니다. 만약 농부가 씨앗을 심고 조급해하며 땅을 파헤친다거나, 싹이 났어도 정성껏 가꾸며 기다리지 않는다면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 역시 응답받기까지 정성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조국의 장래를 이상 중에 보고 세 이레, 즉 21일 동안 슬퍼하며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첫날 듣고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이 응답을 가져오는 천사를 방해하였으므로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다니엘에게 올 수 있었고 그는 천사가 깨닫게 해 주므로 그때서야 하나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단 10:12~14).
다니엘은 이상을 보고 근심하여 힘이 없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여 마침내 응답받았습니다. 이같이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울 자를 보내 응답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에게 응답을 가져온 천사도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십니까? 다니엘처럼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시는지요? 그는 자기가 본 이상을 깨달으려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여 좋은 떡을 먹지 않고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않으며 기름을 바르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세로 작정하여 기도하니 하나님은 첫날부터 듣고 응답하신 것입니다(단 10:1~12).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기도를 듣고 첫날에 응답하셨으나 그에게 응답이 오기까지는 21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하루 이틀 기도해 보고 응답이 없다며 쉽게 낙심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믿음이 적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기도를 듣고 분명히 응답하시는 분임을 믿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에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는 분이십니다(렘 5:24). 그러므로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만약 응답이 없다고 낙망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므로 응답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믿음이 있다면 현실을 보지 않고 항상 기도하며 결코 낙망치 않을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며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기도에 응답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5장 7~8절에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하신 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믿음과 인내로써 간구하여 항상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기도하지 않으면 ( )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다.
2.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 )을 깨우쳐 그 뜻대로 살 수 있다.
3. 기도할 때 ( )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다.
4. ( ) 않고 기도하면 때가 이르러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29~139페이지까지 읽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인내와 강청하는 기도로 응답받은 사람들
① 야곱 -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하며 간절하게 기도하니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허락하셨다.
② 수로보니게 여인 -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소리 질러 간구했는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녀가 또다시 절하며 간청해도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며 응답하시지 않았다.
그래도 이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 하며 강청하니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칭찬하며 응답을 주셨다.
2020-12-04
제49과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기도 (2)
이사야 58:6~9
읽을말씀 : 이사야 58:6~9 | 외울말씀 : 이사야 58:6 | 참고 말씀: 이사야 58:3~5
교육목표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과 올바른 보호식을 함으로 마음의 소원에 신속히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지난 시간에 이어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금식기도를 기뻐하시는지와, 올바른 보호식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다섯째, 하나님과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만약 집안에 귀신 들린 사람이 있다면 온 가족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금식한 후에 능력자를 청하여 예배드리고 물리치면 즉시 귀신이 나갑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먼저 가족이 우상을 섬긴 것이나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한 것 등 하나님 앞에 담이 되었던 것을 철저히 돌이킨 뒤에 한마음으로 금식해야 합니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금식을 할 때에도 질병에 걸리기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은 이유를 알아서 회개하고 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 외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도 먼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금식해야 합니다. 어떤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담이 된 것이 있다면 먼저 그 문제를 해결하여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그런 뒤에 기도하고 금식할 때라야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버리기 위해 기도할 때에도 자신의 악함을 철저히 통회자복하면서 어떻게든 진리로 변화하려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형제와 걸려 불편함과 미움을 이기지 못하면서 금식을 한다면 이런 것은 회개 금식도 될 수 없습니다. 회개 금식은 자신의 목숨을 드려서라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겸비한 행함인데 마음에 악을 품고 한다는 자체가 이미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먼저 자신의 악함을 철저히 회개하고 온전히 마음의 악을 벗어 버리기 위해 기도해야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임하여 마음에서부터 미움이나 감정을 버릴 수 있습니다.
여섯째, 불같은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을 하니 힘들어서 기도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금식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금식하면서 올려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향입니다. 즉 곡기를 끊고 생명을 다해 드리는 중심의 기도 향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하는 동안에는 할 수 있으면 말씀과 기도에 몰두해야 하며 평소보다 더 많이, 더 불같이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더구나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금식에 들어가기 전에도 충분히 기도를 쌓아 준비할 뿐만 아니라 금식 중에는 하루에 적어도 다섯 시간 이상 부르짖어 불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라면 장기간 곡기를 끊을 때 몸이 상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금식할 때에는 기도를 통해 강건함과 능력을 받습니다. 이때 기도의 내용은 육적인 제목이나 개인적인 소원이 위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또한 교회와 목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지요.
일곱째,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근신해야 합니다.
이사야 58장 3~5절에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금식을 한다면서 오락을 즐기거나 사람들과 다투고 싸우며 해를 가한다면 하나님이 무엇이라 하시겠습니까.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말을 주고받다 보면 무익한 말이나 악한 말이 나오고 농담도 나옵니다. 금식 중에 주변 사람과 다투어 마음이 상하고 혈기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될 수 없습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며,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여 그 은혜를 구하는 지극히 겸비한 행함입니다. 그런 만큼 마음과 뜻과 힘, 정성 다해 하나님 뜻 가운데 행하며 정녕 하나님께서 감동하실 금식을 드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단기 금식을 할 때에는 일상적인 집안 일이나 직장 일을 병행합니다. 온 집에 충성해야 하니 그렇게 하지만 장기 금식일 때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장기 금식하는 동안에는 몸에 무리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세상 것을 접하지 않고 온전히 기도와 말씀에 전력하며 근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근신하고 절제하면서 금식할 뿐 아니라 첫날부터 마치는 날까지 마음에 요동 없이 오직 진리 안에 서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바라고 믿어야 합니다.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입히며 또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않는 금식, 곧 형제에게 선을 행하는 가운데 드리는 금식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사 58:7).
여덟째, 금식이 끝난 후 보호식까지 잘 마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금식을 하면 몸이 상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으로 금식한다 해도 사람이 할 수 있는 도리는 해야 합니다. 금식을 하고 그 날짜만큼 보호식을 할 때 온전한 금식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절제의 능력이 생길 뿐 아니라 몸에 무리가 가지 않고 더욱 강건하며 영이 맑아집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건강하여 소화가 잘되니 굳이 보호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호식을 온전히 할 때 하나님께서는 위가 연약한 사람이라도 튼튼하게 하고 사소한 질병도 그 기간에 치료해 주십니다. 아무리 금식을 잘했어도 보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만큼 기가 빠지거나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보호식 중에는 몸을 무리하게 움직이거나 힘든 일을 피해야 합니다. 혹 금식한 뒤에 시험이 찾아올 수도 있으므로 금식할 때 미리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금식을 기뻐 받으셨을 때에는 보호식도 잘할 수 있도록 주관하십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은 먹지 않도록,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절제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절제하여 아름답게 드리는 보호식까지도 온전한 금식에 포함됩니다.
2. 올바른 보호식을 하려면
보호식을 할 때 과식하면 얼굴이 붓고 위에 부담이 되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보통 하루에 세 번 식사를 하지만 미음이나 죽으로 보호식을 할 때에는 한 컵 정도의 적은 양으로 네 번에 나누어 먹는 것이 좋습니다. 육류, 계란, 빵, 음료수, 기름기가 많은 음식, 매운 것, 짠 것, 단 것, 신 것 등 자극적인 음식이나 화학조미료, 향신료는 피하고 가급적 채식을 하는 것이 좋지요.
3일 금식을 한 뒤에는 처음부터 묽은 죽을 먹어도 되지만 장기 금식을 한 후에는 위장이 아기와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더 주의해야 합니다. 이틀 정도는 거의 물처럼 묽은 미음을 하루에 네 차례 정도 마셔야 하며, 과일은 사과 한쪽 정도 즙을 내서 마시되 하루 네 차례 정도로 그쳐야 합니다. 그리고 3∼4일이 지나면서부터는 미음을 조금씩 진하게 끓여 마시고, 점점 쌀가루나 익은 호박을 넣은 묽은 죽이나 콩나물 죽 등으로 이어 가며 양도 조금씩 늘려 갑니다.
반찬은 육류는 피하고 화학조미료를 넣지 말아야 하며, 굳이 고기를 먹고 싶다면 생선류를 조금 먹되 간은 싱겁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고춧잎이나 들깻잎, 무 잎, 배춧잎과 같은 야채에 멸치를 넣어 끓인 것이 좋고, 특히 들깨를 갈아 껍질을 벗겨 내고 쌀죽에 섞어 끓여 먹으면 기가 빨리 회복되고 건강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절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보호식을 하면 붓지도 않고 피부색도 뽀얗게 살아나며 체중도 신속하게 회복됩니다. 이처럼 금식에 이어 보호식까지 잘 마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금식이 되어 신속한 응답을 체험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과의 ( )을 헐어야 한다.
2. 불같은 ( )가 있어야 한다.
3.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 )해야 한다.
4. 금식이 끝난 후 ( )까지 잘 마쳐야 한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29~13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금식 기도와 보호식
① 금식 기도란, 음식물을 먹지 않으며 기도하는 것,
즉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② 보호식이란, 금식 이후에 일반식을 하기 전까지 음식을 절제하여
섭취하는 식사를 말한다.
금식 기도의 종류
①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기 위한 금식
② 어떤 질병이나 문제가 있어서 이를 해결받기 위한 금식
③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금식
④ 죄악을 신속하게 벗어버리기 위한 금식
⑤ 능력 받아 영광 돌리기 위한 금식
⑥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금식
교육목표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과 올바른 보호식을 함으로 마음의 소원에 신속히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지난 시간에 이어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금식기도를 기뻐하시는지와, 올바른 보호식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다섯째, 하나님과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만약 집안에 귀신 들린 사람이 있다면 온 가족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금식한 후에 능력자를 청하여 예배드리고 물리치면 즉시 귀신이 나갑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먼저 가족이 우상을 섬긴 것이나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한 것 등 하나님 앞에 담이 되었던 것을 철저히 돌이킨 뒤에 한마음으로 금식해야 합니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금식을 할 때에도 질병에 걸리기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은 이유를 알아서 회개하고 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 외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도 먼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금식해야 합니다. 어떤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담이 된 것이 있다면 먼저 그 문제를 해결하여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그런 뒤에 기도하고 금식할 때라야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버리기 위해 기도할 때에도 자신의 악함을 철저히 통회자복하면서 어떻게든 진리로 변화하려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형제와 걸려 불편함과 미움을 이기지 못하면서 금식을 한다면 이런 것은 회개 금식도 될 수 없습니다. 회개 금식은 자신의 목숨을 드려서라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겸비한 행함인데 마음에 악을 품고 한다는 자체가 이미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먼저 자신의 악함을 철저히 회개하고 온전히 마음의 악을 벗어 버리기 위해 기도해야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임하여 마음에서부터 미움이나 감정을 버릴 수 있습니다.
여섯째, 불같은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을 하니 힘들어서 기도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금식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금식하면서 올려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향입니다. 즉 곡기를 끊고 생명을 다해 드리는 중심의 기도 향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하는 동안에는 할 수 있으면 말씀과 기도에 몰두해야 하며 평소보다 더 많이, 더 불같이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더구나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금식에 들어가기 전에도 충분히 기도를 쌓아 준비할 뿐만 아니라 금식 중에는 하루에 적어도 다섯 시간 이상 부르짖어 불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라면 장기간 곡기를 끊을 때 몸이 상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금식할 때에는 기도를 통해 강건함과 능력을 받습니다. 이때 기도의 내용은 육적인 제목이나 개인적인 소원이 위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또한 교회와 목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지요.
일곱째,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근신해야 합니다.
이사야 58장 3~5절에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금식을 한다면서 오락을 즐기거나 사람들과 다투고 싸우며 해를 가한다면 하나님이 무엇이라 하시겠습니까.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말을 주고받다 보면 무익한 말이나 악한 말이 나오고 농담도 나옵니다. 금식 중에 주변 사람과 다투어 마음이 상하고 혈기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될 수 없습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며,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여 그 은혜를 구하는 지극히 겸비한 행함입니다. 그런 만큼 마음과 뜻과 힘, 정성 다해 하나님 뜻 가운데 행하며 정녕 하나님께서 감동하실 금식을 드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단기 금식을 할 때에는 일상적인 집안 일이나 직장 일을 병행합니다. 온 집에 충성해야 하니 그렇게 하지만 장기 금식일 때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장기 금식하는 동안에는 몸에 무리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세상 것을 접하지 않고 온전히 기도와 말씀에 전력하며 근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근신하고 절제하면서 금식할 뿐 아니라 첫날부터 마치는 날까지 마음에 요동 없이 오직 진리 안에 서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바라고 믿어야 합니다.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입히며 또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않는 금식, 곧 형제에게 선을 행하는 가운데 드리는 금식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사 58:7).
여덟째, 금식이 끝난 후 보호식까지 잘 마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금식을 하면 몸이 상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으로 금식한다 해도 사람이 할 수 있는 도리는 해야 합니다. 금식을 하고 그 날짜만큼 보호식을 할 때 온전한 금식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절제의 능력이 생길 뿐 아니라 몸에 무리가 가지 않고 더욱 강건하며 영이 맑아집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건강하여 소화가 잘되니 굳이 보호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호식을 온전히 할 때 하나님께서는 위가 연약한 사람이라도 튼튼하게 하고 사소한 질병도 그 기간에 치료해 주십니다. 아무리 금식을 잘했어도 보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만큼 기가 빠지거나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보호식 중에는 몸을 무리하게 움직이거나 힘든 일을 피해야 합니다. 혹 금식한 뒤에 시험이 찾아올 수도 있으므로 금식할 때 미리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금식을 기뻐 받으셨을 때에는 보호식도 잘할 수 있도록 주관하십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은 먹지 않도록,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절제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절제하여 아름답게 드리는 보호식까지도 온전한 금식에 포함됩니다.
2. 올바른 보호식을 하려면
보호식을 할 때 과식하면 얼굴이 붓고 위에 부담이 되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보통 하루에 세 번 식사를 하지만 미음이나 죽으로 보호식을 할 때에는 한 컵 정도의 적은 양으로 네 번에 나누어 먹는 것이 좋습니다. 육류, 계란, 빵, 음료수, 기름기가 많은 음식, 매운 것, 짠 것, 단 것, 신 것 등 자극적인 음식이나 화학조미료, 향신료는 피하고 가급적 채식을 하는 것이 좋지요.
3일 금식을 한 뒤에는 처음부터 묽은 죽을 먹어도 되지만 장기 금식을 한 후에는 위장이 아기와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더 주의해야 합니다. 이틀 정도는 거의 물처럼 묽은 미음을 하루에 네 차례 정도 마셔야 하며, 과일은 사과 한쪽 정도 즙을 내서 마시되 하루 네 차례 정도로 그쳐야 합니다. 그리고 3∼4일이 지나면서부터는 미음을 조금씩 진하게 끓여 마시고, 점점 쌀가루나 익은 호박을 넣은 묽은 죽이나 콩나물 죽 등으로 이어 가며 양도 조금씩 늘려 갑니다.
반찬은 육류는 피하고 화학조미료를 넣지 말아야 하며, 굳이 고기를 먹고 싶다면 생선류를 조금 먹되 간은 싱겁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고춧잎이나 들깻잎, 무 잎, 배춧잎과 같은 야채에 멸치를 넣어 끓인 것이 좋고, 특히 들깨를 갈아 껍질을 벗겨 내고 쌀죽에 섞어 끓여 먹으면 기가 빨리 회복되고 건강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절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보호식을 하면 붓지도 않고 피부색도 뽀얗게 살아나며 체중도 신속하게 회복됩니다. 이처럼 금식에 이어 보호식까지 잘 마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금식이 되어 신속한 응답을 체험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과의 ( )을 헐어야 한다.
2. 불같은 ( )가 있어야 한다.
3.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 )해야 한다.
4. 금식이 끝난 후 ( )까지 잘 마쳐야 한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29~13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금식 기도와 보호식
① 금식 기도란, 음식물을 먹지 않으며 기도하는 것,
즉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② 보호식이란, 금식 이후에 일반식을 하기 전까지 음식을 절제하여
섭취하는 식사를 말한다.
금식 기도의 종류
①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기 위한 금식
② 어떤 질병이나 문제가 있어서 이를 해결받기 위한 금식
③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금식
④ 죄악을 신속하게 벗어버리기 위한 금식
⑤ 능력 받아 영광 돌리기 위한 금식
⑥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금식
2020-11-27
제48과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기도 (1)
이사야 58:6~9
읽을말씀 : 이사야 58:6~9 | 외울말씀 : 이사야 58:6 | 참고 말씀: 야고보서 4:2~3, 고린도전서 14:1
교육목표 : 금식의 위력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금식기도를 함으로 마음의 소원에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 작정하여 기도하거나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금식한다 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 금식을 하고도 응답이 없고 여전히 문제가 있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금식을 했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금식기도를 기뻐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금식기도의 위력
성경을 보면 금식기도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길을 예비하였고, 모세의 40일 금식은 십계명을 받아 내리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에스더는 3일간의 금식기도를 통해 민족 전체가 멸망할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고 오히려 대적을 멸함으로써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습니다. 그 밖에도 죄를 범하여 멸망할 위기에서 금식을 통해 용서받기도 하는 등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인 만큼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 더 신속하게 응답을 이끌어낼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약속하셨는데 곡기를 끊으면서까지 간절히 구하는 자녀의 기도에 어찌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따라서 질병 치료를 위해 금식했다면 반드시 치료의 응답이 와야 하고, 시험 환난 때문에 금식했다면 그것이 물러가야 합니다. 축복이나 권능을 놓고 금식했다면 축복이 임하고 권능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하지요.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첫째, 금식하는 기간이 목적에 맞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40일, 21일, 3일 금식 등이 나오는데 그에 합당한 금식의 제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40일 금식은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며, 개인의 유익이나 사업터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경우, 구세주로서 큰 사명을 이루기 위해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또한 모세가 한 금식은 하나님 백성을 위해 십계명을 받아 내리는 큰 사명을 위한 것이었지요.
에스더의 경우, 자기 민족이 멸절될 위기에 처했으니 장기 금식을 해야 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민족과 더불어 단 3일을 금식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응답받을 문제가 있을 때에도 그저 불같이 기도하는 것만으로 족한 경우가 있고, 3일만 금식하거나 길어야 7일 정도면 족함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하기 위해 금식을 할 때에도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회개하여 돌이키면 족한 경우가 있고 금식을 해서라도 자신을 복종시켜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기도를 쉬었다 해서 10일이나 21일을 회개 금식 한다면 합당치 않습니다. 앞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면 되지 장기 금식을 할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일을 행한 경우라면 먼저 철저히 통회자복을 한 뒤에 회개 금식을 해야 합니다(갈 5:19~21).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로 인한 담이 가로막고 있으면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에 여전히 죄를 품고 금식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3일을 금식해도 회개하여 완전히 돌이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나 21일 금식을 해도 돌이키려는 마음 없이 금식만 했다면 받지 않으십니다.
둘째, 금식하는 시기도 중요합니다.
특히 장기 금식은 반드시 성령이 주관하시는 때를 좇아서 해야 합니다. 주의 종이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일을 이루고자 권능을 사모하는 사람 중에는 장기 금식을 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에 따라 구하거나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아무리 40일, 그 이상을 드린다 해도 권능을 끌어내릴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을 보면 은사를 구할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가운데서 구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하물며 권능을 받으려면 합당한 그릇을 준비한 다음에 구해야 합니다. 마음에 악이 없도록 성결한 다음에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때를 좇아서 장기 금식을 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 깨끗한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뜨거움과 열심으로 금식을 작정한 것이라면 공의의 법칙에 맞지 않으므로 응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에 사모함이 있다 해도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그릇을 준비하는 기도와 금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릇이 준비되었을 때에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대로 순종하여 금식하면 응답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셋째,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반드시 질서를 좇아야 합니다.
장기 금식은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니 목적과 기간, 그리고 시기가 과연 하나님 앞에 합당한지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받아서 정한 것이라면 목자도 동일한 주관을 받을 것이니 기꺼이 금식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이며, 그럴 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 속에서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금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와 상담해야 하고 또한 교회 측에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장기 금식 기간에는 말씀과 기도에 몰두해야 하므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양 떼를 관리하는 하나님의 종이 교회 측에 상의도 없이 임의로 장기 금식을 결정해 버린다면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이지요.
우리가 하나님 일을 한다 해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육의 질서를 좇아 행해야 합니다. 몸도 쉬어야 할 때에는 쉬고 과식이나 폭식 등을 삼가야 하듯이 금식도 절제 없이 무리하게 할 때에는 몸을 상하게 하므로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장기 금식의 경우, 마음에 주관이 왔다 해도 먼저 건강을 잘 관리하여 충분히 준비된 상황에서, 또 영적으로도 기도를 잘 쌓은 기반 위에서 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금식은 육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곡기를 끊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더구나 장기 금식은 실제로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반드시 성령의 주관 가운데 해야 하며, 또 성령의 주관을 받았다 해도 신중히, 하나님 앞에 준비된 자세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영육 간에 합당한 질서를 좇아서 드릴 때라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온전한 금식이 됩니다.
넷째, 진리에 합당한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2~3절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했으니, 비진리의 마음으로 금식한다면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물질의 축복을 구할 때에도 믿음이 아니라 욕심으로 구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금식해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질의 축복 분야도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에 따라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심을 때에 응답받는 것입니다. 또 크게 심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먼저 영적 축복을 주기 원하므로 때를 기다리시지요.
영적으로 여러 은사를 구한다 해도 먼저 마음에 깨끗한 그릇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영안이 열리기 위해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의 세계를 사모하며 마음을 정결케 하고 기도해야지, 마음의 할례는 하지 않으면서 욕심으로 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능력을 받기 위해 금식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중심으로 불같이 기도하며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는 오히려 해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금식으로 인해 몸이 상하기도 하고 오히려 금식 후에 교만해져서 사단의 역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식기도 할 때에는 먼저 자신의 욕심으로 구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목으로 금식하며 바른 마음으로 구하는 것인지를 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금식하는 기간이 ( )에 맞아야 한다.
