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고 성령 훼방 등 중한 죄를 범한 이들이 받게 되는 3단계 형벌을 아랫음부에서 받고 있는 ‘빌라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으로서 이스라엘 지역을 다스리는 책임자였지요.
당시 로마의 속국이었던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처형할 권한이 없어서 예수님을 처형하려면 지배국인 로마법의 승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즉 빌라도의 허락이 필요했지요. 유대인들이 빌라도 앞에 예수님을 끌고 와 고소한 이유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찌하든 예수님을 살리고자 했지요.
그러나 큰 물결처럼 몰려온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거세게 요구하자 민란이 일어날까 봐 두려웠습니다.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에 민란이 일어나면 황제 앞에서 문책당해야 하고, 자칫하면 모든 권세와 명예를 잃을 수 있기에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었지요.
이처럼 죄 없으신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함으로써 빌라도는 스스로 사망의 길을 택했고 자신이 받을 형벌을 정하고 만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한 대로(마 27:26), 빌라도의 군병들에게 맡겨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온몸에 채찍질 당하셨고, 이를 허락한 빌라도 역시 아랫음부에서 지옥 사자들에게 채찍질 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 이 땅에서 이름이 불릴 때마다 지옥 사자들에게 채찍 맞는 빌라도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내리쳤던 채찍은 긴 가죽끈 끝에 쇳덩어리나 뼛조각을 매단 흉기입니다. 포악하고 무자비한 로마 군병이 이 채찍을 한 번 휘두르면 가죽끈이 온몸을 휘감으며 살을 찢습니다. 채찍 끝에 달린 쇳덩어리가 살점 깊숙이 파고들지요. 채찍을 다시 잡아채면 채찍 끈에 살점이 묻어납니다.
아랫음부의 빌라도 역시 이와 비슷한 채찍으로 맞고 있습니다. 더 끔찍한 것은 이 땅의 사람들이 빌라도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지옥 사자가 채찍을 휘두른다는 점입니다.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예배나 기도회 때마다 기독교인들이 사도신경을 하면 빌라도는 채찍에 맞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이름을 부르면 채찍질의 속도가 정신없이 빨라지고 강도도 점점 더 세집니다. 이때 주변의 지옥 사자들이 고문을 지원하러 몰려들지요. 이미 찢어질 대로 찢어져서 너덜너덜하고 피투성이가 된 몸임에도 빌라도를 에워싼 지옥 사자들은 서로 경쟁하듯 채찍을 휘두릅니다. 살점이 떨어지다 못해 허옇게 뼈가 드러나고 나중에는 뼛속까지 채찍이 파고들어 채찍 끈에 골수까지 묻어나지요.
채찍이 자기 몸을 후려칠 때마다 빌라도는 “제발 내 이름을 부르지 마소서. 그때마다 내가 괴로움을 당하나이다.” 애원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애원할 수도, 고통을 호소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한(눅 23:23~24) 그 혀가 저주받아 뽑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지옥에서는 고문에 의해 몸이 손상돼도 곧 재생되기 마련인데 빌라도의 혀는 재생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로 저주의 상징이지요.
그의 이름은 저주받은 자의 대명사로 마지막 ‘대 심판의 그날’까지 많은 사람에게 끊임없이 불릴 것입니다. 그때마다 빌라도는 지옥 사자들에게 채찍질 당해야 하고, 그 고통은 점점 더 깊어만 갈 뿐입니다.
2.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빌라도의 죄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줄 때 물을 가져와 손을 씻으면서 유대인들을 향해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하고 외쳤습니다. 이에 예수님을 죽이기에 급급했던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했고, 그 고백대로 보응 받아 그들의 역사는 민족적인 수난의 연속이었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40년이 채 못 되어 예루살렘은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이때 무수한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세계 각처로 뿔뿔이 흩어졌지요. 어딜 가든 차별대우와 박해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점령지에서는 많은 유대인이 학살되었지요. 이처럼 죄 없으신 예수님의 피를 흘린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 역사가 증명하며, 영계의 법칙에 따라 입술의 악한 말이 얼마나 정확하게 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전적으로 유대인들의 책임이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책임도 크지만 그렇다고 빌라도가 무죄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의 청원이 거셌다 해도 빌라도가 끝까지 정의를 따랐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을 수도 있었지요. 빌라도가 아무리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떠넘긴들, 자신은 무죄하다고 결백을 주장한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사형을 언도한 죄가 사라질 리는 만무합니다.