2. 금식하는 ( )도 중요하다.
3.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반드시 ( )를 좇아야 한다.
4. 금식 기도는 ( )에 합당한 목적으로 해야 한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17~12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에스더의 금식 기도’
바사 제국의 왕후였던 에스더는 하만이 유다 민족을 멸절시키려 하는 위기 앞에서 잠잠히 있으면 평안할 수 있음에도, 살아도 죽어도 자기 민족과 함께하리라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3일을 금식하고 담대히 왕에게 나아갔다(에 5장).
당시 바사 제국의 법에 따르면, 누구든지 왕이 부르기 전에 그 앞에 나아가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왕이 그를 위해 금홀을 내밀면 살 수 있었다.
에스더가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걸고 금식기도를 하니,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멸절의 위기에서 구하시고 원수들을 심판하시는 대반전의 역사가 일어났다.
교육목표 : 금식의 위력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금식기도를 함으로 마음의 소원에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 작정하여 기도하거나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금식한다 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 금식을 하고도 응답이 없고 여전히 문제가 있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금식을 했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금식기도를 기뻐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금식기도의 위력
성경을 보면 금식기도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길을 예비하였고, 모세의 40일 금식은 십계명을 받아 내리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에스더는 3일간의 금식기도를 통해 민족 전체가 멸망할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고 오히려 대적을 멸함으로써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습니다. 그 밖에도 죄를 범하여 멸망할 위기에서 금식을 통해 용서받기도 하는 등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인 만큼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 더 신속하게 응답을 이끌어낼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약속하셨는데 곡기를 끊으면서까지 간절히 구하는 자녀의 기도에 어찌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따라서 질병 치료를 위해 금식했다면 반드시 치료의 응답이 와야 하고, 시험 환난 때문에 금식했다면 그것이 물러가야 합니다. 축복이나 권능을 놓고 금식했다면 축복이 임하고 권능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하지요.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첫째, 금식하는 기간이 목적에 맞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40일, 21일, 3일 금식 등이 나오는데 그에 합당한 금식의 제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40일 금식은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며, 개인의 유익이나 사업터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경우, 구세주로서 큰 사명을 이루기 위해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또한 모세가 한 금식은 하나님 백성을 위해 십계명을 받아 내리는 큰 사명을 위한 것이었지요.
에스더의 경우, 자기 민족이 멸절될 위기에 처했으니 장기 금식을 해야 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민족과 더불어 단 3일을 금식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응답받을 문제가 있을 때에도 그저 불같이 기도하는 것만으로 족한 경우가 있고, 3일만 금식하거나 길어야 7일 정도면 족함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하기 위해 금식을 할 때에도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회개하여 돌이키면 족한 경우가 있고 금식을 해서라도 자신을 복종시켜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기도를 쉬었다 해서 10일이나 21일을 회개 금식 한다면 합당치 않습니다. 앞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면 되지 장기 금식을 할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일을 행한 경우라면 먼저 철저히 통회자복을 한 뒤에 회개 금식을 해야 합니다(갈 5:19~21).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로 인한 담이 가로막고 있으면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에 여전히 죄를 품고 금식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3일을 금식해도 회개하여 완전히 돌이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나 21일 금식을 해도 돌이키려는 마음 없이 금식만 했다면 받지 않으십니다.
둘째, 금식하는 시기도 중요합니다.
특히 장기 금식은 반드시 성령이 주관하시는 때를 좇아서 해야 합니다. 주의 종이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일을 이루고자 권능을 사모하는 사람 중에는 장기 금식을 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에 따라 구하거나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아무리 40일, 그 이상을 드린다 해도 권능을 끌어내릴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을 보면 은사를 구할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가운데서 구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하물며 권능을 받으려면 합당한 그릇을 준비한 다음에 구해야 합니다. 마음에 악이 없도록 성결한 다음에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때를 좇아서 장기 금식을 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 깨끗한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뜨거움과 열심으로 금식을 작정한 것이라면 공의의 법칙에 맞지 않으므로 응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에 사모함이 있다 해도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그릇을 준비하는 기도와 금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릇이 준비되었을 때에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대로 순종하여 금식하면 응답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셋째,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반드시 질서를 좇아야 합니다.
장기 금식은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니 목적과 기간, 그리고 시기가 과연 하나님 앞에 합당한지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받아서 정한 것이라면 목자도 동일한 주관을 받을 것이니 기꺼이 금식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이며, 그럴 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 속에서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금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와 상담해야 하고 또한 교회 측에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장기 금식 기간에는 말씀과 기도에 몰두해야 하므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양 떼를 관리하는 하나님의 종이 교회 측에 상의도 없이 임의로 장기 금식을 결정해 버린다면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이지요.
우리가 하나님 일을 한다 해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육의 질서를 좇아 행해야 합니다. 몸도 쉬어야 할 때에는 쉬고 과식이나 폭식 등을 삼가야 하듯이 금식도 절제 없이 무리하게 할 때에는 몸을 상하게 하므로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장기 금식의 경우, 마음에 주관이 왔다 해도 먼저 건강을 잘 관리하여 충분히 준비된 상황에서, 또 영적으로도 기도를 잘 쌓은 기반 위에서 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금식은 육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곡기를 끊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더구나 장기 금식은 실제로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반드시 성령의 주관 가운데 해야 하며, 또 성령의 주관을 받았다 해도 신중히, 하나님 앞에 준비된 자세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영육 간에 합당한 질서를 좇아서 드릴 때라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온전한 금식이 됩니다.
넷째, 진리에 합당한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2~3절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했으니, 비진리의 마음으로 금식한다면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물질의 축복을 구할 때에도 믿음이 아니라 욕심으로 구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금식해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질의 축복 분야도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에 따라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심을 때에 응답받는 것입니다. 또 크게 심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먼저 영적 축복을 주기 원하므로 때를 기다리시지요.
영적으로 여러 은사를 구한다 해도 먼저 마음에 깨끗한 그릇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영안이 열리기 위해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의 세계를 사모하며 마음을 정결케 하고 기도해야지, 마음의 할례는 하지 않으면서 욕심으로 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능력을 받기 위해 금식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중심으로 불같이 기도하며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는 오히려 해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금식으로 인해 몸이 상하기도 하고 오히려 금식 후에 교만해져서 사단의 역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식기도 할 때에는 먼저 자신의 욕심으로 구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목으로 금식하며 바른 마음으로 구하는 것인지를 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금식하는 기간이 ( )에 맞아야 한다.
2. 금식하는 ( )도 중요하다.
3.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반드시 ( )를 좇아야 한다.
4. 금식 기도는 ( )에 합당한 목적으로 해야 한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17~12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에스더의 금식 기도’
바사 제국의 왕후였던 에스더는 하만이 유다 민족을 멸절시키려 하는 위기 앞에서 잠잠히 있으면 평안할 수 있음에도, 살아도 죽어도 자기 민족과 함께하리라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3일을 금식하고 담대히 왕에게 나아갔다(에 5장).
당시 바사 제국의 법에 따르면, 누구든지 왕이 부르기 전에 그 앞에 나아가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왕이 그를 위해 금홀을 내밀면 살 수 있었다.
에스더가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걸고 금식기도를 하니,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멸절의 위기에서 구하시고 원수들을 심판하시는 대반전의 역사가 일어났다.
2020-11-20
제47과합심기도의 위력
마태복음 18:19~20
읽을말씀 : 마태복음 18:19~20 | 외울말씀 : 마태복음 18:19 | 참고 말씀: 사도행전 12:5
교육목표 : 성령과 한마음이 되어 기도함으로 합심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합심기도의 영적 의미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이란 꼭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각 사람이 기도할 때에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지요(유 1:20).
그렇다면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며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과 뜻을 가지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진리를 행하면 기뻐하며 죄 가운데 행하면 애통해하시는 등 독립적인 인성을 가지셨지요. 이러한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성령의 마음이 하나 되어, 곧 두 마음이 합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합심기도를 드릴 때라야 주님이 우리 기도에 함께하시며 신속히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능력의 기도를 하려면 성령의 마음을 알아서 성령이 원하시는 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영으로 변화되는 만큼, 곧 세상에서 입력된 비진리와 죄악이 없어진 만큼 성령께서 우리를 밝히 주관하고 음성을 들려 줌으로써 그 뜻을 알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아 순종해 나갈 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입으며 우리 마음과 성령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할 때에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거나 욕심을 따라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소원에 따라, 또 하나님 방법대로 이룰 수 있도록 진리로 기도하지요. 이렇게 기도할 때에 이것이 영적 의미의 합심기도이며, 그 기도의 위력과 역사하는 힘이 큰 것입니다.
2. 합심기도 방법
하나님께서 합심기도를 기뻐하고 속히 응답하며 크게 역사하시는 까닭은 한마음이 되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내가 한마음이 되어 기도한다면 엘리야처럼 불의 응답을 받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마음껏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어떤 일을 계획하고 의논할 때에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고 의견이 분분하다면 그 일은 이미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혼자든 둘이든 또는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과 마음이 하나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응답받는 데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러니 합심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과 충만을 받아 기도해야 합니다(엡 6:18).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지녔으므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고전 2:10) 하나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는 분입니다(롬 8:27). 그러므로 성령께서 마음을 주관하는 대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고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였거나 꾸준한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을 기도하고자 해도 억지로 생각을 짜내며 힘들어하고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생각 속에서 임의대로 하는 기도는 생각의 기도, 혼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면 성령의 충만함도 없고, 쉽게 잡념이 틈타거나 피곤해져 졸음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기도할 수 없고, 중언부언하며 기도 후에는 자신이 무슨 기도를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여전히 혼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불평하거나 낙망하는 까닭은 혼의 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외면한다는 것은 아니며, 듣고 계시지만 응답하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성령의 감동함을 받지 못하니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의 기도라도 열심히 부르짖을 때 기도 문이 열리고, 능력을 받아 영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예 기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혼의 기도라도 하나님이 듣고 계시며, 때가 되어 기도 문이 열리면 성령과 연합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하게 되고 예전에 쌓아놓은 것까지 모두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성령을 받은 무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주님은 각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여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고 한마음으로 연합하도록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가 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하여도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지요.
그러나 각 사람이 마음을 모으지 않는다면 목표를 정해 놓고 한다 해도 중심을 다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할 때에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면 사회자는 찬송을 충만히 부르게 하고 회개케 하여 성령으로 하나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하나 되어 기도하면 성령이 충만하고 마음에 기쁨이 임하며 응답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영으로 기도하면 조금도 피곤치 않고 졸음이나 잡념도 틈타지 못하며 믿음과 기쁨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가 주님이 함께하시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3. 합심기도의 위력
헤롯(헤롯 아그립바 1세)의 기독교 박해로 열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야고보가 칼에 목을 베이고 베드로는 옥에 갇혔을 때의 일입니다.
사도행전 12장 5절에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이 베드로를 위해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구출하셨습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잡아내려 하던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서 쇠사슬에 매여 잠들었고 파수꾼들은 문 밖에서 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를 얽어 맨 쇠사슬이 벗겨지고 굳게 잠긴 쇠문이 저절로 열려 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행 12:1~10).
베드로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 이를 때까지 그곳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이 기적의 역사는 합심기도의 위력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옥에 갇힌 사도 베드로를 위해 교회가 한 일은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한 것뿐이었습니다.
이처럼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성도들에게 아픔이 있을 때에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줄 믿고 마음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합심기도를 기쁘게 받고 응답하십니다. 더욱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합심으로 기도할 때에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물론 기도하는 사람의 수만 많다고 해서 합심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 같은 성령의 주관을 받으며 동일한 목적을 갖고 열심으로 기도에 동참해야 합니다. 한자리에 모여 있어도 중언부언하고 잡념과 졸음 속에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없지요. 합심기도란 말 그대로 마음을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모으기 위한 구심점은 바로 성령이며, 모든 사람이 성령의 주관에 따라 하나 되어 기도할 때라야 참된 합심기도가 됩니다.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성령 충만함으로써 영의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체험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받고 마음껏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는 곳에 힘써 함께하여 합심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며 기도의 능력을 받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귀한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 )의 마음이 하나 되어, 곧 두 마음이 합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성령을 받은 무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 )은 각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여 ( )으로 하나 되게 하고 한마음으로 연합하도록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가 되도록 하신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105~12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합심기도의 위력’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을 비롯하여 120명이 합심하여 기도에 힘썼는데, 오순절날 모두가 성령을 받고 불같은 성령의 역사를 받아 각 나라 말로 방언을 하였다(행 2:1~4).
또한 이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제자의 수가 삼천 명이나 되었으며(행 2:41) 사도들을 통해 갖가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 믿는 자의 수가 점점 더해졌고 성도들 삶이 변화되었다(행 2:43~47).
이같이 합심기도를 통해 말씀을 전하는 능력이 임하고, 눈먼 사람이나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고 갖가지 질병을 치료하며, 귀신을 내쫓음으로써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교육목표 : 성령과 한마음이 되어 기도함으로 합심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합심기도의 영적 의미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이란 꼭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각 사람이 기도할 때에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지요(유 1:20).
그렇다면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며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과 뜻을 가지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진리를 행하면 기뻐하며 죄 가운데 행하면 애통해하시는 등 독립적인 인성을 가지셨지요. 이러한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성령의 마음이 하나 되어, 곧 두 마음이 합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합심기도를 드릴 때라야 주님이 우리 기도에 함께하시며 신속히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능력의 기도를 하려면 성령의 마음을 알아서 성령이 원하시는 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영으로 변화되는 만큼, 곧 세상에서 입력된 비진리와 죄악이 없어진 만큼 성령께서 우리를 밝히 주관하고 음성을 들려 줌으로써 그 뜻을 알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아 순종해 나갈 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입으며 우리 마음과 성령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할 때에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거나 욕심을 따라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소원에 따라, 또 하나님 방법대로 이룰 수 있도록 진리로 기도하지요. 이렇게 기도할 때에 이것이 영적 의미의 합심기도이며, 그 기도의 위력과 역사하는 힘이 큰 것입니다.
2. 합심기도 방법
하나님께서 합심기도를 기뻐하고 속히 응답하며 크게 역사하시는 까닭은 한마음이 되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내가 한마음이 되어 기도한다면 엘리야처럼 불의 응답을 받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마음껏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어떤 일을 계획하고 의논할 때에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고 의견이 분분하다면 그 일은 이미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혼자든 둘이든 또는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과 마음이 하나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응답받는 데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러니 합심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과 충만을 받아 기도해야 합니다(엡 6:18).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지녔으므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고전 2:10) 하나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는 분입니다(롬 8:27). 그러므로 성령께서 마음을 주관하는 대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고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였거나 꾸준한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을 기도하고자 해도 억지로 생각을 짜내며 힘들어하고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생각 속에서 임의대로 하는 기도는 생각의 기도, 혼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면 성령의 충만함도 없고, 쉽게 잡념이 틈타거나 피곤해져 졸음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기도할 수 없고, 중언부언하며 기도 후에는 자신이 무슨 기도를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여전히 혼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불평하거나 낙망하는 까닭은 혼의 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외면한다는 것은 아니며, 듣고 계시지만 응답하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성령의 감동함을 받지 못하니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의 기도라도 열심히 부르짖을 때 기도 문이 열리고, 능력을 받아 영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예 기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혼의 기도라도 하나님이 듣고 계시며, 때가 되어 기도 문이 열리면 성령과 연합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하게 되고 예전에 쌓아놓은 것까지 모두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성령을 받은 무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주님은 각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여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고 한마음으로 연합하도록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가 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하여도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지요.
그러나 각 사람이 마음을 모으지 않는다면 목표를 정해 놓고 한다 해도 중심을 다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할 때에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면 사회자는 찬송을 충만히 부르게 하고 회개케 하여 성령으로 하나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하나 되어 기도하면 성령이 충만하고 마음에 기쁨이 임하며 응답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영으로 기도하면 조금도 피곤치 않고 졸음이나 잡념도 틈타지 못하며 믿음과 기쁨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가 주님이 함께하시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3. 합심기도의 위력
헤롯(헤롯 아그립바 1세)의 기독교 박해로 열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야고보가 칼에 목을 베이고 베드로는 옥에 갇혔을 때의 일입니다.
사도행전 12장 5절에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이 베드로를 위해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구출하셨습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잡아내려 하던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서 쇠사슬에 매여 잠들었고 파수꾼들은 문 밖에서 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를 얽어 맨 쇠사슬이 벗겨지고 굳게 잠긴 쇠문이 저절로 열려 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행 12:1~10).
베드로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 이를 때까지 그곳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이 기적의 역사는 합심기도의 위력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옥에 갇힌 사도 베드로를 위해 교회가 한 일은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한 것뿐이었습니다.
이처럼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성도들에게 아픔이 있을 때에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줄 믿고 마음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합심기도를 기쁘게 받고 응답하십니다. 더욱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합심으로 기도할 때에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물론 기도하는 사람의 수만 많다고 해서 합심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 같은 성령의 주관을 받으며 동일한 목적을 갖고 열심으로 기도에 동참해야 합니다. 한자리에 모여 있어도 중언부언하고 잡념과 졸음 속에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없지요. 합심기도란 말 그대로 마음을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모으기 위한 구심점은 바로 성령이며, 모든 사람이 성령의 주관에 따라 하나 되어 기도할 때라야 참된 합심기도가 됩니다.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성령 충만함으로써 영의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체험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받고 마음껏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는 곳에 힘써 함께하여 합심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며 기도의 능력을 받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귀한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 )의 마음이 하나 되어, 곧 두 마음이 합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성령을 받은 무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 )은 각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여 ( )으로 하나 되게 하고 한마음으로 연합하도록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가 되도록 하신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105~12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합심기도의 위력’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을 비롯하여 120명이 합심하여 기도에 힘썼는데, 오순절날 모두가 성령을 받고 불같은 성령의 역사를 받아 각 나라 말로 방언을 하였다(행 2:1~4).
또한 이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제자의 수가 삼천 명이나 되었으며(행 2:41) 사도들을 통해 갖가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 믿는 자의 수가 점점 더해졌고 성도들 삶이 변화되었다(행 2:43~47).
이같이 합심기도를 통해 말씀을 전하는 능력이 임하고, 눈먼 사람이나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고 갖가지 질병을 치료하며, 귀신을 내쫓음으로써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다.
2020-11-13
제46과하나님께 감사
출애굽기 23:16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6 | 외울말씀 : 시편 17:8 | 참고 말씀: 레위기 23:42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알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스럽고 하나님께도 큰 기쁨이 될까요?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겠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스라엘의 절기 중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지요.
수장절은 원래 곡식을 자라게 하시고 추수하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수확한 곡식을 저장한 후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성경에는 수장절을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레위기 23장 3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 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지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3절에는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감동적인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오늘날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의 개척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마침내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도착한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지낸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무엇에 감사해야 할까요?
먼저, 이 세상의 수많은 질병, 사고, 재앙으로부터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질병이 있는데 그중에는 의학으로 완치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합니다.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지요. 정신적인 병, 마음의 병도 심각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살로 이어지는 우울증을 앓고 알코올, 마약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와 명예, 권세도 있고,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도 자살하기도 하지요.
이 외에도 우리가 모르는 병,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병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처럼 질병 많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늘 지켜 주셨습니다.
여 성도 한 분은 ‘양수과소증’으로 도저히 살릴 길 없었던 태아를 기도를 받고 무사히 출산했습니다. 양수가 거의 없는 태반 속에서 그 연약한 생명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남았지요. 또 한 분은 급성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진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병원에 누워서 수술을 기다리던 중 통회자복을 한 후 기도를 받았는데 수술을 받지 않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으면 만나 주십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각종 재앙과 사고로부터도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지구는 대지진과 가뭄과 산불, 태풍, 폭우, 폭설 등 자연재해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지켜 주십니다. 혹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철저히 돌이키고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면 해결됩니다.
다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원한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소망이 온전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십니다.
전 세계 수많은 성도들이 『천국』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해졌습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저도 새 예루살렘 성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한 대로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까지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찬양이 있습니다.
“진주문 지나 새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지난 일들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네” 이 찬양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런 은혜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알곡처럼 우리의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 주시며 의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더욱 사랑함으로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장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질병, 사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지킴 받으며 살 수 있을까요?
●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맞아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 다해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진주문’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두 개의 문이 있다. 문마다 큰 천사가 지키고 있어 성의 위엄과 권세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한참을 올려다볼 정도로 큰 아치형의 문 전체가 하나의 영롱한 진주로 되어 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며 황금보석 손잡이가 달려 있으나 굳이 손으로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린다.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려면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 내기까지 고통을 인내한 것처럼 믿음의 연단을 잘 통과하여 승리했을 때 들어갈 수 있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알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스럽고 하나님께도 큰 기쁨이 될까요?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겠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스라엘의 절기 중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지요.
수장절은 원래 곡식을 자라게 하시고 추수하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수확한 곡식을 저장한 후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성경에는 수장절을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레위기 23장 3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 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지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3절에는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감동적인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오늘날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의 개척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마침내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도착한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지낸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무엇에 감사해야 할까요?
먼저, 이 세상의 수많은 질병, 사고, 재앙으로부터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질병이 있는데 그중에는 의학으로 완치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합니다.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지요. 정신적인 병, 마음의 병도 심각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살로 이어지는 우울증을 앓고 알코올, 마약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와 명예, 권세도 있고,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도 자살하기도 하지요.
이 외에도 우리가 모르는 병,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병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처럼 질병 많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늘 지켜 주셨습니다.
여 성도 한 분은 ‘양수과소증’으로 도저히 살릴 길 없었던 태아를 기도를 받고 무사히 출산했습니다. 양수가 거의 없는 태반 속에서 그 연약한 생명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남았지요. 또 한 분은 급성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진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병원에 누워서 수술을 기다리던 중 통회자복을 한 후 기도를 받았는데 수술을 받지 않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으면 만나 주십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각종 재앙과 사고로부터도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지구는 대지진과 가뭄과 산불, 태풍, 폭우, 폭설 등 자연재해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지켜 주십니다. 혹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철저히 돌이키고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면 해결됩니다.
다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원한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소망이 온전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십니다.
전 세계 수많은 성도들이 『천국』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해졌습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저도 새 예루살렘 성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한 대로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까지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찬양이 있습니다.
“진주문 지나 새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지난 일들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네” 이 찬양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런 은혜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알곡처럼 우리의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 주시며 의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더욱 사랑함으로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장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질병, 사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지킴 받으며 살 수 있을까요?
●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맞아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 다해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진주문’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두 개의 문이 있다. 문마다 큰 천사가 지키고 있어 성의 위엄과 권세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한참을 올려다볼 정도로 큰 아치형의 문 전체가 하나의 영롱한 진주로 되어 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며 황금보석 손잡이가 달려 있으나 굳이 손으로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린다.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려면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 내기까지 고통을 인내한 것처럼 믿음의 연단을 잘 통과하여 승리했을 때 들어갈 수 있다.
2020-11-06
제45과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야고보서 5:16~18
읽을말씀 : 야고보서 5:16~18 | 외울말씀 : 야고보서 5:14 | 참고 말씀: 히브리서 11:1
교육목표 : 주님을 닮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의인이 되어 신속히 응답받으며 형통한 삶을 누리게 한다.
1. 병든 자를 일으키는 믿음의 기도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고난 중에 눈물로 기도한 적이 있는가 하면 응답을 받아 즐거워하며 찬송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약 5:13). 또한 병든 사람을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거나(약 5:14)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믿음의 기도를 통해 응답받아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린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했습니다. 믿음은 크게 육적 믿음과 영적 믿음으로 분류된다 했는데 육적 믿음은 내 생각과 이론에 맞아야 믿는 것이므로 삶에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반면 영적 믿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이론에 맞지 않아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니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음과 기사와 표적을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했고,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하셨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영적 믿음을 소유하여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여야 합니다. 즉 자신이 아는 것을 옳다 여기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모든 생각과 이론은 다 깨뜨리고 진리를 좇아 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비진리를 벗어 버리는 만큼 영혼이 잘되고 영적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도 분량이 있어 사람마다 다릅니다(롬 12:3). 처음에 전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을 때에는 겨자씨만 한 작은 믿음이지만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행해 나가면 영적 믿음이 성장합니다. 영적 믿음이 커지는 만큼 표적도 따릅니다(막 16:17). 병든 자를 일으키는 기도는 이러한 영적 믿음의 기도여야 합니다. 중풍으로 고생하는 하인을 둔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말씀으로만 하셔도 병이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졌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곧바로 하인이 나았습니다(마 8:5~13).
또한 담대한 믿음으로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6~7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하신 대로, 하나님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이와 함께 사랑으로 기도할 때에 더욱 크게 역사하십니다. 서로 죄를 고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사랑으로 기도하면(약 5:16) 혹 죄를 범했다 해도 하나님께서 용서하고 치료해 주십니다. 이처럼 영적 믿음과 영적 사랑의 기도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2. 역사하는 힘이 많은 의인의 간구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롬 5:12)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롬 3:23).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신 대로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이라면 죄에서 해방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비진리를 버리며 진리를 좇아 행함으로써 참된 의인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같이 행함 있는 믿음을 소유하여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의인이라 인정하며 그의 간구에 응답해 주십니다.
누가복음 18장 2~8절에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억울한 사연을 지닌 과부가 끊임없이 간청하니 그의 청원을 들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 18:7~8)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밤낮 부르짖어 기도하고 철야하며 금식하는 것 같은데 응답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의인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 일에 충성한다고 다 의인은 아닙니다. 만일 교회에서는 열심을 내지만 집에서는 형제와 화목하지 않고 부모에게 불효한다면 어찌 응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은 주님을 닮아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기도를 올리기 때문에 신속히 응답해 주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와 권능
우리의 영혼이 잘되어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그릇이 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좇아 구하게 하고 은사를 주십니다(고전 12:1~11). 은사란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선물이며 그분의 사랑 안에 이루어지는 특별한 역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합당한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므로 성령의 주관 속에 베풀어야 합니다. 또한 은사를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 합당한 의인이 되도록 힘써야 하지요.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각각 하나님께 쓰이는 분야가 달랐습니다. 크게 능력을 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능력 행함은 없이 예언만 하거나 가르침만 베푼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믿음과 사랑을 갖출수록 큰 은사와 권능을 주셔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 자기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인을 쳐 죽일 정도로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연단을 거치며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자 큰 권능을 받아 갖가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며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되 그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습니다(약 5:17~18). 또한 그의 기도로 죽은 아이가 살아나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이같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정녕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자신을 희생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갖가지 은사와 권능을 주어 큰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물론 우리가 처음부터 의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갓 구원을 받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데에서 나아가 하나님 말씀을 들음으로써 죄를 깨닫고 비진리를 벗어 버리며 영혼이 잘되는 만큼 더욱 온전한 의인이 되어 갑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의 가운데 행하는 만큼 의인이 되는 것이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고백한 사도 바울과 같이 날마다 하나님 능력으로 변화되는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이제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혹시 하나님과 막힌 담이 있지 않은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인정하실 만한 의인이 되기 위하여 믿음으로 순종하고 사랑으로 희생하며, 의인의 간구를 올림으로 항상 형통한 삶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께 ( ) 칭함을 받는다.
2. ( )란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선물이며 그분의 사랑 안에 이루어지는 특별한 역사를 말한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91~101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엘리야의 기도’
불의 응답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나타내고 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켜 바알 선지자들을 잡아 기손 시내에서 죽이게 한 엘리야는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왕상 18:1)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아합왕에게 “큰비의 소리가 있나이다”(왕상 18:41) 말하고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엘리야는 응답받기 위해 얼굴이 무릎 사이에 들어갈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되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을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했다.
사환에게 바다 편을 바라보게 하였고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날 때까지 무려 일곱 번을 기도하였으니 능히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가 되어 하늘로부터 비가 쏟아졌다.
교육목표 : 주님을 닮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의인이 되어 신속히 응답받으며 형통한 삶을 누리게 한다.
1. 병든 자를 일으키는 믿음의 기도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고난 중에 눈물로 기도한 적이 있는가 하면 응답을 받아 즐거워하며 찬송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약 5:13). 또한 병든 사람을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거나(약 5:14)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믿음의 기도를 통해 응답받아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린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했습니다. 믿음은 크게 육적 믿음과 영적 믿음으로 분류된다 했는데 육적 믿음은 내 생각과 이론에 맞아야 믿는 것이므로 삶에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반면 영적 믿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이론에 맞지 않아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니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음과 기사와 표적을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했고,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하셨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영적 믿음을 소유하여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여야 합니다. 즉 자신이 아는 것을 옳다 여기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모든 생각과 이론은 다 깨뜨리고 진리를 좇아 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비진리를 벗어 버리는 만큼 영혼이 잘되고 영적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도 분량이 있어 사람마다 다릅니다(롬 12:3). 처음에 전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을 때에는 겨자씨만 한 작은 믿음이지만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행해 나가면 영적 믿음이 성장합니다. 영적 믿음이 커지는 만큼 표적도 따릅니다(막 16:17). 병든 자를 일으키는 기도는 이러한 영적 믿음의 기도여야 합니다. 중풍으로 고생하는 하인을 둔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말씀으로만 하셔도 병이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졌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곧바로 하인이 나았습니다(마 8:5~13).
또한 담대한 믿음으로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6~7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하신 대로, 하나님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이와 함께 사랑으로 기도할 때에 더욱 크게 역사하십니다. 서로 죄를 고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사랑으로 기도하면(약 5:16) 혹 죄를 범했다 해도 하나님께서 용서하고 치료해 주십니다. 이처럼 영적 믿음과 영적 사랑의 기도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2. 역사하는 힘이 많은 의인의 간구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롬 5:12)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롬 3:23).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신 대로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이라면 죄에서 해방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비진리를 버리며 진리를 좇아 행함으로써 참된 의인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같이 행함 있는 믿음을 소유하여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의인이라 인정하며 그의 간구에 응답해 주십니다.
누가복음 18장 2~8절에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억울한 사연을 지닌 과부가 끊임없이 간청하니 그의 청원을 들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 18:7~8)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밤낮 부르짖어 기도하고 철야하며 금식하는 것 같은데 응답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의인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 일에 충성한다고 다 의인은 아닙니다. 만일 교회에서는 열심을 내지만 집에서는 형제와 화목하지 않고 부모에게 불효한다면 어찌 응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은 주님을 닮아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기도를 올리기 때문에 신속히 응답해 주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와 권능
우리의 영혼이 잘되어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그릇이 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좇아 구하게 하고 은사를 주십니다(고전 12:1~11). 은사란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선물이며 그분의 사랑 안에 이루어지는 특별한 역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합당한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므로 성령의 주관 속에 베풀어야 합니다. 또한 은사를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 합당한 의인이 되도록 힘써야 하지요.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각각 하나님께 쓰이는 분야가 달랐습니다. 크게 능력을 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능력 행함은 없이 예언만 하거나 가르침만 베푼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믿음과 사랑을 갖출수록 큰 은사와 권능을 주셔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 자기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인을 쳐 죽일 정도로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연단을 거치며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자 큰 권능을 받아 갖가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며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되 그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습니다(약 5:17~18). 또한 그의 기도로 죽은 아이가 살아나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이같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정녕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자신을 희생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갖가지 은사와 권능을 주어 큰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물론 우리가 처음부터 의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갓 구원을 받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데에서 나아가 하나님 말씀을 들음으로써 죄를 깨닫고 비진리를 벗어 버리며 영혼이 잘되는 만큼 더욱 온전한 의인이 되어 갑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의 가운데 행하는 만큼 의인이 되는 것이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고백한 사도 바울과 같이 날마다 하나님 능력으로 변화되는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이제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혹시 하나님과 막힌 담이 있지 않은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인정하실 만한 의인이 되기 위하여 믿음으로 순종하고 사랑으로 희생하며, 의인의 간구를 올림으로 항상 형통한 삶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께 ( ) 칭함을 받는다.
2. ( )란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선물이며 그분의 사랑 안에 이루어지는 특별한 역사를 말한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91~101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엘리야의 기도’
불의 응답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나타내고 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켜 바알 선지자들을 잡아 기손 시내에서 죽이게 한 엘리야는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왕상 18:1)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아합왕에게 “큰비의 소리가 있나이다”(왕상 18:41) 말하고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엘리야는 응답받기 위해 얼굴이 무릎 사이에 들어갈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되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을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했다.
사환에게 바다 편을 바라보게 하였고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날 때까지 무려 일곱 번을 기도하였으니 능히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가 되어 하늘로부터 비가 쏟아졌다.
2020-10-30
제44과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2)
마태복음 26:40~41
읽을말씀 : 마태복음 26:40~41 | 외울말씀 : 골로새서 4:2 | 참고 말씀: 베드로전서 4:7
교육목표 : 항상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 육신의 일과 육체의 일을 버려 나가며 오직 하나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때 함께 기도하려고 예수님을 따라간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고 말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0~41)라고 안타까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육신이 약하다’ 하신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는 단순히 몸이 약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어부들입니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신체 건장한 젊은이들이었지요. 밤새 고기를 잡아도 끄떡없던 사람들이니 몇 시간 잠을 안 자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당부까지 하셨지요. 그런데도 제자들은 잠들어 버렸습니다. 이들은 단지 몸이 약해서 잠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해 잠든 것이지요.
이때 육신은 단순히 ‘살과 뼈로 이뤄진 사람의 몸’이 아니라 ‘죄성과 결합한 몸’을 가리킵니다. 죄성과 결합한 몸이 육을 좇고 죄를 짓고자 하는 속성이 바로 육신의 소욕이지요. 제자들은 마음으로는 기도하기 원했지만 잠자고 싶고 편히 쉬고 싶은 육신의 소욕이 더 강해서 졸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를 두고 육신이 약하다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좀 피곤해도 재미있게 놀 때는 피곤도 거뜬히 이기지 않습니까? 이처럼 피곤을 이김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피곤하다는 육적인 현상 자체가 아니라 ‘기도하기보다는 편히 쉬고 싶어 하는 마음 즉 육신의 소욕을 제압하느냐 제압당하느냐’입니다.
성경을 보면 육, 육신, 육신의 일, 육체의 일 등 비슷한 단어가 종종 나옵니다. 여기에 대한 영적인 뜻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육이란 영과 반대되는 썩고 변하는 것을 총칭합니다. 진리로 변화되기 전 인간이나 식물, 동물 등 세상 모든 만물을 다 포함합니다. 반면 영은 영원한 것이며 진리요, 참을 말합니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인류는 유전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를 ‘원죄’라 하며, 자라면서 원수 마귀 사단의 뜻대로 비진리를 행하며 지어가는 죄를 ‘자범죄’라 합니다. 이렇게 원수 마귀 사단을 통해 들어온 죄성이 사람의 몸과 결합된 것을 ‘육신’이라 합니다.
로마서 8장 12~13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하신 말씀의 ‘육신’에는 바로 그러한 뜻이 있습니다. 육신의 일이란 육신이라는 죄성을 낱낱이 분류해 놓은 것으로 거짓, 시기, 질투, 미움 등 아직 행하지 않았으나 행함으로 유발될 수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즉 마음과 생각으로 짓는 죄가 육신의 일이며, 이러한 육신의 일을 행동으로 옮긴 것을 ‘육체의 일’(갈 5:19)이라 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한 것은 성령 받기 전의 일입니다. 성령 받은 후에는 이런 연약함을 찾아볼 수 없는 담대한 사도들로 180도 변했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예수님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받기 전에는 막상 예수님이 잡히시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지요.
하지만 성령을 받은 후 베드로는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고 갖가지 기사와 표적을 나타냈으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할 정도로 담대하였습니다. 이전의 연약함은 찾아볼 수 없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하고 권능 있는 사도로 변화되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원수 마귀의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의 질고와 가난, 연약함까지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갖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영육 간에 강건함을 입고 문제가 해결되며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도 능히 이룰 수 있습니다.
간혹 잘못을 하고도 회개하지 않고 ‘육신이 약해서’라며 합리화하는 사람을 봅니다. 바로 진리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버지에게 백만 원을 받은 아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아들이 돈을 주머니에 넣어 놓은 것을 잊은 채 밖에서 밥을 사먹지 못하고 굶고 있다면 아버지는 얼마나 답답해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육신이 약해서’라는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입으면 무엇이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밤 10시만 되면 잠을 자지 않고는 못 견디던 성도라도 기도하여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 철야예배에 나와 한밤을 충만하게 하나님께 드리기도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영감이 밝아지고 마음에 기쁨이 임하며 피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몸이 가벼움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성령 시대에 사는 우리는 육신이 약하여 기도를 못한다거나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깨어 기도함으로써 성령의 도움을 받아 육신의 일과 육체의 일을 버려 나가며 오직 하나님 뜻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2. 깨어 기도할 때 받는 복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말씀하였습니다.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원수 마귀 사단은 우는 사자같이 하나님의 자녀를 미혹하여 어찌하든 하나님을 떠나게 하거나 믿음을 갖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무를 뽑고자 한다면 먼저 나무를 흔들어 볼 것입니다. 나무가 굵고 뿌리도 깊어서 도무지 뽑힐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포기하고 다른 나무를 골라 흔들겠지요. 그러나 그 나무가 흔들리며 뽑힐 가능성이 있어 보이면 ‘한번 뽑아 보자.’ 하며 더욱 세게 흔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원수 마귀 사단이 우리를 유혹해 올 때 전혀 흔들리지 않으면 물러가지만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계속해서 시험을 가져와 어떻게든 넘어뜨리려 합니다. 이러한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분별하여 물리칠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빛 가운데 나가기 위해서는 힘써 기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뜻대로 모든 사역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기도의 힘 때문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40일 금식기도로 준비하셨으며 공생애 중에도 틈만 나면 기도하여 크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셨습니다. 공생애를 마감하면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기 때문에 능히 십자가를 질 수 있었고 결국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하시며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말씀합니다. 또한 예수님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마 6:13)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지요.
이와 같이 깨어 기도할 때 성령께서 옳은 길을 가도록 깨우쳐 주십니다. 그래서 죄와 싸워 버리는 만큼 영혼이 잘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기 때문에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임합니다. 또한 우리가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원수 마귀 사단이 범접하지 못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기도하여 성령의 도움을 받아 악은 모양이라도 버림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흠 없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서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인류는 유전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를 ( )라 하며, 자라면서 원수 마귀 사단의 뜻대로 비진리를 행하며 지어가는 죄를 ( )라 한다. 이렇게 원수 마귀 사단을 통해 들어온 죄성이 사람의 몸과 결합된 것을 ( )이라 한다.
2. 성령을 받은 후 베드로는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79~87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사단’과 ‘마귀’의 차이
사단과 마귀는 악한 영에 속한다.
사단은 루시퍼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며 실질적인 형태는 없다. 루시퍼가 가진 어둠의 능력을 그대로 담고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생각과 마음을 갖게 한다. 마치 공중에 수없이 퍼져 있는 전파와 같이 어둠의 능력을 공중에 퍼뜨린다.
마귀는 루시퍼와 함께 타락한 천사 중 일부로, 검은 형상에 사람처럼 이목구비와 손발도 있다. 사단의 지시를 받아 수많은 귀신을 관리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죄를 짓게 한다. 생각으로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사단이라면 비진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것은 마귀의 짓이다.
교육목표 : 항상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 육신의 일과 육체의 일을 버려 나가며 오직 하나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때 함께 기도하려고 예수님을 따라간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고 말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0~41)라고 안타까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육신이 약하다’ 하신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는 단순히 몸이 약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어부들입니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신체 건장한 젊은이들이었지요. 밤새 고기를 잡아도 끄떡없던 사람들이니 몇 시간 잠을 안 자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당부까지 하셨지요. 그런데도 제자들은 잠들어 버렸습니다. 이들은 단지 몸이 약해서 잠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해 잠든 것이지요.
이때 육신은 단순히 ‘살과 뼈로 이뤄진 사람의 몸’이 아니라 ‘죄성과 결합한 몸’을 가리킵니다. 죄성과 결합한 몸이 육을 좇고 죄를 짓고자 하는 속성이 바로 육신의 소욕이지요. 제자들은 마음으로는 기도하기 원했지만 잠자고 싶고 편히 쉬고 싶은 육신의 소욕이 더 강해서 졸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를 두고 육신이 약하다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좀 피곤해도 재미있게 놀 때는 피곤도 거뜬히 이기지 않습니까? 이처럼 피곤을 이김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피곤하다는 육적인 현상 자체가 아니라 ‘기도하기보다는 편히 쉬고 싶어 하는 마음 즉 육신의 소욕을 제압하느냐 제압당하느냐’입니다.
성경을 보면 육, 육신, 육신의 일, 육체의 일 등 비슷한 단어가 종종 나옵니다. 여기에 대한 영적인 뜻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육이란 영과 반대되는 썩고 변하는 것을 총칭합니다. 진리로 변화되기 전 인간이나 식물, 동물 등 세상 모든 만물을 다 포함합니다. 반면 영은 영원한 것이며 진리요, 참을 말합니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인류는 유전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를 ‘원죄’라 하며, 자라면서 원수 마귀 사단의 뜻대로 비진리를 행하며 지어가는 죄를 ‘자범죄’라 합니다. 이렇게 원수 마귀 사단을 통해 들어온 죄성이 사람의 몸과 결합된 것을 ‘육신’이라 합니다.
로마서 8장 12~13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하신 말씀의 ‘육신’에는 바로 그러한 뜻이 있습니다. 육신의 일이란 육신이라는 죄성을 낱낱이 분류해 놓은 것으로 거짓, 시기, 질투, 미움 등 아직 행하지 않았으나 행함으로 유발될 수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즉 마음과 생각으로 짓는 죄가 육신의 일이며, 이러한 육신의 일을 행동으로 옮긴 것을 ‘육체의 일’(갈 5:19)이라 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한 것은 성령 받기 전의 일입니다. 성령 받은 후에는 이런 연약함을 찾아볼 수 없는 담대한 사도들로 180도 변했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예수님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받기 전에는 막상 예수님이 잡히시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지요.
하지만 성령을 받은 후 베드로는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고 갖가지 기사와 표적을 나타냈으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할 정도로 담대하였습니다. 이전의 연약함은 찾아볼 수 없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하고 권능 있는 사도로 변화되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원수 마귀의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의 질고와 가난, 연약함까지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갖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영육 간에 강건함을 입고 문제가 해결되며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도 능히 이룰 수 있습니다.
간혹 잘못을 하고도 회개하지 않고 ‘육신이 약해서’라며 합리화하는 사람을 봅니다. 바로 진리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버지에게 백만 원을 받은 아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아들이 돈을 주머니에 넣어 놓은 것을 잊은 채 밖에서 밥을 사먹지 못하고 굶고 있다면 아버지는 얼마나 답답해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육신이 약해서’라는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입으면 무엇이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밤 10시만 되면 잠을 자지 않고는 못 견디던 성도라도 기도하여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 철야예배에 나와 한밤을 충만하게 하나님께 드리기도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영감이 밝아지고 마음에 기쁨이 임하며 피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몸이 가벼움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성령 시대에 사는 우리는 육신이 약하여 기도를 못한다거나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깨어 기도함으로써 성령의 도움을 받아 육신의 일과 육체의 일을 버려 나가며 오직 하나님 뜻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2. 깨어 기도할 때 받는 복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말씀하였습니다.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원수 마귀 사단은 우는 사자같이 하나님의 자녀를 미혹하여 어찌하든 하나님을 떠나게 하거나 믿음을 갖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무를 뽑고자 한다면 먼저 나무를 흔들어 볼 것입니다. 나무가 굵고 뿌리도 깊어서 도무지 뽑힐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포기하고 다른 나무를 골라 흔들겠지요. 그러나 그 나무가 흔들리며 뽑힐 가능성이 있어 보이면 ‘한번 뽑아 보자.’ 하며 더욱 세게 흔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원수 마귀 사단이 우리를 유혹해 올 때 전혀 흔들리지 않으면 물러가지만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계속해서 시험을 가져와 어떻게든 넘어뜨리려 합니다. 이러한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분별하여 물리칠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빛 가운데 나가기 위해서는 힘써 기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뜻대로 모든 사역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기도의 힘 때문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40일 금식기도로 준비하셨으며 공생애 중에도 틈만 나면 기도하여 크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셨습니다. 공생애를 마감하면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기 때문에 능히 십자가를 질 수 있었고 결국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하시며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말씀합니다. 또한 예수님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마 6:13)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지요.