3. 모면할 여러 기회가 있었음에도 예수님께 십자가 처형을 언도한 빌라도
빌라도에게는 범죄에 가담하지 않고 그 상황을 모면할 기회들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뵈면서 그는 예수님께 아무 죄가 없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총독으로서 유대 지방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많은 염탐꾼을 곳곳에 심어 놓았지요. 그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사와 표적에 대해 들었고, 예수님의 설교 내용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기에 예수님을 불러 대화도 해 보았지요.
이런 정황들은 빌라도가 로마 황제에게 예수님에 대해 보고한 공문서 ‘빌라도 보고서’에 기록돼 있고, 빌라도는 자기 입으로 예수님은 결코 사형에 처할 죄인이 아님을 시인했습니다(눅 23:14~15).
예수님께서는 심문받으시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빌라도가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어떻게든 깨우쳐 주려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3~34절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자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말씀하셨지요. 이에 빌라도는 당황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 듣고 또 직접 만나보고는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왕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영적 위엄을 느꼈지요.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질문한 것은 유대인들의 고소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신도 예수님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었지요. 예수님께서 이런 빌라도의 마음을 아시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시니 당황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도 빌라도를 한 영혼으로 바라보시고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때라도 빌라도가 예수님의 마음을 느꼈다면, 적어도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면 더 이상 죄의 길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빌라도에게 주신 기회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빌라도가 십자가 처형을 언도하기 바로 전날 밤에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에 대한 꿈을 꿉니다. 그러고는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하지 말라고 남편인 빌라도에게 간곡히 부탁하지요. 물론 빌라도도 예수님을 풀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거친 유대 군중과 교활한 지도자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2절에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했지요.
이 말에 빌라도는 흔들립니다. 나름대로 옳은 길을 택하려 해 보았지만 결국 자신이 수세에 몰리니 죄에 가담하는 편을 택하고 말았지요. 자신의 지위와 생명을 위협받자 곧 마음이 변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빌라도는 그 상황을 모면할 기회들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끝끝내 그 기회들을 붙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십자가 처형을 언도했고, 그 대가로 지옥에서 지금도 참혹한 채찍의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라도는 단 한 순간의 실수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빌라도의 마음 안에는 이미 악과 불의가 많이 쌓여 있었지요. 자기 유익을 따라 변개하는 간사한 마음, 무엇이 옳은지 알고도 옳지 않은 일을 행하는 불의한 마음, 비겁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미 마음에 가득한 악과 불의가 긴박한 상황 속에서 죄로 열매 맺은 것뿐입니다. 무죄한 사람,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큰 죄로 열매 맺었지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빌라도와 같이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면 옳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불의를 행함에 있어 서슴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고자 남을 모함하고 죽이려 합니다. 결코 작은 죄가 아닌데도 ‘이 정도쯤이야.’ 하지요. 세상이 워낙 죄악으로 관영해 양심이 무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마치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자신의 비겁한 행동을 유대인들의 탓으로 돌린 것처럼 “저 사람 때문에, 상황과 조건 때문에 그랬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내 탓이 아니다.” 하지요.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도 악행에 대한 책임을 결코 남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 일이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고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그러므로 작은 욕심, 사심, 변개하는 마음, 비겁한 마음 등 비진리의 마음이 발견되면 그것을 작다고 그냥 넘겨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쳤던 군중 중에는 바로 며칠 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호하며 예수님을 자기 왕으로 맞았던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치료받은 사람, 생명의 말씀을 들은 사람, 기사와 표적을 목도한 이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죄인으로서 빌라도의 관정에 서신 예수님을 보자 많은 이가 돌변했습니다. 보고 듣고 체험한 증거가 있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오직 선만 행하신 것을 알면서도 자기 유익, 자기 생각에 맞지 않자 배신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말씀한 대로 마음의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자라면 결국 사망을 낳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죄성까지 다 뽑아내셔서 어떤 환경을 만나든 항상 옳은 것, 선한 것을 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 짙은 어둠과 죄악으로 물들어 죄의 유혹도 그만큼 강해집니다. 이런 세상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하지요. 참으로 의로운 마음을 이뤄서 항상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04-27 오전 11:29:56 Posted
2023-05-21 오후 4:02:51 Updated