이와 같이 깨어 기도할 때 성령께서 옳은 길을 가도록 깨우쳐 주십니다. 그래서 죄와 싸워 버리는 만큼 영혼이 잘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기 때문에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임합니다. 또한 우리가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원수 마귀 사단이 범접하지 못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기도하여 성령의 도움을 받아 악은 모양이라도 버림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흠 없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서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인류는 유전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를 ( )라 하며, 자라면서 원수 마귀 사단의 뜻대로 비진리를 행하며 지어가는 죄를 ( )라 한다. 이렇게 원수 마귀 사단을 통해 들어온 죄성이 사람의 몸과 결합된 것을 ( )이라 한다.
2. 성령을 받은 후 베드로는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79~87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사단’과 ‘마귀’의 차이
사단과 마귀는 악한 영에 속한다.
사단은 루시퍼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며 실질적인 형태는 없다. 루시퍼가 가진 어둠의 능력을 그대로 담고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생각과 마음을 갖게 한다. 마치 공중에 수없이 퍼져 있는 전파와 같이 어둠의 능력을 공중에 퍼뜨린다.
마귀는 루시퍼와 함께 타락한 천사 중 일부로, 검은 형상에 사람처럼 이목구비와 손발도 있다. 사단의 지시를 받아 수많은 귀신을 관리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죄를 짓게 한다. 생각으로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사단이라면 비진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것은 마귀의 짓이다.
2020-10-23
제43과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
마태복음 26:40~41
읽을말씀 : 마태복음 26:40~41 | 외울말씀 : 야고보서 1:15 | 참고 말씀: 빌립보서 4:12
교육목표 : 늘 깨어 기도함으로 시험에 들지 않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1.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
예수님은 몸소 기도의 본을 보이시면서 늘 깨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십자가를 질 때가 임박함을 아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함께 간 제자들은 피곤을 이기지 못하여 그만 잠들고 말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수제자 베드로에게 안타깝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 26:40~41)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사건은 영적으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입니다. 하지만 아직 믿음이 적은 제자들에게는 이기기 힘든 시험이 될 수도 있었지요. 이를 염려하시고 깨어 기도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제자들만 아니라 바로 주님을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성도들도 하루하루 원수 마귀 사단과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지요. 늘 깨어 기도해야만 시험에 들지 않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기 쉽지요.
그렇다고 해서 ‘시험을 당할까?’ 하는 두려움 속에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간혹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1장 13~15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시험은 사람이 자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9장 11~12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들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자녀들이 어떤 재앙도 만나지 않고 오직 평안과 소망 가운데 살기를 바라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평안을 얻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하면 시험에 들지 않으며 불가능이 가능케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사람이 호흡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듯이 성령 받은 하나님 자녀는 영이 살기 위해 반드시 영의 호흡인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시며, 기도를 쉬는 것도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은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죽었던 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을 때에 살아나는데 이때의 영적 상태는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 같아서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으면 영이 자라 힘 있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때에는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없듯이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음을 압니다.
아이들은 곧잘 누가 숨을 쉬지 않고 오래 견디나 시합을 하곤 합니다. 먼저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숨을 잔뜩 들이마신 다음 ‘시작’ 하면 숨 쉬기를 멈춥니다. 처음 한동안에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해지고 얼굴이 빨개지면서 견디지 못하고 숨을 내쉽니다. 호흡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자녀가 영의 호흡인 기도를 중단하면 처음에는 그다지 못 느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답답하고 곤고해집니다. 그 원인을 깨달아 즉시 회개하고 기도해 나가면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임하니 다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계속 쉬면 마음이 더욱 곤고해지며, 중단한 시일이 오랠수록 다시 기도하거나 충만한 신앙생활을 회복하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숨을 쉬듯 습관을 좇아 하는 사람에게는 기도가 힘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대로 응답과 축복을 받으며 하늘의 소망이 생기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칩니다.
2. 왜 기도하지 않을 때 시험에 들까?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지으시고 살아 있는 영, 즉 생령이 되게 하여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불순종하여 영이 죽으니 하나님과 교통이 끊겼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된 사람을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니 점점 죄악으로 물들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의 섭리를 계획하시고 때가 되자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줌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죄를 회개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십니다. 연약한 우리를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며 세상을 이기도록 이끄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말씀하신 대로이지요.
우리가 성령의 도움으로 성령 충만하려면 반드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 밝히 음성을 들려 주고 우리에게 시험이 올 것을 알려 대비케 하십니다. 또한 피할 길을 주시며 시험이 와도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 뜻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으므로 세상의 욕심을 좇아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의 가운데 살아가므로 시험 환난이 찾아오고 갖가지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고 죄를 짓는 만큼 사단이 송사하므로 시험에 빠지며 보호받지 못합니다.
야고보서 1장 14~15절을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였습니다.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기도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어떠한 형편에 처해도 자족하기를 원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 11~12절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자족하지 못하고 욕심이 잉태되어 죄를 범하므로 원수 마귀 사단이 시험 환난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시험을 받으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시험 환난을 주신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니 시험을 이길 수도,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라’(고후 10:5) 했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6~7)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배우고 입력시켜 놓은 자신의 이론과 지식이 진리에 비추어 옳지 않은 것이라면 과감히 깨뜨려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과 이론을 깨뜨리며 진리에 순종하려면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사망의 길로 가지 않도록 징계하시고, 회개하여 돌이키도록 시험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한 것이 있는지 회개하고 기쁨과 감사로 기도하면 그 믿음을 보고 응답해 주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성도들은 하루하루 원수 마귀 사단과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 늘 깨어 ( )해야만 ( )에 들지 않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2. 기도할 때 ( )께서 밝히 음성을 들려주고 우리에게 시험이 올 것을 알려 ( )케 하신다. 또한 피할 길을 주시며 시험이 와도 (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63~7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이론’이란
지식을 바탕으로 경험이나 사고, 학습 등을 통해 스스로 정립시켜 놓은 논리를 말한다. 이론은 각 사람의 체험과 생각, 시대에 따라 달라지므로 변론을 낳으며 진리인 하나님 말씀과는 상반되는 경우가 많다.
교육목표 : 늘 깨어 기도함으로 시험에 들지 않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1.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
예수님은 몸소 기도의 본을 보이시면서 늘 깨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십자가를 질 때가 임박함을 아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함께 간 제자들은 피곤을 이기지 못하여 그만 잠들고 말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수제자 베드로에게 안타깝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 26:40~41)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사건은 영적으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입니다. 하지만 아직 믿음이 적은 제자들에게는 이기기 힘든 시험이 될 수도 있었지요. 이를 염려하시고 깨어 기도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제자들만 아니라 바로 주님을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성도들도 하루하루 원수 마귀 사단과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지요. 늘 깨어 기도해야만 시험에 들지 않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기 쉽지요.
그렇다고 해서 ‘시험을 당할까?’ 하는 두려움 속에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간혹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1장 13~15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시험은 사람이 자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9장 11~12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들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자녀들이 어떤 재앙도 만나지 않고 오직 평안과 소망 가운데 살기를 바라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평안을 얻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하면 시험에 들지 않으며 불가능이 가능케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사람이 호흡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듯이 성령 받은 하나님 자녀는 영이 살기 위해 반드시 영의 호흡인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시며, 기도를 쉬는 것도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은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죽었던 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을 때에 살아나는데 이때의 영적 상태는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 같아서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으면 영이 자라 힘 있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때에는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없듯이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음을 압니다.
아이들은 곧잘 누가 숨을 쉬지 않고 오래 견디나 시합을 하곤 합니다. 먼저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숨을 잔뜩 들이마신 다음 ‘시작’ 하면 숨 쉬기를 멈춥니다. 처음 한동안에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해지고 얼굴이 빨개지면서 견디지 못하고 숨을 내쉽니다. 호흡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자녀가 영의 호흡인 기도를 중단하면 처음에는 그다지 못 느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답답하고 곤고해집니다. 그 원인을 깨달아 즉시 회개하고 기도해 나가면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임하니 다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계속 쉬면 마음이 더욱 곤고해지며, 중단한 시일이 오랠수록 다시 기도하거나 충만한 신앙생활을 회복하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숨을 쉬듯 습관을 좇아 하는 사람에게는 기도가 힘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대로 응답과 축복을 받으며 하늘의 소망이 생기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칩니다.
2. 왜 기도하지 않을 때 시험에 들까?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지으시고 살아 있는 영, 즉 생령이 되게 하여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불순종하여 영이 죽으니 하나님과 교통이 끊겼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된 사람을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니 점점 죄악으로 물들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의 섭리를 계획하시고 때가 되자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줌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죄를 회개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십니다. 연약한 우리를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며 세상을 이기도록 이끄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말씀하신 대로이지요.
우리가 성령의 도움으로 성령 충만하려면 반드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 밝히 음성을 들려 주고 우리에게 시험이 올 것을 알려 대비케 하십니다. 또한 피할 길을 주시며 시험이 와도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 뜻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으므로 세상의 욕심을 좇아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의 가운데 살아가므로 시험 환난이 찾아오고 갖가지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고 죄를 짓는 만큼 사단이 송사하므로 시험에 빠지며 보호받지 못합니다.
야고보서 1장 14~15절을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였습니다.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기도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어떠한 형편에 처해도 자족하기를 원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 11~12절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자족하지 못하고 욕심이 잉태되어 죄를 범하므로 원수 마귀 사단이 시험 환난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시험을 받으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시험 환난을 주신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니 시험을 이길 수도,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라’(고후 10:5) 했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6~7)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배우고 입력시켜 놓은 자신의 이론과 지식이 진리에 비추어 옳지 않은 것이라면 과감히 깨뜨려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과 이론을 깨뜨리며 진리에 순종하려면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사망의 길로 가지 않도록 징계하시고, 회개하여 돌이키도록 시험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한 것이 있는지 회개하고 기쁨과 감사로 기도하면 그 믿음을 보고 응답해 주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성도들은 하루하루 원수 마귀 사단과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 늘 깨어 ( )해야만 ( )에 들지 않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2. 기도할 때 ( )께서 밝히 음성을 들려주고 우리에게 시험이 올 것을 알려 ( )케 하신다. 또한 피할 길을 주시며 시험이 와도 (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63~7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이론’이란
지식을 바탕으로 경험이나 사고, 학습 등을 통해 스스로 정립시켜 놓은 논리를 말한다. 이론은 각 사람의 체험과 생각, 시대에 따라 달라지므로 변론을 낳으며 진리인 하나님 말씀과는 상반되는 경우가 많다.
2020-10-16
제42과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 (2)
누가복음 22:39~44
읽을말씀 : 누가복음 22:39~44 | 외울말씀 : 예레미야 33:3 | 참고 말씀: 사도행전 7:59~60
교육목표 :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자세와 중심을 본받아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응답받아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요령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 요령 중 첫째로, 중심 바쳐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중심 기도란 마음과 뜻 그리고 힘과 정성을 다하는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지난주에 이어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던 모습에서 부르짖어 기도하셨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조용히 기도하셨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지요.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어 기도하라 하시며 응답을 약속하신 이유는, 부르짖어 기도할 때 잡념이나 피곤, 졸음이 틈타지 않고 중심 바쳐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용히 묵상 기도하는 것이 경건하고 거룩한 것인 줄 알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예배 전에 미리 와서 기도하거나 밤에 집에서 기도할 때에는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용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부르짖어 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교회 역사상 가장 큰 권능과 부흥이 일어난 초대교회는 큰 핍박 속에서도 부르짖어 기도하여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부르짖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교회는 성령이 역사하여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며 큰 부흥이 일어납니다.
부르짖어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그만큼 간절한 중심으로 소리 높여 간구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하여 성령이 충만하고 방해하는 원수 마귀 사단의 세력이 물러가므로 응답을 받고 나아가 신령한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까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 하며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할 때 성령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 될 수 있으며 성령이 행하시는 권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명령이며 땀을 흘려야 소산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므로 땀 흘려 부르짖어 기도해야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데 굳이 부르짖어 구해야 하는가?” 또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였는데 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하느냐?”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도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했다는 대목은 없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말씀의 참뜻은 중심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보십시오. 골방과 같이 은밀하고 조용한 곳에서 문을 닫아 버린다면 세상 사람과의 대화나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음으로써 외부와 차단되듯 기도할 때에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잡념, 세상 근심 걱정을 끊어버리고 마음 중심을 모아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길에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큰소리로 기도하자 예수님은 그러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 많이 하는 것을 자랑하려는 마음으로 하지 말고 오직 우리 중심과 모든 형편을 아시며, 구하는 바를 다 주실 수 있는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만 마음과 중심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십니다. 차츰 주일성수와 기도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면 믿음이 자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각 사람의 믿음대로 응답하십니다. 믿음의 반석에 서서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그 믿음을 보고 더 큰 응답으로 함께하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기도를 쌓아가면 하늘에서 오는 능력을 받아 죄와 싸워 버림으로 주님 모습을 닮아가고 주님의 뜻을 밝히 알아 그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됩니다. 그러한 믿음에 이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 하신 말씀이 온전히 임합니다.
믿음을 갖는 데에는 자기 스스로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산 믿음은 행함이 따르는 영적 믿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믿음을 갖고자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며 기도해 나가면 하나님께서 마음에 믿어지는 산 믿음, 영적 믿음을 주십니다.
이처럼 자신의 노력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믿음이 합치되어 능력 있는 믿음이 될 때 즉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응답의 확신이 불일 듯 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 믿음이며 그러한 능력 있는 믿음이 임하면 이미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막 11:24) 하신 말씀처럼 마음에 확신이 올 때까지 기도하여 믿고 구하는 것을 다 받는 복된 사람(마 21:22)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넷째, 목적 있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어떤 일에 목적이 분명하면 일을 더욱 힘있게 추진하며 더 빨리 성취합니다. 반면, 목적이 불분명하면 일의 방향을 잡지 못하므로 조그마한 어려움이 와도 왜 그 일을 시작했는지 회의하며 주저앉아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심을 때에도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일 3:21~22).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할 때에 얻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하다면 더욱 간절함과 인내로 기도할 수 있으며,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책망할 것이 없는 우리 중심을 보고 넘치도록 채워 주십니다.
다섯째, 사랑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신 말씀대로 나의 기도가 응답되고 하늘나라의 상급이 됨을 믿는다면 기도하는 것이 피곤하거나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하면 간절한 기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소유하면 자신보다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기도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요, 섬기는 목자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기도도 어떠한 마음을 품고 하느냐에 따라 다른 역사가 나타납니다. 단지 습관을 좇아 한다면, 겉으로는 사랑의 기도 같으나 실제로는 아닌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으로 교회와 목자와 영혼들을 위해 올려 드리는 것이 진실한 사랑의 기도입니다. 즉 마음에 온전히 영적 사랑이 임하여 하나님 뜻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주인 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지요.
예를 들어, 성전 건축을 위해 기도할 때 주님의 몸 된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집을 짓는 것보다 더 마음과 정성을 다해 간구합니다. 성전 건축에 필요한 땅과 재정, 일꾼과 기술력 등 성전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모든 것을 조목조목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영혼들을 위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상대에 대한 영적 사랑이 있다면, 상대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여기며 그에게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지요. 섬기는 목자를 위해 기도할 때에도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원하는 목자의 간절한 마음, 영혼들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기를 바라는 목자의 애타는 마음을 느끼고 헤아리는 만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사랑의 기도가 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요령을 말해 보세요.
① 중심 바쳐 기도해야 한다.
② ( ) 기도해야 한다.
③ ( )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④ 목적 있는 기도를 해야 한다
⑤ ( )의 기도를 해야 한다.
2.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말씀의 참뜻은 ( )를 하라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63~7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모세의 부르짖는 기도’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믿음으로 홍해가 갈라져 마른땅으로 건너는 체험을 하고도 수르 광야를 지날 때 물을 얻지 못하자 모세를 크게 원망하였다. 이에 모세가 부르짖어 기도하니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민수기 12장에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종 모세를 비방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문둥병에 걸린 사건이 나온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주옵소서” 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고쳐 주셨다.
교육목표 :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자세와 중심을 본받아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응답받아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요령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 요령 중 첫째로, 중심 바쳐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중심 기도란 마음과 뜻 그리고 힘과 정성을 다하는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지난주에 이어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던 모습에서 부르짖어 기도하셨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조용히 기도하셨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지요.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어 기도하라 하시며 응답을 약속하신 이유는, 부르짖어 기도할 때 잡념이나 피곤, 졸음이 틈타지 않고 중심 바쳐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용히 묵상 기도하는 것이 경건하고 거룩한 것인 줄 알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예배 전에 미리 와서 기도하거나 밤에 집에서 기도할 때에는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용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부르짖어 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교회 역사상 가장 큰 권능과 부흥이 일어난 초대교회는 큰 핍박 속에서도 부르짖어 기도하여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부르짖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교회는 성령이 역사하여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며 큰 부흥이 일어납니다.
부르짖어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그만큼 간절한 중심으로 소리 높여 간구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하여 성령이 충만하고 방해하는 원수 마귀 사단의 세력이 물러가므로 응답을 받고 나아가 신령한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까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 하며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할 때 성령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 될 수 있으며 성령이 행하시는 권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명령이며 땀을 흘려야 소산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므로 땀 흘려 부르짖어 기도해야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데 굳이 부르짖어 구해야 하는가?” 또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였는데 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하느냐?”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도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했다는 대목은 없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말씀의 참뜻은 중심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보십시오. 골방과 같이 은밀하고 조용한 곳에서 문을 닫아 버린다면 세상 사람과의 대화나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음으로써 외부와 차단되듯 기도할 때에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잡념, 세상 근심 걱정을 끊어버리고 마음 중심을 모아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길에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큰소리로 기도하자 예수님은 그러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 많이 하는 것을 자랑하려는 마음으로 하지 말고 오직 우리 중심과 모든 형편을 아시며, 구하는 바를 다 주실 수 있는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만 마음과 중심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십니다. 차츰 주일성수와 기도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면 믿음이 자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각 사람의 믿음대로 응답하십니다. 믿음의 반석에 서서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그 믿음을 보고 더 큰 응답으로 함께하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기도를 쌓아가면 하늘에서 오는 능력을 받아 죄와 싸워 버림으로 주님 모습을 닮아가고 주님의 뜻을 밝히 알아 그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됩니다. 그러한 믿음에 이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 하신 말씀이 온전히 임합니다.
믿음을 갖는 데에는 자기 스스로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산 믿음은 행함이 따르는 영적 믿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믿음을 갖고자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며 기도해 나가면 하나님께서 마음에 믿어지는 산 믿음, 영적 믿음을 주십니다.
이처럼 자신의 노력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믿음이 합치되어 능력 있는 믿음이 될 때 즉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응답의 확신이 불일 듯 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 믿음이며 그러한 능력 있는 믿음이 임하면 이미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막 11:24) 하신 말씀처럼 마음에 확신이 올 때까지 기도하여 믿고 구하는 것을 다 받는 복된 사람(마 21:22)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넷째, 목적 있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어떤 일에 목적이 분명하면 일을 더욱 힘있게 추진하며 더 빨리 성취합니다. 반면, 목적이 불분명하면 일의 방향을 잡지 못하므로 조그마한 어려움이 와도 왜 그 일을 시작했는지 회의하며 주저앉아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심을 때에도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일 3:21~22).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할 때에 얻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하다면 더욱 간절함과 인내로 기도할 수 있으며,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책망할 것이 없는 우리 중심을 보고 넘치도록 채워 주십니다.
다섯째, 사랑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신 말씀대로 나의 기도가 응답되고 하늘나라의 상급이 됨을 믿는다면 기도하는 것이 피곤하거나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하면 간절한 기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소유하면 자신보다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기도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요, 섬기는 목자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기도도 어떠한 마음을 품고 하느냐에 따라 다른 역사가 나타납니다. 단지 습관을 좇아 한다면, 겉으로는 사랑의 기도 같으나 실제로는 아닌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으로 교회와 목자와 영혼들을 위해 올려 드리는 것이 진실한 사랑의 기도입니다. 즉 마음에 온전히 영적 사랑이 임하여 하나님 뜻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주인 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지요.
예를 들어, 성전 건축을 위해 기도할 때 주님의 몸 된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집을 짓는 것보다 더 마음과 정성을 다해 간구합니다. 성전 건축에 필요한 땅과 재정, 일꾼과 기술력 등 성전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모든 것을 조목조목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영혼들을 위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상대에 대한 영적 사랑이 있다면, 상대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여기며 그에게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지요. 섬기는 목자를 위해 기도할 때에도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원하는 목자의 간절한 마음, 영혼들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기를 바라는 목자의 애타는 마음을 느끼고 헤아리는 만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사랑의 기도가 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요령을 말해 보세요.
① 중심 바쳐 기도해야 한다.
② ( ) 기도해야 한다.
③ ( )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④ 목적 있는 기도를 해야 한다
⑤ ( )의 기도를 해야 한다.
2.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말씀의 참뜻은 ( )를 하라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63~7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모세의 부르짖는 기도’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믿음으로 홍해가 갈라져 마른땅으로 건너는 체험을 하고도 수르 광야를 지날 때 물을 얻지 못하자 모세를 크게 원망하였다. 이에 모세가 부르짖어 기도하니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민수기 12장에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종 모세를 비방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문둥병에 걸린 사건이 나온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주옵소서” 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고쳐 주셨다.
2020-10-09
제41과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 (1)
누가복음 22:39~44
읽을말씀 : 누가복음 22:39~44 | 외울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5:17 | 참고 말씀: 열왕기상 18:42
교육목표 :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자세와 중심을 본받아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응답받아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기도의 본을 보여 주신 예수님
누가복음 22장 39∼44절에는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자세와 중심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려 줍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기에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질 수 있었으며,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또 어떻게 하나님의 사자가 도울 정도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를 드리셨을까요?
1)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하나님 뜻을 알려 주시며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마 7:7)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당연한데 사람들은 흔히 기도하고 싶을 때나 해결할 문제가 있을 때에만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서 기도하셨고,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으며,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습관을 좇아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규칙적으로 식사를 할 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자주 식사를 거르거나 불규칙적인 식생활을 계속하면 위장이 상하여 점차 몸이 쇠약해집니다. 기도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인 힘을 공급받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세상을 이기고 원수 마귀 사단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공급하지요. 따라서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여 육적인 힘을 공급받듯이 습관을 좇아 기도함으로써 영적인 힘이 끊이지 않고 공급되도록 해야 합니다.
반면에 습관을 좇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공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령의 충만함을 잃어버리고 마음이 곤고해지며 결국 마음을 지킬 수 없으므로 죄의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서든 쉬지 않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다가올 시험을 물리쳐 주시고, 설령 시험이 온다 해도 축적된 영적인 힘이 있으므로 사단에게 미혹되지 않고 승리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본받아 시간을 정해 놓고 매일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겠습니다. 특히 일과를 시작하기 전 먼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구하는 새벽기도나 일과를 마친 후 지키고 보호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밤 기도는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시므로 큰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무릎을 꿇으면 중심이 바로 서게 됩니다. 또한 상대를 경외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니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당연히 무릎 꿇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겸손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으며 솔로몬왕도(왕상 8:54), 사도 바울도(행 20:36), 스데반 집사도(행 7:60)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모나, 이 세상의 권세 있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구할 때에도 행여 실수하지 않을까 삼가는데 하물며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어찌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자세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능력을 신뢰한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니 기도할 때에는 당연히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물론 성전 의자에 앉아 하는 경우와 같이 무릎을 꿇기 힘든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냥 의자에 앉아서 해도 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무릎을 꿇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무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무릎 꿇고 기도하는 노력을 하면서 시간을 늘려 가면 나중에는 1~2시간 무릎 꿇고 해도 힘들지 않습니다.
3) 하나님 뜻에 합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 하나님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뜻을 알기 때문에 자기 유익을 좇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이 기도한다고 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구하기 때문에 정작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제 기도에 응답해 주시면 앞으로 이렇게 하겠습니다.” 한다든지, 아니면 실컷 자기 마음대로 기도해 놓고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도 응답이 오지 않으면 원망 불평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믿음의 기도라 할 수 없고, 욕심으로 구하는 것이니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약 4:2~3). 그러므로 응답받으려면 하나님 앞에 맡겨드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맡기는 기도란,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자녀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 되심을 믿기에 어떤 결과가 온다 해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맡기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가십니다.
4)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을 보면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하여 예수님께서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유월절 즈음의 밤 날씨는 추위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힘쓰고 애써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하셨으면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겠습니까?
왜 이렇게 힘쓰고 애써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까요? 창세기 3장 17절에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저주를 받기 이전에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으로 풍족하게 살았으나, 불순종하여 죄가 들어오니 하나님과 교통이 끊기고 땀 흘려 수고해야만 소산을 먹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얻는 것도 이처럼 땀 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힘으로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 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부르짖어 기도함으로써 많은 수고와 땀을 흘려야 얻을 수 있습니다. 열매를 얻으려면 땀 흘리는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하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으니 우리도 그러한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을 통하여 마음을 집중하는 기도는 자세에서부터 비롯됨을 알았습니다. 기도하는 자세를 보면 어떠한 중심으로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요령
1) 중심을 바쳐 기도해야 합니다
중심의 기도란 마음과 뜻, 그리고 힘과 정성을 다하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바른 자세로 마음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지요. 꼭 오랜 시간 한다 해서 중심의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짧은 시간을 하더라도 집중해서 충만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중심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녀를 바라보고 그 기도에 귀 기울이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중심에서 기도가 나오지요.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내 편에 필요한 것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관 아래 하나님 마음을 깊이 이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억지가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할 때 중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중심의 기도는 진심이 하나님께 그대로 전달됩니다. 사랑 자체이며 모든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중심을 다해 믿음으로 구한다면 어찌 응답하시지 않겠는지요? 그러므로 항상 중심의 기도를 하여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 능력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기에 하나님의 사자가 도울 정도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를 드리셨을까요?
① ( )을 좇아 기도하셨다.
② ( )을 꿇고 기도하셨다.
③ 하나님 ( )에 합한 기도를 하셨다.
④ ( ) 애써 기도하셨다.
2. ( )의 기도란 마음과 뜻 그리고 힘과 정성을 다하는 기도를 의미한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43~5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엘리야의 중심의 기도’
불의 응답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회개시킨 엘리야는 땅에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왕상 18:42)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3년 반 동안 타는 가뭄 끝에 큰비를 내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 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다 보니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을 받아 저절로 얼굴이 무릎 사이에 들어간 것이다. 이러한 간절한 중심의 기도라야 하나님을 감동시켜 응답받고 크게 영광 돌릴 수 있다.
교육목표 :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자세와 중심을 본받아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응답받아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기도의 본을 보여 주신 예수님
누가복음 22장 39∼44절에는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자세와 중심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려 줍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기에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질 수 있었으며,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또 어떻게 하나님의 사자가 도울 정도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를 드리셨을까요?
1)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하나님 뜻을 알려 주시며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마 7:7)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당연한데 사람들은 흔히 기도하고 싶을 때나 해결할 문제가 있을 때에만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서 기도하셨고,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으며,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습관을 좇아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규칙적으로 식사를 할 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자주 식사를 거르거나 불규칙적인 식생활을 계속하면 위장이 상하여 점차 몸이 쇠약해집니다. 기도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인 힘을 공급받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세상을 이기고 원수 마귀 사단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공급하지요. 따라서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여 육적인 힘을 공급받듯이 습관을 좇아 기도함으로써 영적인 힘이 끊이지 않고 공급되도록 해야 합니다.
반면에 습관을 좇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공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령의 충만함을 잃어버리고 마음이 곤고해지며 결국 마음을 지킬 수 없으므로 죄의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서든 쉬지 않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다가올 시험을 물리쳐 주시고, 설령 시험이 온다 해도 축적된 영적인 힘이 있으므로 사단에게 미혹되지 않고 승리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본받아 시간을 정해 놓고 매일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겠습니다. 특히 일과를 시작하기 전 먼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구하는 새벽기도나 일과를 마친 후 지키고 보호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밤 기도는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시므로 큰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무릎을 꿇으면 중심이 바로 서게 됩니다. 또한 상대를 경외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니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당연히 무릎 꿇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겸손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으며 솔로몬왕도(왕상 8:54), 사도 바울도(행 20:36), 스데반 집사도(행 7:60)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모나, 이 세상의 권세 있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구할 때에도 행여 실수하지 않을까 삼가는데 하물며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어찌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자세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능력을 신뢰한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니 기도할 때에는 당연히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물론 성전 의자에 앉아 하는 경우와 같이 무릎을 꿇기 힘든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냥 의자에 앉아서 해도 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무릎을 꿇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무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무릎 꿇고 기도하는 노력을 하면서 시간을 늘려 가면 나중에는 1~2시간 무릎 꿇고 해도 힘들지 않습니다.
3) 하나님 뜻에 합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 하나님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뜻을 알기 때문에 자기 유익을 좇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이 기도한다고 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구하기 때문에 정작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제 기도에 응답해 주시면 앞으로 이렇게 하겠습니다.” 한다든지, 아니면 실컷 자기 마음대로 기도해 놓고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도 응답이 오지 않으면 원망 불평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믿음의 기도라 할 수 없고, 욕심으로 구하는 것이니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약 4:2~3). 그러므로 응답받으려면 하나님 앞에 맡겨드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맡기는 기도란,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자녀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 되심을 믿기에 어떤 결과가 온다 해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맡기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가십니다.
4)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을 보면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하여 예수님께서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유월절 즈음의 밤 날씨는 추위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힘쓰고 애써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하셨으면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겠습니까?
왜 이렇게 힘쓰고 애써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까요? 창세기 3장 17절에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저주를 받기 이전에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으로 풍족하게 살았으나, 불순종하여 죄가 들어오니 하나님과 교통이 끊기고 땀 흘려 수고해야만 소산을 먹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얻는 것도 이처럼 땀 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힘으로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 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부르짖어 기도함으로써 많은 수고와 땀을 흘려야 얻을 수 있습니다. 열매를 얻으려면 땀 흘리는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하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으니 우리도 그러한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을 통하여 마음을 집중하는 기도는 자세에서부터 비롯됨을 알았습니다. 기도하는 자세를 보면 어떠한 중심으로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요령
1) 중심을 바쳐 기도해야 합니다
중심의 기도란 마음과 뜻, 그리고 힘과 정성을 다하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바른 자세로 마음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지요. 꼭 오랜 시간 한다 해서 중심의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짧은 시간을 하더라도 집중해서 충만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중심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녀를 바라보고 그 기도에 귀 기울이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중심에서 기도가 나오지요.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내 편에 필요한 것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관 아래 하나님 마음을 깊이 이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억지가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할 때 중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중심의 기도는 진심이 하나님께 그대로 전달됩니다. 사랑 자체이며 모든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중심을 다해 믿음으로 구한다면 어찌 응답하시지 않겠는지요? 그러므로 항상 중심의 기도를 하여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 능력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기에 하나님의 사자가 도울 정도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를 드리셨을까요?
① ( )을 좇아 기도하셨다.
② ( )을 꿇고 기도하셨다.
③ 하나님 ( )에 합한 기도를 하셨다.
④ ( ) 애써 기도하셨다.
2. ( )의 기도란 마음과 뜻 그리고 힘과 정성을 다하는 기도를 의미한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43~5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엘리야의 중심의 기도’
불의 응답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회개시킨 엘리야는 땅에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왕상 18:42)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3년 반 동안 타는 가뭄 끝에 큰비를 내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 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다 보니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을 받아 저절로 얼굴이 무릎 사이에 들어간 것이다. 이러한 간절한 중심의 기도라야 하나님을 감동시켜 응답받고 크게 영광 돌릴 수 있다.
2020-10-02
제40과믿고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
민수기 6:22~27
읽을말씀 : 민수기 6:22~27 | 외울말씀 : 민수기 23:19 | 참고 말씀: 갈라디아서 6:9
교육목표 :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온전히 믿음으로 간구하여 무엇이든지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가난, 질병과 연약함 등 인생의 모든 짐을 대신 져 주셨습니다. 모든 불행의 근원인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생명까지 내어 주셨지요. 이처럼 오직 영혼들을 위해 사신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천국 소망 가운데 참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신 평안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분이 계신지요? 살아가면서 어떤 시험 환난을 만났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신앙을 잘 점검해서 그 원인을 발견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참 평안을 누리도록 이미 모든 조건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시험 환난도 만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리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겔 36장 3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며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이제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을지라도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공의입니다.
1. 믿음으로 바라보고 포기하지 말아야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고 응답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바라보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다가 포기하는 이유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에 그것을 뛰어 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계가 있는 사람의 생각으로 볼 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만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장애물이 장애물로 보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인해 한계를 짓지도 않기에 불가능이라는 것도 포기라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의 기본 자세이지요.
예를 들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갈 때 전혀 장애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땅에 살던 왕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대치하고 있었지요. 기브온에서는 다섯 나라 연합군과 싸워야 했으나 여호수아는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아무 두려움 없이 나아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진멸했습니다.
또한 가나안 땅의 동 서편과 북방을 취할 때에도 그곳의 연합한 이방 군대와 싸워야 했지요. 그 적군의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여호수아 11장 4절에는 “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민중이 많아 해변의 수다한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민중이 많아 해변의 수다한 모래와 같다고 했으니 얼마나 연합군의 힘이 강했는지 알 수 있지요. 여호수아가 만일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면 두려움으로 인해 낙심하며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는 여호수아에게는 오직 함께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만이 있을 뿐이었지요. 그러니 결과는 항상 하나님께서 책임지셔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2.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민수기 23장 19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면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신실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무슨 씨앗을 심느냐에 따라 열매가 달라지듯이 믿음 안에서도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응답의 열매가 다릅니다. 기도를 심으면 하늘로부터 능력이 임하여 말씀대로 살 수 있고 영혼이 잘되어 갑니다. 열심히 충성 봉사하면 영육 간에 강건함을 입고, 십일조와 감사예물 등 물질로 심으면 물질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믿고 구하지만 아직 응답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셨어도 아직 응답받을 만한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에 열매를 거둘 줄 믿지만 즉시 수확하지는 못합니다. 종자마다 열매 맺는 기간이 달라서 참외나 수박은 1년이 채 안 되어 수확할 수 있지만, 사과나 배, 인삼 등은 수년이 지나야 비로소 열매 맺습니다. 오랜 시간 인내한 만큼 수확의 기쁨도 크게 마련이지요.
이같이 우리가 응답받는 데에도 심고 인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사업을 하든, 직장 생활을 하든 혹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서든 모든 것에 기한이 있고 때가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때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합니다.
어떤 학생이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기도했다고 합시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했다면 때가 이르러 분명히 응답하십니다. 기도했다 하여 즉시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시키고 그 후에 응답해 주십니다.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기도한 대로 잡념 없이 공부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하십니다. 열심히 행하는 만큼 형통한 길로 인도하여 서울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하시지요.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병이 왜 오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 치료되는지, 하나님 말씀을 통해 깨닫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발견하여 회개함으로써 질병의 원인을 해결해야 합니다. 미움으로 인해 병이 왔다면 미움을 버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하며, 과식 때문에 병이 왔다면 절제할 수 있는 힘을 받아 과식하는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믿음을 주시고 응답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시킨 뒤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업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경우에도 다를 바 없습니다. 사업을 통해 축복받기를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축복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도록 연단하십니다. 지혜와 능력을 주어 사업 능력을 발휘하게 하시고 사업이 확장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고 도움의 손길을 통해 거래처도 늘어가게 하시지요. 그리하여 때가 이르면 기도한 대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이같이 심고 가꾸는 과정을 거쳐 영혼이 잘되게 하고 연단하여 받을 만한 그릇이 되면 무엇이든 구하는 바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 조급해하지 말고 의심하지도 말아야 하지요. 오직 하나님 생각에 맞추어 이미 응답받은 줄로 믿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계의 법칙을 좇아 공의 가운데 응답하시는 분이며 그의 자녀가 믿음으로 구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신 것입니다(히 11:6).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매우 기뻐하고 사랑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을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에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며 빛 가운데 살았고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에녹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 땅에서 300년간이나 동행하다가 일찍 곁에 두고자 수명이 다하기 전에 하늘로 옮기셨지요. 하나님께서 그처럼 사랑한 에녹에게 이 땅에서도 얼마나 넘치도록 부어 주셨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아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장애물이 ( )로 보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인해 한계를 짓지도 않기에 불가능이라는 것도 포기라는 것도 없다.
이것이 ( )을 가진 사람의 기본 자세이다.
2. 많은 사람이 믿고 구하지만 아직 응답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43~5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여호수아’
에브라임 지파 눈의 아들로 본명은 호세아이며, 모세의 후계자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가기 앞서 열두 명의 대표자들을 보내어 40일간 가나안 땅 곳곳을 정탐하게 하셨다. 열두 명의 정탐꾼 중 열 명은 모두 부정적인 보고를 했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의지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고백했다.
이로 인해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다 멸망한 상황에서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음 세대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다.
출애굽 후 광야생활 동안 모세를 수종하여 붙좇았으며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출애굽 2세대를 이끌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지휘했다.
교육목표 :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온전히 믿음으로 간구하여 무엇이든지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가난, 질병과 연약함 등 인생의 모든 짐을 대신 져 주셨습니다. 모든 불행의 근원인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생명까지 내어 주셨지요. 이처럼 오직 영혼들을 위해 사신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천국 소망 가운데 참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신 평안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분이 계신지요? 살아가면서 어떤 시험 환난을 만났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신앙을 잘 점검해서 그 원인을 발견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참 평안을 누리도록 이미 모든 조건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시험 환난도 만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리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겔 36장 3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며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이제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을지라도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공의입니다.
1. 믿음으로 바라보고 포기하지 말아야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고 응답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바라보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다가 포기하는 이유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에 그것을 뛰어 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계가 있는 사람의 생각으로 볼 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만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장애물이 장애물로 보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인해 한계를 짓지도 않기에 불가능이라는 것도 포기라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의 기본 자세이지요.
예를 들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갈 때 전혀 장애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땅에 살던 왕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대치하고 있었지요. 기브온에서는 다섯 나라 연합군과 싸워야 했으나 여호수아는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아무 두려움 없이 나아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진멸했습니다.
또한 가나안 땅의 동 서편과 북방을 취할 때에도 그곳의 연합한 이방 군대와 싸워야 했지요. 그 적군의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여호수아 11장 4절에는 “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민중이 많아 해변의 수다한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민중이 많아 해변의 수다한 모래와 같다고 했으니 얼마나 연합군의 힘이 강했는지 알 수 있지요. 여호수아가 만일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면 두려움으로 인해 낙심하며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는 여호수아에게는 오직 함께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만이 있을 뿐이었지요. 그러니 결과는 항상 하나님께서 책임지셔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2.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민수기 23장 19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면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신실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무슨 씨앗을 심느냐에 따라 열매가 달라지듯이 믿음 안에서도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응답의 열매가 다릅니다. 기도를 심으면 하늘로부터 능력이 임하여 말씀대로 살 수 있고 영혼이 잘되어 갑니다. 열심히 충성 봉사하면 영육 간에 강건함을 입고, 십일조와 감사예물 등 물질로 심으면 물질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믿고 구하지만 아직 응답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셨어도 아직 응답받을 만한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에 열매를 거둘 줄 믿지만 즉시 수확하지는 못합니다. 종자마다 열매 맺는 기간이 달라서 참외나 수박은 1년이 채 안 되어 수확할 수 있지만, 사과나 배, 인삼 등은 수년이 지나야 비로소 열매 맺습니다. 오랜 시간 인내한 만큼 수확의 기쁨도 크게 마련이지요.
이같이 우리가 응답받는 데에도 심고 인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사업을 하든, 직장 생활을 하든 혹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서든 모든 것에 기한이 있고 때가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때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합니다.
어떤 학생이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기도했다고 합시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했다면 때가 이르러 분명히 응답하십니다. 기도했다 하여 즉시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시키고 그 후에 응답해 주십니다.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기도한 대로 잡념 없이 공부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하십니다. 열심히 행하는 만큼 형통한 길로 인도하여 서울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하시지요.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병이 왜 오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 치료되는지, 하나님 말씀을 통해 깨닫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발견하여 회개함으로써 질병의 원인을 해결해야 합니다. 미움으로 인해 병이 왔다면 미움을 버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하며, 과식 때문에 병이 왔다면 절제할 수 있는 힘을 받아 과식하는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믿음을 주시고 응답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시킨 뒤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업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경우에도 다를 바 없습니다. 사업을 통해 축복받기를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축복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도록 연단하십니다. 지혜와 능력을 주어 사업 능력을 발휘하게 하시고 사업이 확장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고 도움의 손길을 통해 거래처도 늘어가게 하시지요. 그리하여 때가 이르면 기도한 대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이같이 심고 가꾸는 과정을 거쳐 영혼이 잘되게 하고 연단하여 받을 만한 그릇이 되면 무엇이든 구하는 바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 조급해하지 말고 의심하지도 말아야 하지요. 오직 하나님 생각에 맞추어 이미 응답받은 줄로 믿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계의 법칙을 좇아 공의 가운데 응답하시는 분이며 그의 자녀가 믿음으로 구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신 것입니다(히 11:6).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매우 기뻐하고 사랑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을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에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며 빛 가운데 살았고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에녹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 땅에서 300년간이나 동행하다가 일찍 곁에 두고자 수명이 다하기 전에 하늘로 옮기셨지요. 하나님께서 그처럼 사랑한 에녹에게 이 땅에서도 얼마나 넘치도록 부어 주셨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아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장애물이 ( )로 보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인해 한계를 짓지도 않기에 불가능이라는 것도 포기라는 것도 없다.
이것이 ( )을 가진 사람의 기본 자세이다.
2. 많은 사람이 믿고 구하지만 아직 응답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43~5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여호수아’
에브라임 지파 눈의 아들로 본명은 호세아이며, 모세의 후계자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가기 앞서 열두 명의 대표자들을 보내어 40일간 가나안 땅 곳곳을 정탐하게 하셨다. 열두 명의 정탐꾼 중 열 명은 모두 부정적인 보고를 했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의지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고백했다.
이로 인해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다 멸망한 상황에서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음 세대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다.
출애굽 후 광야생활 동안 모세를 수종하여 붙좇았으며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출애굽 2세대를 이끌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지휘했다.
2020-10-01
제0과추석 명절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로마서 12:18
읽을말씀 : 로마서 12:18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한가위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308장 ---------------------- 다 같이
1.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 물결 뒤치며
어디든지 태양 빛에 향기 진동하도다
2. 추수할 것 많은 때에 일꾼 심히 적으니
열심 있는 일꾼들을 주여 보내 주소서
3. 먼동 틀 때 일어나서 일찍 들에 나아가
황혼 때가 되기까지 추수하게 하소서
4. 거둬 들인 모든 알곡 천국 창고 들인 후
주가 베풀 잔치 자리 우리 참여하겠네
후렴
무르 익은 저 곡식은 낫을 기다리는데
기회 지나가기 전에 어서 추수합시다 아멘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로마서 12:18 -------------------- 인도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설 교 --------------------- 화목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갓 시집 와서 살림이 아주 서투른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직장에 다니랴, 살림하랴 하루하루가 벅찼습니다. 특히 맛있게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요. 그런데도 그녀가 버겁다, 힘들다 하지 않고 즐겁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믿어 주시고 부족한 부분도 어여쁘게 바라봐 주시는 시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진밥을 해 놓으면 “얘, 아가야, 나이 많은 사람은 진밥이 좋단다.” 하며 잘했다고 하십니다. 된밥을 할 때면 “아가야! 진밥도 좋지만 때로는 된밥도 먹기가 좋단다.” 하며 잘했다고 하십니다.
또 어느 날은 밥 속에 돌이 들어 있었는데도 며느리 모르게 휴지에 싸서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돌이 있다며 며느리를 구박하거나 민망하게 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나중에 쌀에 돌이 있는 것 같다며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며느리는 매사에 자신을 먼저 생각해 주고 배려해 주시는 시아버지의 사랑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서로 섬기고 배려할 때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입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씀합니다. 곧 고기로 만든 음식이 가득한 부유한 집에서 살며 다투는 것보다 떡 한 조각밖에 없는 가난한 집에서 살더라도 화목한 것이 훨씬 낫다는 뜻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말씀했습니다. 화평이란, 비록 내가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맞춰 줄 수 있고, 내 믿음이 크다 하더라도 믿음이 작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곧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한 융통성 있는 마음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을 수 있고, 편벽되이 치우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거나 상대의 단점을 보지 않음으로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마음이지요.
그러면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두와 화평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 자기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사도 바울처럼 내 것, 내 입장, 내 스타일 등을 고집하는 자아가 없어야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화평을 이루면 무례히 행치 않고 자신을 드러내 자랑하지 않습니다. 중심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며 한쪽으로 편벽되지도 않지요.
둘째, 자기 의와 틀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과 자란 환경이 다릅니다. 교육받은 내용도 믿음의 분량도 다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고 좋고 나쁨의 기준도 다릅니다. A는 옳다고 해도 B는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해서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 입장, 내 기준에 맞추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섬길 때라야 화평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평을 이루는 과정에서 깨우쳐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감정도 없고 화평한데 상대가 나와 화평을 깬다.” 할 때 정말 상대 탓인가 하는 점입니다. 고의는 아닌데 내가 화평을 깨는 원인 제공을 해 놓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부지중에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럴 때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나는 상대에게 감정이 없다.” 고집한다면 결국 화평이 이뤄질 수가 없지요.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봐도 내가 화평을 좇는 사람으로 보이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서로 화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가장 사랑이 넘치고 화목해야 할 곳이지요. 모두가 조금만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배려해 준다면 상하고 얽혔던 감정도 쉽게 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주장하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섬기고 희생함으로 화평을 이루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 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한가위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308장 ---------------------- 다 같이
1.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 물결 뒤치며
어디든지 태양 빛에 향기 진동하도다
2. 추수할 것 많은 때에 일꾼 심히 적으니
열심 있는 일꾼들을 주여 보내 주소서
3. 먼동 틀 때 일어나서 일찍 들에 나아가
황혼 때가 되기까지 추수하게 하소서
4. 거둬 들인 모든 알곡 천국 창고 들인 후
주가 베풀 잔치 자리 우리 참여하겠네
후렴
무르 익은 저 곡식은 낫을 기다리는데
기회 지나가기 전에 어서 추수합시다 아멘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로마서 12:18 -------------------- 인도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설 교 --------------------- 화목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갓 시집 와서 살림이 아주 서투른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직장에 다니랴, 살림하랴 하루하루가 벅찼습니다. 특히 맛있게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요. 그런데도 그녀가 버겁다, 힘들다 하지 않고 즐겁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믿어 주시고 부족한 부분도 어여쁘게 바라봐 주시는 시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진밥을 해 놓으면 “얘, 아가야, 나이 많은 사람은 진밥이 좋단다.” 하며 잘했다고 하십니다. 된밥을 할 때면 “아가야! 진밥도 좋지만 때로는 된밥도 먹기가 좋단다.” 하며 잘했다고 하십니다.
또 어느 날은 밥 속에 돌이 들어 있었는데도 며느리 모르게 휴지에 싸서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돌이 있다며 며느리를 구박하거나 민망하게 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나중에 쌀에 돌이 있는 것 같다며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며느리는 매사에 자신을 먼저 생각해 주고 배려해 주시는 시아버지의 사랑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서로 섬기고 배려할 때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입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씀합니다. 곧 고기로 만든 음식이 가득한 부유한 집에서 살며 다투는 것보다 떡 한 조각밖에 없는 가난한 집에서 살더라도 화목한 것이 훨씬 낫다는 뜻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말씀했습니다. 화평이란, 비록 내가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맞춰 줄 수 있고, 내 믿음이 크다 하더라도 믿음이 작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곧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한 융통성 있는 마음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을 수 있고, 편벽되이 치우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거나 상대의 단점을 보지 않음으로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마음이지요.
그러면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두와 화평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 자기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사도 바울처럼 내 것, 내 입장, 내 스타일 등을 고집하는 자아가 없어야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화평을 이루면 무례히 행치 않고 자신을 드러내 자랑하지 않습니다. 중심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며 한쪽으로 편벽되지도 않지요.
둘째, 자기 의와 틀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과 자란 환경이 다릅니다. 교육받은 내용도 믿음의 분량도 다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고 좋고 나쁨의 기준도 다릅니다. A는 옳다고 해도 B는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해서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 입장, 내 기준에 맞추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섬길 때라야 화평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평을 이루는 과정에서 깨우쳐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감정도 없고 화평한데 상대가 나와 화평을 깬다.” 할 때 정말 상대 탓인가 하는 점입니다. 고의는 아닌데 내가 화평을 깨는 원인 제공을 해 놓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부지중에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럴 때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나는 상대에게 감정이 없다.” 고집한다면 결국 화평이 이뤄질 수가 없지요.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봐도 내가 화평을 좇는 사람으로 보이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서로 화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가장 사랑이 넘치고 화목해야 할 곳이지요. 모두가 조금만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배려해 준다면 상하고 얽혔던 감정도 쉽게 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주장하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섬기고 희생함으로 화평을 이루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 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20-09-25
제39과믿고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1)
마가복음 11:23~24
읽을말씀 : 마가복음 11:23~24 | 외울말씀 : 요한일서 3:21~22 | 참고 말씀: 야고보서 1:6~8
교육목표 :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온전히 믿음으로 간구하여 무엇이든지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위대한 믿음의 힘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다음 날 아침에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마른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않으면 무화과나무에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마 21:21~22). 믿음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여 그것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8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하셨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어떤 문제라도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도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기도하고 구하는 것에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려면 먹을 것, 입을 것 등 필요한 것이 많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호흡입니다. 호흡을 해야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 태어난 하나님 자녀에게도 필요한 것이 많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대화로서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구하여 응답받는 방법이므로 기도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전능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응답의 여부가 달라집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셨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창 1:1~31),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놓인 홍해를 가르고 건너게 하셨습니다(출 14:21~29). 또 이스라엘 백성이 칠 일 동안 여리고성을 돌고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그 견고한 성벽을 순식간에 무너뜨리셨으며(수 6:1~21), 아모리 사람들과 싸우던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간구하니 해와 달도 멈추게 하셨습니다(수 10:12~14).
신약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자를 살리고 갖가지 병든 자를 치료하셨으며(요 11:17~44 ; 마 4:23~24),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요 9:6~11). 원수 마귀와 귀신의 세력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으며(막 5:1~20),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해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남게 하셨습니다(막 6:34~44). 뿐만 아니라 풍랑을 잠잠케 함으로써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친히 증거하셨습니다(막 4:35~39). 우리는 이렇게 전능하시며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9~11절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듯이 사랑의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주셨는데 무엇인들 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을 얻고 평화를 누리며 나음을 입었습니다(사 53:5~6). 이처럼 살아 역사하시는 전능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이라면 어떤 시험 환난을 만나더라도 감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믿음에 기뻐하며 믿음대로 응답하고 살아 계신 증거를 나타내 주십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하게 하여 그 뜻과 섭리를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을 만나 주시며 기사와 표적을 베풀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전능하심을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 만물만 보고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며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3.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믿음에는 육적 믿음과 영적 믿음이 있는데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은 영적 믿음입니다. 육적 믿음은 사람의 지식이나 생각과 일치할 때만 믿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영적 믿음은 사람의 지식이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믿음을 말합니다. 바로 마음에 확신이 오고 응답이 되는 믿음이지요.
야고보서 1장 6~8절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의심은 인간의 지식이나 생각, 이론에서 나오며 원수 마귀 사단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마음은 정함이 없는 간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의심하는 것은 비진리인 육신의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롬 8:7) 모든 이론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라 하셨습니다(고후 10:5).
우리 믿음이 영적 믿음으로 변화되어 조금도 의심치 않으면 하나님은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 응답하십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여호수아가 요단강의 흐름을 멎게 하며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조금도 의심치 않고 믿음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막 11:23) 하며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됩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남산더러 들리어 인천 앞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믿음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받을까요? 만일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큰 혼란이 야기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영적 믿음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응답되지 않지요. 마음에 믿어지는 영적 믿음이 없으면 처음에는 이룰 줄 믿고 기도했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한다면 하나님 뜻에 어긋나게 구했거나 하나님 말씀을 의심한 자신의 허물 때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그 뜻에 어긋나게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뜻에 합하게 기도한다면 무엇이든 구하는 바에 응답받을 수 있으므로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응답을 받으려면 믿음으로 행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 곧 영적 믿음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생각과 이론을 깨뜨리면 의심이 사라지고 온전히 믿어지는 영적 믿음이 오므로 무엇이든 구하는 바를 받을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 태어난 하나님 자녀에게도 필요한 것이 많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 )이다. ( )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대화로서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2. ( )은 사람의 지식이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믿음을 말한다.
바로 마음에 확신이 오고 응답이 되는 믿음이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27~3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육신의 생각’
진리에 위배되는 비진리의 생각을 말한다.
마음에 육신이 있으면 원수 마귀 사단이 공중에 흩뿌려 놓은 어둠의 전파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 그 통로가 되는 것이 바로 생각이다.
교육목표 :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온전히 믿음으로 간구하여 무엇이든지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위대한 믿음의 힘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다음 날 아침에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마른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않으면 무화과나무에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마 21:21~22). 믿음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여 그것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8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하셨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어떤 문제라도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도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기도하고 구하는 것에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려면 먹을 것, 입을 것 등 필요한 것이 많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호흡입니다. 호흡을 해야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 태어난 하나님 자녀에게도 필요한 것이 많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대화로서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구하여 응답받는 방법이므로 기도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전능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응답의 여부가 달라집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셨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창 1:1~31),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놓인 홍해를 가르고 건너게 하셨습니다(출 14:21~29). 또 이스라엘 백성이 칠 일 동안 여리고성을 돌고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그 견고한 성벽을 순식간에 무너뜨리셨으며(수 6:1~21), 아모리 사람들과 싸우던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간구하니 해와 달도 멈추게 하셨습니다(수 10:12~14).
신약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자를 살리고 갖가지 병든 자를 치료하셨으며(요 11:17~44 ; 마 4:23~24),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요 9:6~11). 원수 마귀와 귀신의 세력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으며(막 5:1~20),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해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남게 하셨습니다(막 6:34~44). 뿐만 아니라 풍랑을 잠잠케 함으로써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친히 증거하셨습니다(막 4:35~39). 우리는 이렇게 전능하시며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9~11절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듯이 사랑의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주셨는데 무엇인들 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을 얻고 평화를 누리며 나음을 입었습니다(사 53:5~6). 이처럼 살아 역사하시는 전능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이라면 어떤 시험 환난을 만나더라도 감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믿음에 기뻐하며 믿음대로 응답하고 살아 계신 증거를 나타내 주십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하게 하여 그 뜻과 섭리를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을 만나 주시며 기사와 표적을 베풀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전능하심을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 만물만 보고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며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3.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믿음에는 육적 믿음과 영적 믿음이 있는데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은 영적 믿음입니다. 육적 믿음은 사람의 지식이나 생각과 일치할 때만 믿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영적 믿음은 사람의 지식이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믿음을 말합니다. 바로 마음에 확신이 오고 응답이 되는 믿음이지요.
야고보서 1장 6~8절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의심은 인간의 지식이나 생각, 이론에서 나오며 원수 마귀 사단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마음은 정함이 없는 간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의심하는 것은 비진리인 육신의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롬 8:7) 모든 이론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라 하셨습니다(고후 10:5).
우리 믿음이 영적 믿음으로 변화되어 조금도 의심치 않으면 하나님은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 응답하십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여호수아가 요단강의 흐름을 멎게 하며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조금도 의심치 않고 믿음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막 11:23) 하며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됩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남산더러 들리어 인천 앞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믿음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받을까요? 만일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큰 혼란이 야기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영적 믿음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응답되지 않지요. 마음에 믿어지는 영적 믿음이 없으면 처음에는 이룰 줄 믿고 기도했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한다면 하나님 뜻에 어긋나게 구했거나 하나님 말씀을 의심한 자신의 허물 때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그 뜻에 어긋나게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뜻에 합하게 기도한다면 무엇이든 구하는 바에 응답받을 수 있으므로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응답을 받으려면 믿음으로 행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 곧 영적 믿음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생각과 이론을 깨뜨리면 의심이 사라지고 온전히 믿어지는 영적 믿음이 오므로 무엇이든 구하는 바를 받을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 태어난 하나님 자녀에게도 필요한 것이 많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 )이다. ( )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대화로서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2. ( )은 사람의 지식이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믿음을 말한다.
바로 마음에 확신이 오고 응답이 되는 믿음이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27~3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육신의 생각’
진리에 위배되는 비진리의 생각을 말한다.
마음에 육신이 있으면 원수 마귀 사단이 공중에 흩뿌려 놓은 어둠의 전파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 그 통로가 되는 것이 바로 생각이다.
2020-09-18
제38과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2)
마태복음 7:7~11
읽을말씀 : 마태복음 7:7~11 | 외울말씀 : 전도서 3:18 | 참고 말씀: 요한계시록 2:10
교육목표 : 마음의 성결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구하라 주실 것이요
악한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물며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얼마나 좋은 것으로 주고자 하시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7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하셨는데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과 얼굴을 구해야 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 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계속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셋째, 일꾼 된 자로서 사명 감당을 위해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며(히 11:6), 각 사람에게 일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계 22:12).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했습니다.
세상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면 진급이 되며 더 좋은 대우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면 더 큰 사명이 주어지고 많은 상급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받는 상급은 이 땅에서 받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화로운 것이므로 각자 위치에서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직분이 없는 사람은 일꾼이 되기 위해 구해야 하고 직분을 맡은 사람은 자기 일을 잘 감당하며 더 큰 직분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권찰은 집사, 집사는 장로가 되기 위해 기도하고 구역장은 조장, 조장은 지역장이 되기 위해 또는 그 이상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장로나 집사라는 직분 자체를 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과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고 넘치도록 수고하여 더 크게 쓰이기를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이 있는 사람은 맡은 일을 잘 감당하되 더 큰 일을 맡겨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도록 충성하며,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풍성하고 건강한 삶을 누릴 뿐 아니라 모든 일에 형통한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난과 질병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 친히 가난한 길을 가셨고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입니다(『십자가의 도』 참조).
우리가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한 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마 6:33). 즉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 다음, 필요한 먹을 것, 입을 것, 사업터, 일터의 축복, 가족의 건강 등을 위해 기도하면 약속하신 대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이때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해야지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면 응답하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야고보서 4장 2~3절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욕심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2. 찾으라 찾을 것이요
마태복음 7장 7절을 보면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찾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렸을 때 어디에 있는지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하나님께서는 찾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음 받은 생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에덴동산에서 풍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았지요.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아담은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말씀하셨는데 이를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이렇게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 아담에게 죄의 삯인 사망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단순히 호흡이 끊어지는 육체의 죽음이 아닌 영의 죽음을 뜻합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 영의 지배를 받는 혼, 그리고 영과 혼의 장막인 육으로 창조되었습니다(살전 5:23). 그런데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음으로 아담은 더 이상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범죄한 아담은 물론 그의 후손들도 영이 죽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는 대로 정욕적이고 헛된 것들을 추구하며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전 3:18).
그러므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면 죽은 영이 다시 살아나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켜 행하며 사람의 본분을 행해야(전 12:13)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죽은 영을 살릴 수 있는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오셔서 죽은 영을 살리고 진리와 의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듣고 깨우쳐 마음에 양식 삼고 기도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죽었던 영이 살아나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이요,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과정입니다.
3.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
마태복음 7장 7절을 보면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두드리라고 하신 것일까요?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 문을 두드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 문을 두드릴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두드리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함을 말합니다.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신 말씀을 순종해 나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요한삼서 4절에는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죄를 회개하고 겸비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또한 마음에 양식 삼은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고 하나님의 마음 문을 열심히 두드려야 하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에 풍성하게 응답하십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림의 상호관계는 씨 뿌림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씨를 심었으면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 물도 주고 잡초도 뽑아 주고 비료도 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 씨 뿌리는 작업이 구하는 것이요, 열매를 맺도록 가꾸는 작업이 찾는 것이요, 열매가 잘 자라서 먹게 되는 것이 바로 두드리는 작업이지요.
곧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과정은 분리되어 따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인 것이며 이렇게 구하고 찾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두드릴 때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신 만큼 응답을 받습니다.
마가복음 4장 8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가 되었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부지런히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 항상 응답받는 것은 물론, 죄를 버리고 성결되어 영적인 사랑과 팔복,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면 ( )이 다시 살아나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 )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바로 ( )을 두드리라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마음을 두드리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 )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27~3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영적인 충성’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다. 여기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육의 목숨을 다하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 66권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 다해 이뤄 드린다는 뜻이다.
가장 먼저는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나가는 충성이 있어야 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육을 철저히 죽이고 성결되는 것이 바로 영적인 충성이다.
교육목표 : 마음의 성결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구하라 주실 것이요
악한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물며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얼마나 좋은 것으로 주고자 하시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7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하셨는데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과 얼굴을 구해야 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 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계속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셋째, 일꾼 된 자로서 사명 감당을 위해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며(히 11:6), 각 사람에게 일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계 22:12).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했습니다.
세상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면 진급이 되며 더 좋은 대우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면 더 큰 사명이 주어지고 많은 상급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받는 상급은 이 땅에서 받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화로운 것이므로 각자 위치에서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직분이 없는 사람은 일꾼이 되기 위해 구해야 하고 직분을 맡은 사람은 자기 일을 잘 감당하며 더 큰 직분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권찰은 집사, 집사는 장로가 되기 위해 기도하고 구역장은 조장, 조장은 지역장이 되기 위해 또는 그 이상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장로나 집사라는 직분 자체를 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과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고 넘치도록 수고하여 더 크게 쓰이기를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이 있는 사람은 맡은 일을 잘 감당하되 더 큰 일을 맡겨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도록 충성하며,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풍성하고 건강한 삶을 누릴 뿐 아니라 모든 일에 형통한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난과 질병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 친히 가난한 길을 가셨고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입니다(『십자가의 도』 참조).
우리가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한 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마 6:33). 즉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 다음, 필요한 먹을 것, 입을 것, 사업터, 일터의 축복, 가족의 건강 등을 위해 기도하면 약속하신 대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이때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해야지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면 응답하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야고보서 4장 2~3절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욕심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2. 찾으라 찾을 것이요
마태복음 7장 7절을 보면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찾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렸을 때 어디에 있는지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하나님께서는 찾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음 받은 생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에덴동산에서 풍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았지요.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아담은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말씀하셨는데 이를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이렇게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 아담에게 죄의 삯인 사망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단순히 호흡이 끊어지는 육체의 죽음이 아닌 영의 죽음을 뜻합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 영의 지배를 받는 혼, 그리고 영과 혼의 장막인 육으로 창조되었습니다(살전 5:23). 그런데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음으로 아담은 더 이상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범죄한 아담은 물론 그의 후손들도 영이 죽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는 대로 정욕적이고 헛된 것들을 추구하며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전 3:18).
그러므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면 죽은 영이 다시 살아나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켜 행하며 사람의 본분을 행해야(전 12:13)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죽은 영을 살릴 수 있는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오셔서 죽은 영을 살리고 진리와 의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듣고 깨우쳐 마음에 양식 삼고 기도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죽었던 영이 살아나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이요,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과정입니다.
3.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
마태복음 7장 7절을 보면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두드리라고 하신 것일까요?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 문을 두드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 문을 두드릴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두드리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함을 말합니다.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신 말씀을 순종해 나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요한삼서 4절에는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죄를 회개하고 겸비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또한 마음에 양식 삼은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고 하나님의 마음 문을 열심히 두드려야 하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에 풍성하게 응답하십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림의 상호관계는 씨 뿌림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씨를 심었으면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 물도 주고 잡초도 뽑아 주고 비료도 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 씨 뿌리는 작업이 구하는 것이요, 열매를 맺도록 가꾸는 작업이 찾는 것이요, 열매가 잘 자라서 먹게 되는 것이 바로 두드리는 작업이지요.
곧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과정은 분리되어 따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인 것이며 이렇게 구하고 찾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두드릴 때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신 만큼 응답을 받습니다.
마가복음 4장 8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가 되었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부지런히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 항상 응답받는 것은 물론, 죄를 버리고 성결되어 영적인 사랑과 팔복,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면 ( )이 다시 살아나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 )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바로 ( )을 두드리라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마음을 두드리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 )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27~3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영적인 충성’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다. 여기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육의 목숨을 다하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 66권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 다해 이뤄 드린다는 뜻이다.
가장 먼저는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나가는 충성이 있어야 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육을 철저히 죽이고 성결되는 것이 바로 영적인 충성이다.
2020-09-11
제37과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1)
마태복음 7:7~11
읽을말씀 : 마태복음 7:7~11 | 외울말씀 : 마태복음 6:33 | 참고 말씀: 요한복음 15:16
교육목표 :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께 그의 뜻대로 구함으로 무엇이든지 응답받아 풍성한 삶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좋은 것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성경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많은 응답과 축복을 받은 믿음의 선진들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와 찬양,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며 성전에서 봉사하는 것 등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중에서 기도는 신앙생활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 된 증표입니다. 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귀중한 통로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여러 가지로 사랑의 고백을 하기도 하고, 필요한 것을 구하듯이 우리도 기도로써 하나님과 대화하며 문제를 해결하고 축복을 받을 수 있지요.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마치 우리 영혼의 호흡과 같아서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라면 당연히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힘을 잃고 파리해집니다. 또 기도할 때라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지요. 그러나 우리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받을 수 없습니다.
자녀가 온실 속의 화초같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의존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다방면으로 배우고 체험하여 건강한 인격과 지식을 갖춘 사람이 되길 바라겠지요.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적당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지혜롭고 부지런한 자녀가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복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응답하시겠다는 축복과 약속의 말씀입니다.
2. 구하라 주실 것이요
마태복음 7장 7절을 보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만민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구하여 축복된 삶을 영위하기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지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요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아무리 악한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가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없지요. 또한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자녀에게는 항상 좋은 것을 주기 원할 것입니다(마 7:9~11). 하물며 사랑 자체가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찌 그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능력과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시편 105편 4절을 보면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창 2:4), 전지전능하시고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십니다(출 3:14).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며(요 1:1),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셨으니 하나님 말씀은 능력 자체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러한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을 주셔야 세상을 이기고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지요. 이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하신 대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믿음 역시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 지식적 믿음은 사람 편에서 마음대로 가질 수 있지만 마음 중심에서 믿어지는 영적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한다는 것은 곧 믿음 주시기를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상대의 얼굴을 모르고 그 사람을 안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 낯을 피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던 사람이 이제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며 그 음성 듣기를 구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얼굴을 보기 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한 후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시조인 아담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지음으로써 이러한 축복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멀어지고 원수 마귀의 종이 되어 멸망의 길로 갔지요. 이러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하고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면 ‘하나님이 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지’, ‘왜 말씀이 하나님이신지’ 등 성경 66권 말씀을 깨우쳐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영적인 뜻을 깨달아 마음에 양식 삼는 만큼 하나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닮아갑니다. 따라서 힘써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얼굴을 구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25~33).
그러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해 원수 마귀 사단에게 종노릇 하며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 받아 하나님 자녀로 거듭남으로써 하늘나라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만큼 죄로 인해 사망으로 가던 많은 사람이 구원받으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영혼 구원 곧 세계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우쳐 어둠에서 나와 빛 가운데 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성결하기를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의, 빛 가운데 계신 분이므로 죄악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버리고 진리대로 행하며 성결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함으로 영혼이 잘된 사람에게는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임합니다(요삼 2).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명하시고 그리하면 그 위에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영계의 법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십니다. 즉 구해야 주시며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주시지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구함으로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여호와와 능력을 구한다는 것은 ( ) 주시기를 구한다는 의미이다.
2. 하나님의 ( )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다.
3.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 ) 곧 세계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뜻이다.
4. 하나님의 ( )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우쳐 어둠에서 나와 빛 가운데 살며 성결하기를 기도하라는 뜻이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11~23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전도해야 하는 이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했다(히 9:27). 우리 인생은 단지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는 반드시 천국, 지옥의 두 갈래 길이 있다.
주님을 믿고 성령 받은 사람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지만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 영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널리 알려서 사람들이 그 증거를 보고라도 믿음을 가져 구원에 이르도록 힘써 전도해야 한다.
교육목표 :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께 그의 뜻대로 구함으로 무엇이든지 응답받아 풍성한 삶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좋은 것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성경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많은 응답과 축복을 받은 믿음의 선진들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와 찬양,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며 성전에서 봉사하는 것 등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중에서 기도는 신앙생활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 된 증표입니다. 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귀중한 통로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여러 가지로 사랑의 고백을 하기도 하고, 필요한 것을 구하듯이 우리도 기도로써 하나님과 대화하며 문제를 해결하고 축복을 받을 수 있지요.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마치 우리 영혼의 호흡과 같아서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라면 당연히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힘을 잃고 파리해집니다. 또 기도할 때라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지요. 그러나 우리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받을 수 없습니다.
자녀가 온실 속의 화초같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의존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다방면으로 배우고 체험하여 건강한 인격과 지식을 갖춘 사람이 되길 바라겠지요.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적당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지혜롭고 부지런한 자녀가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복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응답하시겠다는 축복과 약속의 말씀입니다.
2. 구하라 주실 것이요
마태복음 7장 7절을 보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만민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구하여 축복된 삶을 영위하기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지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요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아무리 악한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가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없지요. 또한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자녀에게는 항상 좋은 것을 주기 원할 것입니다(마 7:9~11). 하물며 사랑 자체가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찌 그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능력과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시편 105편 4절을 보면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창 2:4), 전지전능하시고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십니다(출 3:14).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며(요 1:1),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셨으니 하나님 말씀은 능력 자체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러한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을 주셔야 세상을 이기고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지요. 이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하신 대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믿음 역시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 지식적 믿음은 사람 편에서 마음대로 가질 수 있지만 마음 중심에서 믿어지는 영적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한다는 것은 곧 믿음 주시기를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상대의 얼굴을 모르고 그 사람을 안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 낯을 피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던 사람이 이제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며 그 음성 듣기를 구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얼굴을 보기 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한 후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시조인 아담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지음으로써 이러한 축복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멀어지고 원수 마귀의 종이 되어 멸망의 길로 갔지요. 이러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하고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면 ‘하나님이 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지’, ‘왜 말씀이 하나님이신지’ 등 성경 66권 말씀을 깨우쳐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영적인 뜻을 깨달아 마음에 양식 삼는 만큼 하나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닮아갑니다. 따라서 힘써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얼굴을 구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25~33).
그러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해 원수 마귀 사단에게 종노릇 하며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 받아 하나님 자녀로 거듭남으로써 하늘나라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만큼 죄로 인해 사망으로 가던 많은 사람이 구원받으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영혼 구원 곧 세계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우쳐 어둠에서 나와 빛 가운데 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성결하기를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의, 빛 가운데 계신 분이므로 죄악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버리고 진리대로 행하며 성결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함으로 영혼이 잘된 사람에게는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임합니다(요삼 2).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명하시고 그리하면 그 위에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영계의 법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십니다. 즉 구해야 주시며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주시지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구함으로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여호와와 능력을 구한다는 것은 ( ) 주시기를 구한다는 의미이다.
2. 하나님의 ( )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다.
3.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 ) 곧 세계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뜻이다.
4. 하나님의 ( )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우쳐 어둠에서 나와 빛 가운데 살며 성결하기를 기도하라는 뜻이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11~23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전도해야 하는 이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했다(히 9:27). 우리 인생은 단지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는 반드시 천국, 지옥의 두 갈래 길이 있다.
주님을 믿고 성령 받은 사람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지만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 영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널리 알려서 사람들이 그 증거를 보고라도 믿음을 가져 구원에 이르도록 힘써 전도해야 한다.
2020-09-04
제36과심고 거두는 축복의 비결 (2)
민수기 6:22~27
읽을말씀 : 민수기 6:22~27 | 외울말씀 : 고린도후서 9:6 | 참고 말씀: 시편 116:1~2
교육목표 : 마음 밭을 개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과 행함을 항상 내보임으로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마음 밭을 개간하여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첫째, 마음의 할례를 해야 하고, 둘째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지난주에 이어 살펴보겠습니다.
셋째, 무엇이든지 욕심으로 구해서는 안 됩니다.
“부자가 되려면 재물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자기를 좇아오게 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재물에 집착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정도에서 벗어나 큰 손실을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물질의 축복을 받으려면 먼저 탐심부터 버려야 합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라 하셨고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기 유익을 구할지, 손해를 보더라도 진리를 따를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만일 탐심이 있으면 적당히 둘러대면서 진리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합니다. 탐심 때문에 신앙이 변질되기도 하지요. 수입이 적을 때는 십일조를 잘했는데 수입이 늘면 아까워 드리지 않는 일도 생깁니다.
우리가 물질의 축복을 구하는 이유는 자신이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땅에 재물을 아무리 많이 쌓아 둬도 천국에 가면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구해야 하지요.
탐심으로 구하지 않으려면 내 것이 아닌 것은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탐심이 없다면 하나님께 구할 때도 조급하지 않고 공의에 맞게 성령의 주관을 받아 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가 10만 원인데 “십일조 100만 원 드리게 기도해 주세요.” 합니다. 물론 앞으로 축복받아 그렇게 하겠다는 믿음은 좋지만 당장 그렇게 받을 수는 없습니다. 20만 원, 30만 원, 50만 원 단계를 밟아 올라가야 합니다. 단계를 무시하고 자기 생각과 조급함으로 하나님께 독촉하듯 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넷째, 항상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은 물론 세상 법도 준수하며 정직과 성실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수월하게 유익을 얻으려고 편법을 쓰고 남을 속이거나 진리를 벗어나면 세상에서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야곱은 삼촌의 양 떼를 지킬 때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추위와 더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가축들을 돌봤으며 심지어 도둑맞은 것이나 맹수에게 찢긴 것은 자기가 물어낼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남의 양 떼를 맡아 돌보면서도 성실하게 일했기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지요.
아무리 진리를 많이 알고 기도를 많이 한다 해도 정도를 걷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작은 일을 맡았을 때 충성하는 사람이라야 큰 것도 맡길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라야 하나님 앞에 진실하다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직과 성실로 쌓아가지 않으면 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 해도 축복을 자기 것으로 취할 수 없습니다.
다섯째, 부지런히 많이 심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했습니다. 아무리 넓은 땅을 가졌어도 심은 만큼만 거둘 수 있습니다. 좁은 면적에 뿌리고 드넓은 면적의 수확량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지런히 많이 심을 때라야 그 축복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만 원을 심고 두 배로 받았다고 합시다. 이때 직접 돈으로 주실 수도 있고 질병이나 재앙으로 인한 손실을 막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 원의 두 배 곧 2만 원 정도의 액수라면 하나님께서 주셨다 해도 그것을 실감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면 천만 원을 심었는데 두 배로 갚아 주셨다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단순히 액수가 크다 해서 ‘많이 심었다’ 할 수는 없습니다. 예물을 통해 하나님이 받고자 하시는 것은 마음의 향이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믿음과 행함에 변개함이 없어야 합니다.
농부가 많은 씨를 심고 몇 달 지났는데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 해서 가꾸지 않거나 땅을 갈아엎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동안 수고한 것이 허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응답받기 위해서도 이것저것 기회가 될 때마다 부지런히 심되 심은 것은 반드시 축복으로 주실 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내가 이만큼 드렸으니까 축복해 주세요.” 하고 계산적으로 요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축복을 주시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드릴 마음이지만,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기에 영광 돌리고자 하는 믿음으로 구해야지요.
응답이 더디다 해서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응답이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함으로 쌓아왔다면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정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드리고자 한 것을 자기 유익에 따라 바꾸거나 서원한 것을 어기는 일도 없어야 하지요(레 27장 ; 시 15:4).
일곱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심어야 합니다.
주식으로 이윤을 남기려면 수익성이 좋은 종목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부실한 종목에 투자했다가는 원금조차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영적으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곳에 심으면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구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니 축복받는 길입니다. 그런데 범죄하여 하나님께 징계받는 사람을 구제한다면 함께 연단을 받습니다. 그가 계속 죄를 짓도록 돕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악을 행한 니느웨에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요나에게 가서 그의 멸망을 경고하라 하셨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적국인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랐기에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항해 도중 요나 때문에 폭풍이 왔는데, 이를 알고도 사람들은 요나를 돕다가 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지니 풍랑이 그쳤습니다(욘 1:1~15).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바르게 심어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덟째, 하나님 나라에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충성한다는 것은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영적으로 참된 충성을 하는 사람은 몸으로만 봉사하지 않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며 쉬지 않고 불같이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다가 축복을 받아 사업터에 일이 많아지니 사명에 대해 소홀해집니다. 신앙이 점점 변질되어 가지요. 은혜가 식고 기도를 하지 않는 등 세상과 타협해 갑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불법을 행하다가 하나님이 외면하시므로 사업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병까지 얻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진리대로 행하여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외적인 충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악을 버리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해야지요. 나아가 가정이나 직장, 교회 등 자신이 속한 모든 곳에서 충성되어야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116편 1~2절에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여러 문제로 고통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무엇이나 응답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지요. 우리가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응답받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건강, 재물, 명예 등 그 밖의 어떤 소원이든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진리 안에 살며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믿음과 행함을 내보여 모든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으며 삶 가운데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또한 영혼이 잘되는 복을 받아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참 자녀가 되어 장차 새 예루살렘 성에서 큰 영광과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물질의 축복을 받으려면 먼저 ( )부터 버려야 한다. ( )은 우상 숭배라 하셨고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신다.
2. 하나님 나라에 ( )한다는 것은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뜻도 된다. 영적으로 참된 ( )을 하는 사람은 몸으로만 봉사하지 않는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며 쉬지 않고 불같이 기도한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11~23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마음의 향이 담긴 예물’
예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받고자 하시는 것은 마음의 향이다.
마가복음 12장에 나오는 과부는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었다.
이는 당시 가장 작은 화폐 단위인 동전 두 닢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많은 소유 중에 일부를 드렸지만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의 향이 담긴 예물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예물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한 것이다.
교육목표 : 마음 밭을 개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과 행함을 항상 내보임으로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마음 밭을 개간하여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첫째, 마음의 할례를 해야 하고, 둘째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지난주에 이어 살펴보겠습니다.
셋째, 무엇이든지 욕심으로 구해서는 안 됩니다.
“부자가 되려면 재물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자기를 좇아오게 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재물에 집착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정도에서 벗어나 큰 손실을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물질의 축복을 받으려면 먼저 탐심부터 버려야 합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라 하셨고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기 유익을 구할지, 손해를 보더라도 진리를 따를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만일 탐심이 있으면 적당히 둘러대면서 진리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합니다. 탐심 때문에 신앙이 변질되기도 하지요. 수입이 적을 때는 십일조를 잘했는데 수입이 늘면 아까워 드리지 않는 일도 생깁니다.
우리가 물질의 축복을 구하는 이유는 자신이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땅에 재물을 아무리 많이 쌓아 둬도 천국에 가면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구해야 하지요.
탐심으로 구하지 않으려면 내 것이 아닌 것은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탐심이 없다면 하나님께 구할 때도 조급하지 않고 공의에 맞게 성령의 주관을 받아 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가 10만 원인데 “십일조 100만 원 드리게 기도해 주세요.” 합니다. 물론 앞으로 축복받아 그렇게 하겠다는 믿음은 좋지만 당장 그렇게 받을 수는 없습니다. 20만 원, 30만 원, 50만 원 단계를 밟아 올라가야 합니다. 단계를 무시하고 자기 생각과 조급함으로 하나님께 독촉하듯 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넷째, 항상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은 물론 세상 법도 준수하며 정직과 성실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수월하게 유익을 얻으려고 편법을 쓰고 남을 속이거나 진리를 벗어나면 세상에서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야곱은 삼촌의 양 떼를 지킬 때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추위와 더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가축들을 돌봤으며 심지어 도둑맞은 것이나 맹수에게 찢긴 것은 자기가 물어낼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남의 양 떼를 맡아 돌보면서도 성실하게 일했기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지요.
아무리 진리를 많이 알고 기도를 많이 한다 해도 정도를 걷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작은 일을 맡았을 때 충성하는 사람이라야 큰 것도 맡길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라야 하나님 앞에 진실하다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직과 성실로 쌓아가지 않으면 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 해도 축복을 자기 것으로 취할 수 없습니다.
다섯째, 부지런히 많이 심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했습니다. 아무리 넓은 땅을 가졌어도 심은 만큼만 거둘 수 있습니다. 좁은 면적에 뿌리고 드넓은 면적의 수확량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지런히 많이 심을 때라야 그 축복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만 원을 심고 두 배로 받았다고 합시다. 이때 직접 돈으로 주실 수도 있고 질병이나 재앙으로 인한 손실을 막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 원의 두 배 곧 2만 원 정도의 액수라면 하나님께서 주셨다 해도 그것을 실감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면 천만 원을 심었는데 두 배로 갚아 주셨다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단순히 액수가 크다 해서 ‘많이 심었다’ 할 수는 없습니다. 예물을 통해 하나님이 받고자 하시는 것은 마음의 향이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믿음과 행함에 변개함이 없어야 합니다.
농부가 많은 씨를 심고 몇 달 지났는데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 해서 가꾸지 않거나 땅을 갈아엎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동안 수고한 것이 허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응답받기 위해서도 이것저것 기회가 될 때마다 부지런히 심되 심은 것은 반드시 축복으로 주실 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내가 이만큼 드렸으니까 축복해 주세요.” 하고 계산적으로 요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축복을 주시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드릴 마음이지만,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기에 영광 돌리고자 하는 믿음으로 구해야지요.
응답이 더디다 해서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응답이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함으로 쌓아왔다면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정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드리고자 한 것을 자기 유익에 따라 바꾸거나 서원한 것을 어기는 일도 없어야 하지요(레 27장 ; 시 15:4).
일곱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심어야 합니다.
주식으로 이윤을 남기려면 수익성이 좋은 종목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부실한 종목에 투자했다가는 원금조차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영적으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곳에 심으면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구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니 축복받는 길입니다. 그런데 범죄하여 하나님께 징계받는 사람을 구제한다면 함께 연단을 받습니다. 그가 계속 죄를 짓도록 돕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악을 행한 니느웨에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요나에게 가서 그의 멸망을 경고하라 하셨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적국인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랐기에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항해 도중 요나 때문에 폭풍이 왔는데, 이를 알고도 사람들은 요나를 돕다가 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지니 풍랑이 그쳤습니다(욘 1:1~15).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바르게 심어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덟째, 하나님 나라에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충성한다는 것은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영적으로 참된 충성을 하는 사람은 몸으로만 봉사하지 않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며 쉬지 않고 불같이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다가 축복을 받아 사업터에 일이 많아지니 사명에 대해 소홀해집니다. 신앙이 점점 변질되어 가지요. 은혜가 식고 기도를 하지 않는 등 세상과 타협해 갑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불법을 행하다가 하나님이 외면하시므로 사업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병까지 얻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진리대로 행하여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외적인 충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악을 버리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해야지요. 나아가 가정이나 직장, 교회 등 자신이 속한 모든 곳에서 충성되어야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116편 1~2절에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여러 문제로 고통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무엇이나 응답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지요. 우리가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응답받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건강, 재물, 명예 등 그 밖의 어떤 소원이든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진리 안에 살며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믿음과 행함을 내보여 모든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으며 삶 가운데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또한 영혼이 잘되는 복을 받아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참 자녀가 되어 장차 새 예루살렘 성에서 큰 영광과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물질의 축복을 받으려면 먼저 ( )부터 버려야 한다. ( )은 우상 숭배라 하셨고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신다.
2. 하나님 나라에 ( )한다는 것은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뜻도 된다. 영적으로 참된 ( )을 하는 사람은 몸으로만 봉사하지 않는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며 쉬지 않고 불같이 기도한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11~23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마음의 향이 담긴 예물’
예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받고자 하시는 것은 마음의 향이다.
마가복음 12장에 나오는 과부는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었다.
이는 당시 가장 작은 화폐 단위인 동전 두 닢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많은 소유 중에 일부를 드렸지만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의 향이 담긴 예물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예물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한 것이다.
2020-08-28
제35과심고 거두는 축복의 비결 (1)
민수기 6:22~27
읽을말씀 : 민수기 6:22~27 | 외울말씀 : 말라기 3:10 | 참고 말씀: 마태복음 13:3~23
교육목표 : 마음 밭을 개간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심고 가꾸며, 온전한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함으로 풍성한 축복을 받게 한다.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서 옥토로 만드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마음을 빛으로, 의와 선으로, 진리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하지요. 이렇게 마음을 부지런히 개간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심을 때 축복과 응답으로 거둡니다. 그러면 응답받는 과정을 심고 거두는 자연의 법칙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1. 응답과 축복의 기본 원리
첫째, 마음 밭을 개간해야 합니다.
농사 지을 때 아무리 좋은 씨를 많이 뿌린다 해도 토질이 나쁘면 수확이 좋지 못합니다. 기왕이면 좋은 밭, 옥토에 씨를 뿌려야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지요. 영적으로 축복받기 위해 씨를 뿌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밭은 영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뜻합니다. 많은 씨를 뿌리고 열심히 가꾼다 해도 마음 밭이 좋지 않으면 기대만큼 좋은 수확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먼저는 마음 밭을 개간해야 하는데, 이는 죄와 악을 벗어 버리고 성결된 깨끗한 마음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곧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욕심을 버리라, 미워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 등 성경에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마음 밭을 개간하는 것입니다.
둘째, 씨를 심어야 합니다.
씨를 심는다는 것은 “사랑하라, 상대의 유익을 구하라, 섬기라, 안식일을 지키라” 등 성경에 무엇무엇을 ‘하라, 지키라’ 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대로 씨를 심되, 한 번만 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심어야 합니다.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도 철을 따라 씨를 뿌리듯이 영적으로도 천국에 갈 때까지 뿌리고 거두는 작업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셋째, 인내로 가꾸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심기만 하고 가꾸지 않으면 추수 때 거둘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영적으로 가꾸는 것이란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찬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워야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찬송과 기도로 성령 충만함을 얻어야 새 힘을 받아 밭을 옥토로 개간하며 열심히 심고 가꿀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 역시 영적으로 가꾸는 작업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 땅에서도 추수할 소망이 가득한 농부는 기쁘고 행복하게 일을 합니다. 흥얼흥얼 노래하면서 거두기까지 부지런히 가꿉니다. 우리도 천국 소망 가운데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원수 마귀 사단이 틈타지 못하고 천국까지 힘차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넷째, 꽃이 피고 열매를 거두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꽃이 피면 향기가 나듯이 우리 마음에도 영적인 꽃이 피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마음이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니 주변 사람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심은 것에 꽃이 피면 마침내 열매가 맺힙니다. 성령의 열매, 팔복의 열매, 사랑장의 열매, 빛의 열매 등 영적인 열매들이 맺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 밭을 개간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심고 가꾸는 것이 영육 간에 모든 응답과 축복을 거두는 기본 원리이자 핵심입니다. 마음 밭을 얼마나 옥토로 개간하여 씨를 많이 심고 가꾸었느냐에 따라 거두는 정도가 다릅니다. 2배로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30배, 60배, 100배로 거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2. 30배, 60배, 100배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비결
첫째, 무엇보다 마음의 할례를 해야 합니다.
이는 마음 밭을 개간하여 옥토를 만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심든지 열매로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으로 심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성결된 만큼 하나님께서 주시지요. 따라서 마음을 할례하여 죄악을 벗어 버릴수록 영적인 믿음이 커지므로 축복도 더 크게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삼서 2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말씀했습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곧 마음밭을 옥토로 개간하는 만큼 육적으로도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아 나간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영혼이 잘되는 것이 응답과 축복을 받는 길이므로 먼저 마음을 할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의 할례란 마음에 있는 비진리를 벗어 버리는 것, 곧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길가밭, 돌밭, 가시 떨기밭을 옥토로 개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길가밭은 영적으로 단단한 마음, 즉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밭을 개간하려면 교만, 자존심, 고집, 거짓 등 마음의 악을 버리고 자기가 옳다는 의와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돌밭은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깨닫고 은혜도 받지만 시험이나 환난, 핍박을 만나면 이내 넘어지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은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비진리,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골라내면 됩니다. 가시 떨기밭은 말씀을 들으면 믿고 행하기는 하지만 온전하게 행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 염려와 재물, 명예, 권세 등에 대한 탐심을 버리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처럼 마음 밭을 개간하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비진리를 발견하여 버려 나가는 만큼 마음 밭이 개간되어 옥토로 변합니다. 악이 없고 선한 마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진리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로 변화되어 기름진 옥토를 준비하고 거기에 씨를 심으면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온전한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주일 성수는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한다는 의미로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최소한의 행함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면 원수 마귀 사단이 시험 환난을 준다 해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씨를 뿌려도 폭풍과 가뭄 같은 재앙을 만나 결국 수확할 수 없습니다.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사업 특성상 주말에 일감이 많이 들어오므로 주일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말씀을 통해 잘못을 깨닫고 ‘주일에 생기는 일감은 내 것이 아니다’ 하고 주일을 지키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생각도 못했던 일감들을 보내 주셔서 주중에 더 큰 수입을 얻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십일조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물적 주권을 인정하는 행함입니다. 천하 만물이 창조주 하나님께 속해 있고 우리의 모든 축복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증거입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셨습니다(말 3:10).
또 십일조는 다음 해를 위해 구분해 놓는 종자와 같습니다. 농부는 추수한 곡식 중에서 제일 좋은 알곡으로 종자를 골라 놓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다고 종자를 남겨 두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가장 먼저 구별해 드려야 합니다. 쓰고 남는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십일조로 드릴 예물을 구제 등 다른 헌금으로 드렸다면 여전히 십일조를 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주일 성수나 십일조는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구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매우 중요한 분야이지요.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며 축복을 구한다 해도 주일 성수하지 않거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믿음으로 구할 때라야 하나님께서도 축복과 응답을 주실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우리가 어떻게 심고 가꿔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둘 수 있을까요?
2. 씨를 ( ) 것은 ‘사랑하라, 상대의 유익을 구하라, 섬기라, 안식일을 지키라’ 등 성경에 무엇무엇을 ‘하라, 지키라’ 하신 대로 ( )하는 것을 말한다.
● 금주 과제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책자 117~133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십일조’란
자신이 얻은 수입 전체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땀 흘려 수고하여 얻은 소산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다. 가령, 농부가 소출을 내었어도 내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은, 종자는 물론 비와 바람과 햇빛을 주시고 자라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은 물론 근본적으로 생명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결국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므로 이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수입 전체 중에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바로 십일조이다.
교육목표 : 마음 밭을 개간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심고 가꾸며, 온전한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함으로 풍성한 축복을 받게 한다.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서 옥토로 만드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마음을 빛으로, 의와 선으로, 진리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하지요. 이렇게 마음을 부지런히 개간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심을 때 축복과 응답으로 거둡니다. 그러면 응답받는 과정을 심고 거두는 자연의 법칙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1. 응답과 축복의 기본 원리
첫째, 마음 밭을 개간해야 합니다.
농사 지을 때 아무리 좋은 씨를 많이 뿌린다 해도 토질이 나쁘면 수확이 좋지 못합니다. 기왕이면 좋은 밭, 옥토에 씨를 뿌려야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지요. 영적으로 축복받기 위해 씨를 뿌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밭은 영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뜻합니다. 많은 씨를 뿌리고 열심히 가꾼다 해도 마음 밭이 좋지 않으면 기대만큼 좋은 수확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먼저는 마음 밭을 개간해야 하는데, 이는 죄와 악을 벗어 버리고 성결된 깨끗한 마음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곧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욕심을 버리라, 미워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 등 성경에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마음 밭을 개간하는 것입니다.
둘째, 씨를 심어야 합니다.
씨를 심는다는 것은 “사랑하라, 상대의 유익을 구하라, 섬기라, 안식일을 지키라” 등 성경에 무엇무엇을 ‘하라, 지키라’ 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대로 씨를 심되, 한 번만 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심어야 합니다.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도 철을 따라 씨를 뿌리듯이 영적으로도 천국에 갈 때까지 뿌리고 거두는 작업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셋째, 인내로 가꾸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심기만 하고 가꾸지 않으면 추수 때 거둘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영적으로 가꾸는 것이란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찬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워야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찬송과 기도로 성령 충만함을 얻어야 새 힘을 받아 밭을 옥토로 개간하며 열심히 심고 가꿀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 역시 영적으로 가꾸는 작업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 땅에서도 추수할 소망이 가득한 농부는 기쁘고 행복하게 일을 합니다. 흥얼흥얼 노래하면서 거두기까지 부지런히 가꿉니다. 우리도 천국 소망 가운데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원수 마귀 사단이 틈타지 못하고 천국까지 힘차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넷째, 꽃이 피고 열매를 거두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꽃이 피면 향기가 나듯이 우리 마음에도 영적인 꽃이 피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마음이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니 주변 사람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심은 것에 꽃이 피면 마침내 열매가 맺힙니다. 성령의 열매, 팔복의 열매, 사랑장의 열매, 빛의 열매 등 영적인 열매들이 맺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 밭을 개간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심고 가꾸는 것이 영육 간에 모든 응답과 축복을 거두는 기본 원리이자 핵심입니다. 마음 밭을 얼마나 옥토로 개간하여 씨를 많이 심고 가꾸었느냐에 따라 거두는 정도가 다릅니다. 2배로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30배, 60배, 100배로 거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2. 30배, 60배, 100배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비결
첫째, 무엇보다 마음의 할례를 해야 합니다.
이는 마음 밭을 개간하여 옥토를 만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심든지 열매로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으로 심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성결된 만큼 하나님께서 주시지요. 따라서 마음을 할례하여 죄악을 벗어 버릴수록 영적인 믿음이 커지므로 축복도 더 크게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삼서 2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말씀했습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곧 마음밭을 옥토로 개간하는 만큼 육적으로도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아 나간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영혼이 잘되는 것이 응답과 축복을 받는 길이므로 먼저 마음을 할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의 할례란 마음에 있는 비진리를 벗어 버리는 것, 곧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길가밭, 돌밭, 가시 떨기밭을 옥토로 개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길가밭은 영적으로 단단한 마음, 즉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밭을 개간하려면 교만, 자존심, 고집, 거짓 등 마음의 악을 버리고 자기가 옳다는 의와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돌밭은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깨닫고 은혜도 받지만 시험이나 환난, 핍박을 만나면 이내 넘어지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은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비진리,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골라내면 됩니다. 가시 떨기밭은 말씀을 들으면 믿고 행하기는 하지만 온전하게 행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 염려와 재물, 명예, 권세 등에 대한 탐심을 버리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처럼 마음 밭을 개간하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비진리를 발견하여 버려 나가는 만큼 마음 밭이 개간되어 옥토로 변합니다. 악이 없고 선한 마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진리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로 변화되어 기름진 옥토를 준비하고 거기에 씨를 심으면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온전한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주일 성수는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한다는 의미로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최소한의 행함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면 원수 마귀 사단이 시험 환난을 준다 해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씨를 뿌려도 폭풍과 가뭄 같은 재앙을 만나 결국 수확할 수 없습니다.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사업 특성상 주말에 일감이 많이 들어오므로 주일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말씀을 통해 잘못을 깨닫고 ‘주일에 생기는 일감은 내 것이 아니다’ 하고 주일을 지키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생각도 못했던 일감들을 보내 주셔서 주중에 더 큰 수입을 얻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십일조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물적 주권을 인정하는 행함입니다. 천하 만물이 창조주 하나님께 속해 있고 우리의 모든 축복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증거입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셨습니다(말 3:10).
또 십일조는 다음 해를 위해 구분해 놓는 종자와 같습니다. 농부는 추수한 곡식 중에서 제일 좋은 알곡으로 종자를 골라 놓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다고 종자를 남겨 두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가장 먼저 구별해 드려야 합니다. 쓰고 남는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십일조로 드릴 예물을 구제 등 다른 헌금으로 드렸다면 여전히 십일조를 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주일 성수나 십일조는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구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매우 중요한 분야이지요.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며 축복을 구한다 해도 주일 성수하지 않거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믿음으로 구할 때라야 하나님께서도 축복과 응답을 주실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우리가 어떻게 심고 가꿔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둘 수 있을까요?
2. 씨를 ( ) 것은 ‘사랑하라, 상대의 유익을 구하라, 섬기라, 안식일을 지키라’ 등 성경에 무엇무엇을 ‘하라, 지키라’ 하신 대로 ( )하는 것을 말한다.
● 금주 과제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책자 117~133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십일조’란
자신이 얻은 수입 전체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땀 흘려 수고하여 얻은 소산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다. 가령, 농부가 소출을 내었어도 내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은, 종자는 물론 비와 바람과 햇빛을 주시고 자라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은 물론 근본적으로 생명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결국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므로 이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수입 전체 중에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바로 십일조이다.
2020-08-21
제34과온전한 응답을 받으려면 (2)
잠언 8:13
읽을말씀 : 잠언 8:13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1:6 | 참고 말씀: 야고보서 2:22
교육목표 :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죄의 담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헐고 선을 쌓아 나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면 능력의 하나님을 만나 놀라운 사랑을 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기쁘시게 하면 구하는 것마다 온전한 응답과 축복을 받아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담을 헐어야 한다 했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계속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죄의 담을 헐고 선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어떠한 질병에도 걸리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만일 질병이 왔다면 하나님의 뜻에 위배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배한 것이 죄의 담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가로막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하여 지켜 주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질병을 비롯한 모든 문제에 온전한 응답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과 자신과의 사이를 가로막은 죄의 담을 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죄의 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것,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것, 욕심으로 기도한 것, 미워하고 시기하며 판단 정죄한 것 등 하나님께서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신 말씀에 어긋나게 행한 모든 것이 죄의 담이 됩니다.
이를 찾아 회개하여 죄의 담을 헐 때 비로소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행함과 선의 행함을 쌓아간다면 신속하게 온전한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했고, 야고보서 2장 22절에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 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라, 용서하라, 섬기라, 사랑하라, 상대의 유익을 구하라, 빛 가운데 행하라” 하셨으니 그 말씀대로 행합니다. 선으로 보고 듣고, 선으로 말하고 행하는 등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해 선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과 선의 행함을 기뻐하며 신속히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진리를 듣고 깨우쳐 믿음을 성장시키며 그에 맞는 선한 행함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하셔서 어찌하든 좋은 것으로 주기 원하십니다.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합당한 행함을 보이면 즉시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초신자라 해도 단번에 응답받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도 체험하고 신앙의 경륜도 있는 사람에게는 더 높은 수준의 행함을 원하십니다. 예전보다 더 선하고 큰 믿음을 내보이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편에서는 예전과 똑같이 행하거나 그보다 못하면서 ‘기도해도 응답이 안 온다.’ 생각하기도 합니다. 당장 응답받거나 문제를 해결받고 질병을 치료받는 데만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당장의 응답은 부수적인 열매일 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대로 살아서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이 되면 당연히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따라서 사람 편에서도 자신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과 같은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당장의 응답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응답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조급하거나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이 자신을 영으로, 곧 진리로 변화시키는 축복의 시간임을 알아 감사하며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2. 죄의 담을 헌 뒤 다시 쌓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응답받기에만 급급해하는 것을 봅니다. 응답이 더디면 실망하고 낙심하며, 심지어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말을 한 자체가 또다시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을 높여서 응답의 시점은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 후 다시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물을 심고 봉사하며 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쌓기는 하지만 이미 쌓은 죄의 담을 헐기에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응답을 받으려면 죄의 담을 남김 없이 헐어야 합니다. 그런데 조금 헐었다가 다시 쌓기를 반복하니 응답받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이 10센티미터가 쌓였다고 합시다. 그 상태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며 회개함으로 5센티미터를 헐었습니다. 그러면 5센티미터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계속 죄의 담을 헐어서 제로(0)가 되어야 온전한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담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도 했으니 이제 응답받으리라 기대합니다. 담이 남아 있기 때문에 공의의 잣대로 재면 아직은 응답받을 때가 아니지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응답이 안 오면 서운해하고 감사치 못하며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직 남아 있는 담 위에 또다시 담을 쌓게 되니 응답받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응답받기 위해서는 죄의 담을 헐었다가 다시 쌓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노력한 것만 생각하고 말과 행함으로 쌓은 죄의 담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믿음으로 행했는데도 응답이 안 된다, 더디다’ 생각하며 실망하고 낙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보실 때에 마음이 어떠시겠는지요?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영혼의 변화입니다. 그러니 신실하신 하나님을 변함없이 믿고 영혼이 잘되기 위해, 곧 진리로 변화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말씀을 선으로 생각하며 오래 참아야 응답을 앞당길 수 있습니다. 열심히 믿음으로 행하고, 선으로 쌓은 것을 깎아 버리지 않으니 응답의 시간이 앞당겨집니다.
질병의 치료만이 아니라 가정의 화평이나 복음화, 물질의 축복 등 범사가 그렇습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형통케 됩니다(요삼 1:2). 마음을 영으로, 진리로 일굴수록 더 큰 축복과 응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지금 자신의 모습이 예전과 비슷하다면 영적인 성장이 제자리라는 증거입니다. 그런 경우 신속히 비진리를 버리고 영으로, 진리로 채워 나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을 사모하여 진리를 취하고 육 곧 비진리를 버린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계속 육을 취해 나갑니다. 영으로 채운 분량보다 더 많은 분량의 육을 취하기도 합니다. 육을 버리는 것보다 취하는 것이 쉽기 때문에 자신은 조금 취했다 생각하지만 실은 많은 분량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이때 자신은 ‘영은 많이 취했고 육은 조금 취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는 육의 마음이 영의 마음보다 크거나 제자리걸음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왜 열심히 기도해도 육이 안 버려질까?’ 생각하고 낙심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육을 철저히 끊습니다. 육은 썩어지고 냄새나는 것임을 알아 취하려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영을 사모하고 취해 나가니 신속히 마음이 영으로 채워집니다. 이렇게 영으로만 정진하는 사람은 응답도 축복도 바로 임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모든 것을 공의와 사랑 가운데 이루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경외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요소들을 온전히 벗어내고 다시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온전히 버리며 선으로 채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행함으로 하나님 사랑하는 증거를 나타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을 주십니다. 건강, 물질, 명예 등 구하는 것마다 넘치게 주십니다. 혹여 응답이 더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선으로 더 쌓을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항상 온전한 응답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죄의 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2.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하여 지켜 주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다. 질병을 비롯한 모든 문제에 온전한 응답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과 자신과의 사이를 가로막은 ( )을 허는 것이 중요하다.
● 금주 과제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책자 117~133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영과 육’
영이란?
죽거나 썩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 영원한 것으로 생명이요, 진리 자체를 의미한다.
육이란?
시간이 흐르면 썩고 변질되며 결국 없어지는 것, 추하고 더러운 것의 총칭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죄의 담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헐고 선을 쌓아 나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면 능력의 하나님을 만나 놀라운 사랑을 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기쁘시게 하면 구하는 것마다 온전한 응답과 축복을 받아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담을 헐어야 한다 했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계속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죄의 담을 헐고 선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어떠한 질병에도 걸리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만일 질병이 왔다면 하나님의 뜻에 위배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배한 것이 죄의 담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가로막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하여 지켜 주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질병을 비롯한 모든 문제에 온전한 응답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과 자신과의 사이를 가로막은 죄의 담을 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죄의 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것,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것, 욕심으로 기도한 것, 미워하고 시기하며 판단 정죄한 것 등 하나님께서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신 말씀에 어긋나게 행한 모든 것이 죄의 담이 됩니다.
이를 찾아 회개하여 죄의 담을 헐 때 비로소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행함과 선의 행함을 쌓아간다면 신속하게 온전한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했고, 야고보서 2장 22절에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 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라, 용서하라, 섬기라, 사랑하라, 상대의 유익을 구하라, 빛 가운데 행하라” 하셨으니 그 말씀대로 행합니다. 선으로 보고 듣고, 선으로 말하고 행하는 등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해 선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과 선의 행함을 기뻐하며 신속히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진리를 듣고 깨우쳐 믿음을 성장시키며 그에 맞는 선한 행함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하셔서 어찌하든 좋은 것으로 주기 원하십니다.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합당한 행함을 보이면 즉시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초신자라 해도 단번에 응답받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도 체험하고 신앙의 경륜도 있는 사람에게는 더 높은 수준의 행함을 원하십니다. 예전보다 더 선하고 큰 믿음을 내보이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편에서는 예전과 똑같이 행하거나 그보다 못하면서 ‘기도해도 응답이 안 온다.’ 생각하기도 합니다. 당장 응답받거나 문제를 해결받고 질병을 치료받는 데만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당장의 응답은 부수적인 열매일 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대로 살아서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이 되면 당연히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따라서 사람 편에서도 자신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과 같은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당장의 응답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응답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조급하거나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이 자신을 영으로, 곧 진리로 변화시키는 축복의 시간임을 알아 감사하며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2. 죄의 담을 헌 뒤 다시 쌓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응답받기에만 급급해하는 것을 봅니다. 응답이 더디면 실망하고 낙심하며, 심지어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말을 한 자체가 또다시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을 높여서 응답의 시점은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 후 다시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물을 심고 봉사하며 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쌓기는 하지만 이미 쌓은 죄의 담을 헐기에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응답을 받으려면 죄의 담을 남김 없이 헐어야 합니다. 그런데 조금 헐었다가 다시 쌓기를 반복하니 응답받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이 10센티미터가 쌓였다고 합시다. 그 상태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며 회개함으로 5센티미터를 헐었습니다. 그러면 5센티미터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계속 죄의 담을 헐어서 제로(0)가 되어야 온전한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담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도 했으니 이제 응답받으리라 기대합니다. 담이 남아 있기 때문에 공의의 잣대로 재면 아직은 응답받을 때가 아니지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응답이 안 오면 서운해하고 감사치 못하며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직 남아 있는 담 위에 또다시 담을 쌓게 되니 응답받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응답받기 위해서는 죄의 담을 헐었다가 다시 쌓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노력한 것만 생각하고 말과 행함으로 쌓은 죄의 담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믿음으로 행했는데도 응답이 안 된다, 더디다’ 생각하며 실망하고 낙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보실 때에 마음이 어떠시겠는지요?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영혼의 변화입니다. 그러니 신실하신 하나님을 변함없이 믿고 영혼이 잘되기 위해, 곧 진리로 변화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말씀을 선으로 생각하며 오래 참아야 응답을 앞당길 수 있습니다. 열심히 믿음으로 행하고, 선으로 쌓은 것을 깎아 버리지 않으니 응답의 시간이 앞당겨집니다.
질병의 치료만이 아니라 가정의 화평이나 복음화, 물질의 축복 등 범사가 그렇습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형통케 됩니다(요삼 1:2). 마음을 영으로, 진리로 일굴수록 더 큰 축복과 응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지금 자신의 모습이 예전과 비슷하다면 영적인 성장이 제자리라는 증거입니다. 그런 경우 신속히 비진리를 버리고 영으로, 진리로 채워 나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을 사모하여 진리를 취하고 육 곧 비진리를 버린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계속 육을 취해 나갑니다. 영으로 채운 분량보다 더 많은 분량의 육을 취하기도 합니다. 육을 버리는 것보다 취하는 것이 쉽기 때문에 자신은 조금 취했다 생각하지만 실은 많은 분량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이때 자신은 ‘영은 많이 취했고 육은 조금 취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는 육의 마음이 영의 마음보다 크거나 제자리걸음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왜 열심히 기도해도 육이 안 버려질까?’ 생각하고 낙심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육을 철저히 끊습니다. 육은 썩어지고 냄새나는 것임을 알아 취하려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영을 사모하고 취해 나가니 신속히 마음이 영으로 채워집니다. 이렇게 영으로만 정진하는 사람은 응답도 축복도 바로 임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모든 것을 공의와 사랑 가운데 이루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경외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요소들을 온전히 벗어내고 다시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온전히 버리며 선으로 채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행함으로 하나님 사랑하는 증거를 나타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을 주십니다. 건강, 물질, 명예 등 구하는 것마다 넘치게 주십니다. 혹여 응답이 더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선으로 더 쌓을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항상 온전한 응답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죄의 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2.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하여 지켜 주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다. 질병을 비롯한 모든 문제에 온전한 응답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과 자신과의 사이를 가로막은 ( )을 허는 것이 중요하다.
● 금주 과제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책자 117~133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영과 육’
영이란?
죽거나 썩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 영원한 것으로 생명이요, 진리 자체를 의미한다.
육이란?
시간이 흐르면 썩고 변질되며 결국 없어지는 것, 추하고 더러운 것의 총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